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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만찬에 대하여
Ⅰ. 들어가는 말 교회에서 성찬식은 매우 중요한 예전이라고 생각된다. 요즘은 많은 개신교회에서도 성찬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옛날에는 일 년에 거의 형식으로 두세 번으로 끝났지만 요즘은 한 달에 한번 정도는 성찬식을 곁들인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많은 것 같다. 성찬에는 포도주와 함께 빵(떡)이 곁들여지는데 본 글에서는 빵(bread)에 대하여 살펴보고 성찬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빵 성경에는 빵(떡)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타난다. 성경에 기록된 빵은 우리가 알고 있는 떡과는 다르다. 빵은 밀, 보리 등 곡물을 가루로 만들어서 물로 반죽하여 화덕을 이용하여 불에 구운 것을 말하며 우리나라(한국)의 떡은 대부분 쌀을 주원료로 하여 그 가루를 반죽하여 시루에 넣고 수증기로 익힌 것으로 여기에 고명으로 팥, 콩, 대추, 밤 등 잡곡이나 과일이 곁들여지기도 한다. 빵의 시작은 무려 6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경에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라고 기록된 구절을 통해 우리는 성서가 기록되기 이전부터 빵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초기 인류는 채취한 곡류를 곱게 갈아서 미음으로 만들어 먹었다. 이후 죽은 납작한 무발효 빵이 되었고 이후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빵의 모양으로 변화되었다. 결국 수렵 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접어들면서부터 자연스레 빵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성서시대 사람들은 돌이나 토기로 만든 화덕을 이용하여 피자 형태의 납작하고 둥근 빵을 만들었으며 발효된 빵을 만들 경우 누룩(발효된 반죽)을 넣어서 만들었다. 빵은 보통 밀가루를 주원료로 하여 물을 섞어 발효시킨 뒤 오븐에서 구워낸 것을 지칭한다. 여기에 밀가루, 소금, 물, 이스트, 유제품류를 첨가하여 반죽을 배합하며 견과류나 건과일 등을 첨가하기도 한다. 빵은 독일어로 Brot, 영어로 Bread, 네덜란드어로는 Brood라고 불리는데 Bread, Brot, Brood의 어원은 고대 튜튼어인 Braudz(조각)에서 유래된 것이다. 또한 프랑스어 Pain, 스페인어 pan, 포르투갈어 pão 는 그리스어인 pa, 라틴어인 panis에서 기원하였다. 우리가 서양식 빵을 먹게 된 것은 개화기 때인 1890년대경,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정동구락부에서 ‘면포’라고 하는 빵과 ‘설고’라는 카스테라가 만들어졌는데 이것이 한국에서의 빵의 시초였으며 개화기를 거쳐서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영향으로 빵(pan)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일본인들은 속에 단팥을 넣은 소위 ‘앙꼬빵’이라는 것을 만들어내어 세계적인 빵으로 승격시켰는데 앙꼬빵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877년경이었다고 한다. 당시 우리 선조들은 빵 대신 ‘왜떡’이라 불렀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성경에는 빵(떡)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타난다. 성서시대에 일반 서민들은 밀보다 보리가루를 주로 이용하여 돌이나 토기로 만든 화덕에 불을 피우고 그 위에 우리네 빈대떡 모양의 둥글고 납작한 빵을 만들어 주식으로 먹었다. 당시 성인 기준의 한끼 빵의 섭취량은 세 덩이였을 것이다(눅 11:5 참조). 구약성경에도 빵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타나는데 특히 우리는 구약의 제사에서 진설병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진설병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신다는 사실이다.(민4:7) 진설병은 성소의 떡상 위에 진열하는 빵(떡)으로서(레24:6)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 하신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하나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양식을 공급하신다는 것은 성경의 중요한 진리중의 하나이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날마다. “하늘의 만나”(출16장)를 받아먹고, 가나안 정착 후에도 여전히 먹을 양식을 하나님께 의지해야만 했다. 진설병은 하나님이 날마다 우리의 삶에 개입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하나님이 제공하신 가장 위대한 양식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6:49;51).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영적인 양식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양식도 공급하시는 분이시다.
Ⅲ. 성찬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마 26:26-30, 막14:22-25; 눅 22:15-20)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 23-26)
성찬예식의 원형은 출애굽 시에 있었던 유월절 식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우리가 통상 교회에서 드리는 성찬예식은 마가복음 14장 22-25절, 마태복음 26장 26-30절, 누가복음 22장 15-20절, 고린도전서 11장 23-26절을 중심으로 드린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대부분은 성례전주의에 사로잡혀 성례전을 드리고 있는데 개인적이며 참회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성경에는 무발효 빵을 사용했는데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는 대부분 발효빵인 카스테라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만찬을 연상하며 성찬예식을 하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찬식에 참여하면서 늘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우는 경우가 있으며 장내는 조용한 가운데 어둡고 침울한 분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동안 한국 교회가 다양한 성찬의 의미 중에서 “그리스도의 희생”과 “회개”라는 점만을 강조함으로써 그 의미를 제한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과 초대교회의 성찬식은 이보다 훨씬 더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성찬식이 지니는 신학적 의미는 다음의 여섯 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감사의 행위; 친교와 일치의 공동식사; 역사적인 그리스도 사건의 기념; 그리스도 희생의 재연; 그리스도의 현존 또는 신비의 사건; 하나님나라의 선교적 파송; 그리고 현대에는 여기에 두 가지가 더 첨가되는데 그것은 성령의 작용으로서의 성만찬과 종말론적 사건 즉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으로서의 성만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을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리라 기록 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준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다시 그를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 6:35-58)
성찬의 의미에는 하나님 나라의 삶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선교적 파송이 담겨져 있다. 요한복음 6장은 성찬과 관련이 있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갈릴리 호수 건너편, 산에서 5천명을 먹이신 이적으로 아이가 가져온 오병이어로 5천명이 먹고 남은 부스러기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예수께서는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앉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누구나 공평하게 먹고 마음껏 먹고 부스러기도 남았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러한 평등공동체의 식사를 맛본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추종하려 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의 한 부분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빵을 들어, 축사하시고, 찢어 나누고, 먹도록 주셨다. 이것은 우리가 드리는 성찬식의 순서를 보여준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드러내는 구원의 음식나누기, 이것은 성찬의 원시적 형태를 보여준다. 초대교회의 성찬이 형성되어지는 과정에 있는 성경시대의 성찬의 원형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이에 대하여 오래전 슈바이처 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광야에서의 공동식사(오병이어 사건)를 말씀의 빵을 떼어 먹은 예배(예배식사)였다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슈바이처의 개인적인 가설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수년전 어느 감리교회 목사는 농촌에서 목회하면서 밀가루 술빵과 막걸리로 성찬식을 했다고 하는데 이것 또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동안에 식탁을 누구에게나 개방함으로써 식탁친교의 경계를 허물었다. 예수는 “부정한” 자들과 함께 먹지 않는 유대교의 관습을 깨뜨리셨다(마태 11:19; 마가 2:15). 특히 누가는 공동식사에서 이 점을 강조한다. 누가는 가난한 자들과 거지들과 시각 장애인들과 지체부자유자들을 향한 예수의 연민을 보았으며(누가 14:15-24), 죄인들과 버림받은 사람들이야말로 예수께서 가져다 줄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누가는 묘사하였다. 탕자의 이야기는 탕자가 아버지와 화해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데, 이때에 이루어지는 화해의 극치는 바로 돌아온 이들을 위해 베푼 즐거운 환영의 만찬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진다(15:11-32). 이 모든 누가의 기록을 통해서 주목할 점은 예수가 가져다주는 구원의 과정이 특히 식탁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식사의 모습은 누가 공동체의 자기 정체성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식사는 유대인보다도 이방인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이는 하나의 종말론적 잔치의 성격이 짙었다. 다시 말해서 누가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상징하는 그들의 식사에 이방인과 버림받은 자들을 거침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이 공동체가 종말론적 공동체라는 자기 정체성을 나타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대부분은 성례전주의에 사로잡혀 성례전을 드리고 있으며 개인적이며 참회적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 만찬으로서의 성찬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고난을 기억하는 성찬, 어두고 슬픈 분위기에 침울하게 드리는 성찬, 목사가 집례하고 장로라는 사람이 나누어 주는 성찬, 교회의 기쁜 일에나 교회절기의 기쁜 부활절에도 슬프디 슬픈 십자가의 고난을 되씹으며 눈물을 흘리고 슬퍼해야 하는 성찬식이다. 오늘날 성찬 신학은 대단히 발전되어 있다. 성경시대는 물론이며 초대교회의 성찬은 다양하고 여러 모습을 지닌다. 성경에 보면 마가복음, 마태복음, 고린도전서의 성찬 모습이 각각 다르다. 하나는 예수님이 하신 하나님 나라 사역의 역동성을 드러내는 성찬 이해, 즉, 예수님의 전체 구속사역을 기억하며 감사하고 재현하는 성찬 이해가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성례전주의의 성찬이 있다. 한편 한국 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장로교회는 칼빈 전통이라기보다는 쯔빙글리 전통을 따라 메마른 심리적 기억 중심의 성찬을 드린다. 세계 교회의 여러 전통의 성찬 이해가 1982년 페루 리마에서 BEM이라는 수렴문건으로 정리되었다. “세례, 성찬, 교역”에 관한 문건인데, 이중 Eucharist라는 성찬 문건을 살펴보면, 5가지의 의미로서 1)성부 하나님께 감사로서의 성찬, 2)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기억으로 성찬, 3)성령임재에 대한 초대로서의 성찬, 4)성도의 교제로서의 성찬, 5)하나님 나라의 식사로서의 성찬, 으로 우리가 드릴 성찬에는 이러한 5가지 의미가 들어있다. 특히 한국교회에 주는 시사점은 1)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감사로서의 성찬 이해, 2)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신 성부 하나님에 감사, 3)성찬에서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를 만드시고, 인간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4)이에 대하여 인간이 피조세계를 죽이고 파괴하는 행위에 대한 죄고백과 회개의 필요이다. 그러므로 성찬은 단순한 최후의 만찬에 대한 기억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에 대한 기억으로서의 성찬을 집전해야 하며 역동적인 하나님 나라 선교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으로서 성찬인 것이다. 또한 성찬은 생명살림을 위한 선교사의 파송으로서 성찬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고전 11:26)
Ⅳ. 나가는 말 그동안 한국교회의 대부분은 성례전주의에 사로잡혀 성례전을 집전하여 개인적이며 참회적이라 할 수 있었으며 마지막 만찬으로서의 성찬,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고난을 기억하는 성찬, 어두고 슬픈 분위기에 침울하게 드리는 성찬, 목사가 집례하고 장로라는 사람이 나누어 주는 성찬, 교회의 기쁜 일에나 교회절기의 기쁜 부활절에도 슬프디 슬픈 십자가의 고난을 되씹으며 눈물을 흘리고 슬퍼해야 하는 성찬식이었다. 이제는 밝고 기쁜 분위기 속에서 성령임재에 대한 기원과 초대로서의 성찬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교의 참여로 이끄시는 힘으로서의 성찬이 되어야 하며 성도간, 교회간, 갈등극복과 일치, 화해를 위한 친교, 평화, 용서를 위한 성찬이 되어야 하며 정의, 평화, 창조보전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미리 맛보기로서의 성찬이 되어야 하며 성찬에 참여하는 자는 세상 문제를 가지고 들어와서 성찬을 통하여 해소하고 성찬의 의미를 실천하기 위하여 세상 속으로 파송 받아 나간다. 이러한 성찬에 우리가 참여하여 세상문제를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불어 해결하고, 또한 세상으로 우리가 나아가 세상을 하나님 나라가 되게 선교에 참여해야 한다. 성찬에 참여하여 성찬을 드린 후에, 우리는 세상 속으로 나아가 성찬의 삶을 드림으로서 정의와 평화와 생명보전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죄 사함 받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늘 함께 하는 것이다.(요 6:57 참조) 예수는 생명의 빵으로서 이 땅에 오셨다. 우리는 날마다 일용할 빵(bread)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뢰해야 한다. 그분과 영적으로 늘 함께 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함께 함으로써 예수 닮는 삶, 거룩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 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 고전 11:26 - <글쓴이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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