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가 쓴 노란색의 자서전을 가을이 다 갈 때까지 읽어내지 못했다/정유화
나는 은행나무가 쓴 자서전의 108쪽을 읽던 중이었는데, 그 가운데 부분에 이르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어린이나 어른이나 강아지나 버스나 할 것 없이 잠깐 잠깐씩 던져준 그대들의 눈길이 낸 몸에 스며들었습니다. 그대들과 내 눈길 사이에 어떤 길이 나 있기에 나의 눈길도 그대들의 몸속으로 스며듭니까.” 또 몇 줄을 천천히 걸어가다 보니 “눈빛이 스미면 몸이 가벼워집니다. 나는 지금 너무 몸이 가벼워 콩새 한 마리 품을 수가 없습니다. 그 기억만을 품을 뿐입니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은행나무가 ‘품을 수 없다’라는 은행나무의 말 내부로 들어가 그 말이 마련해준 노란 벤치에 앉아 며칠씩 굶어가며 그 의미를 캐고 있다.
<시 읽기 70> 은행나무가 쓴 노란색의 자서전을 가을이 다 갈 때까지 읽어내지 못했다/정유화
정유화의 시와 언어에는 ‘가시’가 없습니다. 저는 방금 쓴 ‘가시’라는 말을 박해석 시인의 시 <가시>에서 빌려왔습니다. 이 시를 보면 “말에 가시가 있는 시는/좋지 않다”는 인상적인 말이 작품 속의 선배시인의 입을 통해 시인의 시론처럼 발화되고 있습니다. 매우 인상적인 시론임에 틀림없습니다.
‘말에 가시가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옹졸함, 교만함, 사디즘, 원망, 분노 등과 같은 아직 ‘발효’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나 마음의 메커니즘이 활약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시쓰기를 세속적인 전략으로 무기처럼 생각하는 자세가 지배적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위의 시가 수록된 정유화의 시집 『청산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의 <자서>를 보면 그는 누군가가 호젓한 즐거움과 재미를 맛볼 수 있도록 “시의 내부를 단장하는 일”에 열중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시의 내부를 단장한다는 것은, 삶의 내부를 단장한다는 것이자 언어의 내부를 단장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단장한다’는 말을 들으면 불현 듯 존재의 내부가 환해지고 영혼이 정갈해지며 주위가 단정해지는 느낌이 들면서 기분이 좋아집니다. 단장한다는 것이야말로 존재의 거울을 계속하여 닦는다는 것이며, 자발적인 이타성의 공간을 확장해 나아간다는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위의 시 <은행나무가 쓴 노란색의 자서전을 가을이 다 갈 때까지 읽어내지 못했다>는 제목이 아주 깁니다. 제목을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읽는 것만으로도 성급했던 마음이 차분해지고 세상을 마구 건너뛰려던 조급증이 얼마간 가라앉게 됩니다.
이렇게 긴 제목을 가진 위 시는 발상부터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은행나무의 전 생애를 은행나무의 자서전으로 등식화한 것이 그렇습니다. 자서전은 몇 마디 말로 요악될 수 없는 것이고 보면, 은행나무의 전 생애 그대로가 모두 은행나무의 자서전을 이루는 한 질의 책이자 텍스트일 것입니다.
위의 시에서 은행나무의 전 생애를 한 질의(혹은 한 권의) 자서전으로 생각하는 시인은 그 책을 읽어나가는데 골몰합니다. 그런 가운데 그는 책으로부터 여러 가지 목소리를 전해 듣습니다. 모든 내용이 다 인상적이지만 특히 자서전의 108쪽에서 책장을 더 넘기지 못할 만큼 인상적인 내용을 발견하고 그는 빨간 볼펜을 꺼내 굵은 밑줄을 그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전율 속에서 읽던 책 앞에 멈춰 섭니다. 그가 사로잡혀 밑줄 친 문장이란,
어린이나 어른이나 강아지나 버스나 할 것 없이 잠깐 잠깐씩 던져준 그대들의 눈길이 내 몸에 스며들었습니다. 그대들과 내 눈길 사이에 어떤 길이 나 있기에 나의 눈길도 그대들의 몸 속으로 스며듭니까
라는 것입니다. 직접 인용의 방식으로 위 시 속의 문면에 소위 ‘지배소dominant’가 되어 나타난 이 문장 앞에서 독자인 우리도 시인과 더불어 책읽기를 멈추고 사색의 시간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노현자의 전언 같은, 잠언의 한 부분 같은, 경전의 은유 같기도 한 위의 문장은 ‘음미’하지 않고 뛰어넘을 수 없는 거친 세상의 녹색지대와 같습니다.
시인이 아니더라도 단풍든 은행나무 앞에서 사람들은 그 색과 모양에 매료되어 감탄의 눈길을 무한으로 보냅니다. 어찌 사람들뿐이겠습니까? 위의 인용부분에서 말했듯이 강아지도 버스도, 또다른 존재들도 감탄의 눈길을 그렇게 보낼 것입니다. 시인 최승호는 그의 시 <가을날의 은행나무>에서 노랗게 단풍든 은행나무 앞에 모자 벗고 느낌표로 서 있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무슨 과학적 원인에 의하여 노랗게 단풍든 은행나무 앞에서 우리가 이렇게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고 황홀해하는지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단풍든 은행나무야말로 무상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인간세상의 손님이라는 점입니다.
위에서 시인이 말했듯이 이런 은행나무는 세상의 감탄 섞인 눈길을 품어 안으며 더 노랗게 물이 들고, 그렇게 익어가는 은행나무의 눈길을 몸속에 받아들이며 세상의 뭇 존재들도 그들이 내면을 노란 은행나무처럼 단장해 갑니다. 이런 세상과 은행나무 사이에 ‘길’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위 인용문 속의 발화자인 은행나무는 말합니다. 그렇겠지요. 감탄과 애정과 관심 그리고 배려와 존경과 아낌의 마음을 주고 받는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그곳이 어디든지 ‘길’이 나 있겠지요. 그것을 ‘교감의 길’이라고 말하면 될까요? 아니면 ‘화응의 길’이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교감과 화응 속에서, 존재는 열리면서 익어갑니다.
시인은 앞의 문장에 밑줄을 치고 가까스로 해독을 마친 다음, 다시 은행나무의 책을 읽어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는 얼마 못가서 다시 빨간 연필을 꺼내 밑줄을 치고 맙니다. 그가 다시 밑줄친 문장은,
눈빛이 스미면 몸이 가벼워집니다. 나는 지금 너무 몸이 가벼워 콩새 한 마리 품을 수가 없습니다. 그 기억만을 품을 뿐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앞의 문장보다 조금 더 어렵습니다. 시인과 더불어 우리들도 이 어려운 문장 파에 멈춰 서서 조금 더 심각하게 사색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눈빛이 스미면 몸이 가벼워진다니, 그것이 무슨 뜻일까요? 해석은 해석자의 몫이고, 감동도 감동하는 사람의 몫이니 이 말의 뜻을 주관적으로 적어봅니다. 그것은 감탄과 사랑의 눈길을 받으면 존재는 읽어가지만, 그 익어감은 늙어감을 뜻하는 것이라는 말로 들립니다. 익어감의 상승하는 기운이 늙어감의 하강하는 기운으로 기울어질 때 우리는 우울하지만 그것이 생의 신비이고 묘유이고 원리라면 그 앞에서 넓고 그윽하고 담담한 마음이 공간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익지 않고는 제대로 늙을 수도 없는 것이라면, 익음이야말로 늙음을 잉태할 수 있는 모성이니 그것은 축복의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맥락에서, 위의 문장을 다음과 같이 이어서 해석해봅니다. 이제는 넘치는 사랑과 교감으로, 한없는 익음으로, 마침내 늙음에 도달하여, 더 이상 콩새 한 마리도 품을 수 없을 만큼 가벼워져, 겨우 이전의 기억만을 무게 없는 그림처럼 간직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화려한 가을의 은행잎을 다 떨어뜨린 초겨울의 은행나무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그 은행나무는 비극적 정조만을 환기시키지 않습니다. 한편으로 늙음의 불모성을 느끼게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늙음이 무심함을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축제의 날과 같은 화려한 가을의 물오른 단풍의 시간도 매혹적이지만, 그 모든 장식과 그리움의 물기를 넘어선 늙음의 무력(?)함도 초탈을 느끼게 하여 매력적입니다.
시인은 지금 이 문장의 해독이 끝나지 않아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은행나무가 “품을 수 없다”고 한 말에 걸려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앞에서 한 우리의 해석은 너무나 거칠고 단호했는지도 모릅니다. 시인이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끼리 해석을 하며 여기까지 글을 이끌고 왔으니 말입니다.
위 시를 보면 시인은 아직도 발걸음을 떼지 못한 채 그 문장 앞에 서 있습니다. 서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벤치에 앉아 해결의 날을 기다리며 장기전을 폅니다. 그는 자신의 이런 모습을 “나는 ‘품을 수 없다’라는 은행나무의 말 내부로 들어가 그 말이 마련해준 노란 벤치에 앉아 며칠씩 굶어가며 그 의미를 캐고 있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품을 수 없다”는 말을 대상화시키지 않고 아예 그 말의 몸속으로 한몸이 된 듯 들어가 그말이 뜻하는 바를 직접 몸으로 체득하고 나오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품을 수 없다”는 말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도 흥미롭지만 “그 말이 마련해준 노란 벤치에 앉아 며칠씩 굶어가며 그 의미를 캐고 있다”는 상황도 아주 재미있습니다. 말이 마련해준 벤치라니요? 내면이 잘 단장된, 의미와 울림이 풍성하고 깊은 말은 그 속에 사람들이 머물면서 이 의미와 울림을 맛볼 수 있는 여유있는 벤치를 마련하고 있나 봅니다. 어떻게 하면 누구든 찾아와 며칠씩 굶어가며 그 말이 마련해준 벤치에 앉아 사색하고 감동할 수 있는 문장을 만들 수 있을까요?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하고 싶은 일임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이 건조한 기호가 아니라 풍요로운 우주임을, 소비되는 도구가 아니라 존재하는 생명임을, 그리고 사전 속의 차가운 개념이 아니라 생성과 깃듦이 가능한 품안임을 알 수 있습니다. 훌륭한 말은 훌륭한 건물 못지 않게 훌륭한 공간을 그 속에 품고 있습니다. 그 공간은 물리적 공간 이상으로 살림의 공간으로 작용할 수 있으니, 언어의 세계는 무형의 집이자 생태적 처소입니다.
이런 집을 잘 단장한 정유화의 위 시에서 먼저 시쓰기의 새로운 방식을 만나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은행나무의 아름다움에 깃든 결코 단순하지 않은 의미와 울림의 중첩성과 복합성을 만나봅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멋진 존재의 방에 찾아 들어가서, 그들이 마련해준 벤치에 앉아 며칠씩 굶어가며 사색할 수 있는 ‘낭만적인 시간’을 갖고 싶다는 충동에 빠지게 됩니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