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번국도는 사천시 정동면 대곡리 한하고 고성에서 발원하여 사천만으로
흘러드는 사천강과 거의 동행한다.
통영별로 옛길의 오리지날을 가늠하게 하는 강줄기다.
대동지지와 대동여지도의 부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도로가 얼마만큼 넓고 곧고 평평해야 성이 찰까.
감치를 작살낸 여세를 몰아 사천의 산자락들을 난도질치려 하는가.
사천땅 객방(아래 그림)에 들어서자 마자 성한 곳이 없다.
세종3년(1421)에 건립된 사천향교(아래 그림:도유형문화재 제220호)는 임진왜란 때
소실당했다가 인조23년(1645) 현 위치(사천읍 선인리119)에 복원되었다.
사천향교도 창립시기만 있을 뿐 장소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통영, 고성, 사천의 기록들이 전반적으로 부실한 느낌이다.
누락인가 생략인가.
홍살문을 통한 출입과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는 향교의 전형이다.
배향(拜享)인물 또한 기본 오성(五聖) + 열조(列朝)의 현인들이다.
사천향교 역시 이 룰(rule) 대로다.
다만, 열조의 현인들에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분명하다.
단골로 등장하는가 하면 가뭄에 콩나듯 하는 인물도 있으니까.
도 기념물 제144호 사천읍성(아래 그림들)의 축성시기는 세종24년(1442)이란다.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병조참판 신인손(辛引孫)이 왕명으로 토석혼성을 축조했다고.
선조31년(1598), 정유재란 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정기룡(鄭起龍)의 조명연합군과 왜군이
치열하게 혈전을 벌인 곳으로 유명한 읍성이다.
지금, 사천읍성은 고증에 문제가 있다지만 일부 복원되거나 새로운 시설들이 들어섬으로서
산성공원(山城公園)으로 탈바꿈 했다.
백성보호를 명분으로 쌓은 성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백성의 피땀이 응고돼 있고 이렇게 해서
축조한 성이 후손의 휴식공간과 관광상품(사천8경중 1)으로 활용되고 있다.
아래 그림(1)읍성 (2)객사 수양루 (3)북문터 枕鰲亭 (4)충혼탑 (5)사천읍성사적비
조명연합군이 사천읍성 전투에서는 승리하였으나 연이은 선진리성(도 문화재자료 제274호)
싸움에서는 대패했다.
화약고 폭발이라는 액운이 겹침으로서 참패한 결과물이 수천 병사가 묻힌 도 기념물 제80호
조명군총(아래 그림6)이다.
관율교(아래 그림1)는 사천읍 수양로를 바통터치한 두량로 상의 다리다.
1940년대 초에 일제가 지역 농민을 동원하여 만든 농수용 두량저수지의 수로라니까
통영별로 때는 없던 물길이다.
관율교를 건너면 두량2리로 옛 관율역이 있던 곳이다.
관율마을에는 옛 이름을 딴 '관율길'도 있다.
가고 있는 길이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으나 사람 만나기가
어찌나 어려운 일인지.
간신히 한 분을 만났으나 워낙 노옹이라 대화를 하지 못했기에 염치 불고하고 밭에서
열심히 일하는 중인 이를 불러세웠다.
그는 관율마을 이장(姜明植:아래 그림2)인데 조금 전의 노옹이 자기 부친이라고.
(자세한 내용은 메뉴 옛길 86번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