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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무개한 입사 시험"
일본전산은 1976년 신입 직원을 뽑으면서 아예 이력서를 보지도 않았다.
이력서는 기본 인적사항을 확인하는 용도로만
쓰였고,
면접은 글씨를 읽고 쓰고 말을 알아듣고 자기 의견을
표현할 줄 아는 정도면 무조건 통과였다.
대신 '일본전산만이 할 수 있는 시험 과목'을 새로
만들었다.
첫째는 '큰 소리로 말하기'시험이다.
목소리가 큰 것은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고,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는 반증이다.
상사에게 보고할 때도 일처리를 제대로 한 사람은 목소리가 자신만만하고 크다.
반면, 꼬투리라도 잡힐까 봐 지레 겁을 먹은 사람은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그래서 짧은 문장을 준비해 두고 지원자들에게 순서대로 읽게 한다.
물론 '큰 소리로 읽어야 한다.'는 요구사항은 알려 주지 않은 상태.
"이번에 일본전산 신입 사원으로 입사한 아무개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두 문장밖에 되지 않지만, 면접관들의 날카로운 눈에는 그 사람이 자라왔던 배경,
특유의 습관, 말버릇 등이 걸려들게 마련이다.
두 번재로 일본전산이 실행했던 입사 시험은 '밥 빨리 먹기'였다.
응시자들을 모아 놓고 음식점에서 특별히 주문한 도시락을 제공했다.
도시락 밥은 설익은 데다, 반찬은 말린 오징어, 멸치볶음, 콩자반 같은 씹기 고약한 것뿐이었다.
당연히 응시자들은 미간을 찡그렸다.
가장 빨리 먹은 순서대로 서른세 명을 무조건 합격시켰다.
밥을 빨리 먹은 사람은 일처리도 빠르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런 유형은 대부분 결단력과 동작이 빠르며 일하는 속도도 빠르다.
더불어 위가 튼튼해서 소화도 잘 시킨다.
즉 건강한 신체를 포함해 갖춰야 할 기본기는 다 갖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세 번째 시험은 '화장실 청소'였다.
응시자 중에는 심한 모욕감을 표현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전산의 생각은 다르다.
밑바닥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어야 모든 일을 잘할 수 있다는 것.
밑바닥을 경험하지 못하면 나중에 관리자로 성장했을 때
부하 직원들을 통솔하거나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들의 지론이다.
어찌 보면 상식을 파괴한 시험이지만 직원 채용이나
교육 방법을 두고 고뇌하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바다.
경영자의 능력이란 결국 사람이나 사물의 표리를 꿰뚫어볼 수 있는 혜안이다.
그런 면에서 이들의 경험담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준다.
"배운대로 아는대로 살아가시길 ..."
근래에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뉴스는 자살이 늘고 있다는 것일
것이다.
이 자살에는 연예인도 있었고 주부도 있었고 고위 공직자를 지낸 사람도 있었다.
순식간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 죽음들의 공통점은 자살, 말 그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그들 이전에도 그런 죽음은 항상 있었다.
갑자기
그런 일들이 생긴 것은 아니다.
다만 그때는 특별한 이슈가 없었기에 그냥 그대로 묻혀 지나갔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눈길을 끈
그들의 죽음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자살이라는 형태의 죽음이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유명인의
경우였다.
연예인이거나 사회적 이슈에 관련된 사람일 경우에만 그랬다.
최근 잇달아 이어진 사람들의 죽음이 주목을 받는 것은
유명 연예인의 죽음이 있은 이후였기 때문이다.
그 개인적인 일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그 사람이
그만한 사회적 지명도를 가졌을 경우의 일이다.
그러나 철저히 개인적인 죽음에 있어서 사회적 지명도는
세간 사람들의 문제일 뿐이고 죽음을 택한 개개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
개인들에게는 단지 죽음이라는 똑같은 일만 있을 뿐이다.
그 철저히 개인적인 길을 선택한 이유도 철저히 개인적이다.
어떤 사람은 세상
사람들의 악소문에 시달렸고,
세상의 시선은 싸늘하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로 열심히 살아라.
그러나 죽음에 눈을 돌린 사람은 그것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사고의 전환이 생기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잠시만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는 자라면서 참 많은 것을 배운다.
초등학교에서 시작한 배움은 스무 살이 넘도록
학교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그것은 참 단순한 가르침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배운 것 중에서 많은 것을 꺼내어 사용한다.
그것은
학교에서 배운 것일 수도 있고, 어른들에게 들은 것일 수도 있고,
아이들에게 배운 것일 수도 있다.
죽음을 택한 사람들이, 배운대로 그리고 상식대로 했다면
그들은 그런 선택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혼을 하고 두 명의 자녀와 함께 살던 사람에게 죽음이 가장 급한 일이었을까.
이제 그
아이들은 누구와 살아야 할까.
단순히 생각해봐도 그것은 아닐 것이다.
신발이 작아 발이 아프다던 아이들에게 신발을 사주지 못해
미안했던 주부가 택한 죽음은 제대로 된 것이었을까.
새 신발을 사지도 못하는 아이들은 이제 발이 아프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엄마도 남지 않았다.
그녀에게 좋은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뇌물 사건에 연루 혐의를 받고 있는 고위공직자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자신의 결백에 대한 항변이었다 해도 결과는 참담하기만 하다.
죽음은 철저히 개인적이지만 결코 개인적이지 않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그들의 죽음에 세상의 시선이 싸늘한 이유는 그것이다.
죽음의 선택은 개인적이지만 결과는 개인적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시선은 싸늘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이유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배운대로 상식대로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배운대로라면 그들은 목숨을 스스로 버리지 말았어야 한다.
배운대로라면 그들은 힘들더라도 아이들과 함께 사는 방식을 택했어야 하고,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싸움을 해야 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행위는 누가보아도 납득하기 어렵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은 세상살이가 힘들다고 한다.
사실이 그렇다.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음은 누구나 느끼는 일이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많은 고민을 한다.
이럴 땐 어떻게 할까,
저럴 땐 어떻게 할까.
그런 선택의 길에서 사람들이 의지하는 것은, 알고 있는 것과 배운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알고 있는 대로, 배운 대로 선택하지 않는다.
복잡하고 어려운 세상살이에서 옳은 선택은 단순하게 사는 것일 수도 있다.
배고플 때는 무언가를 먹고, 피곤할 때는 몸을 쉬게 한다.
단순하지만 그것은 가장 현명한 선택이다.
바보 같은 단순함 속에 현명한 세상살이가 있다.
"진딧물-전사가 되다!"
"세부적인 것에 집착하라"
19세기 미국 과학자 루이스 애거시.
그는 빙하, 물고기 화석, 살아 있는 물고기의 전문가였다.
그는 생명의 기원과 여러 과학 분야에 영향을 끼친 연구들로 인해 유명해졌다.
대학원생들이 애거시의 수업을 듣고 싶어 찾아온 첫날,
애거시는 작고 평범한 물고기 한 마리가
담긴 그릇을 학생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러고는 학생들에게
"물고기를 해치지 말고, 그것에 관한 글을 읽거나
누구와 상의하지도 말고 자세히 관찰만 하라."고 말했다.
대학원생들은 그 과제가 특이하긴 하지만 별것 아니라고 여겼다.
한 두 시간 뒤 그들은 관찰한 내용을 보고하기 위해 애거시를 찾았지만
그는 다시 해 오라며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러기를 몇 차례, 결국 그들은 애거시가 물고기 한 마리를
몇 주 동안 관찰하기만을 바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생들은 지시대로 묵묵히 관찰만 하면서 놀라운 결과를 발견해 애거시를 찾아갔다.
"선생님, 저희는 물고기를 관찰하면서 엄청난 지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비늘의 일정한 모양, 이빨의 정확한 배열, 눈의 색깔 등
어떤 책의 지식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애거시는 학생들에게 세부적인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와,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연구하는 자세의 중요성까지 깨닫게 해 준 것이다.
건강한 집착, 애착심은 복잡하고 거대한 문제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기대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사물을 보는 힘을 준다.
"자수성가 성완종이 문어발 인맥 구축한 방법은"
‘성완종 리스트’ 파문을 보는 충청인의 마음은 복잡하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같은 충남 출신인 이완구 총리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인 양상으로 상황이 전개되면서
당초 그에게 온정적이었던 여론이 비판적으로 바뀌어가는 모습이다.
성완종 전 회장이 4월 9일 자살하며 메모를 남겼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만 해도 두 가지 감정이 혼재했다.
‘어머니 옆에 묻어달라’는 유서가 알려지면서 충청권의 중장년층 이상은
“성완종이 그렇게 효자였다면서”라며 안타까워했다.
젊은 세대는 그의 자살에 비판적이었다.
대체로 “잘못한 거 없으면 살아서 끝까지 싸워야지 죽긴 왜
죽어”였다.
성완종이라는 이름은 충청권에서는 알려졌지만
타지역에서는 덜 알려졌었다.
충청권의 그에게 온정적 시선은 그가 입지전적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의 과거사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자.
그는 충남 서산시 해미면 홍천리 출생으로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상경했다.
그가 서울로 무작정 상경하게 된 배경에는
피눈물 나는 가족사가 숨어 있다.
그는 여러 차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는 1951년 충남 서산에서 4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서산에서 유통업을 했다.
서산에서 쌀, 보리 등 곡물을 수집해 배에 싣고 인천으로 가 팔았다.
평탄했던 어린 시절은 초등학교 4학년 때 깨졌다.
어느 날 아버지가 인천에서 여자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그리고 얼마 후인 1964년 12월 겨울날 4형제와 어머니는 집에서 쫓겨났다.
어머니와 4형제는 이웃집 사랑방에서 며칠을 기거했다.
어느 날 밤 어머니는 4형제를 깨워 손에 인절미를 쥐여줬다.
어머니는 그날 밤 서울로 식모살이를 하러 갔다.
이후 완종은 동생들을 데리고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렇게 1년여가 흘렀다.
어린 완종은 엄마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완종은 외삼촌 집에서 서울에 기거하는
어머니 주소를 알아내 무작정 상경했다.
영등포역에서 내린 완종은 이삿짐센터를 찾아
어머니가 살고 있는 주소를 들이밀었다.
어렵게 어머니를 만났지만 식모살이를 하는 어머니는
아들을 거둘 형편이 아니었다.
이때부터 완종의 서울 생활이 시작됐다.
완종은 어머니가 사는 집에서 가까운 교회에 잠자리를 얻었다.
새벽에는 신문 배달을 했고, 낮에는 광생약국에서
‘약 배달 소년’으로 일하며 돈을 벌었다.
밤에는 교회 부설 야학에서 공부를 했다.
완종은 신문 배달과 약 배달로 버는 돈을
꼬박꼬박 고향의 외삼촌에게 보냈다.
외삼촌은 이 돈으로 장리쌀을 놓아 알뜰살뜰 늘려
7년 만에 해미에 집 한 칸과 전답 1만㎡(3000평)를 마련했다.
잠잘 곳과 농사지을 땅이 생기자 어머니와 4형제는 눈물의 재상봉을 했다.
완종은 집안의 가장이었다.
완종은 돈을 벌기 위해 공사판을 돌아다니면서
화물운송 중개업에 눈을 떴다.
1974년 그는 성신화물 해미영업소
직원으로 들어가 화물차를 운전했다.
들소처럼 일하며 악착같이 저축했다.
1977년 그는 자신을 친아들처럼 아껴주던 사람에게서
건설업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는다.
서산토건 대주주가 농협조합장에 당선되면서
200만원의 소유 지분을 완종에게 넘겼다.
이게 건설업과의 첫 인연이었다. 그는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서산토건을 탄탄한 기업으로 키워 나갔다.
서산토건은 이어 대아건설을 인수했다.
대아건설 오너로 기업가의 길을 걸었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박수를 치는 대목이다.
그는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다.
기업인으로 성공한 그는 1991년 34억원을 출연해 서산장학재단을 설립했다.
누구보다 가정형편 때문에 공부를 못하는 설움을 잘 아는 그였다.
서산장학재단 이사장으로 그는 초중고 학생들에게
매년 20억원이 넘는 장학금을 수여했다.
지난해까지 장학금 혜택을 받은 이들은
2만5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산장학재단 역시 베풂의 철학을 실천하는 것으로 칭송받았다.
김평산 서산장학재단 부이사장은 지난 4월 12일 장례식장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장학금을 준 2만5000여명의 꿈나무들에게
바른길을 가도록 희망의 길을 열어주고자 했던
고인의 숭고한 삶의 가치를 하루아침에 산산조각 내고
죽음으로 몰고간 책임을 누군가는 반드시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2000년 충청포럼을 결성하면서 본격적으로
중앙 정치무대에 등장했다.
충청포럼은 알려진 대로 충청도 출신 정치인·관료·언론인으로 구성되었다.
‘성완종 메모’를 계기로 그의 인맥이 역대 정권과
여야를 넘나들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한마디로 그는 역대정권 모두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변변한 학연이 없는 그가 어떻게 이같은 인맥을 구축했을까.
충청포럼이 문어발 인맥의 저수지 역할을 했다는 게 정설이다.
충청포럼은 주로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강연회를 개최했는데,
강연자 중에는 고르바초프 구소련 대통령,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등 거물급 인사도 있었다.
그는 충청포럼 강연모임의 모든 경비를 15년간 혼자 댔다.
그는 충청포럼 소속 언론인에게 각별한 공을 들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많은 언론인들과 골프를 했다.
충청포럼은 세를 넓혀 전국에 10개 지부와
100여개 지회를 갖추고 있는 거대조직으로 성장해나갔다.
회원 수만 35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충청포럼의 주요 멤버를 보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 심대평 지방자치발전위원장, 박병석·홍문표·이명수 의원,
권선택 대전시장, 정진석·고흥길 전 의원, 오연천 전 서울대 총장이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충청포럼 창립 당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가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충청포럼 관련행사에는 빠지지 않을 정도로 공을 들였다.
반기문 총장과의 특별한 인연을 보여주는 대목은
반 총장의 친동생인 반기상씨가 경남기업 상임고문으로 7년 이상 재직한 사실이다.
2003년 대아건설은 경남기업을 인수하면서
그룹의 면모를 갖췄다.
이로써 대아그룹은 매출 1조2000억원대 그룹으로 급부상했다.
경남기업은 대아그룹의 주력 기업이 됐다.
충청포럼에 대해선 의견이 갈린다. 충청포럼이 세를 확장해 나가면서
일각에서는 성완종 개인의 정치적 야심을 위한 사조직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했다.
충청포럼을 함께 해온 한 인사는 “그는 학력 콤플렉스가 극심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정치적 야심을 키웠다”고 말했다.
충청포럼이 생기고 얼마 후 그는 자유민주연합(이하 자민련)에 입당한다.
경남기업 회장으로 있으면서 총재특보 명함을 가졌다.
결국 그는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자민련에
불법정치자금 16억원을 제공한 혐의로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2005년 특별사면을 받았다.
그는 행담도 개발비리 사건에도 연루되어 유죄를 받았지만
역시 2007년 다시 사면을 받았다.
일부에서는 자민련 총재특보를 정치입문으로 보지만 다른 시각도 있다.
그는 30대 시절부터 정치권을 기웃거렸다.
1980년 초반 민정당 재정위원으로 참여한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그는 2012년 선진통일당 소속으로 충남 서산·태안에서
1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보다 앞선 2004년에 거의 당선될 뻔하다 낙선한 경험이 있다.
2004년 총선에서 김종필 총재에 이어 전국구 2번을 받았다.
모두가 당선은 문제없다고 했지만 자민련 득표율이 예상보다 모자라 분루를 삼켰다.
성완종은 2012년 그토록 고대하던 금배지를
달았지만 2년 반 만에 국회에서 퇴출되었다.
2012년 총선 당시 자신이 이사장인 서산장학재단을 통해
지역단체에 1000만원을 기부한 게 선거법 위반이었다.
4월 13일 그는 서산시 음암면 도담리 어머니 곁에 묻혔다.
"300억짜리 인사"
한 은행에 임시직 청원경찰이 있었다.
그는 고객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딱딱하다는
지적을
받고 웃는 연습을 하기 시작 하였다.
많은 연습 끝에 밝은 미소를 소유한
그는
은행 입구에서 고객들에게 인사를 했고
그 모습이 고객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는 좋은 인상을 주었을 뿐만이
아니라 은행 업무에 서투른 노약자들을 도와주었고
은행 업무를 익히고 금융상품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고객 노트도 만들어서 고객을
관리하면서 고객의 인상과 대화 내용까지도
꼼꼼히 기록해 관리를 했다.
그는 여전히 70만을 받는
임시직이었지만
은행은 그 청원경찰로 인해 수신고가 몇 백억이 증가됐다.
그가 정직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고객들은
그를
정식으로 채용해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은행에서도 그의 실적을 무시할 수 없어서 그는 정식 직원으로 채용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잠간 뿐 은행이 합병되면서 퇴직 권고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내 이웃의 새마을 금고에서 특별 스카웃을 하여 그를
채용하였다.
그를 채용한 금고의 예금액은 80억원에 불과했는데
그가 온지 불과 몇 달 만에 260억원을 넘어섰다.
전에 근무하던 은행 고객이 그가 금고로 자리를 옮긴 것을 알고
예금을 금고로 대거 이동했기 때문이다.
"제가 한
일은 아무나가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다만 게을러서 하기 싫을 뿐이지요.
누구나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지 않기 때문에 못하는 것뿐이지요."
그는 300억의 예금 유치실적을 올렸다.
그가 바로 신화의 주인공 새마을 금고
한원택 지점장이다.
('행복한 동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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