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월 30일) [2009년] 북한 “남북 기본합의서 NLL 조항 폐기”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30일 남북간 "정치군사적 대결 상태 해소와 관련한 모든 합의사항들"에 대한 무효화를 일방 선언하고, 남북기본합의서와 부속합의서에 있는 "서해 해상군사경계선에 관한 조항들"을 폐기한다고 밝혔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오늘 조선반도 정세는 남조선 보수 당국의 무분별한 반공화국 대결책동에 의해 갈수록 긴장해지고 있다"며 이 같은 조치를 발표했다.
북한에서 대남정책을 총괄하는 조평통의 이번 성명은 지난 17일 대남 전면대결 태세를 선언한 북한군 총참모부 대변인 성명에 이은 것으로, 역시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면서 남한 정부의 대북정책 전환을 압박하고 긴장 책임을 남한에 넘기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조평통은 "북남 당국 사이에 지난 시기 채택된 합의들에는 서로의 사상과 제도존중 문제, 비방중상 중지 문제, 무력충돌 방지 문제를 비롯한 정치군사적 대결을 해소할 데 대한 문제들이 반영돼 있다"고 일방적인 무효화 선언 대상을 예시했다.
조평통은 "현실은 북남 합의사항의 그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하고, 정치군사적 대결 상태 해소와 관련한 "모든 합의사항들을 무효화한다"고 말했다.
이날 조평통 성명은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미국 방문과정에서 한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의 통일’ 발언과 민간단체들의 대북 전단 살포, 급변사태론, 선제공격론 등을 거론, "북남 합의사항들을 무참히 파괴, 유린했다"며 "이런 형편에서 정치군사적 대결상태 해소와 관련한 북남합의는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됐으므로 우리는 그 합의들이 전면 무효화되었다는 것을 정식 선포한다"고 주장했다.
조평통은 또 남북기본합의서와 부속합의서가운데 서해 북방한계선(NLL)과 관련한 내용을 지적하면서 "북남합의 파괴책동으로 서해 해상 군사경계선 관련 조항들이 휴지장으로 되어버린 조건에서 우리는 그 조항들을 완전히 그리고 종국적으로 폐기한다는 것을 공식 선포한다"고 말했다./한겨레
[1974년] 한일대륙붕협정 체결
한일대륙붕협정이 1974년 1월 30일 체결됐다. 체결목적은 제주도 동남방 약 8만4천 평방km의 대륙붕을 공동개발하기 위해서였다. 1970년 11월부터 대륙붕문제를 둘러싼 일본과의 교섭이 시작된 이래 1차의 외무장관회담, 4차의 실무자회의와 5차의 실무소위원회를 거쳐 1973년 7월 4일 협정문안에 양측이 합의함으로써 이날 체결됐다.
협상과정에서 양국은 조광료(租鑛料)및 세금 납부방식과 공동개발회사의 법규적용문제 등으로 심각한 대립을 보였으나 1973년 4월16일 김용식 외무장관과 오히라 일본 외무장관이 이를 정치적으로 해결함으로써 협상이 타결되었다. 한일대륙붕협정 비준서는 1978년 6월 22일 교환됐다. 협정체결로부터 4년5개월이나 늦어진 것은 일본의회가 협정발효에 필요한 비준을 지연시켰기 때문이었다. /조선
[1972년] ‘피의 일요일’
← 1972년 1월 30일, 북아일랜드 런던데리 시내에서 구교도 시위대들이 친 바리케이트를 영국군들이 돌파하고 있다.
1972년 1월 30일 영국의 공수부대가 시민권 쟁취를 위한 가두행진을 벌이던 아일랜드 구교도 시민 13명을 사살하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 테러와 보복이 난무하는 북아일랜드 사태를 한층 격화시켰다.
북아일랜드 사태는 1921년 아일랜드 공화국이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하면서 북아일랜드와 분리되자 북아일랜드 구교도들이 독립을 요구하며 IRA라는 단체를 조직한 것이 시초가 된다. 이들은 영국 본토에서 이주해 정착한 신교도가 정부를 장악하고 소수민으로 전락하게 된 구교도에 대한 차별정책에 항거, 196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폭력으로 치달았다.
IRA는 영국과 영국계 신교도에 대한 무차별 폭탄테러에 들어갔다. 오랫동안의 협상 끝에 이들은 1998년 4월 신·구교계 모든 정파가 모인 가운데 북아일랜드 평화협상을 타결, 3천5백여 명의 목숨을 빼앗은 30년간의 피의 대결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평화협상 타결에도 불구하고 1998년 8월 북아일랜드 오마시에서 또 IRA의 강경분파인 ‘리얼(Real) IRA’가 다시 폭탄테러를 저질러 28명이 죽는 등 2백여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조선
[1954년]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발족
우리나라는 1950년 6월 14일에 유네스코에 가입했지만, 열흘 후에 발발한 6.25 전쟁으로 유감스럽게도 유네스코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전쟁의 참화를 뼈저리게 느낀 대한민국 정부는 유네스코의 이념인 세계평화 달성에 기여하고자 한국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 1월 30일에 유네스코한국위원회를 창설하였습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창설을 계기로 우리나라는 유네스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 직후의 우리나라 사정상 유네스코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는 입장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유네스코의 도움으로 초·중등 학교에서 학생들이 사용하는 교과서를 제작하여 학교교육을 차질없이 이행할 수 있었던 것은 현재의 발전된 대한민국을 가능케 한 초석이었습니다.
[1953년] 부산 국제시장 대화재
← 부산국제시장 화재현장.
1953년 1월 30일 오후 7시40분, 해방 후 가장 큰 화재가 부산 국제시장에서 발생했다. 화재 원인은 신창동의 요리집 춘양원에서 손님과 종업원이 석유등잔을 발로 쳐 넘어뜨리면서 불이 순식간에 옮겨 붙어 이 지역 일대인 신창동, 부평동 등 상가 1천여호를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로 만들었다. 부족한 물과 장비부족도 대형화재의 한 원인이었다.
부산 국제시장의 화재는 해방 후 발생한 화재사건 중 가장 손실이 컸을 뿐만 아니라, 부산시민의 경제생활면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날 화재로 이재민 2만 2천명에 가옥 4천2백60동이 전소해 무려 5백억원이란 거액의 피해를 냈다. 화재는 부산시민의 경제생활을 더욱 피폐하게 했다. /조선
[1948년] 동계올림픽 도전, 92년 첫 금메달
한국의 올림픽 도전은 하계보다 동계가 먼저였다. 1948년 1월 30일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개막한 제5회 동계올림픽.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이지만 'KOREA'라고 적힌 단복을 맞춰 입은 5명의 초미니 선수단이 태극기를 앞세워 개막식에 참가했다. 대한체육회에 따르면, 미국 하와이에서 사탕수수 이주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월터 정(한국명 정월택)이 본부임원을 맡았고 최용진 감독과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3명(이효창·이종국·문동성)이 출전했다. 1944년 전일본선수권대회 종합우승, 1946년 춘천에서 열린 제1회 한국빙상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효창이 한국의 간판이었다. 물론 당시의 한국은 참가에 의미를 둔 나라였고, 대회 성적도 노메달이었다. 그러나 미니 선수단은 세계에 코리아를 알리며 나라를 되찾은 기쁨을 만끽했다. 하계 올림픽 참가는 같은 해 7월의 런던올림픽이 처음이었다.
한국은 6·25전쟁 와중에 열린 1952년 오슬로올림픽엔 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1956년 이탈리아 코르티나담페초 대회부터는 빠지지 않고 동계올림픽에 나섰다. 그때까지는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뿐이었지만 1960년 대회(미국 스퀘밸리)부터는 알파인 스키와 크로스컨트리 스키에도 출전했다. 이후 출전 종목도 다양해졌고, 출전 선수의 수도 늘었다. 그러나 한국은 동계올림픽의 '들러리'였고 '노메달 행진'도 계속 이어졌다.
첫 메달 소식은 쇼트트랙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1992년 알베르빌올림픽에서 나왔다. 김기훈은 쇼트트랙 남자 1000m에서 우승하면서 한국인 1호 동계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됐다. 동계올림픽 데뷔 44년 만의 쾌거였다. 당시 한국은 쇼트트랙 남자 5000m 계주에서도 금메달을 보탰고, 스피드스케이팅의 김윤만(은메달), 쇼트트랙 이준호(동메달)가 메달을 따내면서 종합 10위(금2·은1·동1)에 올랐다.
이후 한국의 동계올림픽 순위는 쇼트트랙 성적에 좌지우지됐다. 쇼트트랙은 말 그대로 한국의 '메달밭'이었다. 쇼트트랙 대표팀은 1994년 릴레함메르부터 2006년 토리노까지 금메달만 15개(은7·동4)를 따냈다. 안현수와 진선유는 토리노올림픽 남녀 쇼트트랙에서 3관왕에 오르며 한국 올림픽 역사를 새로 쓰기도 했다. 그러나 쇼트트랙에만 편중된 '메달 편식'은 한국 동계 스포츠의 숙제로 남아 있다. 2010년 2월 개막하는 캐나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는 쇼트트랙이 아닌 종목에서 첫 금메달리스트가 나올 수 있을까.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에 출전하는 '피겨 여왕' 김연아,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의 이규혁과 이강석이 유력한 후보다./조선
[1948년] 마하트마 간디 피살
← 마하트마 간디.
인도의 사상가 마하트마 간디가 1948년 1월 30일 인도 뉴델리에서 반 이슬람 극우파 청년이 쏜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79세였다. 1947년 7월 인도의 분할독립으로 힌두.이슬람의 대립소동이 벌어져 이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벵갈에 이어 뉴델리를 방문중이었다.
1869년 포르반다르에서 출생한 간디는 1887년 영국으로 유학가 법률을 배운 후 1891년 귀국해 변호사로 개업했다. 1893년 소송사건을 의뢰받아 남아프리카로 건너갔다. 이 남아프리카 여행에서 간디는 인도사람의 지위와 인간적인 권리를 보호하고자 결심하고 차별받는 인도인을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1915년 귀국한 간디는 인도국민회의파를 지도하며 납세거부, 취업거부, 상품불매 등을 통한 비폭력저항운동을 실시했다. 1924년부터는 국민회의파의 의장으로 있으면서 인도인이 자력에 의한 농촌구제에 나설 것을 역설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기도 했으며 1930년에는 소금세 신설반대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인도의 사상가이자 민족 운동 지도자인 간디는 인종 차별 압박에 대한 투쟁, 자기 실현을 위한 인격 수양, 무상해 이 세가지를 가르치며 진리 구현을 평생 실천했다. 1922년 12월 인도의 문호 타고르로부터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라는 칭송을 받은 이래로 마하트마 간디로 불린 간디는 그의 평화사상뿐만 아니라 모범적인 실천을 통해서도 인도인들만이 아니라 20세기 인류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조선
[1933년] 히틀러 독일 수상에 취임
힌덴부르크(Hindenburg, Paul von, 1847~1934) 독일 대통령이 1933년 1월 30일 히틀러(Hitler, Adolf, 1889~1945)를 수상에 임명했다. 히틀러가 수상이 되기까지에는 복잡한 정쟁이 있었다. 나치스는 1932년 11월의 독일 총선에서도 7월 총선처럼 여전히 제1당이었지만 61개 의석과 200만표를 잃는 나치스 사상 처음으로 후퇴를 경험했다.
1932년 12월 파펜(Papen, Franz von, 1879~1969) 수상을 실각시키고 자신이 수상이 된 국방장관 슐라이허(Schleicher, Kurt von, 1882~1934)는 선거결과를 이용, 히틀러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공작했지만 파펜 전수상과 히틀러가 비밀회동을 해 히틀러를 수상에, 파펜을 부수상에 임명한다는 연립내각 수립에 합의했다. 파펜과 히틀러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설득, 슐라이허를 수상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히틀러를 연립 내각 수상에 임명하도록 했다. /조선
[1924년] 제1차 국공합작(중국 국민당 제1회 전국대표자대회에서 집행부에 공산당원이 선출)
1921년 7월 탄생한 중국 공산당은 그 해 제1기 전국대표대회 직후 제국주의와 군벌을 타도하고 ‘민족혁명’을 성취할 목적으로 국민당과의 합작(제1차 國共合作)을 결정하였다. 이는 1920년 레닌이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서 ‘민족 및 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를 발표, 식민지 해방투쟁에서 부르주아의 역할을 중요시한 데 따른 것으로서 1920년경부터 반제(反帝) ·반봉건의 입장을 취해 오던 국민당도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1923년 쑨원-요페선언을 거쳐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공식적인 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당은 1924년 제1기 전국대표대회에서 ‘연소(聯蘇) ·용공(容共) ·농공부조(農工扶助)’의 3대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국공합작이 발족되었으며, 공산당원은 그 당적을 보유한 채 개인의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하는 형식을 취하여 리다자오[李大釗] 등 3명이 중앙집행위원에, 마오쩌둥[毛澤東] 등 4명이 중앙집행위원 후보에 선출되었다. 이에 힘입어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급속히 발전하였으며, 1927년 우한[武漢]에 혁명정권이 수립되기까지 하였는데, 이와 같은 좌파의 영향력 확대를 두려워한 장제스[蔣介石]는 1927년 4월 상하이[上海]에서 반공 우파 쿠데타를 감행함으로써 국공합작은 결렬되고 공산당은 불법화되었다. 이러한 패배에 큰 타격을 입은 중국공산당은 토지혁명을 추진함으로써 농촌지역에서의 세력확장에 주력하였으며, 마오쩌둥[毛澤東]을 지도자로 하는 장시성[江西省]의 ‘중화소비에트’를 성립시켜 난징[南京]정부에 대항하였다. 이에 따라 10년간에 걸친 국공내전이 전개되었다. /naver
[1910년] 이병철(李秉喆) 삼성그룹 회장 출생
← 이병철
1910년 1월 30일 태어남 / 1987년 11월 19일 죽음
"전(全) 생애를 통한 나의 기업활동에서 배우고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은 국가와 사회 발전에 공헌해야 한다는 점이다." - 이병철
이병철은 한국의 대표적 재벌 그룹인 삼성그룹의 창업자이다. 치밀한 재정관리와 인사관리로 오늘날 삼성그룹의 조직력을 다졌다. 1938년 대구를 중심으로 청과물, 소맥분 등을 수송하는 삼성상회를 설립해 사업을 시작했다. 6·25전쟁 이후에는 삼성물산(주)을 모태로 제일제당, 제일모직, 신세계백화점 등을 차례로 설립하면서 사업 규모를 키워나갔다. 1961년 5·16군사정변 발발 당시 도쿄[東京]에 출장 중이던 그는 부정축재자 제1호로 지명되었으나 곧 귀국해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박정희 의장과 담판을 지어 재벌의 재산몰수보다는 재벌을 통한 국가경제 건설이 더 중요함을 역설했다. 1961년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발의해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에도 식품·섬유·전자·기계·항공·언론·유통 등 다방면의 사업확장을 통해 경제를 주도해나갔다. 반면 과점적 시장구조와 불균형한 산업구조를 초래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브리태니커
[1902년] 독립운동가 방순희(方順熙) 출생
1902. 1. 30 함남 원산 ~ 1965. 1. 31
일찍이 상경해 정신여학교에서 수학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한 후 해외로 망명해 여성계몽과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8년 8월 8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 함경남도 대의원에 선임되었다. 임시의정원 최초의 여성위원으로 의정원 회의에서 주미대표부 대표권을 둘러싸고 김원봉과의 이론논쟁을 벌였으며, 광복군 창설, 대일·대독 선전포고와 조소앙의 건국강령 채택문제,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기 위한 외교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1939년 임시정부의 결의에 따라 미국·영국·소련·중국 등 연합국으로부터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기 위한 대표로 선임되어 충칭[重慶]에 있는 소련대사관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했다. 1942년 5월 한국독립당 충칭 구당[重慶區黨] 간사로 선임되어 중국 내의 일본군이 점령하지 않은 지구에 거주하는 한인교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선전사업에 주력하는 한편, 당시 미주지역에서 대두되었던 신탁통치론을 공박했다. 1943년 10월 충칭에서 김순애(金淳愛)·최선엽(崔善燁)·최애림(崔愛林)·권기옥(權基玉)·최형록(崔亨祿) 등과 함께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1943년 임시정부 선전부원으로 임명되어 중국 중앙방송국[中央光波電台]을 통해 국내 동포들에게 한국어 방송을 실시했다. 8·15해방 후 임시정부 국내연락원에 임명되어 선발대로 귀국 중, 화중지역의 교포선무공작을 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902년] 시베리아철도 (블라디보스톡 - 하바로스크 구간) 개통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시작해 시베리아 대지를 가로질러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총길이 9288km의 세계 최장 철도.
급행열차를 탈 경우 모스크바를 출발해서 종착역까지 계속 갈 경우 7일이 걸린다. 지구둘레의 3분의 1에 가까운 거리며 시간이 바뀌는 시간대만도 7개나 지난다.
시베리아철도는 1891년에 첫 삽을 뜨기 시작해 25년만인 1916년 완공되었다. 이 철도의 등장과 함께 지구의 최대 자원보고인 시베리아도 본격개발의 계기를 맞았다.인구유입이 촉진돼 철로변을 중심으로 잇따라 대도시가 등장했고 대학·도서관·극장등이 들어서 문화적 대변혁을 가져왔다.
특히 2차세계대전중 모스크바·레닌그라드 등 유럽쪽에 있던 많은 공장·문화기관들이 이 철도를 따라 대거 시베리아로 옮겨져 이 지역의 현대화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지금은 최대 공업지대인 우랄지구·쿠즈네츠탄전·북부의 석유·가스산지를 유럽쪽으로 연결해 주는 러시아의 산업 대동맥 구실을 하고있다.
2차대전 종전 직후부터 전노선의 전철화가 시작되었으며 현재 전구간이 전철화됐다.
[1882년] 미국의 제32대 대통령 루스벨트(Roosevelt, Franklin D.) 출생
1882. 1. 30 ~ 1945. 4. 12
뉴욕주(州) 하이드파크 출생. 하버드대학교를 졸업, 1904년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하였으며, 1907년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1910년 뉴욕주의 민주당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진출하였다. T.W.윌슨의 대통령선거를 지원해주고, 1913∼1919년 윌슨 정부의 해군차관보로 임명되어 제1차세계대전을 통하여 활약하였고, 베르사유회의에 수행하였다. 1920년 민주당 부통령후보로 지명되어 대통령후보인 J.M.콕스와 함께 국제연맹 지지를 내걸고 싸웠으나, 공화당 대통령후보인 W.G.하딩에게 패하였다. 그 후 다시 변호사로 일하며 보험회사에도 관계하였으나, 1921년 39세의 나이에 소아마비에 걸렸다. 치료 후 체력이 회복되자 1924년 정계로 복귀하였다. 1928년 뉴욕 주지사에 당선되어 2기(期)를 재임하였다.
1932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자, 그 지명수락연설에서 ‘뉴딜(New Deal)’을 선언하였다. 1929년 이래 몰아닥친 대공황으로 천 수백만에 달하는 실업자를 배출하고 있던 당시 미국의 사정으로서는 뉴딜을 대환영하였고 마침내 H.C.후버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대통령 취임 후에는 강력한 내각을 조직하고 경제공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뉴딜정책을 추진하였다. 통화금융제도의 재건과 통제, 산업 특히 상공업의 통제, 농업의 구제와 통제, 구제사업과 공공사업의 촉진, 정부재정의 절약 및 행정의 과감한 개혁 등으로 성공을 거두어, 국민생활은 점차 안정되어 갔다.
외교면에서는 소련의 승인, 필리핀의 독립과 함께 호혜통상법(互惠通商法)을 제정하게 하고 공황의 원인이 되었던 국제무역의 불균형을 시정하였고 라틴아메리카 제국(諸國)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선린외교정책(善隣外交政策)을 추진하였으며, 먼로주의를 미국만의 정책으로 삼지 않고 아메리카주(洲) 전체의 외교정책으로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936년 대통령에 재선되었고, 1940년 3선되었다. 1935년 유럽 정세가 악화됨에 따라 중립법이 제정되었지만, 원래 국제주의자였던 그는 고립주의를 억제하여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후에 적극적으로 영국과 프랑스를 원조하였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眞珠灣)공격을 계기로 참전하였다. 대서양헌장의 발표를 비롯하여 카사블랑카·카이로·테헤란·얄타 등의 연합국 회의에서 전쟁의 결정적 지도권을 장악하여 영국의 총리 W.L.S.처칠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지도적 역할을 다하고 전쟁종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44년 대통령에 4선되고 국제연합 구상을 구체화하는 데 노력하였으나, 1945년 4월 세계대전의 종결을 보지 못하고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naver
[1649년] 영국 국왕 찰스1세(Charles I) 처형
찰스1세 [Charles I, 1600.11.19~1649.1.30]
제임스 1세의 차남. 그는 형 헨리가 죽음으로써 황태자가 되었으며, 즉위 직후에 앙리 4세의 딸 앙리에타 마리아와 결혼하였다. 총신(寵臣) 버킹엄 공작의 실정이 국민의 불만을 산데다가, 카디스 원정, 라로셰르의 위그노 구원, 그리고 30년전쟁에서의 덴마크 왕에 대한 전쟁비용 제공 등, 무익한 대외정책에 국고를 탕진하고 국민에게 중세를 과하였기 때문에, 1628년의 의회에서 권리청원이 제출되어 악정을 비난당하였다. 왕은 이것을 인정하기는 하였지만, 이듬해에 의회를 해산하고 그 후로는 11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으며, W.로드와 T.W.스트래퍼드를 등용하여 친정을 실행하여 선박세 등의 불법과세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에 강제로 국교(國敎)를 시행하려고 하여 1640년에 스코틀랜드에서 반란을 초래하였다. 이 반란에 대한 처리비용에 곤경을 겪자 단기의회, 그리고 이어 장기의회를 소집, 1642년에는 스스로 하원에 나가 지도급 의원 5명을 체포하려 한 것이 드디어 의회와의 정면대결을 초래하였는데, 이것이 그 해 여름의 청교도혁명으로 확대되었다. 1646년에 왕은 네이즈비전투에서 패배하였으며 이듬해 항복하고 유폐되었다. 그는 한때 와이트섬으로 피신하여 가서 스코틀랜드군과 통모(通謀)하여 제2차 내전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1649년 1월 재판결과에 따라 ‘국민의 적’으로서 처형당하였다. /naver
[1637년] 병자호란때 인조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
← 남한산성,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석축산성, 사적 제57호 수어장대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조선에 침입하여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태종에게 항복했다. 1632년 후금(後金) 태종은 만주와 내몽골의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조선과의 '형제지맹' 관계를 '군신지맹' 관계로 고치려 했다. 이에 조선 조정은 후금 사신이 인조비 한씨의 조문을 왔을 때 그들을 죽이고 척화할 것을 주장했다. 1636년 후금은 국호를 청(淸)이라 고쳤는데, 청태종의 즉위식에 참가한 조선 사신들은 신하국으로서 갖춰야 할 배신(陪臣)의 예를 거부했다. 이에 격분한 청태종은 1636년 12월 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직접 조선을 침략했다. 조선군은 청군에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고 기대했던 명나라의 도움 또한 구할 수 없었다.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인조는 삼학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1637년 1월 30일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의식을 행했다. 조선은 청에 대해 사대(事大)의 예를 지킴에 따라 조공(朝貢) 관계가 유지되었다. 이후 1649년 즉위한 효종을 중심으로 북벌론(北伐論)이 대두되기에 이르렀다./브리태니커
그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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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한국-피지 국교 수립
1969년 이희승 등 140명, 한글전용반대 성명
1967년 조달기금법안 통과, 한국외환은행 발족
1964년 베트남 군부쿠데타(2차)로 웬칸 장군 집권
1964년 미국 달 위성 레인저 6호 발사 성공
1959년 오스트리아의 자동차 공학자 포르셰 사망
1959년 일본 외상, 국무회의에서 재일교포 북송을 발표
1958년 독일의 항공기 설계자 하인켈 사망
1958년 김포공항 국제공항으로 정식 지정
1952년 국제전기통신연합(ITU) 가입
1951년 폴크스바겐 원형의 설계자이자 포르셰의 창업자 페르디난트 포르셰 사망
1949년 중국군 북경 입성
1948년 미국 비행기 발명가 오빌 라이트 사망
1939년 조선일보, 조선 여성백과사전 ‘청규박물지’의 첫 발견을 보도
1927년 스웨덴 올로프 팔메 수상 출생
1913년 발칸동맹, 대 터키 강화 담판 결렬
1909년 미국-카나다, 나이아가라 폭포 공동보호협정 체결
1902년 제1차 영일동맹 조인
1899년 대한천일은행(현 상업은행) 창립
1895년 러시아 황제 전제정치 선언
1878년 러시아,터키 휴전조약 체결
1781년 독일 시인 샤미소 출생
1621년 조선, 무과에서 대리시험이 공공연히 자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