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논산시 성동면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순박했던 농촌 마을은 공산세력에 의해 핏빛으로 물들여져 피를 토하는 아픔과 증오가 쌓여있었다. 성동면에서 주민 수백 수십명이 학살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촌성결교회, 우곤감리교회 등 여러 교회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의 복음으로 정전(停戰) 70년이 지난 지금도 용서와 치유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1950년 7월 23일 논산시를 장악한 공산당은 토지개혁을 내세워 소작인들의 민심을 얻는듯 했으나 이내 본색을 드러내 모든 농작물을 강제로 빼앗아 갔으며 폭행과 살인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성동면은 논산시의 제2의 모스크바라 불릴 정도로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이 활기찼다. 유엔 연합군의 인천상륙과 더불어 불리해진 공산당 세력은 9월 27일, 28일 이틀에 걸쳐 600여 명의 주민이 학살하였는데(김주옥장로 생전 증언) 병촌교회 성도들도 이때 처참하게 학살당했다.
당시 병촌성결교회는 총 74명의 교인이 출석하였는데, 공산당원들은 교인들을 끌어다가 “기독교는 공산주의와 사상이 맞지 않는다.”라고 하며 구타하고 66명의 교인을 무참히 학살을 하였다. 그때 순교한 성도는 세례인 15명, 학습인 12명, 구도자 8명, 젓먹이 유아 9명과 12살 미만 어린이 22명을 포함하여 16세대 66명이 학살당하고 겨우 8명만 살아남았다. 당시 완전 몰살당한 집이 5가정이나 되었다.
▲병촌 순교기념관
생존자는 김주옥, 우제학, 노미종, 신용순, 이정숙 5명의 장년 성도와 3명의 어린이 뿐이였다. 정수일 집사(여, 당시 31세)는 시부모, 시동생, 아들, 딸, 조카 등 일가족 10명은 끌려가서죽음 앞에서도 함께 찬송하고 기도했다. 눈앞에 닥친 죽음 앞에서도 오히려 “공산군은 패전하니 이제 회개하고 예수 믿어 구원을 받으십시오!”라고 복음을 전하며 끝까지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이때 공산당원은 죽창과 몽둥이와 삽, 괭이 등을 들고 달려들어 무자비하게 구타했고, 구덩이에 생매장해 버렸다. 정수일 집사는 후일, 병촌리의 집단 매장된 곳에서 발굴할 때 보니 임신한 몸으로 젖먹이를 가슴에 안은 채 흥건하게 고여 있는 핏속에 죽어 있는 모습이였다. (노미종권사 생전 증언)
▲김주옥 장로(우측)와 아들 김형호 장로
증언자 김주옥 장로(당시 집사, 31세)는 1942년에 연성숙(練成熟) 야학교를 세워 여성과 미취학 청소년들에게 국어, 한문, 산수 등을 가르쳤고 때때로 민족혼을 심어주었으며 전쟁 중에는 면 소재지에서 식량 배급소를 경영했다. 그도 공산당원에 잡혀가 죽게 되었다. 끌려가던 중 미군 비행기 폭격의 혼란을 틈타 탈출에 성공해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달아났던 그가 국군과 유엔군이 들어오자 집으로 돌아와 보니 어머니와 부인과 두 자녀와 세 명의 질녀들이 무참히 학살당해 있었다.
이후 김 장로는 ‘살아 있는 순교자’로 살기로 다짐하고 전쟁 후 피해자들과 함께 가해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용서하고 예수님을 소개하였다. 또 생활이 어려운 가해자 가정들을 도우며 지역사회가 화해하고 화목하기를 노력했다. 그 결과 성동면의 여러교회들이 부흥하게 되었다. 순교자의 유족 가운데는 김진호 목사와, 우운식 장로가 있고, 산 순교자 김주옥 장로의 후손에는 김명호 사모(남편, 이석종 목사), 김완호 장로, 김신호 장로, 김형호 장로, 김영숙 목사가 교회와 사회를 위하여 섬김의 본을 다하고 있다.
▲순교자를 모신 평토장 묘
병촌교회는 1933년에 강경교회 이헌영 목사의 추진으로 세워졌다. 1956년 현재 교회의 위치에 순교자 기념예배당으로 52평을 건축하였으며, 1981년에는 ‘순교자기념교회’로 현재의 교회당을 신축했으며, 1989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교단은 ‘66인 순교기념탑’을 세웠다. 또한 2015년에는 7,000평 대지 위에 170평의 ‘순교기념관’를 건축하였고, 현재 담임 이성영 목사는 매년 방문하는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순교의 영성을 강물같이 흘려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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