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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 신윤복이 여인의 춘정(春情)을 묘사한 명작으로 꼽히는 ‘연못가의 여인’. (국립중앙박물관)
“수컷·암컷 얽혀 사는 것이 이치
청춘 헛되게 보내고 싶지 않다”
사또에게 간절히 이혼허락 호소
조선 후기에 민원문서를 모은 사례집에 여성이 이혼을 청하는 문서가 있다. 어디에다가 몰래 혼자 쓰거나 은밀히 누구에게 전하는 편지가 아닌, 민원문서다.
조선시대에 ‘박복한 여인’이라고 본인을 소개한 이 여인은 남편과 이혼하기 위해 민원문서를 썼다.
여성의 인권이 한없이 낮았던 조선 후기에 이 여성은 무슨 일로 이혼을 신청했을까?
정말 극심한 괴로움이 아니었으면 마음먹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뻔한 이혼 사유가 아니다. 남편과 잠자리 문제로 불화를 겪은 이 여인이 소박을 맞고, 이혼을 신청하며 사또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이다. 21세기에도 잠자리 문제는 이혼 사유에 ‘성격 차이’로 표기한다는데, 이 여인은 솔직히 털어놓았다.
여인은 강보에 싸여 있을 때 부모를 잃고 외가에서 자라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남편에게 시집을 왔다. 당시 남편은 스물다섯 살이었다. 젊은 나이에 만났지만 결혼한 지 육칠 년이 지나도록 단 한 번도 남편과의 잠자리에 만족한 적이 없었다. 한창 청춘인 여인은 자신의 정욕을 이기지 못해, 깊은 밤마다 옷을 풀어헤치고, 침석(枕席)으로 남편을 데려가 남편의 온몸을 어루만지며 합환(合歡)을 시도하였으나 남편은 못 들은 척했단다. 어디 야사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민원 문서에 적혀 있는 내용이다.
“금슬(琴瑟)의 즐거움을 저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관저(關雎)의 흥겨움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
매일 밤 이러니 눈물이 마를 날이 없고, 부부 사이는 마치 원수가 된 듯 멀어졌다는 것이다. 여인은 너무나 괴로워 옷이 헐거워질 정도로 살이 빠지고, 눈썹 화장과 머리치장은 오히려 헛된 장식이라고 느껴져 매일 통곡했단다. 돌부처 같은 남편, 대체 어떤 사람일까? 여인은 남편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외모로 보면 면목과 몸과 수염이 여느 사람과 흡사하지만, 방 안의 일에 이르면 중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서 있는 나무처럼 형체를 갖추었지만 크기만 할 뿐 힘이 없고 사나운 범이 주저하는 듯하여, 벌이나 벌레가 쏘는 것만도 못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수염 난 아녀자와 같은 저의 낭군’이라고 직격탄을 날린다.
“여자가 낭군에게 바라는 것이 과연 무슨 일이겠습니까? 옷을 바라겠습니까? 먹을 것을 바라겠습니까? 옷도 아니고 먹을 것도 아니고 오직 크게 바라는 것은 침석상의 한 가지 일일 뿐입니다. 이미 그 바람을 잃어버렸고 또 아무 흥도 없으니 하물며 옷이 귀하겠습니까? 음식이 귀하겠습니까?”
좋은 옷, 귀한 음식 다 필요 없고 오로지 밤에만 좀 잘하라는 말이다. 그녀는 괴로움이 너무 깊어, 이런 삶은 죽느니만 못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정욕이 지나치거나 유난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사물의 이치라고 설명했다. 짐승에는 원앙이 있고, 나무에는 연리목(連理木)이 있듯이 수컷과 암컷이 서로 얽혀 사는 것은 초목의 정인데, 음양의 이치를 받은 남편의 정욕이 이에 따르지 못하니, 초목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썼다. 그녀의 괴로움은 슬픔에 더해 원한의 지경까지 갔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서릿발이 내리칠 것이라며, 나라 안에 원한 가진 여자가 없도록 사또가 판단하시라고 공을 던진다. 그러면서 그녀가 남긴 마지막 글에 또 한 번 할 말을 잃는다.
“청춘의 여인이 무용한 장군의 집에서 헛되이 늙게 하지 마시어, 마침내 만물의 이치에 마땅하도록 하옵시길 천만 번 바라옵니다.”
청춘의 여인인 이 여인, 헛되이 늙지 않고 만물의 이치에 마땅하고 속궁합까지 잘 맞는 남자를 만나셨을까? 부디 그러셨길 바란다.
김은양 전문위원 ㆍ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