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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기독교 안티 사이트와 이단 사이트를 두루 웹 서핑하였습니다.
여전히 기독교 안티는 불신의 열정을 종교적 신념으로 가졌고
이단은 성경적 기준으로 스스로 이단이 아닌 것을 증명하며 이단으로 정죄하는 곳을
사탄의 소굴이라고 단죄하였습니다.
이단 감별사들이 이단으로 매도되는 현실을 직시하며
믿음의 척도로 뜨거운 감가가 되어 있는 십일조에 관한 수 많은 글들을 보았습니다.
십일조는 믿음의 척도로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믿음의 조건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순종의 삶이다는 보수적 전통 신앙을 견식하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십일조는 다른 복음이다는 글을 읽으면서
복음적인 시선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명령이요, 원하시는 뜻이기 때문에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는 보수적 전통 신앙과
십일조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고 폐하여진 율법으로 율법적 십일조를 준수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훼손하는 다른 복음이다는 복음 신앙이 첨예하게 대립하였습니다.
십일조 찬성론자는 십일조 반대론자를 이단으로 매도하였고
십일조 반대론자는 십일조 찬성론자를 맘몬 신앙의 사이비로 매도하였습니다.
극과 극의 대립이 팽배한 가운데
예장 합동측에서는 십일조를 교인의 의무로 규정하며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교인의 자격을 제한하는 교회법을 만들고 있습니다.
어느 덧 한국 교회는 십일조가 믿음의 척도요, 믿음의 조건이며 축복의 씨앗이라는
맘몬 신앙의 사이비 정체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십일조를 교인의 의무로 규정한 교단과 교회는
사도적 터 위에 세워진 교회의 정체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굳건한 십일조의 신앙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혼잡케하는 기성 교회는 참된 성경의기독교인가?
할례와 세례가 혼재할 수 없듯
제물로서의 율법적 십일조와 복음은 혼재 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율법에는
의식법과 시민법과 도덕법이 있습니다.
율법의 의식법과 시민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되어 폐하여졌고
율법의 도덕법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의 사랑은
주께서 명하시고 그 율법을 완성한 대강령이 되었습니다.
구약의 십일조 강조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와 성막과 성전이 있을 때 율법 준수의 의무를 가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과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으로 열 두 지파가 해체되고.....
솔로몬 성전과 스룹바벨 성전과 헤롯 성전마저 붕괴되고 사라진 신약 시대의 십일조는
폐하여진 율법의 흔적이요, 잔재에 불과합니다.
율법은 복음의 뿌리이지만 몽학선생이요,
그리스도의 법으로 완전 성취되었습니다.
옛 언약의 새 언약 성취는
상위법이 최고법의 효력을 지닙니다.
십일조는 가나안 땅에 대한 아브라함 언약의 기초였지만
옛 언약, 곧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과 다윗 안약이 새 언약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이것을 믿는 신앙이 기독교 신앙이요,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본질입니다.
사도 바울의 율법 이해는 사망의 쏘는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여 썩어질 것을 썩지 아닐 할 것으로
영생의 구원을 주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 하였습니다.(고후3:6-9)
돌에 새겨 죽게 하는 율법이라는 바울의 이해는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엡2:15-18)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하였습니다.(엡2:19-22)
십일조로 교인의 의무를 규정하고 교인의 권한을 제한하는 교단과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 곧 그의 성도와 하나님의 권속을 부인하는
다른 복음의 사이비 집단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모세의 율법을 좇아 레위인은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기업으로 받았으나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한 멜기세덕은 산다는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가자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히5:5-10)
뿐만 아니라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히7:23-8)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율법과 복음에 대한 갈등은 하였어도 십일조와 복음에 대한 갈등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에 대한 이해도 사망의 쏘는 것이요, 의문의 죽은 증서요, 진노를 이루게 하는 것이요, 폐하여진 것이요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신약의 저자는 바리새인이 정통으로 지키는 모세의 율법과
그 율법의 효능을 완전 말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롬3:20-24)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갈2:16)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갈2:21)
신약 시대에 율법에 대한 강조와 십일조에 대한 강조는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일이요, 그리스도께서 헛되어 죽은 것이라고 사도바울은 역설하였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고 하였습니다.갈3:2-7)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그의 자손은
율법의 행위나 십일조의 준수가 아니라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하였습니다.(롬10:4)
그러므로 율법적 십일조의 강조와 준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영적 이스라엘의 자손이 아니며,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성도와 권속이 될 수 없습니다.
십일조는 축복의 씨앗입니까?
십일조는 믿음의 척도요, 신앙의 조건입니까?
사실 아브라함이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드린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충만한 언약의 복을 받을 창의적인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전쟁을 함께한 사람들과 소돔왕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창의적 십일조 믿음의 효시로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은 제사장과 종교적 업무를 담당할 구별된 레위 지파의 기업이 되게 하였고
각 지파는 가나안 땅의 소산 십분의 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은
레위 지파를 위한 가나안 땅의 소산 십분의 일을 레위인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레위인은 다른 지파의 종이 되어 비참한 생활을 하였고
떠돌이 유랑생활을 하였습니다.
사사기의 이스라엘 모습은
모세 율법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고 각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여 혼란과 무질서의 역사를 기록하였습니다.
아론 자손의 제사장들도 명맥이 끊길 정도로
혼돈과 공허의 암흑시대였습니다.
사무엘과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겨우 율법의 흔적을 찾았으나
솔로몬 이후 남북 왕조 시대를 맞아 열 지파의 북왕국 이스라엘은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 우상을 섬겼습니다.
열 지파에 분배된 레위인은 떠돌이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일부는 남왕국으로 도망하였으나 분배받은 거처할 성읍이 없었습니다.
겨우 유다 지파에 분배받은 레위인만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 남았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어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하고
언약의 배반으로 남왕국 유대마저 바벨론에게 멸망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불타고 폐허가 되었으며 대제사장 스라야는 살해 되었고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대인은 성전을 잃어 버리고 디아스포라의 회당으로 겨우 신앙의 명맥을 이었습니다.
바벨론 유수와 귀환은
남은 두 지파 유다와 레위 가운데 유다 지파는 쇠약하고 레위 지파는 리더로 부각되었습니다.
그러나 말라기 시대.......
평화의 언약을 맺어 하나님의 사자로 삼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마저 그 언약을 파기함으로
하나님은 스룹바벨 성전을 버렸고 이스라엘을 영원히 버렸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끝입니다.
율법과 십일조의 준수로 받을 가나안 땅의 복을 이스라엘은 멸망의 심판으로 받았습니다.
선지자의 글에는 율법이 없습니다.
다만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과 영원한 메시야 왕국에 대한 소망이 계시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하였던 이스라엘......
모새의 율법은 없고 배반의 심판만 옛 언약의 흔적으로 가졌습니다.
십일조의 준수는 가나안 땅에서 받을 기업의 복이었지만
하나님은 말라기 시대에 하나님의 의를 행할 성전의 십일조와 봉헌물을 제사장들이 도적함으로
이스라엘을 영원히 버렸습니다.
이것이 말라기서의 핵심입니다.
말라기서는 율법적 십일조의 준수로 가나안 땅의 회복을 예언한 말씀이 아니라
평화의 언약을 배반한 레위인에 대한 저주의 파멸을 심판의 경고로 선포한 말씀입니다.
신약 시대에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를 율법의 준수로 붙들고 있었지만
십일조를 준수하는 그들의 율법적 의로 가나안 땅을 회복하지 못하였고
헤롯 성전마저 로마에 의해 붕괴되었습니다.
이것으로 성전의 십일조는 사라졌고.....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은 유다지파 마저 열방으로 흩어졌고 가나안의 복을 완전 상실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적 십일조 준수는
가나안 땅의 복을 받는 율법적 언약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는
오직 복음을 믿음으로 선지자와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움을 받아
아브라함의 복을 하나님 나라의 복으로 영원히 누립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중심에 율법적 십일조의 준수는
더 이상 언약의 복으로 그 효력이 영원히 없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의 복을 모세 율법으로 지키지 못하였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은 영원히 아브라함의 복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립니다.
이것이 성경의 복음적인 이해요,
그 놀라운 시선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창의적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제사장 멜기덱에게
전리품의 십일조를 드려 전쟁의 승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는 교훈의 복음을 듣는다면.......
풍성한 십일조의 연보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널리 전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율법적 십일조의 준수가 아니라
풍성한 연보로 드리는 자원하는 믿음의 십일조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향기로운 제물이 될 것입니다.
교인의 의무가 아닌 자원하는 마음의 감사로 드리는 모든 물질과 헌물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충성하는 바나바의 헌신일 것입니다.
믿음의 봉사와 연보는
하나님 나라의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사도 바울은 교훈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