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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寅年 *정착과 부흥의 해* 2月 ☞영적 성숙의 달☜
삼상24:1-22절) 원수를 살려줌
사람이 세상에 살다 보면, 우연히 어떤 일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연이라는 것은 늘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즉 어떤 학생이 길을 가다가 돈을 한번 주웠다고 합시다. 이것은 정말 우연히 주운 것이고. 매일 돈을 주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 만일 어떤 학생이 시험을 치는데, 우연히 아는 문제만 나와서 전교에서 일등을 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이 학생은 다음 시험이 두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난번에 일등 한 것이 자기 실력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또 이번 시험에도 자기가 아는 문제만 나와서 또 일등을 한다는 것은 확률상 거의 불가능 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연(偶然)이라는 것은 결코 내가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고,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우연한 도움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면, 이런 우연이 또 일어날 수 있을까? 이 점이 곧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우연한 도움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려운 일이 새롭게 닥쳤을 때, 또 하나님의 우연한 도움이 일어난다고 보장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사람에게는 *고통의 기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자기를 괴롭게 하거나. 고통을 주면, 그 기억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아무 일이 없어도 마음의 고통을 느낍니다. 그 고통의 기억을 없애는 방법은 두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는 내가 고통을 당한 만큼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즉 내가 맞은 만큼 상대방을 때리거나. 혹은 내가 욕을 얻어먹은 만큼 상대방을 욕해주는 것입니다.
그때 고통을 받았던 사람은 *속이 다 후련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고통의 기억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에게 고통을 주었던 사람이 죽든지. 딴 곳으로 가서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다시는 나에게 고통을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고통의 기억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이 고통의 기억이 계속되면. 결국 우울증이 오게 되고. 어떤 때는 스트레스를 못 이겨서 돌연(突然死)하든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하여 아둘람 굴에 숨어있었는데, 선지자 갓이 와서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종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 들판에 다윗이 숨어있을 만한 장소가 없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십 사람들이 다윗을 배반하고. 다윗이 있는 곳을 사울 왕에게 알려주는 바람에 다윗은 사울 왕에게 거의 얼마 차이로 쫓기고. 또 쫓겼습니다.
이제 다윗이 거의 사울 왕에게 잡히게 되었을 때. 사울 왕은 갑자기 쫓기를 멈추더니, 모든 군대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나중에 그 이유한 알아보았더니. 블레셋 사람들이 갑자기 쳐들어오는 바람에 막으러 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 중의 우연이고, 이런 우연은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시 사울 왕이 다윗을 잡으려고. 많은 군대를 끌고, 다윗이 있는 곳으로 내려왔습니다.
Ⅰ.반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우리 인생에 우연이라고 하는 것은 단 한 번만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기가 막힌 행운이 나에게 여러 번 일어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행운은 수도 없이 일어납니다.
단지 일어날 때마다 다른 방법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잘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잡으러 왔다가 거의 다 잡았는데, 갑자기 돌아간 장소를 다윗은
*셀라하마느곳*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것은 *분리의 바위*라는 뜻입니다.
즉 바로 이 바위까지는 다윗이나 사울 왕이나 서로 섞여서 도망치고. 잡으러 가고. 뒤죽박죽이었는데, 딱 이 바위에서 사울 왕의 부대는 제자리에 멈추더니. 모두 다 돌아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즉 다윗의 일행과 사울 왕의 부대 사이에 분리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것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여기서 자기 자신과 사울 왕의 부대를 가르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았고, 하나님의 칼을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 살 수 없는 유대 땅으로 몰아넣으신 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바로 하나님의 손을 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다윗을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과 사울 왕 사이에 하나님의 손이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하나님의 손을 보지 못했습니다.
만일 사울 왕이 하나님의 손을 보았다면, 다윗을 쫓는 것을 포기했을 텐데, 사울 왕은 하나님의 손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다윗을 거의 다 잡을 뻔했다가 놓친 것이 너무나도 아까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 왕은 또다시 다윗을 잡으러 내려왔습니다. 이번에도 사울 왕은 다윗을 거의 다 잡은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울 왕은 다윗이 대충 어느 부근에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24:1-2절)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역시 사울 왕은 전쟁하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그는 군대를 끌고 가서 쳐들어온 블레셋 군대를 모두 다 쫓아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군대를 거느리고. 다윗을 잡으러 온 것입니다.
그때 또 현지인들은 사울 왕을 두려워해서 다윗을 배반하여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숨어있다고 밀고(密告)했습니다. 이제 다윗은 거의 다 잡힌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울 왕은 안심했습니다. 만일 다윗이 광야에 숨어있다면 도망칠 곳도 없고,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다윗이 엔게디에 숨어있지만. 정확하게 어디에 숨어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의사가 환자를 수술해야 하는데, 대충 수술 부위만 알고 있지. 정확한 곳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경우 잘못하면, 엉터리 수술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세상 정치인들이나 기업가들은 어려움이 생기면, 나름대로 원인을 찾고. 해답을 찾는데, 대충 그 원인을 아는 것이지. 그것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점을 치듯이 답을 두들겨 맞추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엔게디의 들염소 바위까지 와서 삼천 명으로 거의 엔게디를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사울 왕에게 그만 급한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우리말 성경에는 사울이 뒤가 너무 급해서 가까이 있는 양 우리의 굴 안에 들어가서 일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4:3절)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사울 왕이 *뒤를 보러 들어갔다*고 했는데, 이것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알 순 없습니다. 원문에는 사울 왕이 *발을 가리러 들어갔다*고 했는데, 이것은 잠을 자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용변을 보는 것을 말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은 아주 더운 곳이기 때문에 낮잠을 자지 않으면, 오후에 잘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이때 사울 왕이 너무나 피곤하고. 잠이 와서 견딜 수 없었는지 모릅니다. 즉 어쩌면 지난 밤 사울 왕은 블레셋과 싸우고, 또 엔게디까지 이동하느라고 잠을 자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 왕은 잠이 와서 미칠 지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 왕은 굴(窟)이 있는 것을 보고. 부하에게 *내가 저 굴에 들어가서 잠을 조금만 자고 나올 테니까 너희들은 이 굴 입구를 잘 지켜라*고 명령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울 왕이 설사를 했을 수 있습니다. 즉 사울 왕은 지금 용변을 누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데, 마침 길 옆에 굴(窟)이 있는 것을 보고 *내가 저 안에 들어가서 용변을 누고 오겠다.*고 하면서 혼자서 달려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굴(窟)은 생각보다 깊은 굴(窟)이었고, 굴(窟)깊은 곳에서는 다윗의 일행이 고스란히 숨어있었습니다. 다윗 일행의 특징은 도망 다니는데. 훈련이 되어서 남자나 여자나 어린아이나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 왕의 신하가 굴(窟)안에 들어와서 봤다 하더라도 아무도 없는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 왕은 굴(窟)안에 아무도 없는 줄 알고. 굴(窟)에 들어가 잠을 잤던 것입니다.
잠을 잤다고 말하는 이유는 다윗이 사울 왕의 옷을 베려고 하면, 아무리 옷을 벗어 던졌다 하더라도 소리가 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분리의 바위에서 사울 왕으로 하여금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울 왕이 다윗이 보는 앞에서 전혀 무방비 상태로 잠을 깊이 자게 하심으로 얼마든지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에게 *우연은 우연이 아니고, 이런 기적은 얼마든지 반복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 왕의 옷자락을 자르면서도 *마음이 찔렸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기면서도 사울 왕을 존경했고, 사랑받기 원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옷자락을 자르면서 마치 *자기 자신이 왕에게서 완전히 잘리는 것*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다윗은 사울 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모습을 통해서 마음속으로는 그의 목을 베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든지 간에 다윗은 자기가 한때 사랑하고, 존경했던 사울 왕의 옷자락을 자르면서 마음이 굉장히 찔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옷자락은 다윗이 사울 왕과 함께 그 굴(窟)에 있었다는 증거였고, 다윗이 사울 왕의 목숨을 살려준 증표(證票)였습니다.
Ⅱ.다윗의 관용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숨어서 보고 있는 그 앞에서 사울 왕이 부하도 없이 혼자 옷을 벗어 던지고. 두 팔을 쫙 벌리고. 코를 골면서 자는 것을 본 다윗의 부하들은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이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도록 주신 절호의 찬스*라고 말했습니다.
24:4-5절)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이깃은 누가 생각해도 *원수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다윗의 원수 사울 왕은 아무것도 모르고. 지금 눈앞에서 쿨쿨 잠이나 자고 있었습니다. 사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사울 왕과 그의 군대가 왔을 때, 그들은 *이번에는 모두 잡혀 죽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더 이상 피할 데가 없어서 들염소 바위가 있는 굴(窟)속에 들어가서 숨었던 것입니다. 만약 사울 왕의 군대가 그 동굴 속을 수색하면, 한 명도 도망치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다윗과 그의 일행은 *아, 우리가 숨어있는 굴까지 사울 왕은 다 알고 있구나. 우리는 오늘 다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났습니다. 즉 사울 왕의 부하들은 굴(窟)안을 대충 흩어본 후에 나가고, 사울 왕 혼자 허겁지겁 들어오더니. 옷을 훌렁 다 벗어버리고. 누워서 잠을 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다윗의 신하들은 다윗에게 지금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원수(怨讐)를 죽이라고 주신 절호의 기회라고 하면서 *사울 왕을 죽이자*고 했습니다. 물론 입으로 말하지 않고. 모두 손으로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안 된다*고 손 사례로 흔들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서 세운 왕을 우리가 마음대로 죽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죽이시든지 해야지, 우리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종을 죽일 수 없다*고 하면서 단지 사울 왕의 옷깃만 잘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 다윗이 사울 왕의 입고 있던 옷깃을 자른 것 같지는 않고, 벗어서 바위에 걸쳐 놓은 옷깃을 자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 왕의 옷깃을 잘랐지만, 실제로는 사울 왕의 목을 자른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반복해서 다윗을 위하여 *우연한 일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사실 다윗은 사울 왕에 대하여 깊은 마음의 상처가 있습니다. 즉 사울 왕은 아무 잘못도 없는 다윗을 몇 번이나 죽이려고 창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가정을 파괴했고, 그의 사회적인 직책을 박탈했고, 온 이스라엘의 원수(怨讐)가 되게 했습니다. 만일 다윗이 이때 사울 왕을 죽인다면, 그는 그 이상 쫓겨 다닐 필요도 없고, 그와 함께 있는 육백 명 모두 당당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찬스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잘 살려야 성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다윗도 사실 우연히 전쟁터에 갔다가 골리앗을 죽이는 바람에 이스라엘의 영웅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찬스가 왔다 하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할 순 없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유행하는 말 중에 *아버지 찬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좋은 자리에 있는 것을 이용해서 좋은 성공의 기회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 찬스*는 공정하지 못한 것이며, 비겁한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이기 때문에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계속 쫓겨 다녔습니다. 즉 다윗은 자기 마음의 상처를 인간적으로 복수함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Ⅲ.다윗의 당당함
다윗은 사울 왕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울 왕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자기가 얼마든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었다는 표시(標示)로 그의 옷자락을 베었습니다.
사울 왕은 그것도 모르고 볼일을 보고. 자기 옷을 입고. 굴(窟)에서 나가 다윗을 수색하러 갔습니다. 사울 왕은 이미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수색하러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리가 어느 정도 떨어진 후, 다윗은 대담하게 사울 왕을 불렀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다윗은 사울 왕을 보지도 않고. 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제 자기가 *사울 왕을 이겼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저 멀리 가고 있는 사울 왕은 불렀습니다.
즉 다윗이 *내 주 왕이여!*부르니까 사울 왕과 모든 일행이 돌아보았습니다, 그때 다윗은 땅에 엎드려 큰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의 정당성(政堂省)을 당당하게 입증했습니다. 즉 다윗은 이제 더 이상 숨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자기가 *사울 왕을 이겼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면, 사울 왕은 *절대로 자기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큰 소리로 사울 왕을 불러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왕은 어찌하여 다윗이 왕을 죽이려고 한다는 신하들의 말을 듣습니까.* *오늘 왕이 굴에 들어와서 일을 보셨는데, 그때 하나님은 왕을 내 손에 넘기셨습니다.*
그리고 *내 부하들은 지금이 왕을 죽일 절호의 찬스라고 죽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서 세우신 왕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제가 왕을 죽이지 않고, 왕의 옷자락만 베었습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실 텐데, 하나님이 왕을 보복하시겠지만, 저는 왕을 해치지 않겠습니다.*(8-15절 참조).
그리고 다윗은 사울 왕이 자기를 추격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 낭비라고 이야기했습니다.*왕이 쫓는 대상은 죽은 개나 벼룩을 쫓는 것입니다* 즉 왕은 나를 쫓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많이 있다는 것을 깨우친*것입니다.
이때 사울 왕은 다윗이 얼마든지 자기를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다윗이 사울 왕을 선대하니까 일시적으로나마 사울 왕이 착한 마음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은 다윗을 보고 *내 아들 다윗아 네 목소리냐*하면서 목을 놓아 엉엉 울었습니다. 이것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울음이었습니다. 즉 지금까지 사울 왕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던 답답한 생각들이 모두 터져 나오면서 우는 통곡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정신과나 상담하는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즉 자기 마음의 답답함과 두려움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다가 이제 죽게 되니까 말을 하게 됩니다. 그때 얼마나 우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그렇게 울어야 합니다. 울지 않으면, 인간의 마음이 더 독해지고, 사탄이 그 사람을 더 악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은 이제 진심으로 돌아와서 다윗에게 *오늘 네가 너를 선대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죽이도록 네 손에 넘기셨지만. 너는 나는 죽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길에서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그러나 너는 내 목숨을 살려주었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네게 선대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울 왕은 *네가 이스라엘의 왕이 될 줄 내가 안다*고 하면서 *이스라엘이 네 손에서 견고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울 왕은 다윗에게 부탁했는데, *네가 왕이 되었을 때, 내 후손을 다 죽이지 말고. 내 이름을 멸하지 않도록 맹세하라*고 했습니다(17-21절 참조).
이때도 사람들이 죽은 후에 자기 이름이 없어지는 것을 굉장히 수치스럽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죽으면 이름이 금방 없어집니다.* 즉 화장해서 뼈를 뿌리거나. 수목장을 하면, 금방 그 이름은 없어지게 됩니다.
사람의 좋은 이름을 남기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자신의 일시적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악용하지 말고. 세무 공무원 삭개오처럼 진정한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후손에게 저주가 전가되지 않습니다.
눅19:8절)...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라고 한 후,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해야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만 우리에게 선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무한정 선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셀라하마느곳* 이후로 다윗은 사울 왕을 계속 이겼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본 순간, 이상하게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 그 순간부터 우리는 악한 자를 이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악(惡)한 자에게 관용(寬容)을 베풀어야 합니다. 즉 그의 목을 베는 대신 옷자락만 베어야 합니다. 빌4:5절)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그래야 사람들은 조금씩 정신을 차리게 될 것이고, 나중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찬송가 475장 *인류가 하나 되게*
역사서
☞ 자발적인 신청을 수시(隨時)로 받습니다.
▣리더(leader)는 1단계 *필수과목* 자격증을 취득해야 공동체가 안전하고, 직분도 반드시 *필수과목*을 필하고 *세례를 받아야*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전 천주교인 포함).
딤후3:13-14절)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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