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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나는 물리치료사로 근무하며 퇴행성 질환을 겪고 있는 여러 노인 환자들의 삶을 가까이서 엿보았다. 이따금씩 나와 많은 유대감을 형성했던 환자가 사망하는 날에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질문했다. “잠시 후면 죽게 될 이 인생사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잘 사는 삶이란 뭐지? 마지막까지 잘 사는 삶은 뭐지?”
이 책은 우리가 마지막까지 잘 사는 삶을 살도록 필요한 모든 지혜들을 제공한다. 이 책을 통해서 그동안 내가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 뚜렷해져서 유익했던 부분도 있었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어 유익했던 부분도 있었다.
“젊어보이세요”라는 칭찬의 이면
첫째로, 노인의 가치를 알게 되어 유익했다. 흔히 이 세상에서 노인은 짐짝처럼 취급 당한다. 많은 노인분들이 우울을 겪는 큰 이유는 자신이 이 사회 및 가족들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 같고 더 이상 아무런 가치창출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 같기 때문이다. 설령 짐짝처럼 취급하며 공격하지는 않더라도, ‘안타깝게’ 여기거나 ‘약자’로 배려한다는 미명 아래 우리 사회는 은근히 노인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더 문제는, 노인분들은 그런 사회현상에 대해 슬퍼하면서도 본인들이 스스로 그런 사회현상을 강화하고 있기도 하다는 점이다. 젊어보이려고 애쓰면서 혹여 누군가로부터 젊어보인다는 칭찬을 들으면 고마워하며 좋아한다. 이것은 ‘늙은 것’이 열등하고 ‘젊은 것’은 우월하다는 전제를 본인 스스로 인정하는 꼴인 것이다.
난 이 부분에서 매우 찔렸다. 나 또한 병원에서 근무할 때 잘 꾸미고 온 노인환자를 보면 “우와~! 너무 아름다우셔서 저는 청년인 줄 알았어요.”라고 칭찬하며 유대감을 형성하려고 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우와~! 정말 아름다우시네요.”라고만 말했어도 됐었다. 노년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잘못은 여러 교회들 안에도 만연한 것 같다.
성경은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잠16:31),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욥12:12)고 말하며 노인, 나이 듦의 가치를 드높인다. 나 또한 성경적인 관점으로 돌아가야겠다. 늙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치기 보다는 지혜롭게 늙고자 노력해야겠다. 누군가에게 “젊어보이세요”라는 말로 칭찬하려고 할 필요가 없겠다. 나 또한 누군가로부터 “젊어보이세요.”라는 말을 들을 때 그리 기뻐할 필요가 없겠다.
청지기인 동시에 나그네
둘째로, 우리의 사생관에 대해서 성경은 상충하기 쉬운 두 가지 진리를 우리 안에서 융화시키라고 가르친다는 점이 유익했다. 한 편으로 우리의 생명은 신성하며, 다른 한 편으로는 죽음을 통과해야 진정 온전한 영적 삶을 살게 된다. 한 편으로는 죽음은 우리의 엄연한 원수이므로 대적해야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죽음은 패배한 원수이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한 편으로는 “어떻게든 살아야 해!”라고 말하는 것 같고, 다른 한 편으로는 “너무 살려고 발버둥 치지마!”라고 말하는 것 같다. 과연 성경은 상충되는 말을 하는 건가?
또한 우리는 청지기인 동시에 나그네이다. 청지기로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육체적 생명을 잘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런데 나그네로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 가고자 하실 때 미련 없이 우리 손에서 내려놓아야 한다. 청지기로서 우리는 안락사에 반대하며, 나그네로서 우리는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반대한다. 청지기로서 우리는 의료기술을 적극적으로 선용하며, 나그네로서 우리는 윤리가 결여된 의료기술의 남용을 경계한다.
우리는 두 가지 반대적인 측면에 대해서 매우 정밀한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역설이며, 상호대립이 아니라 상호보완이다. 저자는 “두 진리 사이의 긴장, 이것이 우리가 풀어내야 할 긴장이다.”고 말하지만 나는 이를 “긴장”이라고 부르기보다는 “하모니”라고 부르고 싶다. 마치 고음의 바이올린과 저음의 첼로가 하모니를 이루어 우리를 감동시키듯이, 마치 강인한 남자와 유순한 여자가 하나되어 아름다운 부부를 이루듯이, 마치 교감신경계와 부교감신경계의 작용이 조화를 이루어 건강한 신체를 만들어 주듯이 말이다. 정반대인 성질의 두 가지가 하모니를 이룬다.
나는 예전에 대학생 때는 청지기로서의 측면만 깊이 생각하며, 생명을 보존해야 할 인간의 책임성만 깊이 생각하며 연명치료를 긍정적으로만 보았다. 그것이 안락사와 무엇이 다른 지 잘 구별할 수 없었다. 흔히 생명권을 강조하는 기독교윤리 운동을 하며 안락사와 자살을 반대하다보면 자칫 무의미한 연명치료까지 긍정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물리치료사로 일하면서, 그리고 이 책을 통해 결정적으로 또 다른 측면을 보완할 수 있었다.
우린 분명히 청지기이다. 그러나 주인이 우리에게 일을 멈추고 오라고 명하실 때, 멈추고 주인이 계신 곳으로 가는 자가 되길 소망한다.
우리는 고난학교에 있다
셋째로,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선 고난을 기뻐해야 한다는 점이 유익했다. 인간 대부분은 “행복”을 쫓으며 “고난”을 피한다. 이 둘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 즉 고난 중에도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고난은 피해야 하거나 극복해야 할 대상처럼 간주된다. 그리스도인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고난을 막아주지 못하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고난을 허용하신 이유가 납득되지 않는다면 곧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고난에 대한 전혀 다른 시각을 가르친다. D. A. 카슨은 욥기의 핵심교훈을 이렇게 설명한다.
“고난은… 벌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을 길러주기 위한 도구일 수 있다. … 우리의 믿음을 확고히 하며 거룩함에 대한 열정을 키워주는 데 있다. … 풀리지 않는 신비는 단순히 신학적이고 지적인 차원에서 답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 크리스천들은 교만한 설명이 아니라 예배에서 하나님에 관한 질문의 답을 찾아야 한다.”
내가 물리치료사 생활을 하면서 여러 크리스천 노인 환자분들을 보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중 대부분은 기복신앙이셨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포기하지 않고 치료해달라고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치료해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딱 한 분의 할머니만은 질병의 고통과 다가올 죽음을 초연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지금 죽어도 괜찮고, 좀 더 살아도 괜차녀. 생전에 예수 믿게 된 것만으로도 은혜고 지금까지 산 것만으로도 은혜여. 한 선생, 너무 열심히 살지 말고 그저 예수 잘 믿으면서 살어.”
나는 “아름다운 죽음”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동안 이론적으로만 알다가 그때 처음으로 실제로 목격한 것이다. 어느 크리스천은 끝까지 생명을 보존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어느 크리스천은 생명을 거두어가셔도 좋다고 기도한다.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잠잠히 인정하며 이해할 수 없는 때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붙잡는다. 고난, 고통, 죽음을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자는 아름답게 죽는다. 그는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하다는 사실을 세상에 증명해보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다.
생각해보면 안락사를 하려는 자들도,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하려는 자들도 정반대의 행위 같지만 그 본질을 파헤쳐보면 둘 다 고난(혹은 죽음)에 대한 회피적 태도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락사는 신체적인 통증 혹은 삶의 고난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한 것이라면,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죄에 대한 형벌인 죽음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한 것이다. 고난과 죽음에 대한 바른 신학이 필요한 이유다.
우리는 고난학교에 있다. 우리가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기 때문이다. 고난은 우리의 인격을 성숙하게 만든다. 또한 우리가 고난을 기쁨으로 맞이할 때 남은 가족들은 큰 위로와 용기를 얻는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고난은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낸다.
한국교회에 웰다잉 교육이 시급하다
미국의 마지막 청교도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녀들에게 글씨 연습을 시킬 때 이런 문구를 적도록 했다.
“죽음보다 더 확실한 사실은 없다. 죽음 준비라는 위대한 일을 한시도 늦추지 마라.”
우리는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나는 물리치료사로서 환자의 죽음과 죽어감을 자연스레 접하면서 죽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든 생각은 나도 잠시 후면 죽는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 오늘은 그의 차례였다면 내일은 내 차례이다.
100년은 화살처럼 지나가며, 100억의 재산은 모래성처럼 무너진다. 죽음 앞에서는 부자나 빈자나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죽음 앞에서는 왕의 후손이든 노비의 후손이든, 범법자였든 자선사업가였든, 심지어 가족과 함께이든 혼자이든 그 어떤 차이도 무의미해진다. 돈, 명예, 권력, 심지어 가족들의 위로도 죽음을 앞에 둔 자에게 충분한 위로가 되어주지 못한다. 영원한 멸망이라는 거대한 실존적 문제 앞에 두려워 떨든가 허무함에 넋이 나가든가 둘 중 하나이다. “헛되고 헛되도다.”
그러나 유일하게 의미 있는 차이점이 한 가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인가 아닌가였다. 죽음을 앞에 둔 자가 만일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는 영원한 천국으로, 아니라면 영원한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이 차이 외에는 그 어떤 차이도 죽음 앞에서 무의미하다. 바로 이것이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죽음의 의미와 삶의 의미 말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게 했다. 죽음이 내게 말했다. 너는 곧 죽을 것이라고. 인생의 의미를 점검해보라고 말이다. 뒤이어 성경이 내게 말했다.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그리고 겸손하게 살라고 말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하나님께서 날 부르신 방식은 바로 죽음 앞에 서게 될 나에게 유일한 의미가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임을 깨닫게 해주신 것이었다. 그 후로부터 나는 Soli Deo Gloria & Coram Deo의 삶을 살기로 결단했다.
한국교회가 점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그것은 현상이고,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다. 자신이 비참하고 연약한 인간, 죽음에 처하게 될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자가 필요 없는 것이다. 한국교회에 시급한 것은 바로 죽음 교육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전적 타락' 교리, '심판과 지옥' 교리에 대한 교육이기도 하다. 모두가 곧 죽는다. 그 죽음의 위협이 매서운 속도로 모두에게 다가오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전능하심,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인정해야 한다. 창조주이자 구속주이신 그분께 철저히 굴복하는 자에게는 죽음이 더 이상 두려워보이지 않는다. 죽음은 이미 하나님께 패한 적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우리 삶에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 또한 결국 다른 모든 것들과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주는 수단일 뿐인 것이다. Memento Mori!
첫댓글 많은 위로가 되는 참 좋은 책인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