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46
2월24일 [연중 제7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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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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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4zMaiZyCfqA (정민규 도미니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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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혹시라도 나는 존재 자체로 누군가를 죄짓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바람 소리, 파도 소리만이 정적을 깨는 한적한 시골에서, 하루 온종일 일만 하다 보니, 시골 어르신들 심정이 백 퍼센트 이해가 됩니다.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영감님도 세상 떠난 지 오래고, 조용한 시골에서 혼자 사는데 먼 죄가 있겠수?”
사실 그렇더군요. 환경이나 나이를 무시 못 하겠더군요.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대인 관계의 폭을 줄이면서, 아무래도 죄를 덜 짓고 살아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돌아봅니다. 혹시라도 은연중에 지금 내가 짓고 있는 죄는 무엇인가?
요즘 때가 때인 만큼 본의 아니게 짓는 죄가 꽤 많더라구요. 주님께서 착하고 가련한 우리나라 백성을 어련히 알아서 좋은 길로 인도하실 텐데, 미리 걱정하고, 미리 예단하며, 하느님께 따지고 한탄하는 것도 죄인 듯합니다.
‘하느님! 어떻게 우리 민족에게만 이다지도 가혹하십니까? 다른 나라 사람들은 저리도 하나 되어, 알콩달콩 편히 살게 하시면서, 어찌 우리나라만은 남북으로 찢어놓으시고, 그것도 모자라 동서로 갈라 놓으시고...어디 그뿐인가요? 이념과 사상으로, 빈부와 세대로 갈라놓으시니, 정말이지 해도 해도 너무하시네요!’
어디 그뿐인가요? 불쑥불쑥 미워하는 감정이 솟구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죄를 자주 짓습니다. 이러지 말아야 하는데도 얼굴이 화면에 등장하기만 해도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존재 자체로 분노를 유발시키는 사람들 때문에 죄를 많이 짓습니다. 따져보니 행동 하나하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분노를 돋구니, 분노유발자들, 그야말로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들이 참으로 밉습니다. 선량한 우리 백성들을 오랜 세월 동안 극단적인 대결 구도로 몰아간 몰지각한 정치인들과 그들과 한배를 탄 사이비 언론 세력들이 참으로 원망스럽습니다.
저도 제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나도 존재 자체로 누군가에게 분노를 유발시키며 죄를 짓게 하는 것은 아닌지? 행동거지 하나하나, 말 한마디 한마디, 신중해야겠다는 성찰을 하게 됩니다.
솔직히 이스라엘의 다윗 성왕이나 세종대왕이 환생한다 할지라도 국정을 운영하기 힘든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한숨만 내쉬며 걱정하고 있기도 그래서, ‘올바른 지도자 선출’이라는 지향을 두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부족한 듯해서 나라를 위한 9일 기도를 바치려고 준비 중입니다.
소중한 투표권을 행사하기에 앞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서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할 시기입니다. 남아있는 기간 동안 걱정하고 분노하기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한 기도를 시작해야겠습니다.
기도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노력도 해야겠습니다. 이제 두 번 남아있는 대선후보 tv 토론회(2월 25일, 3월 2일)를 꼼꼼히 챙겨봐야겠습니다. 지금 이 시대 우리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에서 필요한 지도자가 누구인지 간절한 기도 안에서 식별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쓰레기 기자들이 양산해내고 있는 가짜 뉴스에 현혹되지 말아야겠습니다.
공교롭게도 지금 우리나라는 참으로 엄중한 순간에 서 있습니다. 탁월한 지도력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끊임없는 대화 속에 균형 잡힌 외교력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남과 북의 평화로운 공존 분위기를 강화하고 지속시킬 능력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부동산이나 주택, 일자리 창출이나 저출산, 이념 간의 갈등 등 산적한 문제들을 풀어갈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갈등과 분열을 최대한 자제시키고 균형 잡힌 통합을 추구하는 준비된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대내외적으로 이토록 엄중한 시기, 너무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내 나라 공동체 운명의 키를 단 1도 준비되지 않은 사람, 생뚱맞기가 하늘을 찌르는 사람, 국가 중대사를 도사님들이나 무속인들의 점괘에 의지해서 결정하는 사람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을 무리겠지요. 다만 겸손하고 상식적인 사람, 기본적인 대화가 가능한 사람, 이성적이면서도 기본적인 대화 능력을 지닌 분이어야겠습니다. 눈 씻고 봐도 그런 후보가 없다 하시면, 그래도 방법이 있습니다. 덜 교만한 사람, 덜 비상식적인 사람, 덜 비이성적인 사람을 찾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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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FokOWmvEp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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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맛을 간직한 소금인지, 맛을 잃은 소금인지 알아보는 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을 몇 년 동안 그대로 두면 짠맛을 잃게 된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쓸모없는 소금을 불 속에 넣었습니다. 우리도 짠맛을 잃으면 그런 소금처럼 불 속으로 들어가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내가 짠맛을 잃었는지, 아니면 소금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맛을 잃은 소금은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 9,42) 우리가 누군가에게 죄를 짓게도 하고 짓지 않게도 하는 영향력을 지녔다는 뜻입니다. 다른 이를 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영향력을 주면 그 사람은 짠맛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옥 불에 들어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세상은 인간의 운명은 타고나는 것이지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정말 그럴까요? 환경의 힘은 상상 이상입니다. 『다정함의 과학』의 저자 ‘켈리 하딩’은 6살 생일 때 특별한 체험을 합니다. 부모님이 마술사를 불러 자신과 친구들에게 생일파티를 열어준 것입니다. 그때 수건에서 흰 토끼가 나오기도 하고 어항과 금붕어가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마술사는 그녀에게 금붕어가 든 어항을 선물하였습니다. 켈리는 그 금붕어를 스누피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좋아하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켈리는 스누피가 보고 싶어서 가장 먼저 어항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스누피가 죽어서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우울해진 켈리가 울자 엄마는 이렇게 위로해 주었습니다. “얘야, 금붕어는 원래 오래 살지 않아. 이제 떠날 때가 되었던 거야.” 그런데 자라면서 엄마의 말이 거짓인 것을 알았습니다. 금붕어는 환경만 좋으면 20~30년도 살 수 있습니다. 작은 봉지에서 스트레스를 받았던 금붕어가 유리 어항에 혼자만 들어있어서 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그녀는 사람도 환경의 영향을 받는지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비만은 개인 성향의 차이일까, 아니면 환경의 영향이 클까를 연구했습니다. 뉴욕에서 소호 스프링가에서 업타운으로 향하는 C라인 지하철을 타면 10명 중 한 사람 정도가 비만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맨해튼에서 북쪽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고 20분 정도(10㎞) 가면 할렘의 웨스트 125번가가 나오는데 여기는 네 명 중 한 명이 비만입니다. 마찬가지로 어퍼 이스트사이드의 96번가에서 6호선 업타운 행을 타고 8㎞ 정도 북쪽으로 가서 브롱크스에서 내리면 비만은 세 명 중 한 명으로 증가합니다.
거리가 멀지 않은 같은 뉴욕 시내에서도 이런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말 유전적으로 비만이 될 사람들이 그곳에 몰려 사는 것일까요? 그러면 지역에 따른 편차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원인은 환경 때문입니다. 비만이 되는 음식을 파는 식당들을 찾기 어려우면 그 지역에서는 비만율이 낮다고 합니다.
사람은 환경에 지배를 받습니다. 그 환경을 좋아하면 그 환경을 닮아갑니다. 아기에게 환경이 되어주는 부모나 어른들이 곧 아이들의 소금입니다. 그 짠맛을 간직하였다면 아이는 건강하게 성장할 것이고 짠맛을 잃었다면 아이들은 동물의 본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옥사나 말라야’는 세 살 때 알코올 중독에 걸린 부모에게서 버려졌습니다. 추운 겨울에 버려진 그녀는 본능적으로 따듯한 곳을 찾아 움직였습니다. 그녀가 찾아간 곳은 바로 개들이 사육되고 있던 오두막입니다. 그들의 부모는 그녀를 다시 찾지 않았습니다. 옥사나는 날고기와 개 사료를 먹으며 살아남았습니다.
그렇게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우연히 옥사나가 발견되었을 때 그녀의 모습은 이미 사람인지 들개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행히 사람에게 발견이 되었지만, 옥사나가 인간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까요? 그녀는 인간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네 발로 걷고 개처럼 짖었습니다. 네 발로 나무를 단숨에 뛰어넘는 모습은 영락없는 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옥사나를 보면서 강아지에게서 보는 귀여움을 느낄 수 없을까요? 우리는 사람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 옥사나에게서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되지 못하는 옥사나가 안타까운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인간의 본성을 지닌 사람의 시선입니다. 이 때문에 바꾸고 싶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옥사나에게 정말 오랜 시간 인간답게 사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인간의 옷을 입히고 머리카락을 다듬었습니다. 그런데 옥사나는 자신을 인간으로 생각할까요, 아니면 아직도 개라고 생각할까요? 두 발로 걷는 것을 배우기는 했지만, 여전히 네 발로 걷는 것이 더 안정적으로 보입니다.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네 발로 걸으며 개처럼 으르렁거립니다. 그녀는 자신이 아무리 인간의 모습이라 해도 생존하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었고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개라는 믿음이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만들어줄 수 있는 환경이란 바로 ‘내가 누구냐는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짐승과 같다면 자녀도 짐승과 같은 존재라 여기고 그렇게 자랍니다. 어렸을 때 우리가 종교교육을 제대로 해줘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사춘기는 더는 부모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 시기입니다. 다른 성장의 환경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좋은 환경이 제공되지 않으면 아이는 마치 개 우리에서 성장하는 것처럼 세속적인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기 전 첫영성체 때 정말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고 그분들의 환경에서 살게 해야 합니다.
소금의 역할이란 나의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주님의 환경 안에서 살게 하는 일입니다. 아기가 태중에서 성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태중에서 성장한다고 믿게 하는 일입니다. 옥사나는 자신이 부모와 같은 인간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소금의 짠맛을 잃었던 부모입니다. 우리가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짠맛을 유지하려면 내 환경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본성이 하느님이라는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내 안에 머무는 이들은 이 믿음에 따라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소금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나의 짠맛을 가장 잘 확인할 방법은 자녀를 보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사랑하여 부모의 환경 안에 머뭅니다. 그리고 부모가 만들어주는 환경대로 자랍니다. 내가 키운 아이들이 죄에서 끊임없이 벗어나고 있다면 나는 짠맛의 소금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환경입니다.
나와 함께 머물기를 원하는 이들이 동물의 본성에서 벗어나고 있나요? 그러면 나는 짠맛을 간직한 소금입니다. 지옥 불에 떨어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머무는 이들이 돈에 대한 욕심과 성적인 즐거움, 교만한 말과 행동을 더 찾게 된다면 나는 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나와 함께 머무는 이들 대부분이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 살펴보십시오. 내가 곧 이웃의 환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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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9,41-50 :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41절) 자선을 베푸는 데는 부유하고 풍족한 사람들뿐 아니라,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들도 다 그 몫이 있다. 인간은 누구도 남과 나눌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나누는 것이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애정은 같을 수 있지 않겠는가? 목말라 하는 사람에게 냉수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것 자체가 자선이라고 하셨다.
자선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42절)고 하신다. 이 말은 인간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버려지는 모습이다. 땅에는 그가 묻힐 곳이 없어서 돌을 달아 바다에 수장시키는 것이다.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불행한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45절)고 하셨다고 지체를 잘라 버리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분이 잘라내라고 하신 것은 지체가 아니라, 욕망이다. 하느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는 데, 반대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 우리 육의 욕망을 끊어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달려가는 방향을 멸망의 길에서 돌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47절) 눈은 우리 마음의 창과 같고 온갖 더러운 욕망은 갈라진 틈새와 같은 눈을 통해 우리에게 들어오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을 핑핑 돌게 만드는 것들로부터 우리 눈을 가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결국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하느님의 뜻을 놓고 갈등하는 나!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지 않는 구더기나 꺼지지 않는 불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지옥에 있는 구더기나 불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보는 그러한 것들이 아니다. 구더기와 불은 고통을 의미하는데, 이 세상에서 겪는 어떠한 감각의 고통도 저승에서 죄인들이 받을 벌에 비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꺼지는 불과 꺼지지 않는 불은 차이가 크다. 구더기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죽지않는다고 하는 말은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제할 길 없는 탄식과 후회가 있는 그곳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으며, 죽고 싶어도 죽음조차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들은 미래의 삶에 대한 희망을 주고 자유의지로써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에 대한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해 준다. 주님 안에 희망을 가지고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50절) 소금은 말씀의 지혜를 뜻한다. 지혜롭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자기 말이 청중의 일치를 뒤흔들어 놓는 일이 없도록 매우 두려워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잘 선택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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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마실 물 한 잔이라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 9,41)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아주 작은 선행도 모두 기억하셨다가 반드시 상을 주신다.”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은 ‘구원의 은총’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아주 작은 선행이라도 실천하면구원받을 기회를 얻게 된다는 가르침이 됩니다. 여기서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라는 말씀은, 이 가르침이 ‘비그리스도교인’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비그리스도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구원에서 배제되는 일은 없습니다.) ‘마실 물 한 잔’은, 주는 쪽 입장에서 아주 작고 사소한 선행을 뜻하는데, 받는 쪽 입장에서는 죽을 위험에서 살아나게 해 주는 ‘큰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마실 물 한 잔’이라는 말에서 요한복음 4장의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시카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셨다.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요한 4,5-7) 우리에게 ‘마실 물 한 잔’을 청하는 사람이 예수님일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그네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사람도 있었습니다."(히브 13,2. 공동번역) (여기서 ‘나그네’는 여러 가지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뜨내기’ 같은 사람을 뜻하고, ‘천사’는 ‘하느님’을 뜻합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 9,42)
이 말씀은 두 가지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마실 물 한 잔’을 주는 것과 같은 선행을 실천하기를 거절해서 상대방을 죄짓게 하는 경우. 예를 들면, 굶주리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아서 그 사람을 도둑질을 할 수밖에 없는 궁지로 몰아넣는 일. 그런 상황에서는, 굶어죽지 않으려고 도둑질을 한 사람보다는 굶주리는 사람을 외면한 사람들의 죄가 더 큽니다.
2)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경우.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지은 사람 자신에게도 그 죄의 책임이 있지만, 죄를 짓도록 유혹한 사람의 책임이 더 크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마르 9,43)
이 말씀은, 죄를 짓게 만드는 유혹이 다가왔을 때, 마치 손을 잘라 버리는 것 같은 단호한 심정으로 그 유혹을 물리치라는 가르침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예수님께서 엄하게 꾸짖으신 일은 좋은 모범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마르 8,31-33)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에게 오른팔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는 제자였지만, 그 제자가 당신의 길을 가로막자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고 대단히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사실 그 일은 당신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지만, 베드로 사도를 위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갈 위험에 놓여 있는 그를 구하기 위해서 그렇게 엄하게 꾸짖으셨다는 것입니다.)
‘유혹’은 대부분 ‘잘 아는 사람, 친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옵니다. 나의 손과 발처럼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나를 죄짓게 한다면, 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는 자녀가 나를 죄짓게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일에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함께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선’이어야 합니다. 함께 ‘선’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사랑’입니다. ‘악’을 향해서 간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어리석은 욕망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짓게 하는 것들’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0-23)(여기서 ‘더럽힌다.’는 ‘죄짓게 한다.’입니다.) 우리를 죄짓게 하는 것이 정말로 손과 발과 눈이라면, 손과 발과 눈을 잘라 버리면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를 죄짓게 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속에 숨어 있는 ‘악한 욕망’에서 죄가 생깁니다.)그러니 죄를 피하려면 그 ‘마음이라는 것’을 잘라 버려야 하는데, 도대체 마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잘라 버릴 수 있을까? ‘마음이라는 것’에서 죄짓게 하는 유혹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막는 방법은 ‘기도’ 밖에 없습니다. 다른 비결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라고 말씀하셨는데, ‘유혹’은 항상 마귀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은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충동, 욕망, 욕심 등을 다스리는 일에도 해당됩니다. (기도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만으로 유혹에 맞서려고 한다면, 백전백패입니다. 물론 기도를 하면 노력을 안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지만, 기도하면서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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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4달 된 손녀를 1달 동안 돌보고 온 자매님이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저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손녀의 얼굴을 보면서, 손녀의 작은 손과 발을 보면서 하느님의 선물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생명의 탄생,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 하느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하느님이 아니시라면 누가 있어서 이런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천사가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10인치가 넘게 눈이 온 새벽입니다. 신문사의 마당과 길을 치워야하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천사처럼 눈 치우는 장비를 몰고 옆에 있는 퀸즈 성당 신부님이 신문사로 왔습니다. 3시간을 넘게 치워야 하는데 20분 만에 눈을 깔끔하게 치워주고 갔습니다. 성당 지하 친교실에 가보니 자매님들이 녹두를 큰 그릇에 불리고 있었습니다. 주일에 녹두 빈대떡을 만들기 위해서 눈보라를 헤치고 성당으로 오셨습니다. 제가 함께하는 부르클린 성당에서도 자매님들이 집에 모여서 만두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주일에 성당에 오시는 분들에게 주려고 만들었다고 합니다. 기꺼이 눈을 치워주신 신부님, 매운 양파를 까면서 녹두 빈대떡을 준비하는 자매님, 예쁜 만두를 만드는 자매님은 분명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천사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군가 부자가 된다 하여도, 제집의 영광을 드높인다 하여도, 부러워하지 마라.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 영광도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한다.”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갖기 위해서 양심을 속이고, 이웃에게 큰 상처를 주고, 가족까지 멀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그런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하십니다. 그 어리석음을 경고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그만큼 재물과 명예 그리고 권력에 대한 집착과 욕심이 크기 때문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도, 종교인도, 성직자도 이런 유혹에 넘어지는 것을 봅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지만, 신앙은 결단과 실천이 필요합니다.
식당에서 일하는 직원에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손님 중에는 몇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친절하고 예의 바른 손님, 손님들끼리 화목하고 친교를 나누는 손님, 손님들끼리 다투고 욕하는 손님, 직원을 하인처럼 대하는 손님, 말을 함부로 하는 손님’이 있습니다. 손님들 중에는 배움이 많고, 재산이 많고, 능력이 뛰어난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배움의 크기가, 재산의 많음이, 능력의 뛰어남이 손님의 친절과 예의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종교인들 중에도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 서로 다투는 사람이 있다고 말을 합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마치 제가 그런 것처럼 미안했습니다. 직원은 다행히 제게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신부님처럼 친절하고 예의 바른 손님은 많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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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병훈 세례자요한 신부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소금은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않되는 것입니다. 고기를 구워먹을 때도, 장을 담글 때도, 국을 끓일 때도, 생선을 보관할 때도 소금은 쓰입니다.
소금을 뿌려서 맛을 맞추는 것을 간이라고 합니다. 국 같은 곳에는 간이 금방 들지만 젓갈류나 생선 또는 배추 김치 등은 오래 둘수록 간이 깊이 배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국 같은 것에는 “간이 들었다”라고 하고, 오래 두어야하는 것은 “간이 배였다”라고 하는가봅니다.
오래 되어 묵은 맛이 배여 나올수록 맛있습니다. 간장, 된장, 고추장, 홍어, 막걸리 등이 그렇습니다. 오래 되어 묵은 맛이 배여 나올수록 좋은 것 중에서 최고는 좋은 친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래된 친구와 이어주는 우정은 아무것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옛날 서양 사람들에게도 소금은 음식에 맛을 들이는 것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변치 않는 우정, 성실, 맹세의 상징으로도 나옵니다.
그래서 성서에서도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는 다윗과 소금으로 계약을 맺으시고”(역하 13, 5)라고 합니다. 그리고 불에 태워 바치는 “번제물 위에 소금을 뿌려 야훼께 바쳐야한다”(에제 43,24)고 하니, 하느님도 싱거운 음식은 별로 입에 맞지 않으셨나 봅니다.
하여튼 제물 위에 뿌리는 소금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맺는 계약의 의미를 가지면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변함없는 우정과 성실을 나타냅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제물 위에 소금을 뿌려 계약을 맺은 역사가 수천년이 되니, 간이 배여도 아주 깊이 배여 있고, 묵은 맛도 그 많큼이나 좋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을 한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에 대한 깊은 우정을 표현하십니다. 친구에게 좋은 것은 나에게도 좋은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나를 믿는 이 작인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라고 하시면서 친구 사이를 갈라놓는 이들에게 제자들에 대한 깊은 우정을 과시하십니다. 친구에게 나쁜 것은 나에게도 나쁜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이렇게 오래된 좋은 친구 사이에 배여 나는 깊은 우정을 나타내는 소금은 매우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금이 짠맛을 잃으며, 다시 말하면 그 우정이 한쪽의 탓으로 깨어지면 어떻게 그 묵은 맛을 다시 낼 수 있겠습니까?
오래 묵은 것일수록 상하게 되면 그 맛은 아주 안좋은 것입니다. 우정을 깨어버린 쪽도 우정이 깨어진 쪽도 서로 간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고 당부하시는 것이겠지요.
소금에 대해서 집회서에서는 이렇게도 이야기 합니다. “사람이 사는 데 제일 필요한 것은 물과 불과 쇠와 소금이며, 밀가루와 우유와 꿀, 그리고, 포도즙과 기름과 의복이다. 이 모든 것이 착한 사람들에게는 좋은 것이 되고 악인들에게는 악한 물건이 된다.”(집회 39,26) 아무리 좋은 것도 좋은 사람이 사용하면 좋은 것이지만, 악인이 사용하면 악한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좋은 사람들 간의 우정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일이지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 간에 이야기하는 의리라는 것은 보복을 연상케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들은 다른 이들과 나누어 쓸 때는 축복이 될 것이지만, 다른 이들의 아우성을 외면할 때는 녹이 슬어, 우리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젓가락으로 맛을 한번 보시고는 젓가락을 놓고 한 마디 하겠지요? “사랑이 식은 게지”
예수님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우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깊은 우정의 묵은 맛을 지켜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 맛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마지막날에 예수님께서 젓가락으로 맛을 한번 보시고는 숟가락까지 드시면서 한마디 하시겠지요?
“그래! 이 맛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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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상균 다니엘 신부님]
<공동체 안에서의 화목>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소 섬뜩한 말씀을 하십니다. “손을 잘라 버려라”, “발을 잘라 버려라”, “눈을 빼 던져 버려라”
처음 이 복음을 접했을 때에 조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이 말씀은 마지막 구절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서로 펑화롭게 지내라”
어느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별히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 교우들끼리 화목하게 지내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갈등을 빚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미움, 시기, 질투로 이어지는 이 갈등은 일방적인 경우는 잘 없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미워하면 그 사람도 나를 미워하게 되고, 내가 그 사람을 시기, 질투하면 그 사람도 나를 경계하고 시기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보면 ‘내 편’, ‘니 편’ 갈리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그를 미워하면 결국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문제로 번져갑니다. 마치 독사에게 물린 내 발의 독이 온 몸으로 퍼져나가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위 사람들과 갈등을 빚게 되는 원인은 다양합니다. 다양한 그 원인들 중에는 매우 심각한 것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가 빚는 갈등의 원인 중 많은 부분은 사소한 경우일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것이 사소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면에 자존심 싸움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서로의 화목을 위한 친교 프로그램 준비에 있어서 이런 저런 방법을 모색하다가도 자신의 자존심 살리기에 집착하면 내 방식만을 고집하게 되어 갈등이 빚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습게도, 함께 친교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도 오히려 그 친교 프로그램 때문에 괜한 미움이 쌓이게 됩니다.
결국 나의 사소한 ‘자존심 지키기’ 때문에 ‘나’와 ‘너’를 죄짓게 하고 ‘우리’ 공동체를 병들게 합니다. 시작은 사소하지만 결과는 엄청나게 되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발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자존심을 버려라. 그 자존심 때문에 공동체 전체가 불행해지는 것보다 자존심을 버리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 낫다”
우리는 작은 욕심 하나로 전체를 망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에만 집착해서도 안 됩니다. 지금 그 누군가와 사소한 자존심 싸움에 빠져 있다면 더 큰 것을 바라보며 나의 자존심을 버리고 먼저 사과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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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은 냉정하고 가혹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에게 닥칠 책임을 예수님께서는 충격 요법까지 쓰시면서 경고하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소중한 손과 발, 눈이 나를 죄짓게 하거든 가차 없이 잘라 버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아예 죄를 지을 생각을 하지도 말라는 훈계입니다. 우리도 간혹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과장된 표현을 쓰듯이 말입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의 유혹에 빠졌을 때 겪게 될 고통을 미리 알고 계셨나 봅니다.
집회서는 우리가 겪는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구체적인 지침을 줍니다. “너 자신과 네 힘을 붙좇지 말고, 마음의 욕망을 따르지 마라.” 능력 중심의 시대, 욕망의 사회에 대한 경고입니다.
“속죄를 과신하지 마라.”
“‘그분의 인자함이 크시니, 수많은 내 죄악이 속죄받으리라.’고 말하지 마라.”
남에게는 엄격하면서 자신에게만 하느님의 자비를 남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님께 돌아가기를 미루지 말고, 하루하루 늦추려 하지 마라.” 즐길 수 있을 때 실컷 즐기고, 하느님을 모르는 것이 더 자유롭다고 말하는 냉소적인 이들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부정한 재산을 믿지 마라.” 재산을 모으기만 하고 나누지 못하는 이들이 말년에 겪는 자녀들의 재산 다툼, 평생 돈 모으느라 삶의 기쁨도 잊은 채 병원비로 재산을 날리는 이들, 망나니로 키운 자녀들 뒤치다꺼리로 재산을 탕진한 이들에게도 하느님의 경고는 전달됩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사는 동안에는 이런 훈계가 실감나지 않습니다. 다 잃고 바닥으로 떨어져야 뒤늦게 깨닫는 것이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마음에 담은 소금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나만 잘살겠다고 평생 남을 외면하다 보면, 훗날 하느님을 마주 뵐 때 무슨 말씀을 드릴 것인지 생각해 볼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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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앞 장면에서 보여주듯이,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서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기에, 그가 하는 일을 막아 보려고 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 9,42)
우리가 자주 빠지는 일이기에 가슴이 섬찟합니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자신을 죄짓게 하는 도구 세 가지, 곧 자신의 손과 발과 눈을 잘라버리고 빼버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옥구더기와 지옥불과 지옥 불 소금을 피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손과 발과 눈을 잘라내라라’는 말씀이 아니라, 죄를 짓게 하는 그 단초가 되는 죄의 뿌리를 잘라내라는 말씀입니다. 곧 ‘죄를 불러들인 마음의 뿌리를 절단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 9,50)
이는 제자들이 ‘소금’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소금은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산상설교에서 보여주듯이, “세상의 소금”(마태 5,13) 입니다. 곧 다른 이 속으로 들어가 녹아서 부패를 막고 맛을 냅니다. 또한, 소금은 곡물(레위 2,13)이나 향료(탈출 30,35)에 뿌려져 성별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제물(민수 18,19)에 뿌려져 하느님과의 언약 관계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무엇보다도 평화의 도구로 말해집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따르지 않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마귀를 쫒아내는 일을 막지 말라고 하셨고, 그 앞 장면에서는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마태오복음>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하느님에게 참여하는 모든 것, 곧 세상 전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구원보다, 남의 구원을 먼저 찾으라고 하십니다.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지 말고, 그의 구원을 먼저 찾으라 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을 되새겨봅니다. “여러분의 말은 언제나 정답고 언제나 소금으로 맛을 낸 것과 같아야 합니다.”(콜로 4,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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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 9,50)
주님!
제 마음을 사랑의 소금에 절이소서.
제 마음이 부패하지 말게 하소서!
제 마음이 깨끗해지고 당신 마음 되게 하소서!
제 마음이 사랑의 소금을 간직하고
형제들에게 녹여들어 당신의 평화를 이루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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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죄 더하기 죄>
마르코 9,41-5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지지하는 사람이다, 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쳐라, 소금)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모두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죄 더하기 죄>
죄짓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
죄짓는 것은
죄짓고 싶지 않은 나를
거스르는 죄이지요
죄짓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
죄짓게 하는 것은
죄짓고 싶지 않은 너를
거스르는 죄요
그렇게
죄지음으로써
죄짓고 싶지 않은 나를
거스르는 죄 더하기 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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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단호한 결단>
“행동을 통해서 수확하는 것은 습관이고, 습관을 심어 수확하는 것은 성격이며 성격을 심어 수확하는 것은 운명입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다음에는 습관이 우리를 만듭니다.” 그러니 좋은 습관을 지닐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좋은 습관은 덕이 되고, 좋지 않은 습관은 그야말로 악습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악한 표양으로 남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 9,4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릇된 말과 행동으로 신앙이 약한 사람을 죄짓게 하여 신앙을 저버리게 한다면 그 책임이 막중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네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네 발이 너를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마르 9,45-47) 이렇게 섬뜩한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사람의‘신앙에 걸림돌이 되는 악한 행동은 절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섬김의 자세로 살지 않고 오히려 잘못된 행동으로 다른 이들을 신앙에서 멀어지게 한다면, 짠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되어서 버려질 뿐입니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는 옛 말을 흘려들어서는 안 되지요.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합니다. 매순간 단호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말씀하십니다. '교회가 권력과 돈과 허영을 쫓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이끄시는 그리스도인의 길은 봉사와 겸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분열시키는 ‘세속적인 유혹’을 이겨내고 출세와 출세를 위해 타인을 망가트리고 싶은 유혹에 잘 맞서야 한다.'
날이 갈수록 신앙이 여려지고 있다고 합니다. 참된 신앙인의 삶보다는 무늬만 신앙인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환경은 좋아졌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정도는 부족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예전에는 모든 환경과 여건, 처지가 어려웠지만 믿음의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세상 안에서 나를 유혹하는 것이 너무도 많기에 마음이 흔들리고 심지어 신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도 늘어만 갑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은 한순간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눈길을 돌립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4,18)
그러므로 영원한 것을 잡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 9,41-50)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소금은 보존하기 위한 소금이 아니라 주기 위한 소금입니다. 소금은 자기 맛을 느껴지지 않게 하고 오히려 각 음식의 맛이 좋아지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듯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자신의 풍요로움을 가지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5,13)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소금의 맛을 내기 위해서는 그만한 수고와 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과하면 소금 맛만 느껴지고 다른 식재료의 맛은 느낄 수가 없게 됩니다.
따라서 매 순간 단호한 결단이 요구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것을 주고자 하십니다. 영원한 것을! 일상 안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리는 일이 무엇인지를 가려내시길”(에페 5,10) 바랍니다.
지옥불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마르9,48). 지역은 엄연한 실재입니다. 우리가 아직 볼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과 멀어져 마음의 불안을 느낄 때를 생각하면 지옥이 따로 없다는 의미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지옥불의 뜨거움은 현세에서 불의 뜨거움을 통해서 비유적으로 체험할 수 있겠지만 원한에 사로잡힐 때 영혼의 뜨거움을 체험하게 됩니다.
천국은 사랑으로 채워져 있지만, 지옥은 온갖 증오와 원한, 분노, 미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비가 허락되는 이 지상의 삶에서 천국을 희망하고 지옥의 삶을 피해야 합니다. 천국은 이미 지상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사랑으로 천국을 완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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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요한 신부님]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이 섬뜩한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적잖이 당황하곤 합니다. 너무 극단적이라는 생각이 들지요. 솔직히 나약한 인간이 죄짓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닐 텐데, 그럴 때마다 몇 개 되지도 않는 주요 신체 부분들을 정말로 하나둘 잘라 버리라는 말씀이신지 묻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실제로 그렇게 하라는 의도로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전달하고자 하는 바(‘죄짓지 않아야 함’)를 과장되게 표현해서 듣는 이들에게 강렬한 효과를 주는 수사학적 방법을 택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손과 발을 잘라 버려라.’, ‘눈을 빼 던져 버려라.’와 같은 다소 충격적인 표현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보다는 죄와 관련한 우리의 내적 성찰을 더 강화해서 죄짓는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체의 주요 부분 가운데 특히 손과 발, 그리고 눈이 언급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인간의 온갖 행위를 돕는 ‘손’은 악행을 저지를 때에도 가장 많이 사용되는 부분입니다. 인간의 공간적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발’은 우리를 악행의 현장으로 이끄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의 시각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눈’은 악행을 저지르고자 하는 다양한 유혹이 들어오는 창구가 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선을 위하여 쓰도록 이 모두를 손수 우리에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손과 발, 그리고 눈은 지금 자기 역할에 충실합니까? 아니면 악행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까? 주님 보시기에 선하고 좋은 역할만 하는 아름다운 손과 발, 그리고 사랑스러운 눈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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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네 손이 너를 죄짖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마르9,43)
오늘 복음(마르9,42-48)은 '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실행한다면, 이 세상에는 온통 장애를 지니고 살아가는 이들로 넘쳐날 것입니다. 손이나 발이 죄짖게 하면 그것을 잘라 버리고, 눈이 죄짖게 하면 그것을 빼 던져 버리라고 하시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한 몸으로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장애를 가지고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죄는 우리를 멸망에 빠트립니다. 그러니 우리는 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쳐야 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의 말씀처럼 죄의 유혹이 늘 우리를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5,8-9)
예수님께서는 내가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시지만, 또한 내가 너를 죄짖게 해서도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짖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9,42)
오늘 복음이, 내가 먼저 죄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고, 그래야 너와 내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지금 완전하게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항상 죄의 굴레 속에 머물러 있다고 말할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죄인들의 생명을 위해 사람이 되시고,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해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돌아가기만 하면 나를 받아 안아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합니다.
오늘도 믿음으로 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고, 하느님의 자비로 돌아가 다시 태어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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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소금을 쳐라…>
한 랍비에게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형제애를 강조하면서 격려하며 살 것을 당부하곤 하였습니다. 어느 날 밤. 가족이 잠들 무렵, 한 아들이 랍비에게 와서는 “아버지. 다른 형제들은 잠만 자는데 저는 자지 않고 계속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얘야, 그래서는 안 된다. 다른 형제의 흉을 보는 것보다 다른 형제와 같이 자는 편이 훨씬 나은 거란다.” 마태오 복음 5장 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 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바로 예수님의 이 말씀이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는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 복음을 보면, 누구든지 “나만 옳다.”라는 생각이나 아집으로 다른 사람을 절망하게 하거나, 상처를 준다면 당장 멈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그러니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하느님 나라’는 우리 몸의 사지를 모두 잃는 한이 있어도 꼭 들어가야만 하는 소중한 곳이지만, ‘지옥은 우리 몸의 사지를 다 잃은 한이 있어도 절대로 들어가지 말아야 할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은혜로운 것은 하느님 나라에서는 손과 발을 다 잘라버리고, 눈이 없더라도 하느님 나라에서는 치유가 되어 채워지고 회복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마치 희망이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지듯이, 지금 저희 모두의 삶이 하느님 나라에서 사는 것처럼 아픈 것에 치유가 일어나고, 은총이 다시 돌아오는 회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르코 복음 9장에서 “다른 사람과 하나 되는 길”을 보여주시면서, 그 길을 위하여 오늘 복음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아멘.
사랑하는 고운님들! 구약 성경에 레위기 2장 13절에 보면, 하느님께 곡식 제물을 바치는 규정이 있습니다. “너희가 곡식 제물을 바치는 모든 예물에는 소금을 쳐야 한다. 너희가 곡식 제물에 너희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소금을 빼놓아서는 안 된다. 너희의 모든 예물과 함께 소금을 바쳐야 한다.” 바로 “소금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소금은 시퍼렇게 살아있는 식물을 부드럽게 숨죽이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레위기 말씀 중에 “소금을 쳐야 한다.”라는 말씀이 저와 고운님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들립니다. “이제 네가 숨 좀 죽어야 하겠다.” “어깨에 들어간 힘을 좀 빼야 하겠다.” “네가 좀 낮추어야겠다.” 그래서 “가장 잘났고 똑똑한 줄 아는 고운님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해야 하겠다.”라는 것입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친히 “소금을 쳐라”라고 하시는데, 고운님들 자신이 소금을 치지 않으면 그다음에는 하느님 친히 소금을 치시겠다는 것입니다. “숨 좀 죽이고, 힘 좀 빼고, 낮추고 겸손하게 살라.”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나만 옳다.’라는 성질을 죽일 때까지, ‘남보다 내가 더 나아야지’라는 욕심을 내려놓을 때까지 그리고 고운님들이 먼저 내려갈 때까지 소금을 치실 것입니다.
성 스테파노께서는 돌에 맞아 순교하셨습니다. 성인께서 비록 돌에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숨을 거두셨지만, 성인의 신앙은 자기를 죽이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그리고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 씨앗은 곡식의 많은 열매로 나타나는 것 같이 소금의 역할도 그렇습니다. “고운님, 바로 당신이 소금입니다. 고운님들이 힘을 빼고 숨을 죽이면 평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멘.
저 두레박 사제도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면서 몸과 마음이 아픈 고운님들과 아픈 이들을 돌보는 고운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주님의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지금 고운님들 자신이 하시는 일 안에서 기도로서, 그리고 믿음으로 소금의 역할을 통해 서로 화해하고 평화로운 삶의 자리를 만들어 가면서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아멘.
(동영상은 아래를 길게 누르세요)
https://youtu.be/13qn28pq5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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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죄를 짓지 마십시오>
-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공부, 회개의 삶 -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질 때까지 성난 채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악마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지 마십시오.”(에페4,26-27)
수요일 끝기도 시 말씀이 묵상중 문득 생각납니다. 어제 읽은 29년 동안 불법체류노동자로부터 6명의 전직 대통령, 법정 스님등 수천명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 ‘염장이(염습殮襲을 하는 사람)’ 유재철씨의 인터뷰 마지막 말마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법정스님은 몹시 편안해 보였어요. 잠깐 잠드신 것처럼 보여 흔들어 깨울 뻔했어요. 법정스님은 수의 대신 평소 즐겨 입던 승복을 입히고 관도 준비하지 말고 사리도 찾지 말라고 유지를 남기셨어요. 정말 수천명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면서 얻게 된 지혜는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이죠. 오늘을 열심히 살고,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 죽음은 누구에게나 언제 닥칠지 모르니까요.”
일주 전 4박5일의 제주도 성지 순례 여정 때의 진지했던 묵상도 생각납니다. 순례 여정 며칠 지나니 서서히 돌아갈 집 수도원이 그리워졌습니다. 그런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 순례 여정 끝내고 죽음을 맞이할 때 갈 집이 없다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옷은 잘 차려 입었는데 갈 곳이 없구나!”
어디선가 읽은 수의壽衣를 곱게 차려 입힌 친구의 죽음을 앞에 둔 어느 신자 분의 탄식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영원한 인생 순례 여정이 아니라 언젠가 끝날 때 과연 아버지의 집에 기쁘게 귀가하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겠는지요. 하루하루 충실히 깨어 살아 아버지의 집에 가까워 질수록 기쁨도 더해 진다면 얼마나 멋진 삶이겠는지요.
이런 자각이 투철하다면 정말 죄를 지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정말 몸조심, 맘조심, 말조심 할 것이며, 손관리, 발관리, 눈관리에 만전을 다하며 아름답고 품위있는 사랑의 삶에 온 힘을 쏟을 것입니다. 얼마전 화장실 청소시 실수로 락스가 바지에 묻자 즉시 탈색하여 새바지가 보기 흉해져 마음이 언짢아 즉시 몇분에게 알아보니 탈색은 지울 수 없다 했습니다.
즉시 ‘아, 죄가 마음에, 영혼에 미치는 영향이 이렇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으로 순백純白의 순수했던 마음들이, 영혼들이 세월 흘러가면서 죄로 인해 탈색, 변질되어 많이도 얼룩지어 있겠다 싶었습니다.
이래서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끊임없는 기도, 끊임없는 말씀공부, 끊임없는 회개의 수행이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야 순수와 열정의 사람이 되겠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고질적 마음의 병인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이 셋의 영적 수행뿐임을 깨닫습니다.
무지로 인한 탐욕의 죄입니다. 죄의 뿌리에는 무지의 탐욕이 자기 잡고 있습니다. 마음이 좋아야 생각도 말도 글도 행동도 좋습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공부, 회개의 수행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고 마음을 깨끗이 합니다. 순수한 마음은 영원 불변의 고정적 실재가 아닙니다. 물도 고이면 썩듯이 끊임없는 수행이 있어야 샘솟는 우물같은, 맑게 흐르는 개울같은 순수의 마음입니다.
좋은 마음에서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글, 좋은 행동이듯, 반대로 한결같은 좋은 습관의 행동이 좋은 마음을 만들어 줍니다. 좀 나쁜 마음이라 낙심할 것이 아니니, 끊임없는 선행의 수행과 회개 은총이 더하여질 때 나쁜 마음이나 인성도 선하게 바뀌어 지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평생 죽을 때까지 목숨을 걸고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 사랑의 수행에 온힘을 다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복음과 독서 말씀에 대한 답입니다. 두 말마디로 요약하면 “죄를 짓지 말라”, “지체없이, 끊임없이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의 사람에게 물한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사람 누구나 그리스도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멀리 갈 것 없이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작고 큰 것 상관없이 최선을 다해 선행을 베풀 때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복음 말씀도 충격적이나 구체적이라 실질적 도움이 됩니다. 마음은 지체로 표현되어 손으로, 발로, 눈으로 죄를 짓게 됩니다. 손이 죄를 지으면 손을 잘라 버리고, 발이 죄를 지으면 발을 잘라 버리고, 눈이 죄를 지으면 눈을 뽑아버리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가 아닌 참으로 손관리, 발관리, 눈관리에 만전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손으로 아무것이나 하지 말고, 발로 아무데나 가지 말고, 눈으로 아무것이나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혼에 깊은 자국을 남겨 나쁜 기억으로 우리를 괴롭힙니다. 탐욕따라, 육적본능따라 가지 말고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잘 선택하여 좋은 습관을 생활화하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날마다 평생 일과표의 궤도와 질서에 따라 규칙적인 삶에 탈선하지 말고 있어야 할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책임을 다하며 제대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질서한 삶보다 영성생활에 해로운 것은 없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소금이 상징하는 바 참 깊습니다. 부패인생을 막아주는 소금입니다.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부패한 성인은 없습니다. 음식은 부패하여 맛이 가면 버리면 되지만 부패하여 맛이 간 인생이라면 참 대책이 없습니다. 이래서 소금이 절대적입니다. 그렇다면 소금은 무엇입니까?
주님입니다. 끊임없는 기도, 끊임없는 말씀공부,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을 모시고 살아야 부패하지 않고 늘 새로울 수 있습니다. 영혼중의 영혼이 그리스도요, 말씀과 하나되야 비로소 살아나는 영혼입니다. 참으로 마음에 소금이신 주님을 모시고 살 때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며 지낼 수 있습니다.
인간을 부패하게 하는 주범이 바로 무지의 탐욕입니다. 그러니 생각이 없는, 의식이 없는 졸부拙富들이 부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 하는데 둘 다 무지의 소치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준열한 예언자적 경고는 바로 이런 부자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탐욕의 무지를 일깨우는 회개를 촉구하는 천둥같은 충격요법의 말씀으로 복음과 맥을 같이 합니다.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 먹었습니다. 그대들의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 갔습니다.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
이런 탐욕에 중독된 영혼없는 괴물같이 부패된 삶이라면 죽음의 날에 무슨 면목으로 아버지의 집에 귀가歸家할 수 있을런지요! 가난하다 무조건 천국도 아니고 부자라 하여 무조건 지옥도 아닙니다. 천국이나 지옥은 이미 지상에서 시작됩니다. 참으로 깨어 하느님 중심의 삶에 철저하여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나의 삶을 사는 것이 궁극의 답입니다.
바로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공부와 회개의 수행이 죄를 짓지 않고 날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강화해 줍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철저히 깨어 하느님 중심의 삶을,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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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말씀 기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자꾸만 더 쌓으려는 내 마음을 봅니다.
자꾸만 더 채우려는 내 욕망을 봅니다.
자꾸만 더 가지려는 내 욕심을 봅니다.
모두 다 부질 없는 것임을 잘 알면서도
미래를 위한 안전 보장 장치라고
마치 내일 죽게 될 처지임에도
곳간을 더 짓겠다고 생각하는
그 어리석은 부자처럼...
나의 주님!
야고보 사도의 질책이 맘을 후려 칩니다.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주님이 들려주시는 말씀은
내가 어떻게 해야하는지
그 방향을 가르쳐 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주님!
"쌓지 말고 허물어라.
채우지 말고 비워라.
받으려만 하지 말고 주어라."
그것이 소금이 되는 길이군요.
그 소금을 내 맘에 깊이 간직하고
필요한 곳에 적절히 뿌리며
제 맛을 내는
평화의 사람으로
오늘을 살게 하소서.
오!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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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ygl6PJ7Tt9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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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마르 9, 43)
뒤돌아보면
결단과 결심이
많이 부족했다.
결단해야 할 것이
한 둘이 아니다.
부족한 결단을
주님께 봉헌한다.
믿음은
결단과
함께 간다.
결단은
우리자신을
속이지 않는다.
참된 만남은
결단의
방식으로
서로를
서로를 살린다.
신앙의 축은
결단이다.
결단으로
참된 가치는
새롭게
회복된다.
참된 출발은
우리의
악습을
잘라내는
결단이다.
사람과
양심 사이에는
결단이 있다.
신앙의 여정은
결단의 연속이다.
악습을 잘라낸
자리에서
부활은
이루어진다.
결단의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한다.
결단이
중심이
되지 못하면
우리의 생활은
바뀔 수 없다.
결단은
변화이다.
결단은
참된
자유이다.
하느님께
가는 길은
악습을
잘라내고
뽑아내는
결단의 길이다.
결단이 우리의
오늘을 살리고
우리의 만남을
새롭게 함을
진실로 믿는다.
참된 실천은
잘라내고
뽑아내는
신앙인의
정체성이다.
잘라내고
뽑아야 할 것은
우리의 거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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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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