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7번째 편지 - 가을입니다
어제 여름은 떠나갔습니다. 오늘부터 가을입니다. 제 기준에 따르면 짧아진 가을은 9월 22일부터 11월 16일까지, 단 56일간 머무릅니다. 가을이 되면 몇 가지가 떠오릅니다. 수확, 독서, 쓸쓸함, 단풍, 낙엽.
그런데 문득 생각해보니 가을도 한 가지 계절이 아니라 생로병사처럼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을을 네 갈래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초가을>입니다.
9월 22일부터 10월 5일까지입니다. 아직 여름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아침저녁으로 공기가 조금씩 다릅니다. 설렘과 변화의 기척이 스치기도 합니다.
에밀리 디킨슨은 "As imperceptibly as Grief" 라며, 계절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그 순간을 우리가 거의 깨닫지 못할 만큼 서서히 스러지는 슬픔에 비유했습니다.
여름의 뜨거운 기운이 물러난 자리에 마음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보세요." 고은이 시를 짓고 최양숙이 노래합니다. 계절은 이처럼 우리의 가슴을 흔들어 놓습니다.
서정주 시인은 <국화 옆에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 봄부터 소쩍새는 / 그렇게 울었나 보다 /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가을은 이렇게 우리 곁으로 다가옵니다.
다음은 <한가을>입니다.
한여름이란 말은 들었지만, 한가을이란 말은 조금 생소합니다. 가장 왕성한 가을입니다. 10월 6일부터 10월 19일까지입니다. 하늘은 덧없이 높고 청명하며, 대지는 황금빛 곡식으로 무르익습니다. 산과 들에는 단풍의 향연이 펼쳐지고 바람마저도 성숙한 냄새를 품고 있습니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존 키츠는 1819년 가을 윈체스터를 거닐다가 <가을에게(To Autumn)>를 썼습니다.
"Season of mists and mellow fruitfulness, / Close bosom-friend of the maturing sun.”
(안개와 무르익은 풍요의 계절이여, / 성숙해가는 태양의 가슴 친구여)
그가 노래 한 그 순간이 바로 한가을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어 묻습니다.
"Where are the songs of Spring? Ay, where are they? / Think not of them, thou hast thy music too.”
(봄의 노래는 어디에 있는가? 그래, 어디에 있는가? / 그것을 생각하지 말라, 너도 너만의 음악을 가지고 있다.)
키츠의 말처럼 한가을은 지나간 봄을 그리워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의 충만함에 온전히 집중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다음은 <늦가을>입니다.
늦봄, 늦여름, 늦겨울보다 늦가을은 왠지 입에 잘 붙습니다. 그만큼 아쉬운 계절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올해는 10월 20일부터 11월 2일까지입니다. 늦가을은 단순한 쇠락의 시기가 아닙니다. 깊이 사색하며 내면으로 침잠하는 시간입니다. 새벽 서리가 내리고 찬바람이 붑니다. 나뭇잎들은 생의 마지막 춤을 추듯 하나둘 떨어집니다.
이효석은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낙엽 태우는 연기 속에서 나는 지나간 일 년을 살아간다. 낙엽이 타면서 내뿜는 향기로운 연기는 지난날의 추억을 되살려주고, 타오르는 불꽃은 새로운 생명의 약속을 품고 있다."
늦가을은 잃어버린 것들을 아쉬워하는 시간이 아니라, 그것들이 품었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입니다.
릴케는 유명한 시 <가을날>에서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라고 선언합니다. 그 때가 바로 늦가을입니다. 릴케는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영원히 집을 짓지 못할 것이다."며 절박함과 긴급함을 일깨웁니다. 늦가을은 마지막 준비의 시간이자, 한 해의 성과를 정리하고 자신의 내면을 깊이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입니다.
이번에는 마지막 가을입니다. 저는 이 마지막 가을의 이름을 <끝가을>이라고 붙였습니다.
11월 3일부터 11월 16일까지입니다. 나무는 잎을 거의 다 떨구고 겨울의 기척이 가까워집니다. 끝가을은 가을이 자신의 생을 마무리하고 겨울에게 그 임무를 넘겨주는 시기입니다.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황금빛은 오래가지 못한다(Nothing Gold Can Stay)>에서 노래합니다.
"Nature's first green is gold, / Her hardest hue to hold.”
(자연의 첫 녹색은 황금빛, / 가장 붙잡기 어려운 색)
그의 시처럼 우리는 아름다운 것들의 유한함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다음 계절에 대한 희망을 품습니다.
바쇼는 하이쿠에서 "이 길에는 가는 이 하나 없네"라고 하며, 가을 저녁의 적막감을 쓸쓸히 표현했습니다. 김현승은 시 <가을의 기도>에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홀로>가 아니라 <호올로>, 그것이 바로 끝가을의 본질입니다.
네 가을이 알려준 시간을 따라가다 보면 모든 끝은 새 시작을 품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초가을의 속삭임에서 마음을 열고, 한가을의 풍요로움에서 기쁨을 나누고, 늦가을의 고요함에서 의미를 추출하고, 끝가을의 문턱에서 모든 것을 담담하게 비워냅니다.
이번 가을은 곡식뿐 아니라 우리 마음까지도 풍성해지는 계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5.9.22 조근호 드림
첫댓글 가을에 대한 표현을 잘묘사했군요!
가을에 대한 시 까지 넣어..
좋은글에 머물다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