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다킹신부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김유철 신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통해 전세계에 말씀하십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는다”(16,16). 믿음이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는 것이고, 세례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거듭 태어나는 사람은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일(合一)을 말합니다. 아울러 하느님 나라는 걸림이 없고 부족함과
어두움이 없는 완전한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통해 아픈 자를 낫게 합니다.
이 당시 사람들의 생각은 죄를 지어서 아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아픔을 치유함으로써 죄의 걸림돌을 치워주신
것입니다. 걸림돌이 치워진 사람은 얼마나 기쁜 삶을 살겠습니까? 하느님 나라는
걸림돌이 없는 나라입니다. 기쁨이 넘치는 나라이지요. 예수님은 이런 나라의
주민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민의 조건은 당신의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가르침의 내용이 가지고 있는 힘은 너무나 커서 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뱀을 쥐어도 뱀이 꼼짝을 못합니다. 악마에게서 흘러나오는 죄의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가르침은 힘이 있고 참된 것입니다.
바로 전능하신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살아 숨 쉬는 나라가 바로 하느님 나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 강물처럼 넘쳐
흐르기를 바라십니다. 바로 당신을 믿는 우리 인간들을 협력자로 삼아서 말이지요
성 마르코
-우딘 퀘닉 브리커-
바오로의 선교 여행과 관련하여 여러 번 성경에 등장한 성 마르코는
오랫동안 마르코 복음의 저자로도 여겨졌지만, 역사비평학자들은
그가 마르코 복음사가와 동일 인물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는 예수님이 가르치시던 당시에는 아마 10대 소년이었을 것이다.
성경에 쓰인 이야기들은 너무 옛날 일이어서 당시의 상황이라든가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보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들의 행적이 몇 천 년 동안 전달되어 왔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10여 년이 흐른 뒤인 46년경 마르코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첫 번째 선교 여행에 동행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코는 바오로와 다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마르코와 바오로는
그 후로도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고 2차 선교 여행부터는 동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마르코와 바오로는 화해를 했던 것 같다.
마르코는 왜 집으로 돌아가려 했을까? 바오로는 무엇 때문에 그토록 화를 냈을까? 이런 질문들도 흥미진진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화해했는지가 더 궁금하다. 누가 먼저 화해를 청하느냐는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믿음의 생활
-이세영 수녀-
어느 본당에서 피정 강의를 하던 중 들은 이야기입니다.
70세가 넘은 할머니가 뒤늦게 세례를 받고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해서 생긴 일입니다. 다른 단원들의 활동보고를 들은 할머니는 나름대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 자신도 묵주기도를 많이 했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 여긴 단원들이 처음 묵주기도를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많이 바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말에 할머니가 비법을 공개하였는데 그것이 참으로 기발합니다. 할머니가 묵주기도를 가만히 연구해 보니 성모송만 되풀이하는데 똑같은 것을 바보스럽게 열 번씩 반복할 필요가 있나 싶어 처음 한 번만 성모송을 하고 나머지 9번은 ‘그기 그기고’(똑같다는 의미의 경상도 사투리)라고 했답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모두 한참 웃고 난 뒤 어느 할머니 단원이 말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자면 ‘그기 그기고’ 다섯 자씩이나 할 필요가 있느냐며 차라리 ‘이하동문’이나 ‘상동’을 반복하면 묵주기도를 더 많이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해 모두가 다시 한 번 웃었다고 합니다.
저 또한 이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웃었지만 한편으론 우리의 모습을 다시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믿음의 생활을 해오고 있다고 자처하면서도 실제로는 처음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한 할머니의 묵주기도 활동보고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무감에 마지못해 주일미사만 참례하고 다음 주일까지 일상 속 나의 신앙생활은 덮어두는 그런 소극적인 생활을 해오지는 않았는지 다시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맡기신 사명이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도 맡겨진 것이라는 사실을 함께 되새겨 봅니다. 오늘 마르코 축일을 맞이하여 그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였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다운 모습으로 사명에 맞는 적극적인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길 바랍니다.
<무대 뒤의 마르코>
-양승국신부-
크게 성공한 한 CEO가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자수성가를 이룬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밑바닥에서 차근차근 밟아 최고경영자까지 도달한 사람이었기에, 무척이나 겸손했습니다. 아랫사람들이 겪는 고충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어깨에 힘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가 일관된 겸손을 유지하게 된 데는 자신의 사무실에 걸려있는 한 ‘특별한 그림’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 특별한 그림의 주인공은 한 마리 거북이였습니다. 거북이 한 마리가 높다란 담 위에 앉아있는 조금은 이상한 그림이었습니다. 그 겸손한 사업가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 그림을 바라보면서 이런 묵상을 거듭한다고 합니다.
“저 거북이, 혼자 힘으로는 절대로 저 높은 벽 위까지 올라갈 수가 없다. 그 누군가가 저 거북이를 거기에 올려놓았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야. 내가 비록 지금 이렇게 성공했지만, 이 성공은 나 혼자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절대로 아니야. 그 누군가의 도움과 협력에 힘입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능했던 거야.”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같은 방식으로 생각해야만 합니다. 보름달이 뜰 때 사람들은 흔히 달 자체에서 빛이 발산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달은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기 때문에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이 빛을 발산한다면 하느님의 광채가 우리 삶을 비추기 때문에 빛이 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참으로 겸손했던 한 인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입니다. 그는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란 큰 인물 뒤에 철저하게도 감춰진 인물입니다.
마르코는 바오로 사도의 협조자인 동시에 베드로 사도의 통역관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사도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가르친 바를 충실히 기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르코는 복음 선포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안티오키아로 데려다가 45-49년경에 이루어진 제 1차 전도여행에 참여시켰습니다.
긴 여행을 하다보면 마음이 맞지 않아 서로 길을 갈라서는 경우가 발생하지 않습니까? 마르코 역시 무슨 이유였는지는 모르지만 여행 도중에 전도를 그만두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이런 이유로 제2차 전도여행 때 바오로 사도는 마르코를 데려가지 않습니다. 할 수 없이 마르코는 바르나바와 함께 키프로스 섬으로 가서 전도를 하기도 합니다.
그 후 마르코는 로마로 가서 베드로 사도를 도와 교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바오로 사도가 고초를 겪을 때, 과거의 갈등을 뒤로 하고 극진히 그를 보살폈습니다.
사도들 사이에서도 이런 갈등이 벌어졌다는 것, 생각해보니 재미있기도 하고, 인간미가 풍기기도 합니다.
대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가 이룩한 위대한 복음 선포 사업, 그 뒤에는 충실한 비서이자 보좌관인 마르코의 협력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몫이 있습니다. 누군가 무대 전면에서 빛을 발할 때, 또 다른 누군가는 어두운 무대 뒤에서 비지땀을 흘립니다.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가 복음 선포의 제1선에 서서 용감히, 큰 목소리로 외치는 사람들이었는가 하면, 마르코는 뒷전에서 묵묵히 뒷바라지에 충실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마르코의 주된 업무 가운데 하나는 기록하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일거수일투족을 꼼꼼하게 기록했습니다. 초세기 신자들의 요청에 의해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세밀하게 기록했습니다. 세심하게 사도들의 일정을 점검 했습니다.
꼭 해야 할 일을 챙겼습니다. 사도들의 방패막이가 되었습니다. 겸손했기에, 순명했기에,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마르코를 베드로 사도는 유난히 아꼈습니다. 그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소아시아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마르코를 ‘내 아들’이라고 칭했습니다.
"겸손한 삶 자체가 최고의 복음 선포"
-이수철신부-
저는 마음 답답하고 암울하면
거의 본능적으로 눈 들어 하늘을 바라봅니다.
구름 가득한 하늘 빈틈 사이로 쏟아지는 푸른 하늘과 햇살에
순간 마음 환해지는 느낌도 듭니다.
새삼 하느님 찾는,
자기 초월의 욕구를 지닌 인간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푸른 하늘, 밝은 햇살이 상징하는바 희망의 하느님입니다.
진정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
푸른 하늘, 밝은 햇살과도 같아
마치 사막 같은 공동체의 오아시스와도 같은 존재들입니다.
이들은 그대로 부활하신 주님의 생생한 현존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들이 늘어나야
비로소 청정한 수행자들의 도장인
수도승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이들의 우선적 특징은 겸손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삶은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는 태도에서
가시적으로 환히 드러나며,
이런 이들이 모인 공동체가 진정
코이노니아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이들은
다음 베드로의 확신 넘치는 말씀에 그대로 공감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강한 손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십니다.”
겸손한 자들이 받는 축복이 얼마나 큰지요.
애당초 하느님을 떠나면 겸손도 불가능합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겸손해 질 수뿐이 없습니다.
약한 것 같지만 실로 강한 자들이 겸손한 자들이니
내적 힘의 뿌리를 곧장 하느님께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절로 겸손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
끊임없이 정신을 차리고 깨어 살아갈 때 겸손입니다.
빈틈만 생기면 자기(Ego)의 교만이 비집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또 겸손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워가면서
성장해가는 은총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고난을 겪을 때 마다
모든 은총의 하느님께서는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고
굳세게 하시고
든든하게 하시고
굳건히 세워주십니다.
그러니 겸손한 자들 보다
더 강하고 튼튼한 내적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겪는 모든 고난들을
은총과 겸손의 계기로 활용하여
더 열렬히 하느님을 찾기 때문입니다.
하여 이런 겸손한 삶 자체가
최고의 복음 선포임을 깨닫게 됩니다.
좋은 말의 선교 시대는 끝났습니다.
사막 수도승 전통에 충실했던 모든 수도승들에게는
하느님을 찾는 단순하고 소박한 삶 자체가 복음 선포였습니다.
믿음과 겸손이 온 몸으로 표현될 때
누구도 그 앞에서는 승복하기 마련입니다.
권위는 밖에서 덧붙여진 뭐가 아니라
이런 내적 겸손의 삶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유명한 미국의 심리학자 앨버터 메라비언 벅사는
메시지의 전달 요소에서
내용은 그 중요성이 겨우 8%밖에 안 된다는
연구 결과를 내 놓았다 합니다.
표정이 35%,
태도가 20%,
그리고 목소리가 무려 38%를 차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온 몸을 통해 표현되는 삶이기에
겸손한 삶 자체가 얼마나 복음 선포에 중요한 지 깨닫게 됩니다.
표정에, 목소리에, 태도에
그대로 겸손이 배어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열한 제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오늘 주님의 다음 복음 선포 명령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결과에 개의치 말고
내 온 세상인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겸손한 삶 자체로 복음 선포 과정에 충실 하라는 말씀입니다.
겸손한 삶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증언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고맙게도 제자들에게 하셨던 것과 똑같이
우리와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우리가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황순찬-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나는 불경스러운 상상을 했다. 복음 내용을 홈쇼핑 광고로 각색해 보면 어떻게 될까? 이를테면 ‘복음상품 4종 세트’. 믿음을 구입하는 분께는 선착순으로 기적·구마(귀신 쫓음)·방언·치유 상품을 세트로 증정하겠다는 식으로 말이다.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의 선포는 원래 예수 체험을 근거로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다분히 신앙 실천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기적을 보고 따르는 무리를 경계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병자가 기적적으로 치유된 것보다는 병자를 만나고 그들을 수용하는 모습에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바라신다.
한편 홈쇼핑식 신앙을 위해 과거의 선포를 왜곡시킬 경우, 기적적인 내용에 초점이 맞춰지게 되고 그 폐해는 고스란히 순진한 신자들에게 돌아간다. 실제 홈쇼핑처럼 중독증세를 일으켜 현실에서도 기적과 용한 성직자를 쫓게 된다. 지역에서 정신보건사업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가정이 왜곡된 신앙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본다. 일상생활을 전폐하고 교회에만 집착하여 가산을 탕진하고 가정이 파탄난 경우도 있으며, 자녀가 발병하여 정신과 치료가 필요함에도 믿음과 기적적인 치유에 집착하여 증상을 더욱 악화시키고 사회적 관계를 단절시키는 경우도 있다. 또 거의 매일 밤 교회에서 철야를 하면서 증상 악화와 재발을 거듭하는 정신과 환자들도 보게 된다. 이들은 사회생활에 대한 경시, 타종교(타교단)에 대한 배격, 타인과의 대화 단절을 공통적으로 보이며, 해당 교회의 성직자들 또한 이를 방관하거나 부추기고 있다.
어쩌면 참 기적은 기적과 축복만을 지향하는 삶에서 출애굽(exodus)할 때 경험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예수님은 아직 믿음이 구체화되지 않은 제자들에게 기적보다 우선하여 천지사방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라고 하셨다. 그 말씀대로 제자들은 별의별 사람들을 만나 울고 웃는 가운데 참 기적을 체험한다. 예수님을 다시 만난 것이다. 생전에 따르던 예수님을 이번에는 사람들 속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유광수신부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은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이다. 온 세상이라고 했으니까 어느 곳에 가든지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복음을 전해야할 장소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곳이 곧 복음을 전해야 하는 곳이다. 누구에게 전하는가? 모든 피조물에게 전해야 한다.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전해야 한다. 무슨 말인가? 그리스도인은 그 사람 자체가 복음이 되어야 한다. 즉 복음으로 무장된 사람이다. 복음은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도 사랑하는 것이다. 즉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자연을 가꾸어 환경을 더럽히지 말아야 하고 동물들을 사랑해야하며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라도 정성껏 돌보고 잘 관리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첫째,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 내는 것이다." 마귀를 쫓아낸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마르코 복음에서 마귀란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마르 8,33)사람이다. 마귀를 쫓아 낸다는 것은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일을 생각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다.
둘째, 새로운 언어로 말하는 것이다. 복음은 하느님의 언어이지 인간의 언어가 아니다. 복음을 알게 되면 늘 새로운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한 가지 뜻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뜻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읽을 때마다 다른 언어로 즉 새로운 언어로 다가 온다. 그래서 복음을 아는 사람은 상황에 따라서 늘 새로운 언어로 말을 하게 된다. 우리가 새로운 언어로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복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셋째,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는다. 뱀을 집어 들어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는다는 말은 뱀이란 "유혹하는 이"를 말한다. 복음으로 무장한 사람은 아무리 유혹을 해도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항상 하느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는다는 것은, 독이란 나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들어도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 복음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이 나를 모함하고 미워하는 말을 한다 하더라도 크게 상처를 입지 않는다. 금방 용서하게 되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상처로 남지 않는다.
넷째,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라는 말은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 곧 병자이다. 모든 병은 하느님을 떠났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하느님을 알려주고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 오게되면 병이 낫는다. 믿는 이는 이런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이런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런 표징들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사랑하는 삶이 복음입니다.
-강영구신부-
오늘은 복음사가 마르코 축일입니다.
그가 남긴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 마르코의 향기입니다.
마르코 복음을 통해서 오늘 우리는 그가 사랑했던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습니다.
사랑은 향기입니다. 그 향기는 멀리 그리고 오래 동안 퍼져 나갑니다.
마르코의 향기는 이천년이 지난 지금도 시들지 않고 더 큰 감탄과 감격을 자아냅니다.
마르코 복음은 예수께 대한 마르코의 사랑 고백서입니다.
당신은 버스터미널에서 하루 종일 “예수 천당! 불신 지옥!”하고 소리치며 전도에 열을 올리는 사람을 본적이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은 칭찬할 만하지만 복음 선포는 입으로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꽃들은 소리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침묵하는 꽃들의 향기는 멀리 그리고 널리 퍼져갑니다.
보는 사람마다 그 아름다움을 감탄하고 은은한 향기에 감격합니다.
나비와 벌들이 감미로운 향기에 끌려서 날아옵니다.
온 세상에 두루 복음을 선포해야 할 소명(召命)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스승 예수께 귀의(歸依)하고 그 분을 사랑하면 누구나 감미로운 향기 풍기는 아름다운 꽃이 됩니다.
당신의 맑고 밝고 아름다운 삶이 또 다른 복음서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당신의 아름다운 삶을 통해서 이웃과 형제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一明)
예수님의 정체
-정필종 신부 -
오늘은 마르꼬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실상, 마르꼬 복음을 저술한 분이 누구인지 우리로서는 현재 잘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복음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약간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히브리어와 아랍어 그리고 유다인들의 풍습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다계 그리스도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리스어로 집필했을 뿐 아니라 이방인의 풍습까지 아는 것으로 미루어 해외 유다계 그리스도인이었다고 짐작해 봅니다.
그는 폭넓고 개방적인 사람이라 민족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온 인류의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온 세상 모든 민족이 복음을 믿어 다함께 기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유다인들보다는 오히려 이방인들이 복음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까지 합니다(마르 12,9). 그는 이방인들을 신앙인의 본보기로 제시하기도 했습니다(7,28; 15,39).
마르꼬 복음사가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갖은 우여곡절을 겪은 제자들조차도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 바로 앞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부활한 모습을 본 사람들을 사도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마르 16,14).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니 이 방송을 듣고 계신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올바로 이해하고 계십니까? 아니 이해하려고 노력하십니까? 막상 고백하려고 하면 어떻게 고백해야 할지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대로 대답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이 순간이나마 다시금 그분이 누구신지, 특별히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 한 번쯤 생각해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마르꼬 복음사가께서도 우리를 그 길로 초대하기 위해 복음을 쓰셨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마르꼬 복음사가가 자신의 복음을 저술할 당시인 A.D. 70년경은 초월적인 예수님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이 극성을 부리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마르꼬는 그러기에 앞서 믿는 이들이 예수님의 공생활에 주목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나 부활하신 다음의 모습에는 별반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그분이 이 세상에서 무슨 말씀과 어떤 일을 하시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바라보기를 원했습니다.
마르꼬 복음은 우리가 평상시 묵상하기에 적합하다고 여겨집니다. 특히나 사건과 말씀을 간결한 문체로 우리에게 전달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상상력을 극대화해서 그분에게 나아가는데 매우 좋은 경우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마르꼬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평상시에 당신의 신분이 드러나는 것을 상당히 꺼리신 것 같습니다. 어쩌다 누군가 당신의 정체를 알아차린 때에는 곧 함구령을 내리십니다(1,24.34; 3,12; 5,43; 7,36; 8,26.30; 9,9). 이는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지만, 결국은 예수님 당신에 대한 몰이해에서 오는 경우를 경계하셨던 듯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제자들을 따로 불러 교육시키셨던 장면(4,10-25; 5,37-43; 6,45-52; 7-17-23 등)이 나오는 데, 그들조차도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복음사가는 전해줍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님에 대한 몰이해는 계속됩니다. 우리가 자주 범하는 잘못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많은 단견과 편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너무도 자주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는 마치 정리된 듯이, 잘 알고 있는 듯이 뒤로 내팽개쳐 버립니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은 예수님의 삶이 궁극적으로는 부활에 이르는 삶이지만, 우선적으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가는 삶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상입니다.
“어느 누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그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사실 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와]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을 구할 것입니다”(8,34-35). 이는 당시에 자행되고 있던 박해의 와중에서 끝까지 신앙을 간직하도록 격려하고자 하는 복음사가의 의도가 있었습니다.
나아가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현재의 신자들에게도 자기희생을 통한 나눔의 영성을 권고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자기희생이 없는 신앙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씀이겠습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위한 기복적인 신앙은 더 이상 신앙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마르코. 라틴어 Marcus.영어 Mark
복음사가(福音史家). 그의 이름을 딴 마르코 복음서가 있다.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130년경 별세)에 의하면 마르코는 베드로의 통역이었는데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해서 가르친 것을 기억나는 대로 충실히 기록했다고 한다(에우세비오, 교회사 3, 39,15).
신약성서에는 요한 마르코라는 인물이 열번 나오는데 요한은 이스라엘식 이름이고 마르코는 로마·그리스식 이름이다.
그는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에 살았으며 그 집에 그리스도 교인들이 모이곤 하였다(사도 12:12).
바울로와 바르나바를 따라(사도 12:25) 45-49년경의 1차 전교여행을 함께 했는데(사도 13:5) 키프로스까지 동행한 후
그 다음 목적지인 소아시아의 주요지역 여행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다(사도 13:13).
이에 바울로가 그를 못마땅히 여긴 나머지 50-52년경의 2차 전교여행 때 동행하기를 거부하자
마르코는 사촌인(골로 4:10) 바르나바와 함께 키프로스섬으로 가 전교하였다(사도 15:37-39).
그러나 53-58년경의 3차 전교여행 때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바울로가 에페소에서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마르코는 바울로 곁에 있어서 위로가 되어 주었다(골로 4:10, 필레 1:24).
한편 바울로가 마지막으로 로마에 투옥당해 있을 때 디모테오에게 마르코를 데려오도록 부탁한 적이 있다(2디모 4:11).
베드로의 일행으로 로마에 있었던 마르코는 베드로에게 ’나의 아들’(1베드 5:13)이라 여겨질 정도로 친근한 동료였다.
그리스도교 회화에서 마르코는 대개 복음서를 지니고 날개 달린 사자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사자의 모습은 세례자 요한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마르 1:3)로 표현한 데서 유래하는데 예술적 전승은 그 소리를 사자의 울음으로 비유하였다.
날개는 네 개 달린 ’생물체’에 관한 에제키엘의 환시를 네 복음사가에 적용시켜 이해한 데서 비롯한다.
전승에 의하면 마르코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를 역임하였고 거기서 순교하였다고 전한다.
축일은 4월 25일이며 9세기이래 지내오고 있다.(가톨릭대사전에서)
네 복음서를 집필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냥 작품만 내놓았습니다.
요즘 우리들과는 달리 그들에게는 작품의 내용이 중요했지 지은 자신의 이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사실과는 다른 수많은 복음서들이 생겨나자 가짜 복음서들을 배격하고 참 복음서들을 지키고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것과
복음서들을 서로 구별할 필요성이 생겨서 비로소 누가 복음서들을 지었는지, 곧 복음서의 필자들을 거론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복음서를 집필하였는지 처음으로 밝힌 사람은 소아시아 지방의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였습니다.
그는 130년 경에 사망했는데, 평소에 요한 원로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들었다고 했습니다.
즉, 마르코는 베드로의 통역이었는데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해서 가르친 것을 기억나느 대로 충실히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이 마르코에 대한 성서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신약성서에는 요한 마르코라는 인물이 열 번 나오는데, 요한은 이스라엘식 이름이고 마르코는 로마-그리스식 이름입니다.
그는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에 살았으며 그 집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모이곤 하였습니다.(사도 12, 12)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를 안티오키아로 데려갔다가(사도 12, 25) 45-49년경의 바오로의 1차 전도여행을 함께 했는데(사도 13, 5)
마르코는 도중에 전도를 그만두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사도 13, 13)
이에 바오로는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50-52년경의 2차 전도 여행 때에는 함께 가지 않자
마르코는 바르나바와 함께 키프로스 섬으로 가 전도를 하게 됩니다.(사도 15, 37-39)
그러나 53-58년 경 3차 전도 여행,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마르코는 바오로 곁에 있었습니다.(필레 24; 골로 4, 10)
그런가 하면 바오로가 순교한 다음 그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쓴 디모테오서 4장 11절에서는 바오로가 디모테오에게 마르코를 데려오도록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끝으로 60년대 초 로마에서 집필된 베드로의 첫 번째 편지 5장 13절에는 마르코가 베드로의 일행으로 로마에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신약성서의 증언과 파피아스의 말을 근거로 하면 바오로의 협조자며 베드로의 통역이었던 마르코가 마르코복음을 집필했다는 통설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서를 자세히 검토해 보면 필자는 바오로나 베드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듯합니다.
왜냐하면 마르코 복음서에는 바오로 특유의 낱말 소재 사상을 거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또 마르코 복음서에 수록된 예수님의 말씀은 50년대 아니면 60년대에 편찬된 예수 어록의 말씀보다 많이 변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전한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마르코가 기록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 마르코 복음서에 수록된 치유와 구마의 기적 이야기나 논쟁 혹은 담화의 이야기 역시 목격자 베드로가 전한 이야기라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이 사화들은 대부분 그리이스의 이야기 양식을 따라 역어져 있는데 이는 오랜 전승의 과정을 거쳐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마르코가 마르코 복음서를 집필했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누가 복음서를 집필했다고 밝힐 수도 없는 실정입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거룩한 전승에 따라 마르코가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로 보고 있습니다.
아무튼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는 기존의 여러 그리스도교 전승을 충실히 수집하고 통합하여
복음서라는 새로운 양식을 창안한 탁월한 신학사상가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진정한 면모를 모든 사람들 특히 후대의 사람들에게도 알려준
사도 바오로의 뒤를 이은 위대한 그리스도인인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이 축일은 축일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마르코’라는 한 인물에 대한 축일이 아니라,
마르코복음을 저술한 복음사가의 업적과 덕을 기리는 축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꼭 글로써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달란트를 이용하여 삶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여야 하겠습니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홈에서)
마르코 어머니의 집은 대문을 지키는 여종이 있었던 재산이 많은 큰 주택이었던 것 같다.
또한 남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과부였던 것 같다.
그리고 마르코는 유명한 바르나바 사도와는 사촌지간이었다.
그래서 오순절 이후 유대지방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 예루살렘에 구호를 위해 바르나바 사도가 바오로 사도와 함께 올라온 적이 있었다.
처음으로 사도 바오로는 마르코를 만나게 되었다. 바오로 사도는 대뜸 마르코의 됨됨이와 능력을 보고 자신들과 함께 같이 일할 것을 권고했다.
“마르코, 우리 같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활동을 하지 않겠나? 우리 같이 떠나세”
“저는 모든 게 아직 부족한 사람인데요.…”
“이 사람 겸손하기는 아무 말 말고 함께 떠나세.”
두 사도는 예루살렘을 떠날 때 마르코를 데리고 갔다. 마르코는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와 함께 얼마동안 동고동락하며 전도 활동을 했다.
바오로 일행이 바포에서 배를 타고 밤필리아 지방 베르게로 건너갔을 때였다. 마르코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선생님, 저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이제 전도여행이 시작인데…”
마르코는 만류하는 바오로 사도와 헤어져 결국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바오로 사도는 몹시 실망했다. 그만큼 마르코에게 기대가 컸던 탓이었다.
부유한 생활을 했던 마르코가 바오로 사도의 권고에 따라 따라나섰지만 앞에 놓여있는 어려움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베르게에서 시작되는 전도여행 앞에는 홍수 등 자연적인 재해, 유대인의 박해, 풍토병, 강도의 위험 등이 바오로 사도 일행을 괴롭혔다.
결국 두려움과 어려움을 이기지 못한 마르코는 일행에서 혼자 빠져 나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마르코는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 용기 없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참담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돌아온 마르코는 얼마 후 다시 용기를 내어 주님의 복음 전파자로 활동을 하게 되었으며,
베드로 사도의 통역을 맡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열심히 전했다.
마르코는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다시 일어서는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마침내 초대교회에서 전승을 모아 마르코 복음서를 저술해서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 귀한 복음을 전해주었다.
마르코에게 있어서 신앙의 길은 좌절과 낙담을 반복하면서도 끝내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최후의 승리가 진정한 승리인 것이다.
(허영엽 신부.평화신문 654호에서)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