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월 새재사랑산악회] ♣ 전남 담양의 ‘금성산성’-순창 ‘강천사 계곡’ (10.21.)
* [산행] 담양 금성산성 들머리→ 보국문→ 충용문→ 동자암→ 내성 암문→ 동문[점심]→ 성곽 안부삼거리(하산길)→ 샘터→ 비룡폭포(비룡계곡)→ 거북바위(구장군폭포)→ 현수교(신선봉)→ 강천사(삼인대)→ 극락교→ 송음교→ 병풍바위(폭포)→ 도선교→ 주차장(하산 완료)→ 강천제(저수지)→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순창[손두부집]→[귀경]
▶ [프롤로그] 남도의 가을 햇살을 따라
☆… 시월은 상달이다. 온 천하의 초목이 긴 여름 동안 뜨거운 태양의 정기로 생장하여 그 결실을 맺는 시기이다. 그리하여 요즈음 들판에는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충만하기도 하는데, 시월은 연중 가장 하늘이 맑고 공기가 청정하며 주변의 모든 풍광이 그윽하고 아름다운 달이다. 오늘도 그 이름에 값하는 날, 눈부시게 청명한 날이다. 바야흐로 산야에는 물 고운 단풍이 들기 시작하여 계절의 아름다움을 찾는 발길이 길목마다 흘러넘친다. 우리 산우들도 남도의 비경, 강천사 계곡을 찾아 먼 길을 가는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오전 7시 40분, 서울 군자역을 출발한 우리의 관광버스는 경부선, 천안-논산선을 경유하여, 호남고속도로 장성J.C에서 최근에 개통한 고창-순천선 고속도로를 갈아타고 담양I.C에서 내렸다. 남도로 질주하는 도로의 연변에는 파란 하늘에서 쏟아지는 고운 햇살과 풍요로운 황금들판이 우리의 가슴을 넉넉하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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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나무와 시가문학(詩歌文學)의 본향인 담양(潭陽)
☆… 담양(潭陽)은 사시사철 푸른 절조가 살아있는 대나무의 고장이다. 담양에는 가는 곳마다 죽림이 울창하여 이 지역의 특성을 살린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대나무박물관>도 있다. <죽록원>은 우리나라 최고의 대나무 정원으로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탐방하고 있는 곳이다. … 그리고 무엇보다 담양은 조선시대 한국 시가(詩歌)의 본향이다.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꽃을 활짝 피운 바로 송강(松江) 정철의 고장이 아닌가. 광주호를 바라보는 ‘식영정’의 아름다운 풍광과 선비의 청빈한 삶을 노래한 <성산별곡>의 고장이요, 송강이 벼슬에서 물러나와 연군의 절절한 사연을 담은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의 산실이다. 그리고 그는 훈민가(訓民歌) 16수 등 70여수의 시조 작품을 남겼다. 그에 앞서 중종 때의 송순(宋純)이 이곳 담양에 ‘면앙정’을 짓고 그림 같은 산천의 풍경을 읊은 <면앙정가(俛仰亭歌)>를 짓기도 했다. 어디 그 뿐인가. 도학(道學)을 통한 이상 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조광조(趙光祖)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처형을 당하자, 그의 제자, 양산보가 성리학적 이상향을 꿈꾸며 지은 <소쇄원(瀟灑園)>은 우리나라 정자 중 가장 최고 자연정원으로 꼽힌다.
江강湖호애 病병이 깁퍼 竹듁林님의 누엇더니,
關관東동 八팔百백里니에 方방面면을 맛디시니,
어와 聖셩恩은이야 가디록 罔망極극하다. [원문]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질병이 되어,
은거지인 ‘죽림(竹林)’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임금님께서) 8백 리나 되는 강원도 관찰사의 직분을 맡겨 주시니,
아아, 임금님의 은혜 갈수록 그지없다. [현대문]
저 유명한 정철의 <관동별곡(關東別曲)>의 서두이다. 1580년(선조 13년) 강원도 관찰사로 등용되어, 나아가는 저간의 상황을 노래하고 있다. 여기서 ‘竹듁林님’이란 송강이 그 동안 벼슬에서 밀려나 풍월을 벗 삼으며 살고 있던 이곳 담양이다. 벼슬에 나아가기 전, 서울에서 태어난 정철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유배지인 이곳에 와서 당대 높은 학덕을 지니고 있는 김인후(金麟厚) 문하에서 공부하고, 고봉 기대승(奇大升)과 더불어 학문을 연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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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산성(金城山城)을 거쳐 이어져 나가는 호남정맥(湖南正脈)
☆… 금성산성의 주봉은 산성산(山城山 연대봉, 603m)이다. 이 산은 같은 산줄기인 강천산(剛泉山, 584m)과 함께 호남정맥에 속한다. 호남정맥(湖南正脈)은 경남 함양과 전북 장수군의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 영취산에서 뻗어 나온 산맥[금남호남정맥]이, 전북 진안 마이산에서 남쪽으로 갈라져 나온 산줄기이다. (‘금남정맥’은 전북 무주 주화산에서 북서로 산줄기가 뻗어나가다가 대둔산-계룡산으로 이어져 부여의 부소산 조룡대에 이른다.) 호남정맥은 내장산 국립공원에서부터 심하게 요동하면서 방향을 바꾸는데 백암산을 지나고 담양의 추월산(秋月山, 729m)을 거치면서 이 요동은 더욱 심해져 담양호를 사이에 두고 커다란 U자를 그리면서 강천산, 산성산, 광덕산을 빚어놓고 광주 무등산-승주 조계산으로 남하를 계속하여 광양의 백운산에서 끝을 맺는다. 추월산과 강천산은 위도가 비슷하지만 이 두 산 사이에는 담양호가 있다. 담양호를 사이에 두고 서쪽의 추월산과 동쪽의 산성산-강천산이 마주 보고 있는 것이다. 강천산과 산성산은 전남 담양과 순창의 경계를 이루는 군계능성이다. 그리고 강천산-산성상-광덕산 능선이 호남정맥이라는 말은 능선의 서쪽 계곡, 담양호의 물은 영산강이 되어 목포로 흘러내려가고, 동쪽의 물은 오늘 우리가 탐방하는 강천사 계곡의 저수지 강천제(剛泉堤)에 모여, 순창읍을 거쳐 섬진강으로 흘러들어간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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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 금성산성(金城山城)에 오르다
☆… 오전 11시 50분, 담양 금성면 주차장에서 산성을 오르기 시작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눈부시게 쾌청한 날씨, 살갗에 와 닿는 대기의 감촉은 선선하지만 햇살은 뜨거웠다. 가을 가뭄이 오래 계속되어 산길은 아주 건조하고 팍팍했다. 약 20분 정도 산길을 따라 오르니 경사진 바위 위에 작은 돌로 쌓아올린 성벽과 보국문(輔國門)이 나타났다. 보국문은 산성에서 외부상황을 정찰하고 1차적인 방어를 위한 외문(外門)이다. 문루 아래 좁은 문으로 들어서면, 산 위를 타고 올라가는 본성의 성곽과 북동쪽 산자락에 충용문(忠勇門)이 올려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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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땀을 식힌 후, 내남문인 충용문에 올랐다. 보국문이나 충용문은 문의 좌우를 성벽을 앞으로 내다 쌓아, 성문으로 들어오는 길이 좁은 골목처럼 되어 있어 외부에서 쉽게 들어오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충용문은 보국문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있으므로 주변을 조망하기에 좋은 지점이다. 동쪽은 산성에서 뻗어나간 산줄기가 절벽을 이루고 있고, 그 아래의 골짜기가 이른바 연동사가 있는 ‘이천골’이다. 바로 아래 산 능선 위에 보국문과 그 주변이 성곽이 한눈에 들어온다. 보국문은 성벽을 앞으로 내다 지어서 길따란 옹관의 형상을 하고 있다. 보국문 주변의 모든 상황을 언제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서쪽으로는 담양호를 사이에 두고 추월산의 산봉이 불끈 솟아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광활하게 펼쳐진 담양의 황금들판과 마을들이 눈에 들어오고 멀리 무등산의 묵직한 산봉까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문의 안쪽 산록에는 ‘行別將鞠文榮永世不忘碑’(행별장국문영영세불망비)가 서 있다. 가선대부 별장 국문영(鞠文榮)의 송덕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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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혜의 요새, 담양의 금성산성(金城山城)
☆… 담양군 금성면과 전라북도 순창군의 경계를 이루는 금성산성은 담양읍에서는 동북쪽으로 약 6㎞ 떨어져 있다. 최고 해발 603m 높이의 산성산의 깎아지른 벼랑 위에 돌로 쌓은 포곡식 석성이며, 내성과 외성의 2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성의 전체 크기를 판가름하는 외성은 연대봉(산성상 정상)과 철마봉, 시루봉 등의 바위로 된 산봉우리를 따라 길게 이어져 있는데, 부분적으로 바위 벼랑을 그대로 자연성벽으로 이용한 곳들도 있다. 바위 능선이 매우 험준한 곳이 많아 지정된 문이 아닌 곳으로는 통행이 어려운 지형이다. 산성은 성곽 한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널찍한 분지 형태로 되어 있다. 결코 성안을 볼 수 없는 지형이니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성안에는 샘이 풍부하여 충분한 식량만 쌓아 놓는다면 매우 오랜 시간 동안 성을 지키며 적군을 붙잡아 둘 수 있는 훌륭한 조건까지 갖추었다. 1991년 사적 제353호로 지정되었고 1994년부터 성곽복원사업을 착수하여 외남문은 보국문(輔國門), 내남문은 충용문(忠勇門)이라 명명하였다. 보국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우진각 지붕을 얹은 누각이다. 충용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을 얹은 중층 누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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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의 입암산성, 무주의 적상산성과 함께 호남의 3대 산성으로 불린다. 금성산성은 그 훌륭한 지정학적 위치만큼이나 역사적으로 전화(戰禍)를 겪어 왔다. 고려시대에는 몽고군에 맞서는 항몽의 전적지로, 임진왜란 당시에는 의병의 거점으로 노령을 넘어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군과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특히 정유재란 때의 전투는 피로 피를 씻는 치열한 격전으로 전투가 끝난 후 외남문인 보국문 오른편 깊은 골짜기로 전사자를 치우고 보니 시신이 무려 2,000여구에 달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골짜기의 이름을 ‘이천골(二千骨)’이라 부른다고 한다. 개화기에도 녹두장군 전봉준의 동학군이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진압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결국 전봉준이 잡혀 죽음을 당한 이후 이곳 금성산성도 결국 관군에게 점령되었다. 그때 성 내의 전각과 모든 시설들이 불에 타버리는 참화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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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산성의 최초의 축조 시기는 삼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도 하지만 실제 역사 기록에 처음 나타난 것은 <고려사절요>의 기록이다. 고려 우왕 6년(1380년) 에 왜구에 대비하며 개축했다. 비록 성(城)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이보다 이전인 고려 고종 43년(1256년)에는 몽고의 차라대군이 담양에 주둔했다는 기록도 있다. ‘금성산성’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 것은 <세종실록 지리지>, 조선 태종 때로 1410년 전라, 경상도의 12개 산성이 수축된 기록에서 나온다고 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추월산의 석벽이 사방을 둘러 둘레가 9,018척, 13천(샘)이 있고, 연동사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