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너구리가' 왔다. 진도 앞바다에 바람은 거세지고 물살은 빨라졌을 텐데, 몇몇 언론을 빼곤 '세월호'에 대한 관심을 거두는 판이다. 잊지 않겠다던 약속은 한낱 약속 뿐이었을까.
'세월호'만이 아니다. 승객과 화물을 쟁여 싣고 수평선 너머 낙토를 향해 바닷길을 헤쳐 가는 여정은 어디서나 보인다. 부산 강서구 서낙동강 일대를 개발해 국제산업물류도시로 만들겠다는 '에코델타시티' 사업도 그 중 하나다. 2012년부터 6년간 5조 원 이상의 사업비를 들여 8만여 명이 살 첨단산업, 국제물류, 연구개발 등 복합형 자족도시, 친환경 수변도시를 완성한단다. 하지만 그 덕에 13개 마을이 사라지고 주민들은 이주를 해야 한다. '21세기형 미래도시'의 청사진 앞에 빛바랜 기억으로 남은 그들의 삶도 잊힐 판이다.
그러나 지난 몇 달간 발품을 팔아 뒤져본 강서의 역사와 민속은 뜻밖에 찬연하다. 당대의 걸작 조명희의 '낙동강'과 김정한의 '모래톱이야기'의 성가에 값하는 "위대한 삶의 발자취"란 찬사가 아깝지 않다.
녹산을 제외하면 대저와 명지, 가락이 모두 강으로 둘러싸인 강서는 "메기 하품하듯" 홍수가 들던 섬이다. 여기에 삶을 부린 주민들은 우물에 스며든 소금기로 식수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강이 갈라놓은 마을을 오가는 교통편이라곤 나룻배가 유일했다. 주식인 감자가 떨어지면 여물지 않은 나락을 삶은 '찐쌀'이나 풋보리로 만든 '떡보리', 들에 자라는 '피깃대'와 민물고기, '갈게'로 배를 채워야했다. 그 위에 '노적봉'과 '순아도' 전설에 등장하는 왜구의 노략질과 구휼을 위해 만든 염전을 빌미 삼은 관리의 수탈이 그들을 괴롭혔다. 20세기 초반에는 염전과 농토를 빼앗은 일제가 농장과 군사시설을 만들어 한국인들을 함부로 부려먹었다. 그들의 수탈이 어찌나 심했던지 '상납청'이란 이름이 아직도 남아있는 마을도 있다. 강서에 변고가 생길라치면 섬이 운다 하여 '명지(鳴旨)'라 불렀다니 그 참상이 오죽하면 땅마저 울었을까.
그럼에도 강서인들은 갈대숲을 밀어낸 자리에 농토를 일구며 어기차게 살아왔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명지소금'과 '낙동김', '명지대파', '짭짤이토마토'가 모두 그런 근면의 소산인 특산물이다. 특히 '짭짤이토마토'야말로 강서인의 고난극복을 상징한다. 온도와 습도 모두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다 만들어진 게 그 특유의 달고 짜고 신맛이다. '노화(蘆花)'라 불리는 갈대 역시 보물이다. 강서인들은 이것으로 비와 삿갓, 울담, 지붕, 발을 만들었으며 소금 굽는 화목(火木)과 펄프의 원자재로 썼다. 그 갈대로 지붕을 이은 '새나래집'은 10년 풍상을 이겨냈고, 죽어서 관에 누울 때는 등을 받치는 보공이 돼주었다. 그 밖에도 강서에는 구민 전체가 모래밭에서 대회를 벌이던 '명지씨름'이 대대로 전해졌고, 추수를 끝내고 어른을 무동 태워 마을을 도는 미풍도 살아있었으며, 명지시장 윷놀이에는 전국에서 노름꾼이 모여들어 판을 키웠다.
그런 강서에 나룻배들은 하단장과 녹산장, 구포장, 덕두장, 가락장, 명지장을 오가며 신바람을 올렸고, 평강천과 삼차강을 건너온 나그네들은 순아포구에 모여 북새를 떨었다. 저 박목월의 절창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 "술 익는 마을"이 바로 이곳 아니었겠는가. 수확기에는 전국의 상인들이 돈을 짊어지고 몰려들어 마을에는 공동기금이 쌓이고 시장 상인회는 어엿한 주식회사가 되었다. 그 강서는 해방 후에는 귀환동포, 6·25동란기에는 피란민, 산업화기에는 도시빈민을 품어 안았다. 그러니 강서인들이 거드름을 피우며 내뱉는 "강서사람은 목청이 좀 된다"는 말도 전혀 흰소리는 아니다.
그 강서에 외부에서 불어 닥친 제방 건설과 재개발, 도시화의 변화는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도리어 그런 변화의 구비마다 주민이 떠나고 공동체가 해체되었으며 급기야 마을이 사라져갔다. 그린벨트 해제를 틈타 들어온 외지인들은 농업에 종사하리라던 애초의 약속과 달리 갖가지 얄궂은 사업으로 강서를 황폐화시켰다. 그런 변화를 수없이 겪어온 강서지만 이번의 '에코델타시티' 사업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것보다 충격이 클 듯싶다. 척박한 땅을 일구어 가까스로 삶의 터전을 만들어낸 주민들의 불만이 무시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땀과 눈물이 배어 있는 풍속과 전통마저 가뭇없이 사라질 판이다.
하기야 인간의 구원한 가치를 천명했다는 프랑스혁명도 18세기 현지에서는 여운이 오래 가지 않았다. 누구에게서나 그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무렵 어느 작가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그 혁명에서 무얼 했나요?" 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어 그는 단호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가장 나중까지, 그 혁명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을 기억하며 울겠습니다."
첫댓글 실천하는 인문학자! 감동이군요!
사라져도 마지막까지 기억하겠다.
...
옆에 있어도 잊고 사는 판국에.
그러나 간간히 떠오르면 ~~.
제목이 맘에 드는군요.
그럼요~~~
뭘 했든
무엇이였든 잊혀지고싶은 삶은 없는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