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한담] 네가 얼마나 근사한지! / 정은귀
발행일2024-01-01 [제3374호, 22면]
그 아이가 연구실 문을 똑똑 두드리며 내게 왔을 때 나는 화급한 학교 일을 처리하느라 매우 바빴다. ‘선생님, 지금 바쁘세요?’ 학생들이 면담을 원할 때는 미리 약속을 잡는 편인데, 그날 그 아이는 예고 없이 불쑥 찾아왔다. ‘00구나, 들어와. 어떻게 왔어?’ 그 학기 수업을 듣는 학생이었다. 학기가 시작되면 학생들 이름부터 외우기에 다행히 아이의 이름을 불러 줄 수 있었다. 교실 뒤쪽에 조용히 있는 편이지만 친구가 있었고, 글이 섬세한 아이였다.
그 아이는 대뜸 ‘죽고 싶어서 왔어요’ 라고 말한다. 첫 마디 치고는 너무 세다. ‘왜? 무슨 일 있어?’ 놀라 되묻는 내게 아이는 차분히 고민을 꺼냈다. 자꾸 사회에서 용납되지 않는 사랑을 하게 된다고. 남자가 좋다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꺼내 놓기도 힘들어 친구들과 가족 앞에서 말이 없어진다고. 방학 때는 먼 곳으로 여행을 한다고. 그러면서 묻는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요?’
그 아이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과 혐오의 말들, 거친 언어들이 너무 견디기 힘들다고 털어놓는다. ‘왜 죽어? 살아야지, 앞으로 더 당당히 살아야지. 넌 네가 얼마나 근사한지 모르지? 절대 죽지 마. 오늘부터 더 당당하게 살아.’ 나는 환히 웃으며 말했다. 그 아이는 ‘선생님은 하나도 안 놀라시네요’하며 오히려 놀란다.
살다 보면 자기 의지로 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또 혼자만의 고민인 것 같아도 많은 이들이 함께하는 고민이 많다고 그 아이에게 말했다. 멋진 너를 사랑하고 네 사랑을 믿으라고. 그리고 정말 고맙다고. 죽고 싶은 순간에 내게로 와 주어서 고맙다고. 어떻게 내게 올 생각을 했냐고 물으니, 그 아이 말이, ‘선생님은 늘 행복해 보여서요’ 라고 한다.
그런데 그 시절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당시 학과장으로 처리해야 했던 버거운 일 앞에서 수십 건의 법률 문서를 검토하던 때였다. 밤 12시까지 서류 정리를 하며 연구실에 앉아 있으면 교수직에 대한 회의로 눈물이 났다. 학생들과 시를 읽는 수업 시간이 유일한 산소 호흡기였다. 그래서 속으로는 울어도 학생들 앞에서는 웃었다. 그런 내가 행복해 보인다니, 죽고 싶은 자신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줄 것 같다니, 속으로 헛웃음이 났지만 그 말이 고마웠다.
우린 그날 서로가 구원이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내가 믿는 신은 너를 이처럼 멋지게 빚었고 가족도 너를 사랑하니 그걸 믿으라고 말했고, 그 아이는 교육의 장에서 소모품이 된 것 같은 회의에 힘겨운 내게 믿음으로 희망을 주었다. 그 아이가 죽고 싶은 순간에 내 연구실 문을 두드린 것도, 내가 놀라지 않고 아이의 고민을 가볍게 만들어 준 것도 다 고마운 우연이다.
‘네, 저를 부정하지 않을게요.’ 그 아이는 졸업 후에도 카드를 보내곤 한다. 잘 살고 있다고. 나는 그 아이가 행복을 찾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얼마 전 동성 커플의 사랑 또한 신의 사랑과 자비 안에 있다며 그들을 축복한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이 있었다. 나는 그날의 그 아이와, 그 이후에도 나를 거쳐 간 학생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다들 빛나는 보석들이다. 이 세계를 더 낫게 만들려고 다들 열심히 살고 있다. 아기 예수로 오신 하느님이 사랑하는 근사한 존재다. 교회가 이들을 품고 보듬지 않는다면 무얼 하겠는가?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