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지 / 오탁번
말복날 개 한 마리를 잡아 동네 술추렴을 했다
가마솥에 발가벗은 개를 넣고
땀 뻘뻘 흘리면서 장작불을 지폈다
참이슬 두 상자를 다 비우면서
밭농사 망쳐놓은 하늘을 욕했다
술이 거나해졌을 때 아랫집 김씨가 말했다
-이건 오씨가 먹어요, 엘레지요
엉겁결에 길쭉하게 생긴 고기를 받았다
엘레지라니? 농부들이 웬 비가(悲歌)를 다 알지?
-엘레지 몰라요? 개자지 몰라요?
30년 동안 국어선생 월급 받아먹고도
'엘레지'라는 우리말을 모르고 있었다니
나는 정말 부끄러웠다
그날 밤 나는 꿈에서 개가 되었다
가마솥에서 익는 나의 엘레지를 보았다
犬根을 매개로 한 詩와 男根의 상관관계 / 박제영
오탁번 시집을 읽다가 생각한다
좆도 아닌 것이 좆같이 사람을 울리고
좆돼버린 사람들 좆처럼 다시 서라 웃긴다
그게 시다
엘레지 몰라요? 개자지 몰라요?
봐라 개자지도 시가 된다
큰스님 / 오탁번
어느 고요한 날 저녁 무렵 둠벙에서 연꽃 피어나듯
오동나무 높은 가지에서 오동잎 하나 뚝 떨어지듯
무심히 돌아왔다가 훌쩍 떠나버린 그대여
대웅전 앞 석등에 불이 켜질 때마다
목탁 도끼로 패어 불바다 만들려고 안했나
내가 죽어 참나무 장작 위에 자빠졌다고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건 아니지?
석가는 큰 도적이고 달마는 작은 도적이니
나는 도적놈들 밑씻개나 만드는 땡추여
29는 18이요 씨팔은 두 아가리가 맞붙어야지?
두견새 우는 골에 흩어지는 붉은 꽃이여
저승문 앞에 선 그대의 검정고무신 사이로
해인사 가을낙엽 한 줄기 바람처럼 빠져나가고
녹두알 좁쌀만한 똥고집만 누리처럼 하늘을 덮는다
새 나라의 어린이 / 오탁번
새벽별 이울기도 전에 잠이 깬
갓 육십 된 새 나라의 어린이가
몇 백 살 먹은 느티나무에게 아침인사를 한다
-할아버지,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냐 오냐
단풍 든 느티나무 잎이 막 떨어진다
달걀 한 꾸러미 장에 내다 팔아서
할아버지 장수연(長壽煙)과 유엔성냥을 사오던
새 나라의 착한 어린이!
몇 백 년 된 검버섯 할아버지의
왕겨빛 구레나룻이
낙낙한 삼베적삼 같이 막 흩날린다
이숭원 비평집 『감성의 파문 』, [문학수첩]에서
오탁번 시인의 고향 집앞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고개 마루에 얹혀 살고 있다. 길 오고가며 쉬어 가기 안성
마춤이다. 그 느티나무 밑에서 시인은 나고 자라서 할아버지가 된 나이에도 어린이로 취급받을 수 밖에
없다. 느티나무가 몇 백년 장수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언제나 재롱부리고 어릴적 추억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는 시인의 마음이 무변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나 계란 한 줄을 팔아 장수연을 사고 유엔성냥을 사오라는 심부름 하던 추억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보며, 그
느티나무가 얼마나 많은 세월의 추억을 품에 품었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세월이라는 게 덧없음을 "낙낙한 삼베적삼 같이 막 흩날린다"라는 싯귀에서 느낄 수 있다. 마치 옛날 동화 속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굴비" (항간의 淫談)..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간다.
굴비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 장수는 뙤약별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한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 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약하며 수수방아를 찍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않고 목이 메였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밖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불렀다. ... ...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첫댓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석우님이 많이 사랑하셨구나 ^^
석우님 고마워요
반갑고ㅡ
석우님 덕분에
시 감상에 푹 빠져 봅니다.
반갑습니다,석우님~
덕분에 생각이 납니다..
굴비를 읽었던 기억.
다시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오랫만에 석우님 특유의 글을 읽습니다~
역시나
주제에 소제에 어울리는 폭넓은 시어들을 많이 알고 전파해 주는 석우님 ~~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