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영신학(?)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오해들[III]
[부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하나님의 주권]
1. 번영신학자들은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의 믿음을 믿으라고 강요한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과 그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믿으라는 것이다.
(렘 1:1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하시니라』
(사 14:24)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영신학자들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믿음을 믿을 때 그 믿음대로 된다고 가르치는 아주 이단적이고 매우 잘못된 사람들이라는 착각"을 하시는 분들이 제법 있는 듯 하다. 만일 누군가가 진짜 그러한 가르침을 선포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기에,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과의 관계선상에서 즉시 빠져나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인 번영신학자들에 대한 매우 잘못된 선입견과 오해일 뿐이다. 성경적인 번영신학자들 가운데 우리가 번영하려면, 성경말씀과 상관없이도, 단지 우리도 번영할 수 있다는 우리 자신의 믿음을 믿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과연 그 누구란 말인가?
케네스 E. 해긴, 찰스 캡스, 케네스 코플랜드, 베니 힌 등등 성경적인 번영신학을 주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음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까닭은 성경이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는 자들과 그 말씀을 친히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히11:6). 성경적인 번영의 약속과 그것을 친히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능하심을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하며 따라가야 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믿음의 분량을 주셨기에 그 믿음의 분량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따라가야 하는 주체가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그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따라가야 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기에, 그에 따른 우리들의 믿음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 과연 잘못된 것일까?
(히 4:1-2)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2. 번영신학자들의 믿음운동이란 긍정적인 고백의 운동이다?
아니다. 절대 그런 것이 아니다. 성경적인 번영신학자들이 말하는 믿음의 고백운동이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한 성경적인 고백을 강조하는 운동이지, 단지 사람의 고백에는 엄청난 위력이 있기에 번영에 대한 적극적인 희망을 절대적으로 인정하며 입으로 고백하기만 하면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절대긍정고백의 마력을 조장하는 사교(邪敎)운동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오해와 착각들이 교계에 만연해 있음을 본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이단 사이비 연구가인 행크 해네그래프(Hank Hanegraaff)의 말을 빌려서 그러한 오해를 소개해 본다. “하나님이 긍정적인 고백에 의해 좌지우지 될 수 있다면, 믿음의 공식에 묶여 있는 우주의 종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당신은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은 당신의 벨보이가 된다! 당신은 자아로 둘러싸인 채 우주의 보좌에 앉는다. 그 결과 우리는 빈약한 신관 그리고 비대해진 인간관을 갖게 된다.” (행크 해네그래프. 「바벨탑에 갇힌 복음: 번영신학을 고발한다」. 김성웅옮김. 새물결풀러스. 2010. p.200).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인 번영신학자들에 대한 매우 잘못된 오해이며 섣부른 착각임을 알아야 한다.
(민 14: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들 전체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다. 하지만, 20세 이상을 기준으로, 그 약속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고백한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 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그들 모두가 가나안 땅에 올라갈 수 없을 것이며, 광야에서 죽을 것이라는 불신앙의 말을 내뱉었다. 그 때 그 이스라엘백성 공동체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었다. 그리고 이 말씀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고백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의 고백대로 되어 그들의 고백처럼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불신앙의 말을 하였던 사람들도 그들의 고백대로 되어 광야에서 죽어가야만 했다.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대한 우리들의 믿음의 고백이 너무도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이 과연 잘못된 것일까?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대부분의 성경적인 번영신학자들이 믿음의 고백을 매우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성경적인 번영을 선포하는 설교자들 중 그 누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단지 자신의 번영에 대한 자기 자신의 확고부동한 신념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고백하기만 하면 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것이 궁금할 따름이다. 만약에 그러한 가르침을 선포하는 자가 있다면 그러한 자들로부터는 즉시 돌이키고 결별을 선언해야 할 것이다.
3. 번영신학자들은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를 길길이 날뛰며 반대한다?
아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성경적인 번영신학자들이야말로 주님의 뜻을 절대적으로 갈구하는 자들이며, 주님의 뜻대로 기도하고, 주님의 뜻대로 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이지, 자기 자신의 사욕을 이루기 위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반대하는 자들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상과 같은 오해와 착각들이 생겨나는 것일까?
그것은 기도와 주님의 뜻을 기록하고 있는 성경본문에 대한 해석과 적용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성경은 기도에도 여러 종류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이 말씀에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라고 한 것에 주의해야 한다. 새번역 성경은 “온갖 기도와 간구로 언제나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라고 되어 있다. 이 구절은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기도하되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과 같이 성경은 여러 가지 기도를 하되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하고, 또 여러 종류의 기도에 각기 다른 법칙들을 적용할 것을 가르치고 있지만, 보통의 경우 교회에서는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는 부분을 간과하고 그냥 열정적으로 기도하도록 유도하는 동시에,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기도를 구별하지 않고 획일적으로 기도하도록 하는 실수를 범하곤 한다.
운동 경기에도 야구, 농구, 축구, 골프, 테니스 등이 있다. 이들 모두 각각 다른 규칙에 따라 경기를 한다. 야구의 규칙을 농구나 축구 등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각각의 기도에 각각의 원리를 적용해야 하지만, 한 가지 기도에 사용하는 원리를 다른 종류의 기도에도 동일하게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중의 하나는, 모든 기도의 마무리는 항상 “이것이 만일 주님의 뜻이라면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라든가,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말로 기도를 마무리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기도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 그런 식으로 기도한 경우는 단 한번 밖에는 없었다.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에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도 큰 것임을 잘 아셨기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라고 한 기도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것은 주님이 갖고 계신 문제의 해결을 위한 믿음의 간구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아버지의 뜻에 주님자신을 헌신하기 위한 헌신과 성별의 기도이었기에 그렇게 기도하셨던 것이다. 주님은 질병치유와 같은 믿음의 간구기도를 하실 경우에는 그렇게 기도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셨다.
주님의 모범과 같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여 드릴 때, 성별하여 드릴 때,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할 기도가,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이지, 질병치유나 문제의 해결을 위한 간구의 기도를 하면서도,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이라고 하는 기도를 하면 안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이라는 이 기도는 나를 하나님께 헌신해 드릴 때, 나를 성별해서 하나님께 드릴 때, 그럴 때에만 쓰는 기도이다.
예수님의 기도를 살펴보라.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에게 가서, 울면서 “아버지! 나사로가 불쌍합니다.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나사로를 살려주세요!”라고 기도하셨는가? 아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말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신 후에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하셨다. 그 때 나사로가 수족을 동인채로 걸어서 나온 것이다. 그런 식으로 예수님은, 단 한 번 십자가에 자신을 성별하여 헌신하는 기도를 드릴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기도할 때마다 믿음으로 기도하셨지, “아버지의 뜻이거든”이라는 그런 말씀은 안하셨다. 믿음과 간구의 기도에 있어서 예수님은 항상 그런 식이셨다.
그렇기에 성경적인 번영신학자들은 질병치유 혹은 문제의 해결을 위한 기도에 대하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혹은 “주님의 뜻이라면...”이라는 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시 103:3)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마 8:16-17)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마 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이상의 말씀들과 같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질병을 치유 받는 것이 이미 주님의 뜻이고, 악한 문제들로부터 자유함을 받게 되는 것이 이미 주님의 뜻이기에 그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구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 전반에 대하여 주님의 뜻은 상관없고 오직 우리의 뜻대로만 되어야 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질병과 고난이 사탄의 공격일 수도 있고, 죄의 직접적인 결과일 수도 있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올 수도 있다고 보는 입장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입장이라면 우리가 믿음으로 치유를 위한 기도를 드리고 또 우리의 뜻이 주님의 뜻과 일치할 때에야, 치유는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치유를 위한 기도를 드릴지라도 기도의 마지막은 “우리의 뜻대로 마옵시고 다만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라고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대표적인 사람이 위에서 언급한 미국의 이단 사이비 연구가인 행크 해네그래프이다. 그는 우리가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모든 부분에서 주님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해야만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그 주장에 대한 증거로 다음의 성경구절들을 제시했다(상게서, pp.447-454.). 그가 제시한 성경구절들을 아래에 인용하면서 그 성경구절들이 과연 행크 해네그래프의 주장을 진정으로 지지해 주는 것인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문점들을 함께 제시해 보겠다.
(마 6:9-10)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는 것이기에, 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천국에 질병이 없는 것처럼(계21:4), 이 땅에서도 그와 같은 수준으로 질병의 치유가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닐까? 하나님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천국에도 치유되지 않는 질병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뜻)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이 구절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헌신과 성별의 기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
(약 4:13-17)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이 말씀은 우리의 삶이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의 간섭하에 있는 것이기에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제멋대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오만함에 대하여 꾸짖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을 질병치유의 기도에까지 적용하려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일까? 너무도 무리한 적용이 되는 것은 아닐까?
(요일 5:13-15)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뜻은 그의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미 영생이 있음을 우리가 알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영생을 구했기에 우리에게 이미 영생이 있음을 알 수 있다는 확신의 말씀이다. 그런데도 과연 이 구절을 질병의 치유가 주님의 뜻이기에 받은 줄로 믿고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반대하는 구절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일까? 오히려 그 반대로 질병치유가 주님의 뜻이기에 치유기도를 하고 나서는 받은 줄로 알고 담대해야 한다는 것으로 적용하는 것이 더 합당한 것은 아닐까?
(롬 1: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롬 15:32)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이 구절은 사도바울이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렸고, 그러한 헌신사역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로마에서도 쓰임받기를 열망하며 기도한다는 내용이다. 그리스도인의 헌신에 관한 이 구절을 과연 질병치유의 기도에까지 적용하려는 것이 과연 합당한 적용이 될 수 있을까?
이 부분에 대한 해석과 적용은 각자의 몫이 될 것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맥이며, 성경말씀의 해석과 적용에 대한 결과도 그 자신이 책임져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로 하여금 "번영신학(?)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오해들"이라는 글들을 써내려오게 만든 한권의 책이 있다. 행크 해네그래프가 쓴 「바벨탑에 갇힌 복음: 번영신학을 고발한다」는 비교적 두꺼운 책이 바로 그책이었다. 미국 교회를 뒤흔든 화제의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그 책을 매우 꼼꼼히 읽어보았다. 때때로 여러 가지 유용한 내용들이 있었고, 저자의 의도에 상당수 많은 부분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하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참으로 많은 안타까움들을 금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행크 해네그래프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여러 번영신학자들의 말과 글들을 내가 직접적으로 다 읽어보지는 못하였기에 그 책을 정확하게 평가한다는 것이 무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번영신학자들의 책들 중에 필자가 직접 읽어본 것들도 상당수 있었기에, 그러한 것들을 기준으로 볼때 행크 해네그래프의 비판들 대부분은 저자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문맥이나 설교의 정황들을 놓치거가 혹은 무시하며, 이리저리 비판을 위한 비판을 서슴치 않고 있다는 불쾌한 느낌을 감출 수 없다.
행크 해네그래프가 그 책에서 비판하는 내용들이 모두 다 진실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번영신학자들을 매우 조심하고 경계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인 내가 정확하게 읽어본 책들과 그 저자들을 비판한 부분들을 기준으로 점검해 볼 때, 아쉽게도 그러한 정당한 비판들은 너무도 적었고, 다만 비판을 위한 비판의 입장에서 각 저자들에 대한 매우 잘못된 평가, 혹은 섣부른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었기에 너무도 큰 아쉬움을 갖게 되었다. 행크 해네그래프의 비판만을 본다면 그가 비판의 대상으로 지목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잘못된 것 같은 오해와 착각을 일으키게 되지만, 사실 저자들의 의도에 있어서 그렇지 않은 부분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표적인 일예로 행크 해네그래프가 <케내스 해긴>을 비판한 내용과, 그 비판의 대상이 된 케네스 해긴의 글을 함께 올려놓아 보겠다. 아무런 편견이 없이 두 사람의 글을 함께 읽어보고 판단해 보기 바란다.
<케네스 E 해긴>에 대하여 <행크 해네그래프가 비평한 글>
「해긴은 “크리스쳔 센스”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차라리 난센스라고 하는 편이 낫다. 그 증거로, 해긴은 “원숭이 귀신”과 관련된 한 “환상”이야기를 전한다. 해긴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예수와 함께 귀신들에 관해 논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원숭이 귀신”이 쳐들어와서 예수의 말씀이 들리지 않도록 괴성을 질렀다. 시간이 조금 흘러 해긴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입을 닥쳐라.”라고 귀신에게 명하여 상황을 종료시켰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네가 그 귀신에 대해 뭐라고 하지 않았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해긴은 너무 놀라서 “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가 아니라 “하지 않았을 것이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해긴에게 잘못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고 거듭 확인시키셨다. 해긴은 믿을 수가 없었다. 두세 가지 성경본문의 증거를 보여주지 않으시면 믿지 않겠다고 예수님에게 말씀드렸다. 예수님이 “네 신학은 가끔 뒤집힐 필요가 있다.”고 해긴에게 말씀하시고, 미소 지으시면서 네 군데 본문을 증거로 보여주셨다고 한다.
해긴의 원숭이 귀신 이야기에서 더 역설적인 대목은 예수님이 해긴에게 영적인 전쟁에 관해 자세히 알려주시면서, 그분 자신이 말하신 것을 자신은 하지 못하신다는 것이다. 해긴이 없으면 그리스도는 원숭이 귀신 앞에서 너무나 무기력하기만 하다.」(행크 해네그래프. 상게서. pp.61-62.)
만약에 케네스 해긴의 책을 전혀 읽어보지 않은 그 누군가가, 단지 케네스 해긴을 비판한 이상의 글만을 읽는다면, 케네스 해긴은 그 자신을 예수님보다 더 위대한 사람으로 치켜세우는 이단의 괴수와 같은 매우 위험한 사람이거나, 혹은 정신병자 수준의 이상한 사람이라는 착각을 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행크 해네그래프가 이상의 글을 인용했다고 미주에서 밝힌 케네스 해긴의 두권의 책,「조에: 하나님의 생명」과 「나는 환상을 믿습니다」의 글을 그대로 인용해 보도록 하겠다. 양쪽 모두의 글을 꼼꼼히 읽고 성경적인 기준으로 진지하고 현명하게 판단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의 비평을 받은< 케네스 해긴의 책 원문> 인용
「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정복하고 왕 노릇하기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 롬 5:17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 말씀은 거듭나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은 왕과 같은 상태에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영역에서 왕과 같이 다스리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졌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영역에서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우리는 사망과 마귀의 영역에서 빠져나와서 하늘나라의 영역, 즉 초자연적인 영역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람은 종이 되도록 창조된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아래서 왕으로서 다스리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왕적인 존재가 하나님과 같은 형상으로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같은 조건으로 창조되었으며 어떤 열등의식도 없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설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탄생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결정적으로 연합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로운 탄생에 대해서 생각하는 모든 것은 바로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습니다...
새로운 탄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은 에덴동산에서 우리가 가졌던 그 잃어버렸던 권세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요일 3:1-2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요일 5:1-2
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났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가 되었습니다.
요일 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우리는 그들(악의 세력들)을 이기게 될 것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는 그들을 이기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 하나를 이겼다면 우리는 그들 모두를 이긴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이기었다면 왜 나는 그들과 이렇게 문제가 많지요?” 그것은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다스리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당신이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왕으로 다스리는 삶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사탄은 패배 당했습니다. 그는 패배하게 될 것이 아니라 그는 이미 패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사셨을 때 그분은 원수와의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공의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키신 후에 그분은 마귀를 마귀의 왕궁에서 만나셔서 그의 권세와 통치를 그에게서 빼앗아 버리고 죽음에서 승리하고 살아 나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모든 남자와 여자는 예수님과 동일시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탄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만큼 소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대적합니다. 추호도 사탄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그를 대적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을 때 우리는 그분과 동일시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엡 2:2-6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예수님께서 살아나셨을 때 우리도 살아났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동일시되었습니다. 그러면 언제 우리는 왕으로서 다스립니까? 천년 왕국 시대입니까? “저 천국에 가서”입니까? 아닙니다. 지금 이생에서 입니다! 그럴 수 있는 능력은 여기 당신에게 속한 것입니다... 당신의 삶에는 당신이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삶에 대하여 권세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우리는 돌아다니며 왕이 되어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인생에 왕이 아닙니다. 당신이 당신의 인생의 왕입니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
이 세상에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사탄은 이 세상의 신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서 그는 이 세상 신이라고 불리었으며 그는 여기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이 세상의 신이었는데 그가 그것을 마귀에게 팔아버려서 사탄이 이 세상의 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탄의 권세를 벗겨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권세를 우리에게 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앉아서 권세를 달라고 빌었지만 우리는 항상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앉아서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행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1952년 오클라호마 주에서 주님께서 내게 나타나셨던 환상을 나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지금부터 마귀와 귀신들과 귀신들림에 대하여 너에게 말해 주겠다.”
전체는 모든 한 시간 반쯤 걸렸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무릎을 꿇고 있는 앞에 서 계셨습니다. 갑자기 원숭이처럼 생긴 악한 영이 우리 사이에서 팔짝팔짝 뛰며 검은 먼지처럼 보이는 것을 일으켰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지만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 말씀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 영은 팔과 다리를 크게 흔들면서 찢어지는 날카로운 소리로 “아케티 약 아케티 약 아케티 약”하고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케네스 해긴, 「조에: 하나님의 생명」, 김진호옮김. 믿음의 말씀사, 2008, pp.53-70.]
지면관계상 많이 줄이기는 했지만, 이상의 내용이 행크 해네그래프가 케네스 해긴을 비평하기 위하여 인용하였다고 밝힌 케네스 해긴의 책「조에: 하나님의 생명」에 기록된 그 글 내용의 도입부이다. 이어서 행크 해네그래프가 또 참고하였다고 밝힌 케네스 해긴의 책「나는 환상을 믿습니다.」에 수록된 나머지의 내용도 그대로 인용해 보도록 하겠다.
「예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도중, 원숭이처럼 생긴 귀신 하나가 예수님과 나 사이에 끼어들어서는 검은 구름인지 연막 같은 것을 퍼뜨렸다. 그러자 더 이상 예수님을 볼 수 없었다.
그 귀신은 팔다리를 흔들면서 팔짝팔짝 뛰기 시작하더니 날카로운 쇳소리를 질렀다.
“아케티 약, 아케티 약, 아케티 약.”
나는 잠깐 동안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에 나는 예수님께서 계속하여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지만 그때 나는 혼자 생각했다. ‘주님께서는 그가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르실까? 놓치면 안 되는데. 그러나 나는 놓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왜 주님께서 그 귀신이 멈추도록 명하시지 않는지 궁금했다. 조금 더 기다려 보았다. 예수님께서는 귀신이 나타났는지 조차 모르시는 것처럼 말씀을 계속하셨다. 나는 예수님께서 왜 귀신을 쫓아버리지 않으실까 궁금하였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결국 나는 자포자기하여 귀신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조용하거라”고 외쳤다.
귀신은 곧 멈추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검은 연막이 사라지자 나는 다시 예수님을 뵐 수 있었다. 그 귀신은 두들겨 맞는 강아지처럼 낑낑거리고 훌쩍이면서 바닥에 누워 있었는데, 내가 “조용히 있지만 말고 일어나 여기서 나가거라”라고 호통을 치자 일어나 나가 버렸다.
나는 그 때까지도 왜 예수님께서 이 귀신이 훼방하지 못하도록 막지 않으셨는지 계속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물론 주님께서는 나의 이런 생각을 꿰뚫어보고 계셨다. 주님은 “만약 네가 그 일에 대해 무언가 하지 않았다면 나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주여 제가 주님을 오해했음을 알겠나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주님은 정말로 하시지 않으시겠다는 뜻이었군요.”
“아니니라. 네가 시작하지 않았다면 나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주여, 주님께서는 어떤 일이라도 하실 능력을 가지셨나이다. 주께서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지금까지 제가 들어오고 가르치고 느껴온 바와는 다르나이다. 그 말씀은 정녕 저의 마음을 혼란케 하는 것이니이다.”
“때로는 너의 확신이 바뀌어야 할 필요도 있는 것이니라”고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주여, 제 눈으로 주님을 볼 수 있고 또한, 주님께서 지금까지 제게 말씀하시던 목소리처럼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제가 듣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증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나이다. 그 이유는 성경 말씀에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갈 터이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고후13:1)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경 말씀에 의해 증명되지 않는다면 어떤 환상도 또한 어떤 계시도 받아들이지 않겠나이다”하고 말씀드렸다.
예수께서는 나의 말에 노하시기는커녕 부드럽게 웃으시면서 “나는 단지 너에게 두세 명이 아니라 네 명의 증인을 보이겠노라”라고 말씀하셨다.
“저는 신약성서를 150번 완독했으며 부분적으로는 그보다 더 많이 읽은 곳도 많습니다. 그러니 만일에 그런 것이 성경에 있다면 제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아들아, 거기에는 네가 알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느니라. 신약성서를 보면 ‘믿는 자들이 귀신을 내쫓는 기도를 하면 내가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언급된 부분은 한 군데도 없느니라. 만일 그들이 그렇게 한다면 오히려 시간 낭비하는 것이니라.
천사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사탄에게 족쇄를 채우고 바닥이 보이지 않는 지옥으로 던져 넣을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귀신들에게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고 계시느니라.
교회로 보내는 편지에서 신약의 저자들은 항상 믿는 자들에게 귀신에 대해 뭔가 할 것을 촉구하였느니라. 믿는 자들이 사탄을 능가하는 권능을 가져야만 가능한 일인데, 그렇지만 않다면 성경은 사탄에 대해 뭔가를 하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니라.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그러나 너는 성경 말씀에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졌다고 적혀 있으니 귀신에 대해서도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나의 모든 권한을 세상에 있는 교회에로 위임하였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5~18)
“믿는 자에게 따르는 첫 번째 표적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인데 이는 나의 이름으로 귀신을 이기는 권세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라. 나는 귀신을 이기는 나의 권세를 교회에 다 위임했으므로 교회의 머리가 되는 나는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그 권세를 행사할 수 있느니라. 믿음의 형제들에게 편지를 쓸 때, 야고보는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고 하였느니라. 야고보는 너희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귀신을 물리치도록 기도하라고 하지 않고 ‘너희가 사탄을 물리쳐라, 그러면 너희로부터 떠나가리라’고 말했느니라.”
나는 후에 사전에서 ‘떠나가다’라는 단어를 찾아보았는데 그 말뜻의 하나가 ‘공포에 질려 달아나다’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읽으면서 나는 환상 중에 내가 귀신을 꾸짖었을 때 귀신들이 어떻게 도망갔던가를 기억했다. 그때 이후로 나는 그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행사 하였을 때 귀신들을 볼 수 없었다. 공포에 질려 부르르 떠는 것은 그러나 귀신들이 나를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나타나는 예수님을 두려워한 것이었다.
계속하여 예수님께서 “베드로서에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라고 기록되어 있느니라. 이제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저 손을 들고 ‘매를 맞아야 하겠지요’라고 말하겠느냐?
그것은 아니다.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니라.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5:9)라고 적혀 있듯이 너희에게 귀신을 이길 권능이 없다면 귀신을 쫒아낼 수 없을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는 귀신을 이길 권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물리칠 수 있느니라.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4:27)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귀신들이 너희 안에 들어올 어떤 틈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라. 귀신은 너희가 허락하지 않는 한 절대로 들어올 수 없고 또한 너희는 귀신을 이길 수 있는 권세를 가져야만 할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여기 너희 증인 네 사람이 있느니라. 첫째는 나요, 둘째는 야고보이며, 베드로가 세 번째로, 바울이 마지막 네 번째이니라. 이들이 두세 사람이 아닌, 내가 보여 주겠다고 한 네 사람의 증인들이니라. 이들은 내가 지상에 있는 너희들에게 귀신을 물리칠 수 있는 나의 권능을 위임하였기 때문에 믿는 자가 이 세상에서 권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느니라. 그러나 만일 너희들이 이 일에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그 때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는데, 바로 이런 이유로 어떤 대책도 취할 수 없을 때가 많았느니라.
“그때 나는 “주여, 주님께서는 제게 세 가지 유형의 악령들, 즉 이 세상 어둠의 지배자들, 권세, 정사에 대해서만 말씀하셨나이다. 천국에 있는 악한 영은 어떠합니까?”라고 물었다.
주님께서는 “너는 땅에 있는 것들만 신경 쓰도록 하라. 하늘에 있는 것들은 내가 맡겠노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믿음을 굳게 가지라고 권고하시면서 “너의 목회 일에 충실하라. 믿음을 굳게 가져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말씀을 남기신 후 사라지셨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그 목사관의 식당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이러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한 시간 반 가량이나 지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케니스 E. 해긴, 「나는 환상을 믿는다」, 예태해옮김, 예루살렘, 2005, pp.116-121.]
이상에 인용된 케네스 해긴의 말과 그 말에 대한 행크 해네그래프의 비평의 말을 비교해 볼때, 행크 해네그래프의 비평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행크 해네그래프는 케네스 해긴의 말을 곡해함 없이 그대로 정당하게 인용하면서 올바르게 비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행크 해네그래프의 책「바벨탑에 갇힌 복음: 번영신학을 고발한다」에 실린 비평들이 대부분 이상과 같은 수준에 있음을 보면서 매우 큰 안타까움들을 느끼게 된다. 그런면에서 행크 해네그래프의 이 책은 가급적 읽지 않는 것이 좋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읽어야 한다면, 그가 비판하는 내용들의 원 내용들을 정확하게 아는 상태에서 꼼꼼하게 점검해보며, 매우 조심스럽게 읽어내려가야 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해 주고 싶다.
성경도, 어떤 사람의 책이나 설교도 전체적인 상황이나 문맥 등을 무시하고 어느 한 부분만을 보고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 될 것이다.
(시 14: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이상의 성경구절은 하나님께서 계심을 강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어떤 악의적인 목적을 가지고 이 구절의 앞뒤문구들을 잘라내고 중간 부분만을 인용한다면, "성경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식의 엉뚱한 말로 둔갑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부디 성경적인 번영신학에 대한 올바른 시야가 열려지기를 바란다. 주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 안에서 그와 같은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주시기 바란다.
번영신앙과 번영신학은 서로 다른 것이다.
http://cafe.daum.net/gvlove0691/K3nD/888
한국교회여, 번영신앙위에 굳게 서라.
http://cafe.daum.net/gvlove0691/K3nD/952
진짜복음과 짝퉁복음
http://cafe.daum.net/gvlove0691/K3nD/947
번영신학(?)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오해들[I]
http://cafe.daum.net/gvlove0691/K3nD/959
번영신학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오해들[II]
http://cafe.daum.net/gvlove0691/K3nD/963
※이글을 비롯하여 이병천카페의 모든 글들은 출판예정의 글들로써 무단 전제를 금합니다. 필요하신 분은 출처를 밝히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
^^ 감사...
좋은 글 은혜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나도 누리는 믿음을 갖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아멘. 감사^^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수고많이 하셨습니다
목사남은 WLI를 공부하셨나요>
? WLI 란 소리는 들어보았지만, 그쪽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도 없고, 공부를 해 본 적도 없습니다.^^
WLI 가 어떤 단체인가요?^^
좋은자료 잘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