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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658
10월29일[연중 제3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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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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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iuD6VQE278s
[제주교구 김태정 베드로 신부님 집전(한림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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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의 사랑이 불꽃처럼 활활 타오를 수 있기를>
그냥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오랫동안 제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돌아보니 사목자로서 살짝 그런 순간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너무 좋아서 제 모든 것을 다 바쳤습니다. 내 시간, 내 젊음, 내 에너지,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아부었습니다. 그야말로 내 마음, 목숨, 정신을 다해 사랑했습니다.
그랬더니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에게 투자한 그 사랑이 고스란히 내게로 되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제 사랑을 확인한 아이들로부터 오는 사랑을 느끼다보니, 더 열심히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느꼈습니다. 일방적인 사랑은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로구나. 사랑은 움직이는 것, 역동적인 것이로구나. 사랑은 오고 가는 것이어야 하는구나.
오늘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사랑 안에 얼마나 진심, 진정성, 정성이 포함되어있는지 성찰하며, 큰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저 습관적으로, 아니면 의무적으로, 마지못해 그분을 대해온 것을 크게 뉘우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사랑은 그냥 사랑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 불같은 사랑, 순수한 사랑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오 복음 22장 36절) 그 어떤 질문에도 거침없으셨던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또 다시 촌철살인의 말씀으로 그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습니다.
복잡하게 말씀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요약과 종합의 명수이신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구약 성경 신명기를 인용하시면서, 구약 성경 전체를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요약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게 첫째 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 37~40)
예수님께서는 못배우고 가난한 백성들도 쉽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신앙의 진리를 아주 간단히 종합해서 설명하십니다. 이 또한 그분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느님 사랑, 인간 사랑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아주 쉽게 가르치십니다. 한 인간 존재가 하느님을 깊이 사랑해야 그 사랑을 바탕으로 이웃 사랑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사심없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동일한 중요성을 부여함을 통해, 두 사랑이 지닌 불가분의 관계를 부각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이 실천하던 이웃 사랑은 상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이웃 사랑의 실천은 동족 유다인들에게만 적용시켰고,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이방인들은 사랑의 실천 대상에서 제외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한 개념을 크게 확장시키셨습니다. 사랑은 국경이나 인종을 넘어서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뿐 아니라 이방인들, 원수까지도 사랑의 대상에 포함시킬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오늘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더 뜨거워지고, 더 깊이가 더해지고, 더 진정성 있는 사랑이 될 수 있기, 불꽃처럼 활활 타오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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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nF4h0LPSuH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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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원씽: 사랑뿐!>
어떤 분야에서 전문가가 된 사람들은 무엇이 중요한지 한 가지만을 말해달라고 할 때 주저 없이 말해줄 수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주식으로 투자해서 엄청난 재산을 모은 워런 버핏은 주식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첫째는 원금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는 첫 번째 규칙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10년 이상 보유하지 않을 주식은 사지 않는다고 하는데, 사실 주식은 오르락내리락해서 단기투자를 한다면 원금을 손해 볼 일이 있으므로 10년 이상 보유해야 한다는 규칙은 원금을 잃지 않으려는 기본 법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첫 번째 도미노를 알면 나머지 것들은 저절로 쓰러지는 원리와 같습니다. 책 『원씽』의 저자 게리 켈러는 남다른 성과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이 도미노 원리에서 찾고 있습니다.
“삶은 크고 작은 수많은 문제로 뒤덮여 있습니다. 하지만 우선순위를 세우고 줄을 맞춰 잘 세운다면 최초의 단 하나, 그것만을 움직임으로써 다른 문제들을 저절로 쓰러뜨릴 수 있습니다.”
뭐든지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오늘 율법 학자는 예수님께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말합니다. 사실 이는 쉬운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모세 오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한 구절을 뽑아달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계셨습니다. 율법의 제정자셨기 때문입니다.
중국 영화 ‘먼지로 돌아가다’(2022)는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잘 보여줍니다. 시골의 가난한 한 노총각이 친척들의 성화에 못 이겨 돈을 얼마 주고 장애가 있는 여인과 혼인합니다. 여자를 한 번도 사귀어보지 못한 남자는 아무것도 못 하고 그저 잘해 주려고만 합니다. 비록 장애가 있지만, 무작정 잘해 주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아내도 무언가 하려고 노력합니다.
남편은 피까지 팔아가며 아내를 위해 일을 하기에 아내는 달걀을 부화시켜 병아리를 태어나게 합니다. 달걀을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둘은 열심히 일하며 집을 지어 동물을 키우며 살아갈 생각에 기쁘기만 합니다. 그러나 남편에게 깨끗하게 보이기 위해 물살이 빠른 수로에서 몸을 씻다가 불편한 다리 때문에 아내가 죽게 됩니다.
남편은 삶의 의욕을 잃고 가진 모든 것들을 팔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줍니다. 그러고는 자신을 위해 아내가 키운 닭들이 낳은 달걀을 계속 먹으며 자신도 숨을 거둡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삶도 의미가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그냥 살았으면 그냥저냥 살아졌을 인생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알고 나서는 사랑이 없는 인생은 살아있는 삶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75년간 연구한 끝에 행복은 사랑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당연하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돈이 행복이라 믿습니다. 그러니 이웃을 사랑하려고 하더라도 잘되지 않습니다.
영화 ‘헝거’(2023)는 한 맛집의 요리 잘하는 딸이 헝거라는 부자들을 위한 요리사 집단에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았습니다. 그 헝거 대표는 태국에서 가장 유명한 셰프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가난했고 그래서 천대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요리로 부자들을 자기 앞에 무릎 꿇게 만드는 것이 그의 즐거움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해 그는 최고가 되어야 했습니다. 또 그것 때문에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여자 주인공은 그 행패에 이기지 못하고 자기 이름을 딴 다른 식당을 만들어주겠다는 투자를 받아들입니다. 결국 둘은 한 나라에서 가장 요리 잘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자 스폰서 편에서 남자 셰프가 부자들이 사냥한 천연기념물로 요리하는 사진을 몰래 찍어 그가 감옥에 가게 합니다. 그런데 여자 주인공은 자기도 그 남자 셰프처럼 결국엔 화내고 짜증 내며 남을 이용해 최고가 되고자 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 먼저 무언가 되려고 합니다. 부자가 되거나 창조자가 되고, 혹은 심판자가 되려 합니다. 그러며 자신도 모르게 주위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처럼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려면 하느님을 부모로 사랑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형제가 사랑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함입니다.
사랑은 노력이 아니라 정체성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하면 이웃도 저절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형제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생의 전문가가 되면 자녀들에게도 다 필요 없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만 사랑하면 된다고 가르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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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성지순례 중에 초남이엘 갔습니다. 초남이는 호남의 사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살던 고향의 이름입니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그곳에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이 소유한 땅은 300만평이 넘었다고 합니다. 여의도 땅의 3배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의 땅에서 나는 소출은 3만석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런 유항검은 1784년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고, 이제 부유한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부유함 대신에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건강한 몸 대신에 아픈 것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 있는 삶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사람은 아픈 사람은 고쳐주고, 마귀는 쫓아내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제 유 아우구스티노에게는 빈부귀천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면서 모두에게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가난한 이웃은 물론, 자신의 종들에게도 애긍과 희사를 베풀었습니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제가 없는 조선에 사제를 영입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이런 유항검에게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욥에게 시련이 닥쳤던 것처럼 유항검은 모든 재산을 빼앗겼습니다. 그에게는 ‘파가저택(破家瀦澤)’이라는 벌이 내렸습니다. 그의 집은 모두 부수고, 웅덩이를 만들어 돼지들이나 살게 했습니다. 다시는 그가 살던 집에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단순한 재산의 몰수가 아닌 대역 죄인에게 내리는 벌이었습니다. 유항검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였습니다. 둘째 아들 유일석(柳日碩)[6세]은 흑산도로, 셋째 아들 유일문(柳日文)[3세]은 신지도로, 딸 유섬이(柳暹伊)[9세]는 거제도로 각각 유배되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아이들과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유항검은 능지처참의 형벌을 받아 순교하였습니다. 그의 아들과 며느리인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도 순교하였습니다. 재산의 몰수,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 순교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것이 묻혀버릴 것 같았습니다.
모든 시련을 끝까지 참아낸 욥에게 하느님께서는 축복을 주셨던 것처럼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은 유항검을 과거의 먼 기억 속으로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유항검과 그 가족들을 기억하셨습니다. 유항검과 가족들의 묘는 전주 치명자 산꼭대기에 모셔졌습니다. 치명자 산은 성지가 되었고, 많은 순례자들이 유항검과 그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뜨거운 열정과 신앙을 배우려고 합니다. 순례자들의 기도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유항검과 그 가족들을 복자품에 올렸습니다. 거제도에 묻혀있던 딸 유섬이의 묘지도 발견되었습니다. 돼지들이 살던 유항검의 집터는 초남이 성지가 되었습니다. 그가 교리를 가르치던 곳은 교리당이 되었습니다. 200년 전에 잊혀질 것 같았던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가족들은 교회가 존재하는 한 언제나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200년 전에 호남의 사도였던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이제 복자가 되어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따라야 할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오늘 탈출기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가난한 사람, 고아나 과부를 업신여기거나,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받을 것이 있어도 무리해서 그들의 처지가 너무 힘들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과부나 고아를 돌보아 주는 것은 우리가 선행을 베푸는 것이고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나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은총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복자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온 마음과 생각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가장 큰 계명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몸처럼 여러분의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율법과 계명의 근본정신입니다.’ 남을 위한 희생과 봉사는 자랑할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이를 도와주고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은 생색을 낼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복자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환난과 박해를 이겨낸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른 사람들에게 큰 축복이 주어지리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큰 환난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의 모든 신자에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복자는 조선의 모든 신자들에게,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신앙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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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2,34-40: 네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오늘의 전례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강조하며, 그 사랑을 바탕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올바로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시이며 증거이기 때문에, 하느님과 인간은 떼어놓을 수 없는 두 실체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께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악의를 위장하기 위해 사랑에 대한 논쟁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들이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36절) 라고 예수님을 떠보고 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중요성을 신명기 표현을 인용하여 말씀하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7절) 그리고는 봉인하듯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38절) 하셨다.
이러한 사랑은 무엇보다도 특히 예수님 자신의 생활, 특히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순명(필립 2,8 참조)으로 받아들이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증거된다. 그러나 예수님 대답의 의도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우선성에 대한 재확인보다도 그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나로 묶어놓으려는 데 있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39절). 예수께서는 레위 19,18을 상기시키며 이는 이스라엘 사람뿐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확대 적용하신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체계를 확인하면서도 이 두 계명을 하나로 묶으려 하신다. 두 계명 간의 보충적인 것에 대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대로(창세 1,26) 창조되었으며, 인간 창조가 가장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창세 1,31) 둘째로, 강생의 신비 이후 하느님의 모습이 더 깊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은 이제 신화(神化: Deificatio)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는 보이는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제 하느님께 드리는 그 사랑과 닮은 사랑으로 인간을 사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느님을 향한 여정은 바로 형제들과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도 요한은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0-21)라고 역설하고 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40절) 는 말씀은 두 계명의 일치성과 동질성을 강조하는 것뿐 아니라, 이 두 계명으로 모든 계시가 종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종합의 의무는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몫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그 종합을 생기 있고 활력 있게 이루어 나아가야 한다.
구약에서는 이미 이웃에 대한 사랑, 특히 더욱더 도움이 필요한 사람, 즉 외국인, 고아, 과부 등에 대한 사랑이 강력하게 요구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웃 사랑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해주신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을 드러내는 표현 방법이었다. 탈출기에 나오는 규정들은(22,20-26) 박애주의적 정신만이 아니라, 신앙의 내용이다. 만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려움에 있는 자기 형제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들의 호소를 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자비하시기”(탈출 22,26) 때문이다. 형제들을 어떻게 대하든 간에 그것은 하느님을 그렇게 대하는 것과 같다.(마태 25장 참조) 하느님은 사랑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사람들을 엄하게 다루실 것이다. 이것이 복음과 만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하느님 중심주의적인 박애주의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인간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부터 비롯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더 이웃 형제들에게 베풀 수 있는 봉사도 더 잘 이루어질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그분께 첫 자리를 내어드리지 않는다면 인간은 자신을 소외시킬 수 있으며,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노예가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예수께서 가르쳐 주셨듯이 이 두 계명의 종합을 이루어가야 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37.39절). 이제 우리는 모두 가치관을 확실히 가져야 한다. 하느님이 우리 삶의 첫 자리에 계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 하느님 자리에 다른 것이 있게 되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다. 그 때문에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사물이나, 다른 것의 노예가 될 수 있다. 가치관이 올바로 정립될 때 우리는 진정 이 두 계명을 종합해 나갈 수 있다. 이 종합을 위해 조금씩 실천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러한 삶으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올바로 실천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의 삶으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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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랑은 섬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간단하게 줄이면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만 섬겨라.”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섬김’입니다. <우리는 세속에서 말하는 사랑과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세속 사람들은 ‘좋아하는 감정’을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에서는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섬기는 일, 또 그 마음을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 때에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만 섬기라고 가르친 것은, 원래는 우상을 섬기면 안 된다는 것을, 또 하느님만 섬겨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구약시대는 우상숭배가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되었던 시대였고, 그래서 구약성경에는 우상숭배를 단죄하는 말씀이 아주 많이 나오는데, 십계명의 첫 계명도 우상숭배를 금지하고 하느님만 섬기라는(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어떤 형상으로도 신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 대 사 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신명 5,6-10)
신약시대 때에는 우상숭배뿐만 아니라 재물을 섬기는 일도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섬기면 안 된다는 것을 자주 강조하셨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함께 섬길 수 없다.”는 “함께 섬기면 안 된다.”입니다.> 사실 ‘재물’도 우상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느님이 아닌데도 섬긴다면, 그것은 모두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재물의 경우에 ‘사랑은 곧 섬김’이라는 것이 확실히 드러납니다. 누구든지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재물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재물을 하느님처럼 섬기게 됩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또는 그렇게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다른 것은 일체 생각하지도 않고, 바라보지도 않고, 찾지도 않고, 따라가지도 않고, 오로지 하느님만 믿고, 하느님만 생각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만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이라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아는데, 실제 현실을 보면, 세속 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하느님에게만 집중하지 못할 때가 많고, 또 세속에서 다가오는 여러 가지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흔들릴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도 ‘일편단심’이 중요합니다.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믿는 대로 생활하려는 굳은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계명은, “자기 자신을 아끼고 돌보듯이 이웃을 아끼고 보살펴 주어라.”라는 계명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의 구체적인 설명으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네가 먼저 이웃이 되어 주어라.”라고 가르치셨습니다.(루카 10,29-37)
착한 사마리아인이 실천한 사랑은 곧바로 ‘황금률’에 연결됩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강도당한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는 누구든지 지나가다가 자기를 발견하고 도와주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은 그 간절한 바람을 외면했고, 사마리아인은 그 간절한 바람에 응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곧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고, 그대로 실천하기”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계명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계명입니다. (그것은 ‘이기심’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설명하면서, 이웃을 하느님처럼 섬겨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표현만 보면 그럴듯하게 보이긴 하는데, 그 말은 자기 자신을 하느님처럼 섬긴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부적절한 표현이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 되기도 하고, 십계명의 둘째 계명을 어기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실천하는 ‘이웃 사랑’은, 이웃을 하느님처럼 섬기는 일이 아니라, 이웃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완전히 다른 말입니다. 어떻든 우리는 “네가 먼저 이웃이 되어 주어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이 ‘나’를 통해서 이웃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저를 사랑의 도구로 사용하십시오.”라고 자기 자신을 기꺼이 주님께 봉헌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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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뒤에도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의 공격은 계속됩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21,23-22,14 참조), 바리사이들(22,15-22 참조), 사두가이들에(22,23-33 참조) 이어서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질문을 던집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그 율법 교사는 율법에서 어떤 계명이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지 구분하고자 하였으며, 이는 모든 율법 조항이 도출되는 하나의 원리를 찾고자 하였던 라삐들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조문을 인용하시면서 응답하십니다. 첫 번째 인용된 조문은 ‘쉐마’(‘너희는 들어라.’는 뜻)에 해당하는 신명기 6장 5절입니다. 이 구절은 모든 율법의 근원이자 믿음의 대상인 하느님의 유일성에 대한 신앙 고백을 포함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이 조문을 아침과 저녁, 곧 하루에 두 번 암송하면서 선택된 민족으로서 지녀야 할 정체성을 확인하였습니다. 이 계명은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시므로, 하느님을 헌신적으로 사랑하여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두 번째로 레위기 19장 18절이 인용됩니다. 이 계명에 따르면 이웃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을 첫 번째 계명으로 말씀하셨지만, 이웃 사랑도 하느님 사랑 못지않게 중요한 계명으로서 이 두 계명은 뗄 수 없는 ‘하나’의 계명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제1독서에 따르면, 모세의 법은 이웃, 특별히 이방인, 과부와 고아, 가난한 이와 같은 약자에 대한 보호를 중요한 가르침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가 이웃을 대하는 자세를 돌아보게 합니다. 주위의 이웃을 하느님처럼 섬기며 사랑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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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류지인 야고보 신부님]
<모두를 전부 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라는 구절은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께 대한 합당한 사랑의 자세를 드러내는 널리 알려진 표현입니다.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를 고백하는 오늘의 기도문은 하느님께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 쏟지 않을 때 드러나는 외적 결함에 대한 뉘우침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 마디를 천천히 음미해보면 이것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추운 겨울날 오천 원짜리 지폐 하나만을 달랑 들고서는 거리로 내쫓겼습니다. 이 시간에 가장 가난한 이웃을 찾아서 그들이 겪는 어려움에 동참하며 하느님 사랑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몸으로 익히라는 수도원 양성 프로그램입니다. 가혹한 현실 앞에서 고집스레 지켜왔던 체면치레는 얼마 가지 않습니다. 돌아갈 보금자리가 보장된 고작 며칠짜리 체험에 불과한데도 목숨 하나 부지하기에 바쁩니다.
차비로 소진하고 얼마 남지 않은 주머니 돈으로 계란빵 하나를 샀습니다. 모락모락 귀하디귀한 온기로 따뜻함을 베어 물고 허기진 배를 겨우 채우려는데 옆에 있는 노숙인의 시선이 날아와 꽂혔습니다. ‘아~!’ 내면에서 터져 나온 외마디 탄식에 원치 않는 상황에 대한 원망과 하느님 사랑을 바로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자책이 담겼습니다. 어렵사리 반을 나누어 그분에게 건넸지만 계란의 하나뿐인 노른자가 어느 편으로 얼마만큼 나누어지는지에 따라 마음도 함께 나뉘었습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이라는 두 번째 계명으로 그 맥락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너 자신처럼”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이기적인 마음도 사랑으로 바뀔 수 있음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생활성서 2023년 10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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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용욱 미카엘 신부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아름다운 잔치-
지난 겨울, 베를린에서 본 어느 자매님의 고희연은 감동이었습니다. 자매님은 어려웠던 시절 간호사로 독일에 오셨습니다. 짧은 어학과정을 거치고 병동에 투입된 파독 간호사들의 수고는 말할 필요가 없지요. 가녀린 몸으로 육중한 체구의 독일 환자들을 돌보느라 파김치가 되도록 애쓰던 기억, 그러다 체력이 달려 닭백숙이라도 해 먹으려는데 독일어로 닭이 뭔지를 몰라서 달걀을 들고 가서 얘 엄마를 달라고 했다던 에피소드, 어떻게든 아끼고 모아서 고향 부모님께 논밭을 사드리고 동생들 공부시키고 시집·장가보냈던 이야기들…. 듣다 보면 함께 울고 웃게 되는 사연들이 한아름입니다.
고희연의 주인공인 자매님도 수고 끝에 이제는 은퇴생활을 즐기며 성실히 본당에서 봉사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런 어머니께 고희연을 해드리겠다고 세 아들이 계획을 세웠는데, 정작 주인공이 극구 사양하니 아들들이 꾀를 냈습니다.
성당 강당에 깜짝 파티를 준비해 놓고 어머니를 납치하다시피 모셔왔지요. 가족과 친지들이 각자 집에서 정성스레 준비해온 김밥이며 잡채며 요리로 상을 채운 가운데, 세 아들은 어머니를 위해서 노래를 하고 시를 써서 읽었습니다. 어린 손녀가 비뚤비뚤 손으로 그려 만든 축하 카드를 받으며 환하게 웃는 자매님의 모습은 행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교과서 같았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잔치 다음 날, 어김없이 봉사하러 오신 자매님께 여쭤 보았습니다. “자매님, 어제 잔치는 너무도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좋은 잔치를 왜 안 하겠다고 고집 부리셨어요?” 자매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신부님, 저는 하느님 은총으로 이렇게 가정을 꾸렸고 애들도 잘 커서 행복하게 지내지만, 같이 고생하던 언니들, 친구들 가운데는 그런 복을 못 누리는 분들도 계셔요. 그분들 마음 아플까봐….” 그렇게 말꼬리를 흐리시는 자매님 앞에서 저도 말을 잊었습니다.
나는 누리지만, 또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지만, 누리지 못하는 분들 속사정을 헤아리며 자제하고 삼가는 마음 앞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너희도 이방인이었다-
오늘 첫째 독서는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켜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살이에서 이끌어내시고 십계명을 주시는 대목(탈출기 20장)에 이어지는 법전의 일부입니다. 20장에서 23장까지 이어지는 이 법전 안에는 하느님 백성의 생활을 규율하는 다양한 규정이 등장하는데, 규정 전체를 관통하는 뜻은 네가 힘들고 어려웠을 때를 잊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안 겪도록 돌보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단지 개구리 올챙잇적 잊지 말라는 가르침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생활에서 자유인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능력을 가졌거나 강대한 국가를 세웠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 덕이었지요.
그래서 가장 약한 이들까지 빠짐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돌봄과 인도를 체험한 사람은 그 사랑 때문에 나와 엮일 것이 없는 이방인들, 살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과부와 고아들, 가난한 이들의 처지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내가 누리는 것이 내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하느님 덕분에 얻은 것임을 기억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그 사랑을 전해주고 물려주는 데 힘을 다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전하는가 내가 겪은 고통을 기억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시련의 경험은 잊고 싶어도 잊기 어려운 것이니까요. 그 고통의 기억 속에 ‘나는 고생했지만 내 자식만큼은 고생 안 시키겠다’는 마음이 우리 사회의 외형적 성장에 큰 동력이 되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끼니 걱정에 시달리거나, 돈이 없어서 공부할 기회를 놓치거나, 일만 하느라 옆도 돌아보지 못했던 어려움을 미래 세대가 겪지 않도록 애쓴 결과, 오늘의 한국사회는 물질적인 면에서 전례 없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십리 길을 걸어가던 세대가 값비싼 자동차로 막히는 거리를 물려주고, 끼니 걱정하던 동네를 미식가의 천국으로 만들어 준 것과는 별개로, 정작 중요한 것, 그러니까 사랑 그 자체를 기억하고 전해주는 데는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는 원하던 풍요는 얻었으되 이웃을 여전히 경계와 경쟁의 대상으로 보는 마음의 빈곤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내가 거두고 이룬 것이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게 힘입은 것이라는 점을 놓치기 때문에, 내 성공의 결실을 독점하고 남들이 넘보지 못하게 하겠다는 못난 이기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학벌 사회의 폐해를 뼛속 깊이 체험하고 자란 사람들이 입시 경쟁의 광풍을 잦아들게 하는 대신, 더 지독한 경쟁의 프레임을 강요하는 학부모가 된 것도 그런 까닭이겠지요.
요컨대 고통의 기억, 시련의 기억만 남은 사람은 그 자신부터 고통의 기억을 넘어서지 못할 뿐 아니라 세상을 온통 경쟁자와 잠재적인 적으로 가득 찬 전쟁터로 인식합니다. 내 사람과 남들이라는 이분법에 갇혀서 남들이 도전할 수 없는 나만의 성벽을 쌓아올리는 일에 골몰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 시대에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잣거리의 보통 사람들은 범접할 수 없는 고고한 삶을 구가하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나와 남 사이에 구별의 벽을 세우지 않고서는 못 견디는 메마르고 빈한한 마음을 보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또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의 근본을 짚어주십니다.
그런 맥락에서 사랑의 계명은 의무이기 전에, 우리가 시련의 고통만 남기고 사랑의 기억을 증발시켜 버린 초라한 영혼의 소유자가 아닌지 돌아보라는 말씀 같습니다. 우리가 남기고 전해야 할 것은 고통의 기억이 아니라 사랑의 기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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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황성호 미카엘 신부님]
<모든 것을 쏟아야 하는가?>
“신은 죽었다.”는 주장으로 시대의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던 니체가 떠오른다. 그렇게 주장한 이유는 교회가 가야 할 길을 제대로 가지 않았기 때문이고, 교회를 통해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하는 우리가 익숙함에 젖어 본질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가톨릭교회의 본질인 ‘사랑’이라는 말은 누구나 다 알고 있고, 그 의미도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복음은 알아듣기 쉽지 않다. 오늘 말씀에도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라고 가르치신다. 도대체 이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할까?
예수님의 사랑은 분열되지 않은 참되고 순수한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통합적 존재 곧 온전한 존재이니 통합적인 사랑, 온전한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말은 거룩하나 몸은 불경스럽고, 몸은 거룩하나 말이 거칠다. 이것은 분열된 상태다. 그래서 복음서는 신앙인이 통합적인 사랑, 온전한 사랑을 하라고 선포한다. 분열된 상태에서의 ‘사랑’은 거짓이고 가짜일 가능성이 크다. 쉽게 말해 겉은 웃고 있지만 속은 이기심과 탐욕으로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줄지에 몰두하는 것과 같다.
형식주의적 신앙에 익숙해져 위선으로 깨져버린 통합을 세상과 교회에서 많이 경험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당신의 수많은 담화문에서 통합을 강조하신다. 생명 앞에서는 중립이 없고, 죽음을 무릅쓰고 자기 나라를 떠나온 이주민들과 난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을 향해 통합의 정신을 권고하신다.
지금 우리의 몸과 정신이 소진되어 지쳐있는 모습을 본다. 그래서 삶이 행복과는 멀고, 신앙생활도 참맛을 느끼지 못한다. 익숙함에 젖어 점점 형식주의에 빠지기 쉽다.
“행복하게 살고 싶은가?”라고 물어보면, 모두가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 행복을 방해하는 이기심과 탐욕을 버리지 않는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가?”라고 신자에게 물으면, “그렇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대로 살고 싶으면서도 절대 자기 뜻은 버리지 않는다. 분명한 사실이 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말했고, 교황님도 말씀하셨다. 통합적인 온전한 사랑은 모든 것을 쏟아야 가능하다. 결국 자신에게 익숙한 것을 버려야 한다.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 알고 있는데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술에 관한 학술적인 논문을 읽었다고 해서 술에 취하는 것은 아니다. 말은 쉽지만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모든 것을 쏟아 사랑하자. 통합적이고 온전하게 행동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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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김형렬 요셉 신부님]
<사랑의 시작점, 공감 능력>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매년 10월의 마지막 날이면 라디오에서 한 번은 듣게 되는 노래입니다. 우리는 오늘, 10월의 마지막 주일을 보내며 이번 주간 묵주 기도 성월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노래 가사를 떠올리다 보니) 세상을 향해 쉼 없이 외치는 성모님의 간절한 메시지를 무슨 뜻인지 헤아리지 못하고, 묵주 기도 성월과 헤어지는 건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저는 올해, 교회의 귀중한 선물인 안식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제 20년 차, 짧은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여전히 모자란, 덩치만 큰 어른으로 살아왔음을 성찰하고 고백하며 지냅니다.
안식년 동안 ‘한국 천주교 성지 순례’ 책자에 수록된 167곳의 순례지를 방문하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평신도가 이 길을 완주하고 축복장을 받는 걸 알게 되면서 사제인 저도 도전해 보고 싶었습니다. 한 달 전, 100번째 순례지 방문 후 이제 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완주한 선배들이 얼마나 대단한 수고와 체험을 했을지 존경스러울 만큼 쉽지 않은 여정입니다.
혼자 지내다 보니 순례 중에 ‘나 홀로 미사’를 드리지만, 그래도 주일이면 그날 머무는 곳의 가까운 성당을 찾아 신자석에서 ‘함께하는 미사’의 소중함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재미난 경험도 합니다. 어느 본당의 수녀님은 저를 성가대에 데려가고 싶어 했고, 어느 본당의 자매님은 성경 공부반에 들어오라 권유했고, 어느 본당의 신부님은 미사 후에 먼저 나와 인사를 하면서 ‘혹시 우리 쪽 사람 아니냐?’며 미사 중에 제가 이쪽 사람인 걸 감으로 눈치채셨다는 등 사제 복장을 갖추지 않으니 여러 상황을 겪습니다.
주일헌금도 매주 봉헌하는데, 제단에서 공지할 때는 몰랐던 2차 헌금이 왜 그리 자주 돌아오는지 가끔 헌금의 액수를 줄일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어느 날은 성당과 거리가 멀어 여유 있게 출발했는데도, 길을 헤매거나 주차할 공간을 찾지 못해 미사에 늦어 신부님에게 꾸중 듣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으로 미사에 참여한 적도 있었습니다. 지면으로 다 공유하지 못하지만, 신자들의 불편한 마음과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조금이나마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 제가 그동안 제단 위에서, 그리고 본당 신부로서 우리 신자와의 공감 능력이 얼마나 부족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사랑은 주님의 공감 능력에서 시작됨을 배웁니다. 주님께서는 이방인, 과부, 고아, 가난한 이를 포함한 모두의 상황을 공감했기에 그들을 지키고 사랑해 달라고 계명으로 남깁니다. 이는 누군가가 당신 자녀에게 상처 주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계명을 배우고 가르친 제가, 지금까지 하느님이 맡기신 어린 양들을 제단 위에서만 내려다봤으니, 요즘 제단 아래에서 깨우친 계명의 시작점(평신도와 공감)을 놓쳤던 겁니다.
제단 아래로 내려가 눈높이에 맞춰 형제자매를 깊이 들여다봐야 공감할 수 있고, 그제야 제대로 사랑하게 됨을 매주 신자석에서 배웁니다.
여러분도 서늘해질 차가운 공기 속에 이웃들과 공감하며 따뜻한 가을 보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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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어제 하루, 여러분은 대화 가운데서 혹은 책을 읽는 동안 그리고 방송매체를 통해서 몇 번이나 ‘사랑’이라는 단어를 표현했거나 들으셨나요. 사랑이란 단어는 분명 너무나 아름다운 단어이지만, 또한 사랑은 너무나 흔한 단어가 되어버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역설적으론 사랑하며 살지 않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분명 사랑에 대한 뿌리 깊은 열망을 품고 있는데도 자꾸만 다른 것들을 더 우선시하고 중요시하며 살아간다는 점입니다. 주어진 시간은 분명 한정되어 있지만, 많은 시간을 거의 다 명예, 재물, 권력 혹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을 달성하기 위해 에너지를, 시간을 소진하고 소모하며 살아갑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 15,13)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막시밀리아노 콜베 성인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려달라고 울부짖던 한 명의 수인을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걸었던 분이십니다. 성인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극적으로 살아난 그 사람의 이름은 ‘가죠프니체크’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훗날 자신을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걸으신 콜베 성인의 시복식에 참석하게 되었고, 영광스럽게 교황 바오로 6세도 알현하게 되었는데, 그 알현의 자리에서 가죠프니체크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고결하신 콜베 신부님께서 보잘것없는 저를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가시어 제가 그분 죽음으로 덤의 생애를 살게 되었는데, 신부님의 숭고한 죽음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하여 훗날 그분을 뵙기가 죄스럽습니다."
‘가죠프니체크’가 콜베 신부의 희생으로 살아남은 사람이라면, 우리는 사도 바오로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고”(에페 1, 7)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 많은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가죠프니체크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돌아가신 성인을 생각하면서 성인의 죽음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하고 있음을 죄스럽게 느끼는 것 이상으로, 그보다 더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서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이중 계명이 모든 계명의 으뜸이며 요약이다’라고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이중 계명의 실천 여부가 마지막 심판의 유일한 기준으로 제시할 정도로 그 중요성을 분명히 가르치시고 강조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그리스도인은 그러기에 마더 데레사 성녀가 평생토록 지키고 살려 했던 서원, 곧 "너 자신의 집에서 사랑을 전파하라. 사랑이 시작되어야 할 곳은 바로 거기니까.라고 했듯이, 먼 곳으로 가서 사랑을 실천할 이유가 없으며, 세상의 단 한 사람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 곧 ‘그 이웃’이 바로 ‘모든 사람’이며, 또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며 수단이기도 합니다. 경험적으로 볼 때 먼 곳에 있는 사람보다 가까운 사람에 대한 사랑은 깨지기 너무 쉽습니다. 그래서 항상 사랑에는 구원의 손길 곧 하느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퍼줄수록 더 늘어나는 법이며 또한 사랑할수록 그 사랑은 점점 더 순화되고 더 순수해져 갑니다. 그러기에 어떤 분은 사랑은 자기 할머니 집의 ‘우물과도 같다‘고 표현하더군요.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사랑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사랑해’라고 표현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몸짓이나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일찍이 야고보 사도 또한 이렇게 권고하셨습니다.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 2,14.17)
성 아오스딩은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도 사람도 있다고 가르칩니다. 사랑이 없다면 무슨 선한 것이 있겠는가? 그래서 성인은 강조합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이것이 성인의 삶을 이끌었던 주된 동기였습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며, 하지 못합니다. 사랑이 있어 마음에 기쁨과 평화, 호의와 선의, 온유와 절제가 있는 사람은 결코 사악하고 거짓된 생각을 품지 않습니다. 이는 결국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그 사람을 결정한다.는 성인의 그리스도교적 존재론을 잘 표현한 것이라 봅니다.
『사람이 왜 사는지 해답을 찾지 못해도 살아가지만, 누구 때문에 살아가는지 해답을 찾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다.는 이태리 속담이 있습니다. 사람이 왜 사는지 혹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몰라도 살아갈 수 있지만 사랑할 대상을 찾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다는 말씀은 오늘 우리가 들은 예수님의 이중 계명을 통해서 분명히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지 분명해졌으며, 이중 계명을 지키고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우리의 행복이며 존재 이유입니다. 예전 J.K 김동욱이 <불후의 명곡>이란 음악 프로그램에서 불러 화제를 모았던 '백만 송이 장미'라는 노랫말이 참으로 제 마음에 잔잔하면서도 깊은 감동을 주며 남아 있습니다. 아래 노랫말을 천천히 음미해 보시면서 주일 행복하게 보내십시오.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어오라는, 진실한 사랑을 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 나라로 갈 수 있다네."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사랑이신 하느님을 닮은 존재이고, 하느님을 닮은 만큼 그 사람의 삶은 사랑으로 충만하리라 봅니다. 사랑으로 충만한 만큼 그 사람은 이미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살고 있는 것이며, 삶이 다하는 순간 그 사람은 하늘나라로 들어가 영원한 사랑의 자리에서 사랑이신 하느님과 하나 되리라 믿습니다. “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22, 37~40) ‘저의 사랑이시며 저의 생명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듯 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도록 오늘 당신 사랑안에 머물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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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은 사랑할 때>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뵙고자 한다면 사랑해야 합니다. 이 시간 사랑함으로써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진리를 깨우치고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얻기를 기도드립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참되기 위해서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사랑하면, 상처를 입고 자기를 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성 마더데레사) 다시 말하면,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의 행위가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십시오. 어렵고 힘들지만, 사랑의 절정인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띠노).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더 얻게 됩니다. 내 방식의 사랑을 고집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인간으로 오셨듯이 우리도 눈높이 사랑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노래 한 곡 불러드리겠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도 교만도 아니하며. 사랑은 모든 것 감싸주고, 바라고 믿고 참아내며 사랑은 영원토록 변함없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이 세상 끝까지 영원하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의 말씀을 노래했습니다.
자! 그러면 고린도 전서 13장의 말씀에 견주어서 우리 사랑의 정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오래 참습니다. 나는 친절합니다.
나는 시기하지 않습니다.
나는 자랑하지 않습니다.
나는 교만하지 않습니다.
나는 무례하지 않습니다.
나는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나는 성을 내지 않습니다.
나는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나는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어떻습니까? 부족함을 알았으면, 채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22,37)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22,39)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성 베르나르도) 일상생활 안에서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어른이든 어린이든 약한 사람이건 힘이 센 사람이건 할 것 없이 누구나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주신 예수님을 알아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던 예수님을 만나야 비로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4,7-8) 하느님과의 친교가 깊으면 깊을수록 이웃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크고 거창하게 사랑하려 하지 말고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일상 안에서 사랑할 소재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때로는 친절로, 때로는 온유로, 밝은 미소로,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으로, 청소하는 것으로, 설거지를 도와주고, 환자를 방문해 주고……어떤 의견에 공감해 주는 것으로… 상대를 존중하며 인정해 주고, 칭찬의 말 한마디로……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지금, 미루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사랑할 기회는 너무도 많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많이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제대로 만나고 그 만남의 기쁨도 이웃에게 전할 수 있길 바랍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도하지 않고서는 항구하게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 해야 합니다. “그분의 뜻을 알아듣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분의 뜻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분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마더 데레사) 그러므로 먼저 기도 하십시오. 그리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우리 인생의 참된 가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무엇을 이루는 게 아니라 사랑은 그 사랑을 지켜낼 때 가치가 있습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새로워지길 바랍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과 하나가 되면서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착각입니다. 뿐만아니라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착각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랑의 이 두 차원은 함께 결합되어 그리스도의 제자를 특징짓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갈라 놓으려는 착각이 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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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갑곶성지에 있을 때, 손을 자주 다쳤습니다. 성지 바깥일을 하다가 나무에 찔린 적도 있고, 요리하다가 칼에 베인 적도 있습니다. 강화도 시골길을 자전거 타고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 손을 다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책을 읽다가 책에 베인 적도 있지요.
올 초부터 인천 송도에 위치하고 있는 성 김대건 성당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에는 그렇게 손을 많이 다쳤었는데, 이곳에서는 다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갑곶성지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갑곶성지와 달리 이곳에서는 손 쓸 일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방 일도, 또 바깥일도 하지 않으며, 자전거 도로는 잘 되어 있어서 넘어질 일도 없었습니다.
손을 많이 다치는 이유는 손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친다고 손 사용하는 것을 멈춰야 할까요? 아닙니다. 손 사용을 멈출 수 없으니 조심할 뿐입니다.
마음을 다친 분을 종종 만납니다. 어쩌면 이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마음을 많이 쓰기 때문에 마음을 다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처받았다고 마음 쓰는 것을 멈추는 것이 옳을까요? 다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은 써야 합니다. 멈추는 것이 아니라 조심하면서 계속해서 마음을 써야 지혜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사랑 실천하는 데 써야 합니다. 그 과정 안에서 상처받는 것이 싫겠지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렇게 마음을 써야 합니다. 당연히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사랑하는 마음을 크게 보십니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마음을 많이 쓸수록 그만큼 다칠 확률이 높아집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에도 더 가깝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에는 365개의 금령과 248개의 규정이 있었습니다. 이를 모두 외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또 이를 지키기도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특히 이를 지켜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데, 알지도 못하고 또 지키기도 힘드니 구원의 길에서 제외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쉬운 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바로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이 사랑을 마음에 담고, 이 사랑을 실천하면서 마음을 써야 합니다. 물론 아픔과 상처가 가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그만큼 가까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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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롯한 사랑>
마태오 22,34-40 (가장 큰 계명)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오롯한 사랑>
님께서
오롯한 사랑으로
나를 빚으시어
이렇듯
사랑으로
내가 있기에
나를
빚으신 님을
오롯이 사랑하고
나를
빚으신 님을
오롯이 사랑하기에
님께서
빚으신 나를
오롯이 사랑하고
님께서
내게 주신 이웃을
오롯이 사랑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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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자비하신 하느님의 무자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자비하신 분이시며, 그러므로 우리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이웃에게 무자비하면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무자비한데도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우리에게 자비하시겠습니까?
오늘 탈출기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 된다. 너희가 그들을 억눌러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들어줄 것이다. 나는 자비하다.”
그러므로 힘없는 이들에게 무자비한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무자비하십니다. 힘없는 이들의 부르짖음을 무시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편애가 아니고, 하느님의 사랑은 정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사랑은 편애가 아닙니다. 부자만 사랑하시고 가난한 사람은 사랑하지 않으시지 않고, 부자라고 더 사랑하시거나 가난하다고 덜 사랑치 않으시며, 반대로 가난한 사람만 사랑하시고 가난하다고 더 사랑치 않으십니다.
지금도 그런 면이 있지만 전에 저는 부자를 좋지 않게 보고, 가난한 사람은 거의 무조건 편들고 도우려는 면이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닮으려는 그런 측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는 고상한 자기 만족감의 차원이 있었고, 부자들에게는 제가 우위를 점하지 못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도움을 통해 우위를 점하는 교만 차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필요로 하고 청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자비하시고 그 사랑은 똑같습니다.
다만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 사랑을 필요로 하고 청하는 데 비해 부자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은 편이지요.
다음으로 하느님의 사랑은 정의의 사랑입니다. 불의한데도 괜찮다고 하시는 사랑이 아닙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말씀하신 대로 불의한 사람에게는 불의에서 돌아서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자비이고, 불의에서 돌아서도록 불의에 대해서는 벌을 내리시는 것이 자비인데 그때는 자비하신 하느님도 무자비하십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무자비입니다. 이것이 또한 무자비하신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이 자비를 제대로 알고 실천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듣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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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여정>
-사랑의 전사, 사랑의 학인, 사랑의 형제-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시편105,3-4)
오늘 입당송 시편도 은혜롭습니다. 방금 우리는 하느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화답송을 노래했습니다.
“하느님, 내 힘이시여, 내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수도사제 생활, 만34년 참 많이도 강론에 인용했던 주제가 ‘사랑’입니다. 사랑에도 간절해야 합니다. 사랑은 ‘감상하라’ 있는 것이 아니라 ‘고백하라’, ‘살라’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삶’을 살라고 ‘사람’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람의 정의입니다. 언제 들어도 마음 설레게 하는 사랑이란 말마디입니다.
하루하루 사랑하라 하느님께 주어지는 선물의 하루입니다. 사랑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인생, 미워하고,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고, 아파하고, 걱정하고 지내기엔 너무 억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그날이 아닌 오늘 지금 여기 가까이에서부터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인생 허무하지 않습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삶의 의미이며 모두입니다. 마지막 심판도 사랑에 의한 심판입니다.
인생 무지에 대한 답도, 인생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사랑밖에 길이 없습니다. 사랑밖에 답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 사랑에 목말라, 하느님 사랑에 배고파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사랑의 선물이 저는 감히 사랑의 성체성사 미사라 말하고 싶습니다. 도대체 미사없이, 하느님 없이, 예수님 없이, 이 삭막한 광야인생 무슨 맛으로, 무슨 기쁨으로, 무슨 재미로 어떻게 살아갈까 싶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사랑이야기는 끝이없습니다.
가을은 기도의 계절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에, 10월은 묵주기도 성월, 11월은 위령성월 말그대로 기도의 계절입니다. 그러다 보면 한해도 훌쩍 떠나버립니다. 기도의 계절에 이어 수확의 계절입니다. 저는 여기에 하나를 더 붙입니다. 산많은 대한민국 어디서나 황홀한 단풍사랑으로 불타오르니 “사랑의 계절”, 얼마나 멋집니까? 기도는 사랑입니다. 기도의 계절은 저절로 사랑의 계절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가을에는 시의 계절이라 할만큼 시도 유난히 많습니다. 예전에 써놨던 두편의 시를 나눕니다.
“가을엔 이쁘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
모두가 이쁘다
작은 풀잎, 나뭇잎들,...
작은 것들 하나하나도
사랑으로 타오르는 단풍되니
모두가 이쁘다”-2000.11.16.
“이 좋은 가을날
산에 갈 수도 없다
산을 가져올 수도 없다
아예 산되어 살기로 했다
단풍물든 장엄한 가을산으로
사랑하는 이여
놀러오지 않으렴?
넉넉하고 편안한 가을산
내 사랑의 품으로”-1999.10.26.
20년 훨씬 지난 시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찾아오는 손님들이 때로 빈손으로 왔다 미안해할 때 가장 많이 드리는 바로 다음 한마디입니다.
“형제님 자체가 참 좋은 선물입니다. 그런데 무슨 선물이 필요합니까? 형제님 자체가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언젠가 꽃 한송이를 가져온 분에게는 다음 같이 짧은 시를 써드리며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사실 마음 예쁜 사람은 꽃보다 더 예쁘고 빈손으로와도 반갑고 기쁩니다. 답은 사랑뿐입니다. 허무와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것도 사랑의 빛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하나의 사람을 통해 반사하는 하느님 사랑의 빛입니다. 이 미사분위기가 이처럼 밝은 것은 여러분이 주님의 반사체가 되어 주님의 빛을 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 여정은 사랑의 여정입니다. 날로 사랑 깊어지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평생 공부가 사랑이요 우리는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사랑의 학교”에 재학중인 사랑의 학인입니다. 아무리 사랑을 공부해도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일 뿐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평생 보고 듣고 배우고 실천해야 할 사랑공부입니다. 평생 사랑의 학인에 이어 평생 사랑의 전사인 우리들입니다. 사랑의 학교에 이어 사랑의 전쟁입니다. 영원한 현역의 사랑의 전사인 우리들 역시 죽어야 끝나는 사랑의 영적전쟁입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온힘을 다해 사랑의 전투를 해야 하는 평생 사랑의 전사인 우리들의 신원입니다.
다음은 평생 형제로, 사랑의 형제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하느님 가정내의 한 형제자매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신원입니다. 사랑의 여정앞에 반드시 놓아야 할 말마디가 “투게더together”, 즉 “더불어”입니다. 그러니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사랑의 여정입니다. 평생 사랑의 학인에 학우애學友愛가, 평생 사랑의 전사에 전우애戰友愛가, 평생 사랑의 형제에 형제애兄弟愛가 저절로 따라 오기 마련입니다. 이게 바로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의 삼중신원입니다.
무슨 사랑입니까? 우리의 영원한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명쾌하게 밝혀주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믿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는 사랑의 의무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는 이와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사랑할 때 비로소 행복한, 자유로운, 부요한 사람입니다. 사랑할 때 영혼 건강, 정신 건강, 마음 건강입니다. 만병통치약이 사랑이요 만병의 근원이 사랑 결핍입니다. 끊임없이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 자존감 높은 사람이요 존엄한 품위의 기품있는 사람입니다. 사랑역시 적극적 의지의 선택이요 실행입니다. 온 마음, 온 목숨, 온 정신을 다하여 주 우리 하느님을 선택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결같은, 끊임없는 사랑의 훈련, 사랑의 습관입니다. 그러니 사랑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영적도식이 선택-훈련-습관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영성훈련과 습관화를 위해 여기 수도자들은 평생 날마다 바치는 사랑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구별할 수는 있어도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듯 온 마음, 온 목숨, 온 정신으로 일상의 삶을, 수행들을 사랑합니다. 저도 주님 사랑하는 온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진정한 하느님 사랑은 저절로 이웃사랑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이웃사랑은 물론 자기사랑, 자연사랑으로까지 연장됩니다. 하느님 사람의 진위를 검증하는 잣대가 이웃사랑, 자기사랑, 자연사랑입니다. 저는 이웃사랑에 반드시 자기사랑, 자연사랑을 추가합니다. 그리하여 사랑의 이중 계명은 사랑의 사중계명이 됩니다.
오늘 제1독서 탈출기는 이웃 사랑의 실례를 보여주는 약자 보호법입니다.
1.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된다.
2.너희는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된다.
3.너희가 내 백성에게, 가난한 이에게 돈을 꾸어주었으면 그에게 채권자처럼 행세해서도 안된다.
그리고 주님은 못박듯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자비하다.”
주님은 친히 약자들의 보호자되심을 확언하십니다. 참으로 약하고 병든이들의 배경이 되어주시는 하느님을 생각한다면 주님을 대하듯 이들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루가복음중 주님의 평지설교의 결론같은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평생 주님을 닮아갈수록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여정은 예닮의 여정, 하닮의 여정이 됩니다. 날로 주님을 닮아가고 있는 자비의 얼굴인지 주님 거울에, 미사에 거울에 비춰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이 회개와 사랑입니다. 하느님 앞에 회개 없이는 겸손도, 사랑도 없습니다. 늘 새로운 시작도, 늘 새로운 사랑도 회개를 통해 가능합니다. 사랑의 여정과 함께 가는 회개의 여정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테살로니카 신도들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신뢰가 깊은 울림을 줍니다.
“여러분은 환란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여러분은 어떻게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 계신 참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는지, 또 여러분은 어떻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그분의 아드님,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게 되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우상들을 말끔히 털어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 계신 참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 바로 참 좋은 회개입니다. 날마다 끊임없는, 한결같은 회개를 통해 오롯한 마음, 오롯한 눈길로 오시는 주 예수님을 맞이하는 우리들이요, 이런 회개의 은총으로 날로 순화純化되고 성화聖化되고 심화深化되는 우리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전사가, 주님의 학인이, 주님의 형제가 되어 “사랑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주님은 살아 계시다! 나의 반석 찬미받으시리니, 내 구원의 하느님 드높이시다.”(시편18,4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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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 22,36)
<나의 이웃은?>
오늘 복음(마태22,34-40)은 '가장 큰 계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렇게 묻습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율법 교사는 '가장 큰 계명 하나가 무엇인지?'를 예수님께 물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두 개의 계명'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22,37)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22,39-40)
'하나'를 물었는데, '둘'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하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이웃은?'
'나의 이웃은 가까운 내 주변에' 있습니다. 내 주변에 '예수님과 동일시되는 사회적 약자들'이 있습니다. '나의 가족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보다 하느님의 뜻에 더 잘 순종하는 자연의 피조물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내가 사랑해야 할 '나의 이웃들'입니다.
나의 이웃들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이고, 이 사랑이 바로 '죽지 않고 살아있는 사랑'입니다.
더 힘주어 나누고 싶은 것은, '나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나의 가족들을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의외로 나의 가족 안에 냉담자들과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더 사랑합시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다가가고 그렇게 그들을 사랑합시다!
'오늘 참사 1주기를 맞이한 이태원 희생자들(154명)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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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n_d199AZg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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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 37)
함께하는 사랑이
가장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단 한번도
우리 주
하느님을
제대로
사랑한 적이
없음을 가장 아프게
성찰합니다.
밥이 되어 오신
하느님을
피와 살을
나누시는
하느님을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이렇듯
중심을 헛짚으며
살았습니다.
삶의 중심이
하느님 사랑이며
하느님 사랑이
삶의 완성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삶이란
가장 중요한
하느님 중심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랑의 힘은
더욱 강해집니다.
삶이란
하느님 사랑만을
붙잡고 살아내야
하는 사랑의
참된 여정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우리를 익어가게
합니다.
목숨을 거시는
하느님 사랑을
뜨겁게
만납니다.
그래서 사랑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생명의 시간은
사랑의 시간입니다.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진심으로 소중한
사랑을 나누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입니다.
사랑을 잃으면
하느님도
잃게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아직도 삶이
신비로운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그 자체로
가장 좋은
은총입니다.
가장 좋은
사랑을 나누는
은총 가득한
사랑의
주일입니다.
온 마음을 다하고
온 목숨을 다하고
온 정신을 다하며
만나게 되는
사랑의 가장 좋은
기쁨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은
모두 하나의
사랑으로
연결됩니다.
사랑으로
생명의 길을
여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삶을
따르는
주일 아침입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하느님을
알게 되고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법이 아니라
밥이며
계명보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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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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