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이 길을 터벅터벅 걸을 때 참 좋았다. 마을이 있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한없이 궁핍한 그 시절에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걷고 걷다 보면 어딘가 좋은 세상이 있으리라. 마을도 여행자도 끊긴 길 끝. 정체성을 알 수
없는 풍차 한 대가 언덕 위에 서서 와글거리는 행락객들을 맞는다. 글 곽재구(시인) 사진 최수연 기자
1018번 도로.
이정표를 확인하는 순간 훅~ 꽃냄새가 끼쳐온다. 언덕배기 산자락 어디엔가 천리향 한 그루가 서 있는 모양이다.
잠시 주위를 둘러본다. 꽃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주황색의 황하코스모스들이 바람에 목을 흔든다. 보이지 않는 꽃향기의 주인. 그가 1018번
도로에 진입한 한 여행자를 어디선가 환영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스무 살 무렵 처음 이 길을 걸었을 때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알 수 없었다. 지도는 지녔으나 볼 필요가 없었다. 마른풀들의 냄새와 남해의 반짝이는 물살들. 뭔가를 생각한다는 것이 무의미한
일이었다. 얼굴에 햇살을 바르고 길 위의 자갈을 툭툭 차며 안녕! 인사를 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었다.
이 길 위에서 생의
호사가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낡은 천막을 치고 들국화와 코스모스로 만든 꽃다발 하나를 천막 입구에 걸어두면 샹그릴라가 따로 없었다.
천막 안에서 바다를 보며 헤르만 헤세를 읽었다. 누군가 내게 살아오는 동안 가? 가슴설레는 일이 무엇인가 물어오면 망설이지 않을 대답이 있다.
대학 1학년, 교정에 책 장수가 찾아왔다. 월부로 문학전집을 파는 책 장수였다. 그가 내게 헤세 전집의 카탈로그를 건넸다. ‘크눌프’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싯다르타’. 고교 시절 밤을 새워 읽었던 글들. 내게 그 글들은 소설이 아닌 한 구도자의 쓸쓸하고 아름다운 자기 고백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에게서 헤세 전집을 구입했다. 돈도 없고 벌이도 없었던 그 시절, 어떻게 그 전집을 구할 생각을 했는지, 처음 본 책 장수는
무얼 믿고 내게 책을 팔았는지 모르겠다.
헤세 전집은 그 무렵 내 재산목록 1호였고, 길을 떠날 때면 그중의 한 권과 길동무가
되었다. 바람과 구름, 배낭 속의 헤세와 길. 그것만으로 삶이 두렵거나 외롭지 않았다. 군 입대를 하며 집 없이 떠돌던 시절은 끝났다. 훈련소에
들어가던 내게 걱정이 하나 있었다. 헤세 전집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무렵 내게는 강은교와 김춘수·신동엽·김수영·김지하 등 구하기 힘든
초판본들이 있었다. 모두 아끼는 시집들이었지만 기꺼이 친구들에게 나눠 줄 수 있었다. 그 친구들은 집 없는 내게 잠잘 곳과 밥과 술·담배 를
제공했고, 때로는 브람스나 비발디 같은 클래식 음반을 들려주기도 했다. 나는 지금도 좋은 시와 좋은 음악은 좋은 동무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헤세 전집만은 나눠줄수 없었다. 이종 여동생이 생각났다. 사범대 가정과에 다니는 그 친구라면 3년의 군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도
책을 온전히 건사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군 생활을 하며 힘들 때마다 헤세와 함께 거닐던 길 생각을 했다. 군에서 돌아와 나는 헤세와 다시
조우했고, 세월은 작은 모래알과 들풀 냄새와 바람 속에 길 하나를 보여주었다. 생이란, 시란 그 길 속으로 걸어 ?어가는
일이었다.
그가 열네 살에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고 말했던것, 스물두 살에 첫 시집을 냈던 것, 그 이후 혹독한 인도
여행을 하고 돌아왔던 것들이 마음에 남았지만 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1946년 ‘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이었다. 타고르의 시를 많이 좋아했지만 1913년 타고르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실에 대해서 나는 아쉬움이 없었다. 동방의 성자. 고요하고
신비하고 깨끗한 인간 세상의 꿈. 신과의 대화. 이런 이미지들이 서양 세계에 전달될 수 있음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헤세는
아니었다. 그가 아주 고요하고 완강하게 노벨문학상을 거부했다면 참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인간과 인간이 빚은 세계에 대한 깊은
지혜와 사랑을 우리에게 이야기해준 것만으로 그는 완벽한 인간의 역할을 해냈다. 무슨 상이 필요하겠는가? 1018번 길은
이어진다.
거제시 둔덕면의 술역마을에서 차를 멈춘다. 처음 거제도에 들어섰을 때 천막을 친 마을. 술역이라는 이름에서 누룩 뜨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마을 사람 몇을 붙들고 왜 술역인가 물었지만 아무도 연유를 알지 못했다. 그냥 허허 웃룀며 예부터 술역이었어, 라고
말할 뿐. 그때 내 마음 한쪽에서는 이곳에 술과 관련된 어떤 슬프고 아름다운 전설이 있거나, 아니면 술을 아주 좋아하는 동방의 사람들이 이곳
바닷가 마을에 숨어 살았다 하는 식의 이야기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마을의 남녀노소가 함께 모여 쌀로 빚은 술을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고 생의 긴 항해를 이야기할 수 있다면 아름답지 않겠는가? 뺏고 빼앗기고, 속이고 핍박하는 삶이 아닌 자연과 더불어 바람처럼 들꽃처럼
살아간다면 그것만으로 살 만한 세상이 아니겠는가? 마을 노인정에 들러 릿전처럼 왜 술역이나요? 물으니 같은 답이 돌아온다. 몰라 그냥 술역이야.
언덕에 노란 돼지감자꽃이 피고 석류가 익고 마을 중앙에 정자가 있다. 등을 대고 누우니 산들바람이 불어오고 졸음이 온다. 바람 속에 벼 익는
냄새가 나고, 마을의 어느 집에서 술 익는 냄새가 나는 듯하였다. 한숨 잤다. 눈을 뜨니 가을 햇살 따사로운 바닷가 마을. 거제도 마을
유래지에는 유배 온 고려의 한 왕이 육지와 교류를 한 역마을, 곧 수역이 었는데 뒤에 술역述驛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
지세포知世浦로 차의 방향을 잡는다.
마을 이름에서 심지 굳은 삶을 살다 간 인간의 냄새가 난다. 세상 이치를
알고 싶소? 그렇다면 이곳으로 오시오. 오래전 이 마을에 숨을 부린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바람 소리 속에 스며 있다. 1990년대 초반
미술평론가 L형 일행과 함께 이 길에 들어선 적이 있다. 지명이 풍기는 카리스마 때문에 우리 일행은 잠시 대화를 멈추었는데, 그때 차 앞으로
다가오는 한 물체가 있었다. 거북이었다. 길이가 50㎝쯤 되는 거북이 도로를 횡단하고 있었다. 느릿느릿 네 발을 움직이며 기어가는 거북 앞에서
차를 멈추었다. 길 한쪽은 바닷가 모래밭이었고, 반대편은 소나무가 들 어선 숲이었다. 거북은 도로를 횡단하여 솔숲 쪽으로 가는 중이었다. 거북을
만난 게 무슨 의미인지 설왕설래가 있었다. 그날 거북은 포박당하여 박스에 넣어지는 횡액을 당했다.
돌아오는 길에 거북을 어떻게 할
것인가로 설전이 있었다. 바다에 놓아주자는 의견이 있었고 놓아주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있었다. L형이 얘기했다. 일행 중 장형이었던 그는 투철한
리얼리스트였다.
“거북이 영물이라는 것은 인간의 삶과 역사 속에서 그 의미가 있는 것이오. 이야기나 신화는 더 좋은 인간의 삶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다오. 놓아주기보다는 요리해서 먹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에너지를 쌓는 것이 지세포의 길 위에서 만난 거북의 의미일
것 같으오.” 놀랍고 또 놀라운 생각이었지만 그의 주장에 감동이 있었다. 새 로운 세상. 인간이 함께 어울려 따뜻이 살 수 있는 세상. 그보다
더 소중한 이데올로기가 어디 있겠는가? 자신의 이론적 신념을 현실의 삶에 그대로 적용하는 L형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L형의 집에서 급한 전화가 왔다. 나는 그 전화가 좋았다. 집으로 가는 택시를 타며 그는 내게 한 차례 더 당부를 했다. 용봉탕을
꼭 만드시오. 남은 게 있으면 내일 먹으러 오겠소. 그날 우리는 그의 신념을 실천하지 못했다. 거북은 박스 안에서 세 개의 알을 낳았고, 이튿날
아침 거북과 나는 가까운 목포 바다를 찾았다. 세월의 압박 속에서 함께 꾸는 꿈. 좋은 세상. 거북과의 인연으로 지세포의 길은 내게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
구조라 앞에서 차를 세웠다.
오래전 이 포구에 작은 교회가 있었다. 나는 사람이 북적대는 큰건물의
교회에는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고 십자가의 고상을 보더라도 별 느낌이 없다. 그런데 교실 반 칸이 조금 넘는 작은 교회당을 보면 꼭 들어가고
싶어진다. 그곳의 낡은 장의자에 잠시 앉아 있으면 마음이 맑아지고, 이 세상을 위해 경건한 삶을 살다간 이들의 고요한 에너지가 몸속에 느껴진다.
작은 종탑에 매달린 쇠 종의 줄을 당겨 땡그랑 소리를 듣고 싶어지고, 교회 앞 작은 뜰에 핀 채송화나 분꽃을 보면 손을 모으고 기도도 하고 싶어
진다.
오래전 그 교회 앞에서 낡은 러닝셔츠 차림으로 호미질을 하던 한 사내를 보았다. 목사님이세요? 물었더니 빙긋이 웃었다. 작은
교회의 목사가 호미로 상추도 심고 고추 모종도 심는다면 그곳에 언젠가 얽이 들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오래 뒤 선생이 되었을때 분꽃을 닮은 한
학생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는데, 구조라라고 얘기했다. 반가운 내가 그곳에 아주 작은 교회가 있는데, 라고 말했더니 그 교회의 목사님이
아빠예요, 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인연의 시간들이 하늘의 별자리처럼 빛나는 시간이 있다. 좋은 길을 간다는
것, 아름다운 삶을 꿈꾼다는것. 소소한 시간의 바다에 자신만의 작은 나뭇잎 배 하나를 띄울 수 있다면 그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정직하고
아름답지 않겠는가.
길은 구조라에서 학동으로 이어진다.
학동의 바닷가에는 흑진주를 연상시키는 몽돌들이 펼쳐져 있고
방조림으로 키운 송림이 있다. 수백 년 되었을 이 솔숲에 찾아온 학들 때문에 학동이란 이름이 붙여졌을 것이다. 학동마을 뒷산에는 울창한 동백
숲이 있고 이 숲에는 팔색조가 살고 있다는 말이 전설처럼 전해져 온다. 학동마을 끝자락에 묵은 먹기와집 한 채가 있었다. 기와집 안방 중앙에
2층 조선 장롱이 놓여 있었는데, 마당에 핀 동백꽃과 하얀 창호지 문들이 학이 사는 마을과 어울렸다. 그 집의 할머니가 처음 본 내게 수박을
쑥쑥 잘라주셨다. 집이 참 좋아요 라는 말에 “문만 열면 바다도 보이고 바람 소리도 좋아. 밤엔 파도 소리도 자박자박 좋지.” 할머니의 말이
시였다. 자박자박이 라는 의성어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그때 마음 안에 꿈이 하나 생겼다. 언젠가 할머니의 집에서 하룻밤
비럭잠을 잔다는 것. 창호 문을 열고 몽돌밭을 스쳐 자박자박거리는 파도 소리를 듣고 싶었다. 이듬해 나는 오로지 한 가지 꿈으로 학동마을을 다시
찾았다. 집도 마루도 2층장도 동백꽃도 다 그대로인데, 할머니가 계시지 않았다. 오십 줄의 사내에게 물으니 올해 돌아가셨다 한다. 사내는
할머니의 아들이었다. 대처에서 지내다가 집을 비울 수 없어 자주 들른다는 것이었다. 똑같은 집인데 할머니가 계시지 않으니 하룻밤 자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2017년 가을, 학동 풍경을 보지 않는 게 좋았다.
원주민들이 살던 마을은 단 한 채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식당·카페·펜션·편의점·유흥업소·기념품 가게들이 색색의 네온 간판을 걸고 들어섰다. 걸음을 옮기기 힘들었다. 동백 숲 쪽으로 들어가
할머니 기와집 자리를 찾아보았으나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품위 있던 솔숲도 사라지고 없다. 몽돌밭 가장자리의 수백년 묵은 튼나무 몇 그루가 남아
있기는 했으나 밑동에 두꺼운 나무 데크가 설치되어 있다. 옥중의 죄수들이 목에 칼을 쓴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도장포에 들러 바람의
언덕에 올랐다. 오랫동안 바람은 길의 영혼이라 생각했다. 터벅터벅 걸어 바람들이 모여 사는 언덕에 이른다면 얼마나 근사한 일이겠는가. 세상
어딘가에 바람의 언덕이 있다면 어떤 여행자도 찾아가보고 싶지 않겠는가. 오늘 바람의 언덕에서 당신의 이 꿈은 실현될 가능성이 없다. 수백 대의
차량과 주차장, 위락시설로 범벅인 채 바람의 언덕은 공중으로 솟구쳐 오른다.
오래전 이 길을 터벅터벅 걸을 때 참 좋았다. 마을이
있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한없이 궁핍한 그 시절에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걷고 걷다 보면 어딘가 좋은 세상이
있으리라. 마을도 여행자도 끊긴 길 끝. 정체성을 알 수 없는 풍차 한 대가 언덕 위에 서서 와글거리는 행락객들을 맞는다.
곽재구
시인은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사평역에서’ ‘전장포 아리랑’ ‘서울세노야’ ‘참맑은물살’ ‘와온바다’ 등의 시집을 펴냈다.
산문집으로는 ‘곽재구의 포구기행’과 ‘예술기행’ 등이 있다.
신동엽 창작문학상과 동서문학상을 받았고, 현재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