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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강의1
제 1강 히브리서 대의
히브리서는 신약 중에서 결코 적은 책이 아니다. 그 숟으로도 서간 중에서「로마서」「고린도전서」둘을 내놓고는 제일 큰 것이요, 그 사상으로도 공관복음(共觀福音), 요한문서(文書), 바울문서와 아울러 극히 뛰어나게 빼어난 성질을 가지고 성서라는 전산(全山)을 이루는 한 큰 봉우리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이때껏 이 글은 많은 사람에게 그리 친한 것이 되지 못 하였다. 사람들은 이 영적 고봉(高峯)을 멀리서 바라 볼뿐이요 올라가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 자신이 말하는 것과 같이, 대단히 굳은 식물(食物)이어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참말 첫머리에 따뜻한 인사 한마디도 없고, 누가 누구에게 보낸 것인지도 알 수 없으며, 오늘 우리에게는 별로 홍미없는 유대 옛날 제사의식에 관한 길다란 토론(討論)을 하는 이 글을 알아보기 쉽다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이 글이 읽혀지지 않은 것은 알아보기 어렵다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이 글을 읽을 경우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은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도 글 자체에 그 탓이 있다기보다는 읽는 사람이 자기를 적당한 자리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히브리서」는 평화의 글이 아니다. 평안 한가운데 있는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이는 싸움에 얼굴을 맞대인 사람을 보고 격려(激勵)하는 말이다. 그런고로 이 글은 티끌과 연기가 자욱한 제일선에서 미치는 적군의 고함소리를 들으며 떨리는 손으로 들고 읽을 것이요, 결코 맘의 안전을 느끼는 사람이 책상(冊床) 위에서 읽을 것이 아니다. 책상 위에서 읽는 한은 언제까지든지 아무 흥미 없는 책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번 싸움터에 내다 놓으면 이는 산 불길이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래 이때껏 기독교는 세상과 둘 사이에 평화상태를 이어왔다. 옳게 말하면, 그리스도가 이미 분명히 싸움을 선언하였고 따라서 그가 이 싸움판을 완전히 뒤거둘 때까지는, 싸움이 끊지지 않을 것은 정한 일이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였다. 또 사상적으로 하면 다원주의와의 사나운 싸움이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상적으로 하는 한 아무리 하여도 그는 일신의 안전을 느끼면서 하는 싸움이었다. 정신이 중하니 육체는 경하니 말은 많아도 실지로 이 한목숨이 떨어질 위험을 느끼는 것과 느끼지 않는 것은 그 하는 일에 대단히 다른 결과를 준다. 좀 심하게 말하면 일명(一命)의 위태(危殆)를 느끼지 않으면서 하는 일은 한갓 유희(遊戱)에 지나지 않는 일이 많다. 유희를 하는 아이에게 군가의 의미가 알려질 리가 없다. 근래의 사람들이 히브리서를 읽으려 하지 않고 읽어도 맛을 알지 못한 것은 저들이 평화의 장터에 앉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바뀌어 싸움의 세상이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자기 섰는 곳이 싸움터인 것을 차차 알게 되었다. 싸워 이기느냐 항복하느냐 둘 중에 어느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고 이 이상 더 중성적인 존재를 이어갈 수 없음을 점점 더 느끼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전투의 글 히브리서를 읽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이때까지 오를 수 없는 험한 것인 줄만 알고 바라만 보고 있던 것을 쑥쑥 올라가게 되었다. 올라간 결과는 어떠냐. 그것이 흙과 돌의 쌓인 것만이 아니요, 위에는 하늘을 향하여 입을 벌린 분화구(噴火口)가 있어 산 불길을 토(吐)하고 있는 산화산(火山)임을 안 것이다. 멀리는 말고 최근의 무교회계 신자간에서만 으로도 서너 곳에서 이 글의 강의가 있었다. 이것이 이 책이 어떤 책이며 이 시대가 어떤 시대임을 잘 말하는 사실이다.
여하간 이제 우리는 히브리서를 우리들의 서간으로 읽을 수 있고 읽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또 이것을 우리들의 서간으로 읽음에 의하여 종래에 이해하기 어려웠던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스스로 풀리게 할 수 있다. 성서를 읽을 때에 가장 경계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은 제삼자의 지위에 서는 일이다. 학문은 냉정하게 제삼자의 자리에 선 후에야 될 수 있다고들 하나 성서는 그렇지 않다. 다른 것은 몰라도 성서만은 제삼자의 맘을 가지고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책이다. 이는 생활의 수단이 되는 것을 이성에 호소하여 전하여주는 학문과는 다르다. 직접 내 심정에 향하여, 내 영혼에 향하여 응답을 요구하는 말씀이다. 고로 보는 자는 항상 어떤 누가 어떤 누구에게 하는 말을 옆에서 듣는 태도로 볼 것 아니오 나와 성서가 마주 설 것이다. 엄정하게 말하면 학문도 순전한 제삼자의 태도로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옆의 사람의 귀로만 들어서 어떻게 그 참뜻을 알며, 햄릿의 비극을 정말 구경만 하여서야 어떻게 그 깊이를 참 느낄 수가 있을까. 뉴톤은 우주의 밖에서 방관(傍觀)한 사람이 아니었고 에디슨은 물리의 세계를 냉정(冷靜)하게 들여다만 본이가 아니었다. 학문에도 이미 이렇거든 진리를 말하는 성서에 대해서는 말할 여지도 없다. 그리고 학문의 대상이 되는 세계가 그것을 사랑하는 자에 향하여 그 가슴을 내놓는 것같이, 성서도 그것을 내게 대한 사랑의 말씀으로 받으려고 뜨거운 사랑의 시선(視線)을 던질 때 어김없이 감춤없이 그 깊은 전(殿)의 문을 열어준다. 성서를 지식 탐구의 태도로 대할 때, 의문 또 의문, 수수께끼 또 수수께끼, 얼마 못하여 곧 흥미를 잃어버리게 되나, 이를 영의 양식으로 취할 때 쉽게 먹을 수 있는 맛나는 식물(食物)이다.「히브리서」도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는 난문제 많은 책이다. 우선 그 ‘히브리’라는 제목이 문제요, 편지냐 논문 이냐 하는 것이 문제요, 저자는 누구며 수신자는 누구며 알렉산드리아 학파와의 관계는 어떠하며 바울 사상과의 이동(異同)은 어떤가 등 여러 가지다. 그러나 이는 다 누가 누구에게 보낸 글인가 하는 태도로 대할 때의 일이다. 한번 우리들께 온 서간이라 하고 손에 잡을 때 이들 모든 문제는 스스로 다 없어진다. 그때에는 이 문제들은 알아도 좋고 몰라도 지장(支障)될 것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 학문적 호기심(好奇心)에 관계되는 것이요 영의 양식에 관한 것이 아니다.
히브리라는 제목이 어찌하여 붙게 되었느냐 하는 것을 확실히 설명 할 사람은 없다. 본서의 내용으로 하면 히브리 말하는 사람에게 보낸 것은 아닌 듯하다. 그 증거는 본서 안에 인용된 구약의 구(句)는 다 희랍어 역본에서 나온 것이요 히브리 원본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라 한 것은 웬일일까.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여러 가지 추측(推測)을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 추측에 멈출 뿐이요 사실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당시에 그 글을 받은 사람들은 누군지 모른다 하더라도 다시 생각하면 히브리서는 히브리서 그대로 좋은 제목이다. 히브리인이란, 반드시 아브라함의 혈육에서 나온 것만이 아니요, 하나님이 약속하여 뺀 백성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오늘날 내가 하나님에게 불린 사람이면 나는 깊은 의미의 히브리인이요 내게 온 편지는 히브리서다. 그리고 히브리서의 성서문헌(聖書文獻)으로서의 존재가치는 수천 년 전에 그것을 받았던 그 어떤 사람들 까닭에 있는 것보다는 영원히 계속되는 신앙적 히브리인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서간인 것은 조금 주의하여 읽는 자에게는 의심할 여지없다. 본서의 특색의 하나는 간간이 권면의 구절이 많은 것인데 그것이 그 증거다. 일단의 논이 있은 후는 반드시 일단의 권면이 뒤따라서 참으로 이(理)와 정(情)을 다한 서신이다. 또 내게 보낸 글로 읽는 사람에게 편지 아닌 게 없다. 깊은 의미에서는 모든 진실한 문자는 다 편지다. 혼에서 혼으로, 인격에서 인격으로 보내는 음신(音信)이다. 길가에 아이들이 어지러이 부르는 노래가, 지나는 행객에게는 알 수 없는 말이라도 전선에서는 군인에게는 자기를 위하여 보내는 격려(激勵)의 말이 아닌가.
저자가 누군지는 영원의 수수께끼다. 바울이라는 전설이 아무 가치 없는 것임은 이미 결정적인 사실이요 그밖에 누구누구 하는 말은 요컨대 아무 확실한 근거 없는 추측일 뿐이다. 그리하여 이 글은 영원히 그 인간적 대필자의 이름을 알리는 일 없이 하나님이 그 사랑하는 군졸에게 보내신 말씀만으로 통하게 되었다. 멜기세덱을 말하는 이 글 자신이 이리하여 일종의 멜기세덱이 되고 만 것은 우연만이 아닌 듯하다.
이 글을 받은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도 혹은 히브리인이라 혹은 이방인이라 혹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 혹은 로마에 있는 사람 또 혹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사람 하여 일정(一定)키 어려우나, 여러 학자들이 다 같이 인정하는 것같이 다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니 즉, 그것이 어떤 조그마한 가정적 신앙모임의 단체였다고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글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그런 말을 여러 가지 상태의 사람으로 되는 교회의 일반(一般) 공중(公衆)을 향하여 하였을 수는 없고, 반드시 질(質)을 같이하는 그리고 개개인의 사정을 잘 아는 극히 조그마한 단체를 향해서만 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저자(著者)와 수신자 이름이 전하지 않았다는 사실과도 들어맞는 일이다. 그러한 큰 문헌(文獻)으로서 만일 교회에 공공연하게 보내었다면 그 이름이 떨어질 리가 만무한데, 그런데 그것이 전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쓰지 않았기 때문이요, 쓰지 않은 것은 이름 없는 적은모임에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 글을 오늘 우리들에게 온 서간(書簡)으로 읽으려는 우리에게는 실로 흥미 많은 일이다. 우리는 두 가지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당시 교회 내(內)에 그러한 조그막식한 사집회(私集會)가 있었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우리의 이 서간이 그러한 사집회에서 생겨나온 것이라는 것이다.
큰 교회 안에 또 몇 사람이 사사(私事)로이 모이는 소수의 모임이 있었다면(그리고 초대 교회에 그러한 것이 많이 있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교회의 공공한 집회 외에 또 그런 모임을 할 필요는 어디 있었을까. 이 경우(境遇)에 그 존재 이유는 두 가지밖에 있을 것 없다. ①은 과거 대교회 되기 전의 습관이 그냥 잔존해 있다는 것이요 ②는 교회생활에서 어떤 결함(缺陷)을 느껴서 그것을 보태기 위하여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로 하면 ①의 경우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교회가 신자의 영적 생활의 모든 요구를 유감없이 만족시켜준다면, 아무리 과거에 소수로 모이는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무용한 그 일을 계속할 리가 없다. 고로 그것이 계속되는 한은 모이는 자에게는 반드시 교회의 공적 집회만으로는 얻어 볼 수 없는 어떤 무엇이 거기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교회 이상’의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이다. 고로 대답으로는 ②가 정당하다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거기 신앙사상(史上)에서 어떤 중요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 있지 않을까. 당시에 그런 사집회를 하는 사람이 물론 교회를 부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일인가. 그 진실한 회원에게 교회 이상을 사집회에서 느끼게하는 그 교회는 어떤 것일까. 본서의 저자도 13장 17절에서 보면 수신자에 대하여 교회의 교권자보다는 스스로 좀더 친근하고 깊이 사귐 있는 것을 자신하면서 말하고 있다. 그런 것은 다 무엇인가. 교회 이상의 것이란 무엇일까. 교회에서 느끼는 결함이란 무엇일까. 다른 것 아닐 것이다. 교회가 커지면 제단이 멀어졌다는 것밖에 없다. 진리의 공기가 희박(稀薄)하여졌다는 것밖에는 없다. 그리스도가 조금 멀어진 것이다. 사집회에서 만족되는 것은 이것 이외의 다른 것 아니다. 이런 집회를 명칭은 부를 대로 부르라. 기도회라도 좋고 간담회(懇談會)라도 좋다. 본래 무명의 집회다. 그러나 그 성질은 이른바 무교회적이다. 교회의 공집회(公集會) 외에서 그리스도를 보기 때문이다.
그러한 집회의 시비에 관해서는 여기서 말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하간(如何間) 우리의 이 편지가 그러한 집회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다. 그 집회가 반드시 성인의 모임이어서는 아니다. 하나님 말씀은 반드시 성인에 임하는 것은 아니다. 죄인에게서 도리어 하나님의 진리는 드러난다. 「히브리서」를 받았던 사람들도 결코 완전한 크리스찬이 아니었다. 반대로 저자로부터 아해(兒孩)대접을 받으며 모욕(侮辱)이라 까지 할 만치 책망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원의 대문자는 그 사이에서 나왔다. 또 그 나오던 동기도 결코 큰 것이 아니었다. 극히 사적인 것이었다. 위에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부의 조그마하고 친밀한 단체를 이루어 가지고 있었는데, 저자는 아마 그들 사이에 벗 겸(兼) 지도자격으로 오래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정으로 떠난 동안에 세상이 어려워져서 신앙에 대한 핍박이나 혹은 국가의 무슨 문제로 환난이 닥쳐올 때, 그들 간에는 벌써 퇴보의 경향이 보였다. 그 소식을 들을 때 저자는 견딜 수 없었다. 그리하여 사랑과 노여움에 견디지 못하는 가슴을 안고 붓을 든 것이 이 글이다. 고로 저자는 첨부터 대문장을 쓰자는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의 대교리(大敎理)를 넓이 교회에 가르치는 것이 아니요, 대교사연(大敎師然) 대종교가연(大宗敎家然)하여 대저술(大著述)을 공개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약해지는 몇 사람의 친우가 아까워서 ‘간단한 말로’ 권면을 하자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글은 가장 공적인 진리의 문자로 인류 안에 깉었다.
그러면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렇게 적은 것이 그렇게 큰 것이 되고, 그렇게 사적인 것이 그렇게 공적인 것이 된 원인은 무엇일까. 세상에 진리는 교회에만 있다는 사람은 대답하기를 바란다.「히브리서」는 교회의 소산인가.「히브리서」자신으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는 한 아니다. 혹이 말할 것이다,「히브리서」가 사적 집회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신앙 그것은 모교회 안에서 받은 것이라고. 과연 그런가. 아니다. 그들은 신앙의 가장 긴절(緊切)하고 깊은 것을 교회에서는 아니오 자기네의 ‘우리 모임’에서 얻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집회는 있었을 리가 없다. 중심에서 더 가깝기를 원치 않는다면 원내에 또 원을 그릴 리가 없을 것이다. 다수 반드시 큰 것이 아니고, 소수 반드시 적은 것이 아니며, 공론이 반드시 공리를 얻는 것 아니요, 사사(私事) 반드시 사사에 그치는 것 아니다. 진리 들어 있지 않으면 대(大)도 소(小)요, 진리 들어있으면 사(私)도 공(公)이다. 대소 공사는 하나님만이 결정한다. 그의 뜻 합하지 않으면 십자군 원정을 해도 소사(小事)며 사욕(私慾)이요 그의 뜻에 합하면 아해(兒孩) 모세를 숨겨 길러도 대사(大事)요 공의(公義)다. 아모스는 저처럼 개인적인 자가 없었어도 그의 말처럼 공의적인 것이 없고, 가톨릭은 저처럼 객관적인 것이 없어도 또 그것처럼 사심의 화신인 것은 없다.「히브리서」를 낳은 소집회는 젖냄새 나는 것이었어도 저자로서 대표되는 그들의 신앙의 근본 특색은 하나님에 대하여 직접적이 자는 것이었다. 이것이 이 위대한 문자를 낳은 원천이다.
다음 가장 중요한「히브리서」의 근본요지는 무엇이냐 하는 것에 대하여 한말 하기로 하자. 저자는 본래 문필에 능했던 모양으로, 원어에 밝은 비평학자들의 말을 들으면 문장의 미끈하고 아름답기가 신약 전체 중에 비할 자 없다 하며, 또 논법이 치밀(緻密)하여 긴 토론과 자주 하는 권면에 실례, 인용을 풍부히 하면서도 항상 근본논지를 잊는 일은 없어서 조리가 정연하다. 더구나 저자는 완곡(婉曲)을 꾸미는 사교인(社交人)이나 간단한 것도 복잡한 옷을 입혀놓는 현학자(衒學者)가 아니어서 솔직하게 말하므로, 전편은 마치 드러내놓인 토금맥(土金脈) 모양으로 근본요지의 금문자(金文字)가 곳곳에 드러나 있다. 우선 제 1장 첫머리가 이것을 보여준다.
옛적에 하나님이 여러 부분으로 또 여러 모양으로 예언자를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시었더니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었다.
보면 알대로 이 말을 하는 저자의 눈앞에는 두 세계가 놓여 있다. 그 하나는 지나가는 것이오 하나는 장차 오는 것이다. 그는 그 하나 즉 지나가는 세계를 배경으로 삼아가지고 다른 하나 즉 장차 오는 새 세계를 빛나게 그려내려 하였다. 이것이 그의 구경(究竟)목적이다. 같은 것을 그는 2장 5절에서 “장차 오는 세계”라 했다. 그 외의 다른 곳에서는. 혹 “안식”이라고도 하고, 혹 “지성소”라는 것으로 표하기도 하고, 흑은 “터가 있는 성”이라 “시온 산”이라 “하늘 위의 예루살렘”이라 하기도 하였다. 고로 우리는 그중에 그 의미를 가장 힘있게 표시하는 것인 둘째 것을 택하여「히브리서」의 기어(基語)로 할 수 있다.
장차 오는 세계!
위에 말한 대로 이 서간의 수신자들은 닥쳐오는 환난을 보고 물러가기 시작을 하려 하였다. 본문에 명기되어 있지 않는 고로 그 환난이 어떤 것인지 그들의 실지 행동이 어떠하였던지는 알 수 없다. 성도를 사랑함이 남아 있다 하고 구원에 가깝다 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무종교(無宗敎)의 상태에 빠진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그들이 전에 믿음을 위하여 굳세게 싸우고 곤란을 견디던 것을 회상을 시키며 책망하는 것을 보면 아무려나 그들이 약해진 것은 사실이다. 혹은 그 약해짐이라 하는 것이 어떤 주석자의 말과 같이, 로마인의 압박에서 조국을 건지기 위하여 대동단결을 이루려 조상전래의 유대의 옛종교로 돌아가려 하는데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위험은 당시에 다분하게 있었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 속하지 않는 것을 인해서도 종종 듣는 책망이 그것이다. 그는 수백년래 고질(痼疾)인 파쟁심(派爭心)에서 나온 것이라 하며, 대동일치가 필요한 조선에서 제각기 그럴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분명히 그렇지 않다고 자신은 하면서도 혹이나 하고 삼사사사(三思四思)하게 된다. 당시 본서의 수신자들도 그 문제였는지 아니었는지는 모르나 바로 그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무엇으로 변태(變態)하였거나 구경(究竟)에 있어서는 그와 같은 어떤 것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매우 동정할 처지에 있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동정(同情)스러워도 진리 아닌 것은 용서할 수 없다. 고로 저자는 책망의 붓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내세운 것이 장차 오는 세계라는 것이다. 그 이유를 그는 그들의 약해진 원인을 진단(診斷)하여서, 장차 오는 세계에 대한 충성이 식었기 때문이라고 하였기 때문 이었다. 그리고 그 진단은 틀린 것 아니다. 장차오는 세계에 대한 충성이 식었다 함은 지나가는 이 세계에 대한 애착이 늘었다 함이요. 그리고 모든 불신의 원인은 요컨대 이 세계에 대한 애착이외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이란 무엇일까. 예수를 주로 고백함은 무슨 의미일까. 단(單)히 종교형식을 변하는 일이 아니요, 사상전환을 하는 것만이 아니요, 도덕행위를 개선하는 것만이 아니다. 실로 사는 세계를 바꾸는 일이다.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가는 일이다. 적어도 그 새 세계의 백성이 되겠다고 약속하는 일이다. 믿는다 함은 세계적 사건 이하의 일이 아니다. 신앙에 이만치 큰 의미가 있는 줄 알지 못하는 자는 종교를 유희(遊戱)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 신앙의 반면은 고난이다. 고난인 이유는 그것이 장차 오는 세계로 옮겨가기 위하여 이 세계를 지나가는 것으로 단정하고 거기 대하여 싸움을 개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두 세계가 병립하는 일은 없다. 하나가 지나가야만 하나가 온다. 고로 싸움이 끊길 수는 없다. 싸움이 없는 것은 내 편에서 휴전을 청한 때 만이다. 그리고 그는 죽음 이외의 일이 아니다.
그런 고로 저자는 힘써서 그들 앞에 장차 오는 그 세계를 그리려 하였다.
그 세계가 얼마나 확실한 것인지
그 세계의 영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그 세계에 가는 길이 어디 있는지
이것을 말하여, 연약(軟弱)해지려는 수신자의 눈앞에 그 새 세계의 모양을 생생하게 그려, 그 인상을 그들의 심장에 못같이 박아 전투의지를 격발케 하자는 것이다. 천사에 관한 것을 말하고 제사에 관한 것을 설명하는 것은 요컨대 이것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주의할 것은 그의 장차 오는 세계는 결코 추상적(抽象的)인 단(單)히 이법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이다. 철학에서 그리는 정신적 세계 같은 유(類)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곧 한 개 인격이었다. 그리스도 자신이었다. 고로 장차 오는 세계를 가진다 함은 곧 그리스도를 가짐이다. 고로 장차 오는 그 세계에 절대 필요한 것은 십자가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서만 그리스도일 수 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생애에 일어난 한 우발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인격에 본질적 필연적 요구다. 장차 오는 세계는 영광화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앉는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영광화는 십자가에만 있다. 물론 영원한 세계에서 하면 장차 오는 세계는 본래 붙어 있는 세계다. 그러나 죄의 인간의 현실의 역사에 있어서는 이는 십자가에 의해서만 열린다. 어떤 사람은「히브리서」에는 내세에 관한 신앙만이 있고 십자가의 신앙이 나타나 있지 않다 하나 모르는 말이다. 과연 십자가라는 문구는 없다. 그러나 문구가 없다 하여 진리 그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는 홀로 예수 육체가 골고다에 세운 나무 위에 달리는 것만이 아니다. 그 인간적 출생에서부터 십자가다. 그렇다면 수육(受肉)에 의한 고난의 그리스도를 가장 힘써 주장하는 본서에 십자가 진리가 없다는 것은 큰 무지라 할 수밖에 없다.
장차 오는 세계! 이는 사상으로도 얼마나 큰가. 눈에 뵈는 이 세계 외에, 그 안에, 혹은 그 위에 새로 오고 있는 영원한 세계를 내 집으로 바라는 그 사상은, 이 세계는 그 세계의 그림자 혹은 상징으로밖에 보지 않는 그 사상은, 그리고 우리의 모든 희비극을 그 세계를 위한 해산하는 고통이라 하는 그 사상은 인류의 도달할 수 있는 최대한도의 사상이다. 일세의 영웅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정복하려 할 때 병졸에 향하여 채찍으로 금자탑을 가리키며 3천년의 역사가 너희들을 굽어보고 있다 하여 용기를 고무(鼓舞)하였다고 한다. 저도 칼을 들고 군사의 등 뒤에서 위협(威脅)을 하며 한두 개 공패(功牌)나 몇마디 말로써 달래려하는 군소 장부에 비하면 과연 영웅이라 할 수 있다마는 천만 천사와 구름같이 둘러싸는 허다한 간증자들이 굽어보고 있는 새 예루살렘을 손가락질하여 겁(怯)하는 영혼을 추어세우는 자는 얼마나 장하고 큰가.
장차 오는 세계를 말하는 그는 또 그 직접성을 주장하였다. 그 세계는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요 내 손 끝에 있는 것이며, 거기 들어가는 데 무슨 여러 가지 수단이 필요한 것이 아니요 몸으로써 직접 당할 것이다. 그 세계와 나와의 사이에는 아무런 것도 끼여 있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뒤에 직(直) 따라야 된다. 그리스도만이 유일의 길이요 또 유일의 대제사(大祭司)다. 그 이외의 아무것도, 천사나 율법이나 제사나 기타 일체 피조물인 일체의 아무것도 우리 신앙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고로 그는 일체의 제사무용, 의식무용을 주장한다. 그는 전혀 이상주의의 눈으로 세계를 본다. 일체의 나타나는 현상은 다 그림자요 부호(符號)에 지나지 않는다하고, 정신만을 영(靈)만을 유일의 본체라 하고 실존하는 것이라 한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외형적인 것, 이 세계에 속한 것은 다 어떤 ‘하나’에 대한 암호(暗號)요 상징이었다. 이스라엘 종교 그 자체 교회 그 자체가 한 개 지나갈 그림자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 고로 그것들은 실체 그것이 나타날 때까지만 있을 것이다. 놀랄 만한 신앙이다. 우리는 옛날에 있어서나 이제 있어서나 저보다 더 철저한 이상주의를 보지 못한다. 그리고 신앙의 이상주의 그것은 무엇이냐, 무교회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저는 2천 년 전의 무교회 신앙의 선달(先達)이였다.
신앙에 있어서도 저 세계와 이 세계의 병립(並立)을 인정하는 사상이 없지 않으며 영적인 것 이외에 자연적인 것을 허(許)하는 사상이 없지 않다. 가톨릭이 그것이요 교회주의가 그것이다. 이 세계에 무엇이 아까워 할 것이 있는 듯이, 이 인간에 무엇이 쓸 만한 것이 있는 듯이 그들은 “이 세상 살림을 아니하면 몰라도……” “인간이 아니면 몰라도……” 한다. 하나 우리 저자에게는 그것이 전연 없다. 저는 여기는 우리가 영주할 성이 아니라 하며 신앙의 경주장에서는 입을 옷이 아무것도 없다 한다. 그의 주장의 요점은 “그리스도만” “장차 오는 세계만” “믿음만” 이다. 그는 우리 구원에 있어서 의식, 전통의 필요를 조금도 말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에게 “둔하여졌다”고 책망을 들으면서도 이 글을 우리들에게 온 편지로 볼 수 있는 일을 감사한다.
성서조선 1939.4 123호
저작집30;20-87
전집20;11-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