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구속사 강해
새롭게 건설되는 하나님의 나라
홍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신 의도는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는 노래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리는 자를 엎으시나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초개같이 사르니이다 (출 15:6-7). 이 노래에서 이스라엘은 애굽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미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여러 차례 밝혔듯이 여호와만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주인이심을 만방에 선포한 것이 바로 홍해 사건이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비로소 깨닫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인도하시기까지 그 어떤 세력도 그 길을 막을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열방이 듣고 떨며 블레셋 거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출 15:13-16).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홍해 사건을 통해 여호와께서 가시는 길에는 아무런 방해 세력도 있을 수 없다는 것과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마침내 성취하실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것을 그의 백성에게 계시하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이스라엘은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출 15:17-18)라고 노래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의 기업의 산에 주의 백성을 심으신다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의 사랑하시는 백성을 에덴 동산에 두실 때의 장면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1. 에덴의 회복을 상징하는 출애굽 사건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신 후 사람을 생령이 되게 한 후 사람이 거할 처소로 아름다운 에덴 동산을 만드셨다. 사람이 거하기에 가장 알맞은 곳으로 에덴 동산을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만드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여 창조의 목적을 완수하는데 있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점에서 에덴 동산은 사람을 위해 적합하게 마련된 장소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심으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 2:8-9).
그런데 모세는 본문을 기록하면서 마치 아담을 에덴 동산에 심으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은 매우 주목할 만한 사상이다. 그 지으신 아담을 거기 두시고'라는 말은 에덴 동산에 그 아담을 심으시고' 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아담의 인생을 가장 온전하게 발휘할 수 있는 처소로써 에덴을 주신 것이다. 불행히도 아담은 그 땅에서 범죄하여 쫓겨남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새로운 민족으로 형성하게 한 후 약속의 땅으로 그 후손들을 불러들이실 것을 약속하셨는데, 마침내 이스라엘 후손들이 홍해를 건너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모세는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출 15:17)라고 노래하고 있다.
따라서 홍해 사건은 여호와의 구속을 받은 이스라엘 후손들이 그 조상 아담이 범죄하여 상실한 에덴 동산으로 되돌아가게 되었음을 예표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을 주의 기업의 동산에 심으실 것이라는 사상은 다윗 왕국이 건설되고 난 후 시편 기자에게서도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열조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열방을 쫓으시고 열조를 심으시며 주께서 민족들은 괴롭게 하시고 열조는 번성케 하셨나이다 (시 44:1-2.)라고 노래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심으셨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상은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시 80:8)고 노래하는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사상은 좀더 발전하여 이스라엘이 범죄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그 땅에서 쫓겨남을 예언하던 예레미야에게서 새롭게 나타나게 된다. 예레미야는 선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잠시 동안 바벨론으로 잡혀갈 것을 예언하며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그의 백성을 다시 약속의 땅으로 불러오실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 날에는 하나님의 신(神)을 그의 백성에게 부어 주어 다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를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정녕히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렘 32:38-41).
이 날에 하나님께서 세우실 언약은 그의 종을 통해 그의 백성에게 성령을 부어줌으로서 체결될 새언약이었다(렘 31:31-34 참고). 이 새언약에 대한 예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에 화목을 이루게 하여 오순절에 성령이
그의 백성에게 임하게 됨으로서 성취되었다.
2. 율례와 법도를 주신 이유
이처럼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통과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된 사건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기업에 심기우는 것과 동일하게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처음에 에덴 동산을 만드시어 그곳에서 아담이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살 수 있게 하셨던 것처럼, 이제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이스라엘을 인도하시어 그곳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 인생의 참된 목적을 이루며 살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제 이스라엘은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이미 명백하게 밝혀진 것처럼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구현되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러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에덴 동산과 같이 가나안에서도 모든 여건을 완벽하게 갖추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에 들어가 살기 위해선 먼저 이스라엘이 점검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이 에덴 동산과 같이 인생의 존재 목적을 수행함에 있어 완전한 곳인 반면에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홍해를 건너 온 이스라엘은 유감스럽게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야 하는 일에 있어서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곧바로 가나안 땅으로 불러들이지 않고 광야 길을 가게 하심으로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훈련을 받도록 하셨다. 이것은 그의 백성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지극한 배려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지난 430년 동안 애굽의 종으로 살아오던 이스라엘 후손들이 하루아침에 자유인이 되었다고 해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순종하고 세상 나라와는 달리 고상한 문화를 건설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아시고 계신 하나님께서 내리신 결단인 것이다.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의 의도는 마라에서 쓴 물을 먹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신 말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마라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신 후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출 15:26-27)고 선언하신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율례와 법도를 세우신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약속의 땅에서 인생의 본분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자상한 배려에서 주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세운 율례와 법도가 어떤 것인가는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후에 시내 산에서 성문화하여 주신 율법의 전신이라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출처: 기독신학공동체 원문보기 글쓴이: 송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