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떼어 본 적이 있다.
근데, 보호자 성명 칸에 할아버지 성함이 써 있는거다.그리고 나와의 관계는
"부"로 되어있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
곰곰 생각해 보니 내가 초등 1학년 때 학교서 아버지 도장을 가져오라고 했을 때
할아버지 도장을 가지고 갔었던 적이 있다.
집에 아버지가 자주 안계셔서 도장은 어디에 두셨는지 아무도 몰랐다.
할 수 없이 할아버지 도장을 들고 갔는데 어느날 담임 선생님이
나보고 아버지 이름을 칠판에 적어 보라는 거다.
아버지 성함을 적었는데 왠지 선생님 표정이 묘하게 변해 있었고
난 그냥 자리에 들어왔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선생님께서 생활 기록부에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이미 적은 후였던 터라 뒤늦게 아시기는 했으나 수정은 안 하셨나보다.
어쩌면 살아온 흔적을 되돌아 보면
난 할아버지를 아버지 삼아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늘 집에 계시는 할아버지는 내가 가는 곳곳을 살피시는
분이었다.
내 이름을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가르쳐 주셨고
그 당시 고교생들 나와서 얘기하는 프로그램에 "우리들 세계"라고 있었는데
그 세계가 한자로 되어 있어 그 한자도 써 주시며 가르쳐 주셨다.
내가 걸스카웃이 되어 학교서 선서식을 하고 밤늦게 올 때도
할아버지께서 마중나오셔서 데리고 가셨고
학력부문 공로상과 우등상까지 한꺼번에 많은 상을 받았던 중학교 졸업식에도 오셔서
사진을 같이 찍어 주셨다.
고등학교 들어가 학교 안가겠다고 뻗대고 있을 땐 할아버지께서 오셔서,
"은경아,내가 무릎꿇을테니 제발 학교 가라.봐 이렇게 꿇었지?"
하셨던 분.
고등학교 1학년 봄방학 때 독일 고모가 3년 간 살았던 예산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가시는 걸 보고
내가 따라 가겠다니까 모두들 말리자,
"은경이 안가면 나도 안간다."
하셔서 두 분 따라 독일이 아닌 예산의 독일 고모 집에서 삼일 밤을 자며 독일 고모부랑 많은 얘기를 나누고 온
적도 있었다.
어느 날 성당에서 세례식 때 동네 어르신의 대부를 서 주시는 모습을 봤는데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그 분이 우리 아버지에게
"자네 아버님이 네 영세 대부였네."
하고 말하시더라고 아버지가 내게 말씀하셨을 때, "제가 그 자리에 있어서 알아요."라고 말씀 드린 적이 있었다.
휴학 복학을 거듭하며 김천여고 2학년을 겨우 마치고 3학년에 진급을 할 1989년 1월 1일 할아버지는
대장암으로 80 의 연세로 세상을 뜨셨다.
너무 늦게 발견 되어 손도 쓸 수 없었지만 시집간 고모들이 모두 와서 일주일 간 마지막 할아버지를 돌보는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돌아가실 듯 해서 할아버지 고향분들이 미리 와서 무릎꿇고 울 준비를 하고 있었고
독일 고모와 독일에 여행갔던 막내 고모가 함께 막 도착했고
너무나 엄청난 일을 앞에 두고 막내 고모가 발을 동동 구르는걸 봐야 했다.
모두들 방 안에서 마루에서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데
한 명씩 가서 할아버지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도록 큰 고모가 도와 주었다.
내 차례가 되어서 할아버지 옆에 갔는데 이런 말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 할배요, 예수님 손 꼭 잡고 가세요."
그러자 큰 고모가 옆에서,
"아버지, '은경아, 고맙다.'하세요."
그러셨다.
그리고 나서 몇 명이 더 들어갔다 나오고 좀 있다가 큰 고모의 대성 통곡 소리가 들렸고 나머지 빼곡히 앉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아이고,아이고.."
를 외쳤다.
3일간 장례를 치르는 동안 설거지는 내가 도맡아서 했다.
왜냐면 상 들고 시중들며 왔다갔다 하는 일을 하기가 싫어서 한 곳에만 붙어있었던 거다.
그랬더니 밥을 먹은 모든 사람들이 빈그릇을 갖다주며 내게 인사를 했다.
곡하는 소리도 자꾸들으니까 사람들마다 특징과 개성이 드러나서 내 동생과 사촌 동생들 모인 자리에서
엄마,작은 엄마,고모들 곡하는 사람들 하나하나 돌아가며 흉내를 내기도 했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장례는 마무리 됐고
할머니가 제사를 계속 드리다가 할머니 돌아가신 해인 1998년 설날부터 우리집에서 두 분의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결혼하고 아이 낳아 기르다가 한 번씩 엄마가 부르면 아이를 데리고 할아버지 제사에 가서
탕국을 끓이기도 한다.
첫댓글 할아버지는 할아버지고 아버지는 아버지죠...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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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시군요..피고지고님...^^
아바타 영화 같군요. 피고지고님. 그 영화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종교가 [범신론]이라고 전 생각했거든요.
은유로 읽을 수 있어요. 더바님. 그 부분은 아주 중요해요. 하나로 이어주는 그 큰 나무. 모두의 힘을 모아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그 나무. 은유로 읽을 수 있어요.
그래서 가톨릭교회에서는 못보게 했어요. 전 이건 좀 아니다 싶었습니다. 자기 종교의 교리에 쪼매 위배된다고 관람을 못하게 하다니... 이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두 가털릭 신자이지만 교황청에서 잘못 판단했다고 ...
참 좋은 할아버지셨습니다. 저두 이런 할아버지이고 싶습니다. 근데 손녀들이 자주 올랑가 모르겠십니다.
전화를 자주 하시면 되잖아요...화상전화도 있다고 하던데요.그리고 더바님은 어떤 방법을 통해서도 그런 할아버지가 되실 거예요.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그런 분이시잖아요.
사랑받고 자란 아이는 어딜 가나 잘 살아낼 수 있어요. 해달별님은 저토록 사랑받고 자랐으니 기본은 단단한 겁니다. 무슨 일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어요.
감사합니다,희야님. 제가 희야님께 배운 게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