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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8년 신약성경이 말레이어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동남아의 언어로 번역된 최초의 성경이었다. 1624년 화란이 스페인으로부터 인수한 대만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려는 진지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쳉쳉-쿵(鄭成功)이 거느린 중국 해적들에게 화란이 쫓겨나고 시도는 허사로 끝났다.
한편 영국에서도 식민지의 원주민에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었고 1583년 험프리 길버트 경에게 허가한 특허장에는 "영국민을 통하여 기독교 문화의 감화를 받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이방인들을 감추어 두었던 것 같다"고 하면서 가련한 이교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성공회의 노력은 성과가 크지 못했다. 이 고귀한 목적의 지속적인 시도가 이루어진 것은 1632년 마사츠세츠주 록스베리의 목사가 된 장로교도 존 엘리오트(1604-1690)의 경우가 최초였다.
그는 즉각 이로쿼이의 피쿼트족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개종한 인디안을 위해 "기도하는 마을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엘리오트는 "모히이칸"어로 성경을 번역했는데 1661년에 신약, 1663년에 구약이 출판되었다. 엘리오트 사후 인디언을 위해 봉사한 제일 유명한 사람은 데이빗 브레이너드(1718-47)였다. 브레이너드는 죽었으나 최고의 경건을 지향한 그의 감동적인 글에서 영감을 발견한 윌리암 케리와 헨리 마틴과 같은 사람들의 생을 통하여 그는 계속 살아있다.
1701년에는 성공회 외방 복음 선포회(Anglican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Foreign Parts)가 왕실의 특허장을 받은 법인 협회로 설립되었다. 350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헌신적이고 훌륭한 사람들이 많았다. 1735년 뉴욕주 포트 헌터 수비대 사령관의 보고를 판단할 때 적지 않은 성공이 따랐던 것 같다.
유럽대륙의 교회가 선교운동을 지원하기 시작한 역사는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고서 비롯되었다. 16세기의 "성령운동", 로마 카톨릭의 신비주의, 영국 청교주의의 개인적인 개심의 강조 이 모든 것들이 경건주의의 기원과 관련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경건주의 최초의 뚜렷한 표현은 필립 자콥 쉬펜너의 [ 경건한 소원 1675 ]이라는 책을 통하여 나타났다.
그의 목적하는 바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로서 자신과 또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 깊은 관심을 가진 자들을 상호 덕을 세우고 격려해 주는 여러개의 그룹으로 모으려 했던 것이었다.
경건주의가 교회내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할레의 치이겐발크와 헨리 플뤼차우는 유럽에서 인도에 보내진 최초의 비 카톨릭선교사가 되었다. 그들은 현지 덴마크 주민들의 적개심, 퉁명스럽고 불쾌한 총독으로부터의 계속적인 들볶임, 유럽인들의 신앙생활을 돌보기 위해서 파견된 덴마크 성직자들의 악의, 코펜하겐의 오해와 편견들, 상류 카스트의 미움, 하류 카스트의 관심 부족, 로마 카톨릭의 모멸적인 적대감 등, 끝이 없는 어려움들에 시달려야만 했었다. 그러나 인내로 극복하며 5개의 선교원칙에 따른 선교형태가 나타났다.
1. 교회와 학교를 병행하여 해야 한다.
2. 그리스도인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하려면 그들의 글자로 기록된 말씀을 그들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 치이겐발크는 신약성경 번역에 착수하여 1714년 완결하였고 구약도 죽기 전 까지 룻기까지 진전시켰다.
3. 복음은 주민들의 정신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기초로하여 전파되어야 한다. 치이겐발크는 실제로 그들 종교를 세밀히 연구하여 신랄히 비판받고 1867년에 1세기 반이나 지나 출판되었던 [ 말라바르 신들의 신통기 ] 유럽에 있는 본부에 보냈다.
4. 목적은 명확히 개인적인 개심이어야 한다.
5. 가급적이면 속한 시일 내에 교역자를 가진 인도 교회를 출현시켜야 한다. 이곳에서 선교의 기초를 세운지 3년밖에 되지 않는 1709년에 치이겐발크가 보낸 편지에는 완전한 교회 조직이 되기위해서는 선교지역의 교인 한 사람에 필히 "신품권" 을 부여해야 한다고 되어있다.
실지로 최초의 인도인 목사인 아아론이 1733년에 안수를 받았다. 1백년 선교에 안수받은 목사의 수는 고작 14명이었다. 치이겐발크가 사망했을 때 트랑크바르에는 350명의 기독교인 공동체가 존재했다. 루터교회는 남인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고 이었다.
오래지 않아 선교사들은 트랑크바르란 조그만한 세계에 갇혀있는 일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덴마크왕은 자기가 보내는 돈은 오직 트랑크바르의 사업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하며 그 외의 어느곳을 위해서도 사용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누구의 영토냐(Cuius regio)의 원칙은 신성 불가침이었다.
이 시점에서 S.P.C.K가 나서서 다른지역의 선교사들을 지원하기로 동의하였다. 그 당시 상당히 에큐메니칼한 태도로 "영국 선교구"에서 일하고 있던 선교사들은 여러 경우에서 자신들의 기능이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본래 덴마크 국왕에 의하여 파송된 독일선교사들인데 고교회의 S.P.C.K에 의하여 인수되었고 비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뜻에서 재정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동시에 영국 군대와 영국인 공동사회의 전속목사로 시무하고 있는 것이다.
남인도에서 48년간을 봉사한 크리스챤 프리드리히 쉬바르츠(1724-98)는 그 가운데 우뚝선 선교사다. 그는 말기에 탄조레 왕국 의 실질적 디완(수상)의 궁정의 영국 특명대사로도 출입했는데 매우 정직하고 청렴한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선교사로서 자신의 신분을 잊지 않고 사역에 전념하여 탄조레교회는 그의 지도아래 2,000명을 가진교회로 성장하였다.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의 사후 당시 인도의 여러지역에서 선교사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던 동인도회사가 그들의 경비를 들여 마드라스의 포르트(Fort)교회에 쉬바르츠의 기념관을 세운 사실은 이상한 일이며 그의 은고를 입은 젊은 라자(인도의 왕) 사라보지도 대리석 기념비를 세웠다.
사실 그의 말년은 서글픈 생애였다. 유럽의 선교적 열성이 쇠퇴해지고 교회가 선교구들을 적절히 지워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두가지 사건이 그의 사망직전에 이루어졌다. 그것은 윌리암 케리의 벵갈 도착과 인도에서 최초로 프로테스탄트의 대중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코펜하겐 선교대학의 첫열매의 하나는 한스 에게데의 그리랜드 선교(1722-36)였다. 그는 온갖 고생을 다하여 에스키모어를 배웠으나 이언어가 기독교 진리를 표현하기는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에게데가 그의 천성적인 교만을 극복하고 그의 양떼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얻게 된 것은 1733년에 유행했던 그 끔찍한 천연두 때문이었다.
1734년 다시 덴마크에서 돌아온 아들 파울로 인하여 그리랜드 선교는 활기를 띠었고 일종의 종교적 부흥이 디스크만 일대에 일어났다. 파울은 그들과 함께 자랐기에 그들의 말을 잘했다.
1731년 친젠도르프 백작이 코펜하겐에 와서 에게데에게 세례받은 2명의 에스키모인을 만나고 그리랜드의 선교가 포기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즉각 헤른후트의 그의 신앙의 형제들을 불러 이 난국을 극복하도록 조처하였다. 그는 후에 1737년 형제교회의 감독으로 안수를 받았으며 그 나름의 경건주의를 발전시켰는데 십자가에 달린 구세주에게 깊이 헌신할 것과 그의 의지에 철저히 굴복하고 헌신할 것을 강렬하게 요구하였다.
1732년 8월 21일 모라비아 교회는 선교의 첫발을 내디디었다. 1733년 5월에는 모라비아 선교사들이 그리랜드에 도착하였다. 모라비안들은 에게데의 약점을 들추었다. 에게데를 공격했던 현실을 고려하지 않았던 모라비안 가운데 한 선교사는 1740년 선교방식을 크게 변경시킨 사실과 그 변화의 경과를 기록하였다.
아프리카의 단 하나의 고립된 사례는 S.P.G선교사로 5년간 뉴 저지에서 일했던 토마스 톰손이 1751년 흑인에게 봉사하기위해 현재의 가나로 불려지는 황금해안으로 떠났다. 선교의 결과는 신통치 않았지만 그가 보내 영국에서 공부한 12세의 3명의 아프리카 소년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필립 퀘이크가 1759년 1월7일 세례를 받고 1765년 최초의 성공회 성직자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 50년 이상을 "선교사, 학교장, 교리교사"로서 봉사한 후 1816년에 사망하였다.
미국의 경우는 당시 선교지였다. 그래도 보스톤 회중교회의 저명한 목사 코튼 메더는 할레 대학의 프랑케, 그리고 트랑크바르의 선교사들과 서신을 교환하면서 전세계에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있었다.
신학자인 동시에 부흥사이며, 후에 프린스톤 대학의 총장으로 일했던 조나단 에드워드(1703-58)는 선교의 계획을 자신의 중심적인 관심으로 삼고 그것을 선교를 위한 "전세계적인 기도 협약"이라는 사상에 연관시키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이 정신이 에드워드의 마음을 사로잡아 결국 그는 이 계획을 한권의 책으로 정리했는데 이 책이 바로 "성경의 약속들과 말세에 관한 예언들에 의거하여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왕국의 출현과 신앙부흥을 위해 특별히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분명한 의견의 일치와 눈으로 볼 수 있는 연합을 촉진하기 위한 소박한 시도"이다.
1748년 초판된 이책은 계속해서 재판되면서 개별 및 집단적인 기도는 많은 사람들의 영적인 지평을 확장시키고 또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은 또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킨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6. 선교의 다양성(방법론)
1. 국내선교
시골, 낙도지방 등
2. 국외선교
미전도종족 현황은?
세계 총 24,000종족이 있고 그 중 13,000은 전도 된 종족이고 11,000종족이 미전도종족으로 남아있다고 보고 있다(이슬람권4,000 힌두권2,000 불교권1,000 부족3,000 기타1,000) 미전도종족 인구는 24억이며 주로 10/40 창문 지역에 살고 있다.
-90년대 통계 현재(2004)는 6,000~8,000정도의 미전도 종족이 남아있다고 본다.
세계의 가장 중요한 종교인 이슬람교,흰두교,불교가 이 지역을 압도하고 있다. 극빈자 10명 중 8명이 이지역에 살고 있어 10/40 지역은 영적 빈곤 지역일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빈곤 지역임을 볼 수 있다.
3. 문화선교
문화란 무엇인가? (What is the Culture?)
I. H. Richard Neibuhr 의 견해 (CHRIST AND CULTURE)
1) 문화의 주요한 특징
(1) 문화는 사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 문화는 개인적으로 사용하고 문화의 요소를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하는 것이다.
- 문화는 사람들이 받고 또 물려주는 사회적 유산이다.
(2) 문화는 인간의 성취이다.
- 인간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노력해서 이룬 것 (강은 자연, 그러나 운하는 문화다!)
- 그러므로 문화는 언어, 교육, 전통, 신화, 과학, 예술, 철학, 법률, 의식, 신앙, 발명, 기술 등을 포함한다.
- 또한 문화의 선물은 그 받는 사람 편에서 애쓰는 것이 없이는 결코 가질 수 없다.
(3) 문화란 가치의 세계이다.
- 인간의 성취물(문화)은 다 어떤 목적들을 위하여 고안된 것이다.
- 그러나 지나친 인간중심주의적 가치지향은 위험하다.
(4) 모든 문화의 특징은 다원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인간이 구하는 문화의 가치는 단 하나가 아니다.
- 사람은 많고 성과 계층에 따라 가치가 다르기에 가치를 추구하는 문화가 다원주의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2) 그리스도와 문화간의 대화에 대한 전형적인 모델들
(1) 그리스도와 문화는 서로 대립된다.
- 양자택일의 문제
(2) 그리스도와 문화사이에 근본적인 일치가 있다.
- 그리스도는 인간문화사에서 영웅,그의 생애와 교훈은 최대의 인간 업적
(3) 그리스도는 문화의 그리스도이며, 동시에 문화 위에 있다. (종합형)
- 그리스도는 문화적 열망을 성취시키고 진정한 사회 기구를 회복한 분이면서도 그에게는 문화에서 산출된 것도 아니요 문화에 직접 공헌하는 것도 아닌 무엇이 도 있다는 것
(4) 그리스도와 문화 양자의 이중적 불가피적인 권위를 인정, 동시에 양자간의 상반성도 인정
- 기독교인들은 평생동안 서로 합의되지 않는 두 권위에 동시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긴장성 속에 놓이게 된다.
(5)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
- 그리스도는 각자의 문화와 사회 안에 있는 인간을 변혁시키는 분이다. (어거스틴, 칼빈)
II. Lloyd E. Kwast 의 견해
(PERSPECTES ON THE WORLD CHRISTIAN MOVEMENT 중 " UNDERSTANDING CULTURE"에서)
문화를 조망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문화의 핵심에 접근해 가면서 이해도의 층을 시각화하는 일화성에서 온 외계인이 지구를 관찰한다는 상황을 설정해놓고 문화를 설명
1) 문화란 행동양식 ( BEHAVIOR)
- 어떤 것을 행함에 있어 양식화 된 모습(the patterened way of doing things)
- 문화는 강력 접착제와 같이 사람들을 함께 결속시켜 끊을 수 없는 연속성과 정체감을 부여하게 된다.
- 정체감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즉 행동양식을 통해 뚜렷이 나타난다.
2) 문화란 가치 (VALUES)
- 무엇이 "좋은 것 (good)" 이며 무엇이 "유익한 것(beneficial)" 이며 무엇이 "최선의 것(best)" 인가를 선택하는 것
3) 문화란 신념 ( BELIEFS)
- 문화 속에서 "무엇이 참인가(What is true)?"라는 질문에 대한 답
- 문화 속의 가치는 임의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이면에 내재된 신념체제를 반영한다
4) 문화란 세계관 (WORLDVIEW)
- 문화의 가장 기반이 되는 "무엇이 실제인가(What is real)?"라는 질문의 대답
- 모든 문화의 핵심에는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다.
- 자신의 세계관에 따라 신념체계가 형성되고 실제적인 가치관과 행동양식을 낳게 된다
- 타문화권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종종 세계관에 대한 문제를 고려하지 않으므로써, 노력한 만큼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 좌절할 때가 있다.
타문화권 교회
1. 마 28:18-20은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에 대하여 비교적 포괄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본문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주장(Christ's Claim), 그리스도의 명령(Christ's Command), 그리스도의 약속(Christ's Promise), 지상명령의 목표(Goal of the Great Commission), 그리고 지상 명령의 성취방법(means)에 대하여 논하라.
가. 그리스도의 주장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v.18)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모든 권세를 우리 주님께서 가지고 계심을 먼저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의 주체가 주님이시기에 그가 모든 복음전파 사역을 주장하시며 총괄하시는 분인 것이다.
나. 그리스도의 명령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v.19-20)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에게 주고 가신 명령이다. 우리가 있는 곳이나, 가는곳 어디서나 이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며 가르치며 본을 보여 행하게 하는 일들이 있어져야 한다.
다. 그리스도의 약속 :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v.20)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만 주신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와 함께 계셔서 인도하시며 주관하여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라. 지상명령의 목표 :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v.19)
제자를 삼으라는 분부가 이 후에 나오는 세 분사들의 목적어가 되는 것이다. 가서, 세례를 주고, 가르치며 지키게 하는 모든 것의 결국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마. 지상명령성취 방법 : "가서,... 세례를 주고,... 가르치는것"(v.19-20)
가서라는 것은 우리가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을 총칭할 수가 있다. 우리가 타문화권에 갈수도있고 아니면 아니면 국내에 있는 외국인이 될 수도 있다.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그리스도를 저들의 주로 시인케 하며 말씀을 가르쳐 성숙시켜서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 모든일에 주관자가 되시는 분은 우리 그리스도 주님이심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 교회성장 학자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 제일 효과적인 단일 전도 방법
"하늘 아래서 가장 효과적인 단일 전도 방법은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다." 선교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그들 중에서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다. 교회 설립을 통하여 복음이 더 새롭게 그리고 보다 진취적인 방법으로 전파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3. 챨스 부룩(Charles brock)은 타문화권 선교사들은 적어도 세가지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가. 당면 목표(Immediate Objective) : 현지인들이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 받게 하는일이 선교사의 가장 먼저 해야할 문제이다. 복음을 통한 개종이 이루어져야 한다.
나. 중간 목표 (Intermediate Objective) :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현지인들의 교회를 설립하는 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토착교회를 말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들이 스스로 자치, 자립, 자존하는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현지인들이 그리스도의 주권 안에서 스스로 사고하고, 결정하게 하며, 처음부터 스스로 자립하게 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확장되어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다. 궁극적 목표(Ultimate Objective) : 그들이 교단을 만들거나 혹은 기존의 다른 여러 교회가 서로 교통, 연합하여 서로 협력하면서 복음사업을 할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4. 복음전도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관심 사이
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관심은 복은 전도의 결과이며,
나. 복음전도의 수단(교량)일 수 있으며,
다. 복음전도의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복음전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참된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며 사회를 정화시키고 참된 갈 길을 제시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개인이나 가정이 있는 사회는 변화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동반자가 되어주면서 그 사회를 인도해 나가야 하는 사회적 책임이 복음 전파자들과 믿는 사람들에게 있다. 사회밖에서의 교회가 아니라 사회 안에서의 교회가 되어져야 한다.
5. 도날도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은 교회성장의 4가지 유형
가.내적성장 : 수적 증가 없이 기존 맴버가운데서 일어나는 성장이다:a)영적으로 성장하며; b)조직적(유치부, 성가대, 청년부...)으로 성장하고; c)명목상의 신자가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을 말한다.
나.확장성장 : 교회가 가까운 이웃들로 부터의 숫자적인 성장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a) 먼저 생물학적 성장(결혼, 출산,...)을 들수 있다; b)전입 성장(이사를 통하여 타교인이나 아니면 자연스럽게 교회에 출석하게 된다)이 있게된다; c)같은 언어와 문화권안에서의 사람들의 개종으로 확장이 될 수 있다.
다.개척성장 : 현재 교회에 있는 사람이 그 교회에서 떠나서 새로운 지역에 가서 개척하는 것을 통한 성장을 의미한다.
라.선교성장 :이것은 지리적 차이보다는 문화적 차이가 있는 타문화 선교에로의 성장을 말한다.
6. 와그너(C. Peter Wagner) 는 새로운 교회를 개척해야할 필요 5가지
가. 교회 설립은 성서적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와있는 많은 예들을 볼수가 있다.(엡1:9-10)
나. 교회 설립은 교단의 생존을 의미한다: 성장하는 교회마다 교단이 성장한다. 교회 개척 이 없이는 교단이 성장할 수가 없다.
다. 교회 설립은 새로운 지도자의 지도력을 증진시킨다: 교회 설립을 통하여 새로운 지도 자가 발굴되며 지도력이 개발되어진다.
라. 교회 설립은 기성교회의 새로운 자극을 주어 활성화시킨다: 일하는 교회를 통하여 성도들과 교회를 자극하여 움직이며 일하게 자극을 준다는 것이다.
마. 교회 개척은 효과적이다: 피터 와그너가 말했듯이 교회개척이 복음전파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마 16:18절에 친히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신 것을 보며, 사도들과 바울이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운 것을 볼 때 교회개척이 가장 효과적인 것임을 알수가 있다.
7. 랄프 윈터(Ralph D. Winter)는 1974년 세계 복음화를 위한 로잔 대회에서 전도의 4가지 유형
전도의 4가지 유형들은 다음과 같다:
1) E-0 :(Internal) 이것은 전도에 있어서 문화적 차이가 0 %인 것을 뜻한다.
2) E-1 :(Extension) 이것은 전도하는데 있어서 문화적 차이가 조금있는 것을 말한다.
3) E-2 :(Expansion) 이것은 전도하는데 있어서 문화적 차이가 있는데 유사성이 있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아시아민족들을 들 수 있다, 일본, 중국,...)
4) E-3 :(Bridging) 이것은 전도에 있어서 전혀 다른 문화권을 뜻한다. (남미, 아프리카,...)
E는 전도(Evangelism)를 뜻하고 E-0, E-1, E-2 E-3 은 전도에 있어서 문화적 차이(culture difference)를 뜻한다.
전 세계 255나라와 약 24,000 종족(말과 문화가 다른)에게 복음화 하기 위해서는 E-2,나 E-3 차원의 선교가 요구된다. 그러므로 교회가 미전도 종족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E-2,나 E-3 의 전도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파송하고 기도하며, 물심양면의 지속적인 후원과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전 세계를 품는 선교의 안목이 우리들에게 필요하다.
8.토착교회
복음이 전해지지가 않았던 그런 지역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함으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현지인들의 교회를 설립하는 것을 가르킨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토착교회를 말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들이 스스로 모든 것들을 할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가. 자치: 현지인들이 그리스도의 주권안에서 스스로 사고하고,
나. 자립: 현지인들이 그리스도이 주권안에서 스스로 해정에 대한 결정을 하며 처리하게 하며,
다. 자존: 현지인들이 그리스도의 주권안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전도하며 확장되어질수 있는 교회가 되게 해야 한다. 중국의 삼자교회처럼 정부에 의하여 조정되어지며 이용당하는 교회 는 토착교회라고 할 수가 없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주권안에서 복음이 전파되어지고 회심이 이루어지고 그들만의 교회가 그곳에 세워질 때 이것을 가르켜 토착교회라고 할 수 있다.
9. 찰스 부룩(Charles Brock)에 의하면 교회개척에 있어서 4가지 필수 요소
가. 성령의 사역(슥 4:6; 행 1:8) 교회 개척은 사람의 힘이나, 노력이나, 지혜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다.
나. 하나님의 말씀(롬 1:16,17; 벧전 1:23) 교회 개척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 기초가 되어지며, 그 말씀에 의하여(순종하여)모든 것이 진행되며, 결정되어져야만 한다.
다. 교회를 개척할 수 있는 개척자, 씨뿌리는 자(딤전 2:20)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말씀(복음)을 전파할 준비된 전파자가 있어야 한다. 이에 따른 여러 가지가 포함된다(교육,후원...)
라. 토양(마13장) 교회가 개척될 사람들이 필요하다. 복음이 잘 뿌려질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잘 준비 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교회를 개척하는데 있어서 이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에 민감하여 그분의 때에 맞추어 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10. 선교부와 현지교회 간의 관계 발전 4단계
가. 개척자 단계
현지에 교회가 없기에 전도자가 스스로 모든 것들을 해결해야 하는 단계이다. 전도로 시작하여, 성경공부 인도, 설교, 심방,... 이단계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리더쉽이다.
나. 부자 관계의 단계
개척자 단계에서 전도하여 개종한 새 신자들이 생겼으며 그들로 인한 현지 교회가 생겼 다. 이제는 부모로서 어린아이들을 양육해야 할 단계이다. 이때는 명령이나 지시보다 는 자립심을 키워 주는데 힘써야 한다. 주로 선교사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단계이다. 이때는 이들을 잘 키우기 위햐여 가르치는 은사가 필요하다.
다. 동반자 관계의 단계
신앙안에서 어린아이가 이제는 성장하여 성인이 된 단계이다. 이때는 서로가 동역자로서의 관계가 되어지는 것이다. 성인대 성인으로서의 태도의 변화가 요구된다. 이 단계 에서는 선교사나 선교부가 너무 간섭을 해서는 안되고 서로가 동역자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나아가서 그 들로부터 배척을 당할수도 있는 단계이다.
라. 동참자 관계의 단계
이 단계는 동참자로서 선교부나 선교사가 도와주는 단계로 변한다. 그것도 그들이 요구 할때이며 만약 그들이 싫다면 물러나 주어야 할 단계이다. 이제는 스스로가 충분히 성장한 교회로서 스스로가 지도력을 발휘하는 단계인 것이다. 현지인이 요청하면 있고 아니면 떠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선교와 토착화
선교에 있어서 토착화 문제는 긴 역사를 갖고 있다. 복음이 희랍-로마 세계에 전파되었을 때 이미 복음과 헬라문화의 만남이라는 토착화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러나 선교 사역에 있어서 토착화의 원리에 대한 관심은 근년에 이르러 더욱 고조되고 있다. 이 주제를 다룬 책들과 논문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사상 금년(1991년)6월호는 "한국 토착화 신학 논쟁의 평가와 전망"을 특집으로 싣고 있다.
선교에 있어서 토착화의 필요성을 보다 깊이 인식하게 된 것은 개신교 선교가 서구의 식민지 확장과 때를 같이 했으며,서구 선교사들이 서구 문명의 이식을 복음전달과 동일시한 과오와 관련이 있다. 서구의 식민지였던 국가들이 신생 독립 국가들이 되면서 탈 서구화와 민족 자존의 근거를 위해 그들의 전통 종교를 핵으로하는 전통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서구 선교사들은 떠나고 기독교는 그들의 문화의 일부가 아닌 서구인들의 종교로 간주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입지의 불안을 느낀 선교사들과 신학자들이 기독교의 토착화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I. 선교에 있어서 토착화의 개념
선교에 있어서 토착화란 말의 본래적 개념은 다양한 문화의 모자이크 현상을 이루고 있는 지구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지금은 토착화(Indigenization)라는 말이 그 의미가 많은 변천과정을 거쳐 복음과 삶의 자리인 전체 상황과의 관계로 포괄하는 용어가 되었다.
기독교의 상황화는 인간이 살고 있는 모든 곳, 기독교 역사가 오랜 서구 사회에도 그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문화와 자연환경이 계속적으로 변하고 있으므로 변동한 상황에 적절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상황화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교에 있어서 토착화는 타문화권 복음 전도에 관련된 것으로 보고 논의로 전개해야 할 것이다. 선교에 있어서 토착화는 전도 방법, 성경번역,교회 정치,교회당 건축 양식,예배형태,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관습의 수용문제,다른 종교들과의 관계, 토착적 신학의 형성, 신학교육과 지도자 육성 방법,교회와 선교회와의 관계정립 등 문제들과 관계된다. 오늘날 한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토착화를 주로 신학의 토착화와 관련된 것이다.
II. 복음과 문화와의 관계
선교에 있어서 토착화 문제는 복음과 문화와의 만남, 곧 복음과 그것을 수용할 사람들의 문화 전반과의 관계성 정립의 문제라 말할 수 있다.
토착화란 복음이 문화적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과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요청된다. 복음을 감정적 차원과,평가적 차원에서 정확하고도 쉽게 전달되어져 기대한 결과를 효과적으로 산출하고자 하는 시도를 토착화라 말한다.
모든 문화는 복음 전달을 위한 통로로 사용될 수 있다.누구든지 자신의 문화를 바꾸지 않고는 그 안에서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성숙한 제자가 될 수 있다. 타문화권 전도자들은 그 문화를 적절히 사용하여 복음 진리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수용적이고 보다 더 저항적인 문화가 있긴 하지만, 그것으로 문화와 우열을 말할 수는 없다.
복음의 수용성과 저항성도 늘 변한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문화들 가운데는 완전한 문화도 없으며, 저주 받아야 할 아주 못쓸 문화도 없다.
인간은 주어진 사회적 및 자연적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문화로 만든다. 그리하여 그 문화러 공유하며, 전달하고, 변화시킨다. 모든 문화는 타락한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죄성이 반영된다. 그러나 문화 가운데는 긍정적인 것들도 많이 있다. 모든 문화는 그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며, 삶을 가능하게 하고 가치 체계와 어느 정도의 질서로 제공한다.
모든 문화는 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의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모든 문화에는 인간의 이기성이 만든 악한 구조와 관습들이 있다. 노예 제도,인종차별,일부 다처,억압과 착취,매음,마약,전쟁 등이 바로 모든 문화가 지닌 병적 요소이다. 복음은 이런 악습들을 정죄하며 배격한다. 그러나 혁명적인 방법이 아닌 복음적인 방법으로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참된 복음의 토착화는 문화의 긍정적인 면과 유용성을 인정하고 활용할 뿐만 아니라, 비인간화 시키는 악한 구조와 폐습들에 도전하는 것이다. 복음의 예언적 기능은 복음 진리를 대항하는 신념과 가치체계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복음이 비성경적인 원리와 가치를 수용할 때, 복음은 그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무비판적인 복음의 토착화를 시도했던 아프리카에서는 이교주의와 혼합된 독립 교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것은 기독교 이교주의 (Christopa- ganism)라 부른다. 토착교회가 되는 것은 이교의 원리와 가치가 지배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가르침에 충실한 교회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복음과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그 양자간의 관계 정립을 위해 씨름해야 한다.
III. 선교란 토착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세계복음화가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진전될 때 복음의 씨를 지구상의 모든 문화 토양에 심어지게 된다. 그 결과로 새로운 교회가 형체를 갖게 되며,갓난 아이처럼 의존적인 존재가 출생하게 된다. 선교에 의해 탄생된 새로운 교회는 그 문화 토양에 뿌리를 내리게 되며, 그 문화의 순수한 부분으로 여거지게 된다.
동시에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서 하나님 말씀의 권위 아래 살며, 성령의 인도를 받기 때문에 충분히 자립적인 교회가 될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토착 교회이면서 동시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 되신 보편적 교회의 한 지체가 되는 것이다. 선교 사역의 열매로써 이런 토착교회들이 이 지구상의 모든 족속들 가운데 세워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토착 교회를 통해 그들의 민족이 복음화되며, 그 교회는 다른 문화권에 그들의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선교하는 교회가 되어지기를 원하신다. 토착교회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들의 문화 안에 뿌리를 내려 문화 상황에 적절한 독특한 형체를 이루면서 선교 사역으로 세워지게 되는 교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서,그리고 성령의 조명안에서 그들의 문화 상황에 적절한 성경 번역,교회 정치,예배 형태,지도자 양육,전도 방법 등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일반적으로 토착화 교회가 말할 때 그것을 선교사들의 노력의 결과로 자치 자급,자전의 능력을 가진 교회를 의미한다. 백여년 전에 헨리 벤(Henry Venn,영국교회 선교회 총무)은 선교의 목표로 자급(Self-supporting),자치 (Self-governing),자전(Self-propagation)의 교회들을 세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선교의 목표는 모든 종류의 토양(문화,종족)에 복음의 씨를 심어 토착 교회로 세우는 것이다.
맥가브란(Danald A.Mcgavran)박사의 "교회성장"이란 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는 선교의 대치할 수 없는 목표는 모든 문화권에 교회를 세우며 성장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도바울이 보여준 선교 사역의 모본드 가능한 복음이 전파되지 아니한 여러 곳으로 찾아가서 자급,자치,자전하는 교회들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는 바나바 또는 실라와 함께 때로는 두세 사람과 함께 선교 팀을 이루어 선교여행을 했다.
그는 지중해 연안지역들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행한다. 에베소를 제외하고는 한 곳에서 2년 이상 머문적이 없다.때로는 몇 주간 밖에는 머물지 못했다. 그러나 각처에서 그가 떠날 때는 언제나 받는 사람들이 있어서 지역 교회를 이룰 수 있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3주간이라는 짧은 기간에 자치하는 교회로 세울 수 있었다. 그의 선교 사역에서 새로워진 교회들을 위하여 안디옥 교회나 예루살렘 교회에 사역자나 제정적인 지원을 요청한 사례를 찾을 수 없다.
오늘날 여러 곳에서 수행되고 있는 선교 사역의 양상은 신약 성경적 방법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어떤 지역에서는 선교사들이 10년,20년,또는 50년 이상 일을 해왔지만 여전히 교회가 자립하지 못하고있다. 선교사들은 여전히 파송 교회에 재정적인 지원 요청과, 사역자들의 증원을 요청하고 있다.
선교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토착교회를 세우는데 실패한 요인으리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토착 교회를 세운다는 선교 목표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를 따져볼 수 있을 것이다.
Melvin I.Hodges는 그의 책[The Indigenious Church]에서 선교사들이 토착교회로 세우는데 실패한 원인은 여섯가지로 꼽았다.
첫째로, 선교사들이 선교 사역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갖지 못했다.
둘째로, 토착교회 설립 대신에 선교 센타를 세우는데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세째, 선교지에 선교사들이 너무 많이 파송되어 일자리를 다 차지하므로써 선교지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위치와 기회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네째, 선교지 주민들의 심리학과 방법을 선교사들이 수용하는데 실패하고 모든 일을 자기 식으로 했기 때문이다.
다섯째,과다한 선교 자금이 들어와 그것을 의존케 하므로 영적인 약화를 초래하여 새로운 회심자들로 하여금 책임감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여섯째, 회심자들을 너무 어리게 보았으며, 무책임한 자들로, 신뢰할 수 없는 자들로 보고 과잉보호한 나머지 그들의 활기찬 믿음을 활용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헌금하는 법을 가르치지 못하였으며, 그들도 전도지들을 활용하지 못했다.
선교지에 세워진 교회가 선교사들을 의존하면 할수록 더 많은 선교사들과 선교의 지원을 요청하게 되고, 그 결과는 토착교회 발전을 크게 저해하게 된다. 선교사들은 선교지 교회들로 하여금 선교사나 선교비로 의존하기 보다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므로 그들의 교회를 자립하는 교회로 발전시킬 수 있게 해야한다.
전도방법의 토착화가 필요하다. 선교사들은 전도에 있어서 토착적인 방법의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먼저 인식했으며 시도했다. 서구 선교사들은 다른 문화권에서 전도할 때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다년간의 연구경험을 가진 학자들에 의해 형성되어진 복잡한 철학적 신학적 표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아왔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신학적 진리를 쌓으려면 그들의 언어와 생활방식으로 표현해야만 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 문제에 관해 맥가브란 교수는 하나의 재미있는 예화를 소개한다. 20세기 초엽에 어느 선교사는 불신자들이 흔히 "그리스도인이 될 때 얻게 되는 10가지 이익"이라는 전도지를 그 지방어로 만든적이 있었다. 그 10가지 요점을 모든 마을의 회중들에게 암기하게 했다. 그것은 효과적인 전도의 무기가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얻게 되는 10가지 이익 중 하나가 그리스도인이 되면 불신자들보다 더 많은 자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곧 전도 방법의 토착화이다. 그곳의 모든 농부들은 많은 자녀 두기를 원했다. 그리고 비기독교인들의 성적 타락이 매독과 임질 등의 성병을 창궐시켰으며,그것이 높은 육아 사망율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는 이잇점은 누구에게나 분명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얻게 되는 이익에 관해 전통적 신학에는 이런 진술이 없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 지역 상황에서는 그것이 적절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효과적인 전도방법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도 방법의 토착화이다.
IV. 신학의 토착화가 필요하다.
토착화된 신학이 수용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그 문화 상황에 적절하면서, 동시에 철저하게 성경적인 입장을 견지해야만 한다. 만일 토착화된 신학이 세속적이며 다신교적인 사상과 너무 밀착하게 되면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비성경적인 혼합주의가 되고 말 것이다. 토착화된 신학은 그것이 기독교 신학이 되려면 먼저 성경적으로 건전해야 하며, 동시에 문화 상황에 적절한 것이어야 한다. 수용할 수 있는 신학의 토착화는 모든 신학의 원천이 성경에 합치되며, 동시에 수용자의 생활형태와 언어로 교리들이 제시되어야 한다.
신학의 토착화는 토착화 자체에 그 목적이 있지 않고, 토착화를 통해 계시된 진리가 의미의 굴절없이 바르게 전달되고 쉽게 이해되며 학습과 실천에 있어서 효과적인 것이 되게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신학의 토착화 과업은복음의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수용자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이지,복음의 본질적 의미로 굴절 내지 포기하면서까지 문화화할 때는 혼합주의에 빠지게 된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나 신학의 토착화(또는 상황화)의 필요성은 요청되고 있다. 신학의 토착화는 필요한 것이면서 동시에 매우 위험한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교리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성경적 진리를 가리울 수도 있다. 초대 교회 시대 이래로 유럽, 아세아,아프리카,기타 모든 대륙의 모든 문화권에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으로 고백해 왔다. 이 교리는 명백한 성경적 교리이며 모든 세기마다 고백되어온 전통적 교리이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의 종교적 상황에 알맞게 하려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성경을 순전히 인간들의 저작물로만 본다.
요한복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귀절이 있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헬라적으로 재구성한 것이지, 예수님은 그같이 말씀하신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를 세계의 종교 상황에 알맞게,오늘의 세속화된 지적인 구조와 사고 형태에 맞추기 위해서 유니테리안적인 용어로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는 신 의식이 뛰어난 사람이지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말씀)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황에 맞추기 위해서 성경적 진리로부터 떠나버린 것이다. 그것이 상항에는 적절한 것으로 보일런지 몰라도 (실제로는 인간 상황에도 맞지 않음)성경적인 신학은 아니다.
한국교회 역사 정리
1627. 네덜란드 벨트브레(Jan T. Weltvree) 일본으로 교역차향해중 제주 앞바다에 표류
1653. 하멜(Hendrik Hamel) 일본으로가던중 제주에표류 36명 제주감영에 압송
1816. 맥스윌과 홀 군함을 이끌고 군산부근정박, 조대복에게 한문성경 전함.
1832. 7. 귀츨라프(네덜란드선교회), 충청도 고대에서 전도문서와 성경을 전함.
1874.10. 로스선교사 첫번째 고려문 여행에서 상인 백홍준 부친에게 한문 신약전서를 전함
1866. 9. 2 토마스선교사 대동강에서 성경을 가지고 들어오다 순교함
1880. 백홍준, 기독교서적 휴대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됨
1882.10. 6 서상륜,영국성서공회의 한국최초의 권서로 한국으로 파송받음
1883.10. 로스선교사 요한복음, 누가복음, 사도행전 출간
1884. 9.20 의료선교사 알렌(H.N. Allen) 미국공사관의 공의로 한국에 입국함
1884.11. 로스, 윕스터와 서간도 한인촌을 방문 12월 한국인 75명에게 세례를 줌
1885. 1.21 스크랜톤(Dr.W.B.Scranton)선교사(의사) 한국을 향해 뉴욕을 출발
1885. 4. 5 미국 장로교선교사 언더우드와 미국 감리교선교사 아펜젤러 한국 인천에 입국함
1885. 4. 5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 창립
1885. 4.10 알렌에의해 광혜원 설립(국립병원으로 설립, 후에 제중원으로 개칭함)
1885.10.11 알렌 선교사 집에서 외국인 12명이 한국 최초의 성찬식 거행
1886. 5.31 이화여학교 설립.(서울 정동에서 미감리회 여선교사 스크랜톤 부인에 의해 설립)
1886. 6. 8 배재학당 개교함
1886. 7. 노춘경, 국내에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세례를 받음
1887. 1. 서경조, 최명오, 정공빈 언더우드선교사에게 세례받음
1887. 9.27 새문안교회, 로스와 한국인 신자14명이 참석하여 언더우드에 의해 설립
1888. 4.28 금교령 법령.(천주교에 전교를 금지한다는 법령)
1889. 토론토대학 YMCA파송한 게일, 독립선교사 팬윅(Malcom. C. Fenwick) 내한
1889. 10.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에서 데이비스(j. h. dAVIES)목사 부부와 메리(Mary) 파송
1890. 4. 데이비스 전도하며 부산으로가던중 과로와 천연두, 폐렴으로 한국땅에서 순교
1895. 7. 3 한국 최초 교회인 소래교회가 한국인에 의해 설립
1897. 5. 예수병원 설립.남장로회 한국 여선교사인 의사 잉골드에 의해서 설립 개원됨.
1897. 5. 2 고양읍교회 설립. 미국 남감리회 초대선교사 리드박사가 설립의 동기임.
1898. 9. 캐나다장로교회 그리어슨(R. G. Grierson),푸트, 맥레선교사 파송
1900. 9. 9 정동제일교회에서 <신약젼서> 출판기념예배 드림
1901. 5.14 한국 최초의 목사 안수(김창식, 김기범)
1902. 6. 아펜젤러, 목포의 번역자회의 참석차 여행중 선박충돌사고로 순교함
1903.10.28 기독교청년회 창설(상류 지식층 지도자들과 청년 전도목적)
1906. 현 기독교한국침례회 교단창립총회(대화회), 교단명을 대한기독교회로 정함
1907. 5.30 김상준 정빈 양씨가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설립하다.
1907. 6. 감리교 협성신학교 개교
1907. 9.17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창설, 선교사 33명모임 (한국최초의 목사 7명을 장립)
1908. 3. 1 한국인 목사 길선주 주례로 최초의 세례식 거행
1908.10. 8 구세군 한국본영 창설
1909. 7. 1 구세공보 창간. 처음에는 구세신문이라는 제호로 발간되었다.
1910. 2.15 구세군사관학교 개교(한국에 개전된지 17개월만에 사관학교 개교)
1911. 3.13 경성성서학원(서울신학대학교 전신) 설립하다.
1911. 9. 대구 남문교회에서 열린 제5회 조선노회에서 7개노회 조직 결의
1911.12. 4 경기충청노회 성립.경성부 새문안교회에서 성립되었음.
1912. 2. 1 한국교회 주일학교 위원회 설립
1912. 9. 1 대한예수교장로회 창립총회
1914. 1.19 한국 최초의 유치원 이화유치원 개원
1915.12. 7 기독신보 발행. 일제치하 교회신문 1937년까지 속간됨.
1916. 9. 2 경북노회 분립. 제12회 경상노회에서 경북, 경남노회를 분립할 것을 허락받음.
1919. 2.26 한국기독교 연합공의회 조직
1919. 3. 1 삼일독립운동이 전국전국으로 전개됨
1919. 3. 1 금주동맹회 절제운동.1930년 YMCA를 중심으로 절제운동이 일어남.
1919. 4.15 수원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 발생
1922.11.20 기독교양재여숙 창립(경성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가 설립한 사회교육기관)
1922.11.25 기성 교단기관지 "활천" 창간호 발행
1923. 8.18 한국 YWCA연합회 결성
1924. 9.13 경기노회 충청노회와 분립
1925.10. 1 한국 최초의 신학박사 남궁혁, 평양신학교 부임
1926.11.14 서울에서 토마스목사 순교 60주년 영국성서공회 한국지부설립
1926. 2.18 기독교연구회(한국YMCA) 창립(서울교회 중진들이 민족운동 목적)
1928. 7.24 청년 면려회 제3회 하계대회 및 정기총회(연세대학교)
1929. 2.27 성결교회 제1회 연회가 소집되고 교회법을 제정하다.
1931. 9.11 금강산 기독교 수양관 봉헌(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추진)
1931. 5.29 기독교증험론 발행(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발행함)
1931. 6.14 한국에서 최초의 여자목사 안수(기감 여선교사들)
1933. 1.20 기독교세계 창간(기독교감리회의 교회기관지)
1934. 6.14 한국감리교선교 선교50주년기념식(배재학교)
1935.12.22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창립(최태용목사 중심으로 한국인들에 의해 조직된 교단)
1936. 5.25 천주교에서 신사참배 성명서 발표
1936. 7.19 기독교보 발행(주간으로 1936.1.14 창간된 <종교시보>를 개제하여 발행함)
1937. 4. 1 그리스도교 한국선교회 설립(내한한 존 체이스 선교사에 의하여 설립)
1938. 2. 8 주기철목사 평양감옥에 구금됨
1938. 2.12 장로교 평양신학교 학생들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1938. 9.10 일제 총독부가 장로교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도록 강요함
1938.10. YMCA, YWCA를 해산시키고 일본기독교청년회에 종속시킴
1938. 8.16 기독신문 발행(1942년 4월 23일까지 발행된 개신교 각교파의 연합신문)
1939.11.15 기독교문답 발행(이동욱지음. 기독교조선감리회 총리원 교육국 발행)
1941.12.31 기독교대한감리회청년연합회 창립
1942. 4.29 기독교신문발행(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합동기관지)
1943. 9. 일제 주일밤예배, 삼일기도회 금지령
1944. 4.21 주기철목사 순교
1946. 4. 기독교조선성결교회 제1회 총회
1945. 8.15 일제하에서 해방됨
1945. 9. 1 출옥성도들 교회재건운동 시작, 북한장로교회 재건
1946. 1.17 기독공보 발행(기독교공보의 후신으로 1951년 부산 피난시절 복간됨).
1947. 5. 1 기독교신문 발행(초교파 주간신문 순복음을 주장)
1948. 4.20 기독교박물관설립(한국기독교박물관은 김양선목사가 교회사자료를 수집 개관)
1948. 5.31 대한민국 국회 첫 개회를 기도로 시작함
1948. 6 서울에서 장로회신학교 개교
1951. 1. 9 기독교연합전시비상대책위원회 창립(6.25사변 중에 조직된 국내기독교 연합기관)
1951. 9.18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 개교
1952.12.15 세계적인 전도자 빌리그래함목사 부산과 서울에서 전도집회
1953. 4.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순복음) 창립총회
1953. 5. 한국선명회 창립과 함께 구호사업 개시
1953. 7.28 기독교문화사 설립(기독교 출판기관. 김성준목사)
1953.11.13 기독교어린이문화관 창립(초교파 어린이 문화사업 및 출판 사업기관)
1954.12.15 기독교방송(CBS) 한국 최초의 민간방송으로 방송 개시
1956. 9.15 한국기독교해방10년사 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발행
1956.12.23 극동방송 개국(복음주의 연맹선교회에 의해 개국)
1956. 3.15 기독교문화 발행(기독교 계간잡지)
1957.11. 1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창립;
1958. 5.10 한국예수교오순절교회 창립
1958. 9. 1 국방부 군종과 발족
1958. 4.19 그리스도신학대학교 설립(그리스도교회무악기 선교사 체셔를 중심)
1959. 9.24 제44회 장로회총회에서 통합측과 합동측으로 분리됨
1960. 5. 20 기도 발행(세계문서선교회의 한국지부인 한국가정문서선교회의 기관지)
1961. 9. 1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광주시 대신동 이사무엘선교사와 Sarah Barrry선교사 설립;
1962. 8.31 기독교근로전도회, 한국 설립(불우한 근로자와 불우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함)
1963. 4.28 금주의 설교 발행(기독교명설교집편찬회에서 편집. 발행)
1963. 4.23 기독교구국연합전도회 창립(기독교연합기구)
1963. 6. 3 기독교오순절협동교회연합회 창립(국내 오순절교단으로 박덕종목사에 의해 창립됨)
1964. 1.21 기독교인권옹호상담소 창립
1965. 1. 4 기독신보 발행(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교단 기관지)
1966. 3. 1 기독교사회윤리위원회 창립(부산기독복음병원 원장 장기려 박사를 중심으로 설립)
1967. 개편찬송가 간행
1968. 2.24 예수교 한국독립교회 연합회 총회 창립
1969. 1.10 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회 창립(기독교단체.기독의료인,기독실업인,교역자 주축)
1972. 5.29 군복음화후원회 설립(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영락교회에서 설립)
1975. 8.31 기독교선교에 관한 서울선언 창립
1978. 2.16 기독교서점협의회, 전국 창립(한국기독교서점 연합기구)
1979. 9.15 기성 교단창립 70주년 기념회관인 "성결회관" 준공
1981. 1.29 100주년 기념사업회 규약확정 20개 교단과 연합기관 참가
1981. 4. 9 한국찬송가공회 창립. 한국 개신교 통일찬송가 사업을 위한 교파연합기관.
1983.10. 한국찬송가공회에서 개신교가 함께 사용하는 558곡의 찬송가 발행
1984. 8.15 한국 개신교 백주년 선교대회(여의도 광장에서 예배 드림)
1984. 8.31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 개관
1986.12.10 한국컴퓨터선교회(KCM) 창립
1987. 9.28 제77차 침례교 연차 총회에서 기독교한국침례회 해외선교회 발족
1988. 9. 9 제1회 한국디아스포라 세계대회(서울영락교회)
1988.12.10 국민일보 창간(1일 16면 발행)
1989. 4.28.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설립(원로목사 10여명의 제창으로 창설됨)
1989.10. 8 제1차 의료선교대회(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회) 개최
1991.11.5-8 2000년대를 향한 민족과 세계복음화 회의 개최
1992. 2. 4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 창립
1992. 8.15 92세계성령화대성회 여의도광장에서 개최
1995. 5.15-17 제2차 민족과 세계복음화 회의 개최
1995. 5.17-25 95세계선교대회(GCOWE'95) 기독교21세기운동본부 주최로 서울에서 열림
1996. 8. 5-10 선교한국 '96(한양대학교) 1998.8.3-8 '98(부천 실내체육관)
1997. 5.30 기성 교단창립 90주년기념대회 중앙교회에서 개최하다.
1987. 8.10-13 제1회 기독교사대회를 개최(기독교사단체연합 강원대에서)
1998.12.15 기독교방송 표준 FM 개국(주파수 98.1MHz, 출력 10KW), 21일 대전방송 개국
1999. 5. 5 침례교선교 110주년 축하집회(잠실 올림픽 주 경기장)
1999.10.12 기독교대책위원회 단군상건립 중단요구
1999.11.30 대한성서공회 무역의 날 '수출의 탑'수상(105개언어로 전세계 성경의 20%공급)
1999.12.23-25 영적 각성과 세계선교를 위한 '한국교회비전 큰잔치'(성탄절 기념행사로 열림)
2000. 8.14-18 2000년 세계선교대회 (KWMA주최 서울에서 개최)
토마스 선교사 이야기
대원군이 집정하여 쇄국정책을 펴고 있는 동안, 두 차레에 걸쳐 한국을 방문한 끝에 이 땅에서 처형된 영국 선교사가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사에서 ' 첫 순교'의 영광된 자리를 차지하게된 토마스 선교사가 그 분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영국 하노버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런던선교회 파송으로 중국 상해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의 선교사의 길은 처음부터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그의 아내 케럴라인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망한 데다가 , 런던 선교회의 상해 주재 책임자인 무어헤드와의 불화가 겹치게 되었습니다.
토마스는 런던 선교회에 사표를 제출하고, 해관에서 근무하면서 선교사역을 계속하였지만, 선교회의 반응은 경멸과 적의 그리고 불신뿐이었습니다.
그러다. 그는 스코트렌드 성서공회 , 윌리암슨 선교사를 만나게 되면서, 지푸에서 윌리암슨 선교사의 일을 도우며 선교사역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 한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을 지푸에서 만나게 되면서 였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한국어를 배우면서 바로 한국선교여행을 계확하였습니다.
드디어 1865년 9월 13일 그는 한국에 도착하였습니다. 2개월 반동안 한국해안가에 머물면서 가지고 간 중국 성경을 나누어주고, 복음을 전하는 등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벌였습니다. 그 후 서울을 향해 떠났지만, 태풍으로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만주를 거쳐 북경에서 사역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오직 조선에 가있었습니다. 그의 한국말과 조선에 대한 지식이 알려 지면서, 프랑스 함대가 그를 통역관으로 쓰려고 하였습니다. 당시 프랑스 함대는 조선에서 프랑스 신부에 대한 학살을 구실로 조선에 들어가려는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함대는 인도지나 방면의 긴급사태에 투입되면서 토마스의 한국행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 제너럴 셔먼호가 한국을 향해 떠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에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통역관으로 이 배에 편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토마스 선교사가 꿈에 그리던 조선땅에 도착하였습니다. 1866년 8월 16일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것입니다.
평양에 가까워지면서, 제너렬 셔먼호와 한국 측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이런 긴장 속에 제너럴 셔먼호의 발포사건과 이현익의 억류사건이 일어나자 조선군의 반감을 사면서 사태는 어려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긴장의 분위기 속에서 며칠 더 버틴 제너럴 셔먼호가 모래톱에 좌초되면서 조선의 화공이 전개되었고, 배에 머무르고 있던 토마스 일행은 뭍에 내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분격한 군민들에 의해 결박되고 , 타살되어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했습니다.
1866년 9월 2일 토마스 선교사는 27세의 나이로 아직도 수많은 교회가 그의 죽음위에 세워졌던 평양의 대동강 가에서 피를 흘렸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도 복음의 말씀을 이 땅에 전하려 하였다. 이때 토마스에게서 한문 성경을 받았던 한 사람이 뒷 날 선교사 마펫을 찾았고,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순교는 헛되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너럴 셔먼호가 미국 상선이었기 때문에 , 미국은 이 배의 행방을 추적하면서 조선을 설득하여, 결국 1882년 한미 수호조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 각 미국 교단의 선교사 파견으로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초석이 된다. ' 는 터툴리언의 말대로 한국을 위해 최초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는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의 순교이 후 , 16년이 지나면서 한국의 쇄국정책은 끝나게 되었으며 19년이 지나면서, 언더우드 아펜셀러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오게 된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