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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시: 2025. 2. 20~22.(목~토), 음력(1. 23~25), 일출 07:13~일몰 18:24
●산행지: 진도지맥 1구간 졸업
●산행코스: 진도대교 휴게소~망금산(106.5m)~도암산(122m)~금골산(202.2m)~고두산(252.2m)~설매봉~챙재~철천산(161.2m)~성재~용장산성~상봉(266.4m)~출일봉(226.7m)~오목재~첨찰산(485.2m)~수리봉(388.5m)~왕무덤재~남산(243.3m)~영매산(170.2m)~붉은재~대덕산(219.7m)~돌박재~대학봉(190.4m)~용수봉(170.7m)~죽청고개~봉호산(193.2m)~옹골산(211.5m)~여귀산(458.7m)~귀성삼거리~굴포고개~연대산(150.9m)~신동삼거리~월출산(110m)~희여산(269.3m)~백동재/석성삼거리~남두재~앞산(236.5m)~한복산(231.6m)~서망고개~173.1m봉~백미도 앞 갯바위
●먹거리: 생수1.5리터, 양갱5, 튀김건빵1, 다이제스트1, 크림빵, 사탕10
●준비물: 스틱, 헤드랜턴, 바람막이, 조끼, 여름용긴팔2, 윈드스토퍼, 내피점퍼, 폴라텍바지, 전지가위, 핫팩3, 손수건2, 비상약, 충전지3, 충전짹, 휴지, 물티슈, 안대, 귀마개, 귀덮개, 목폴라, 양말3
●거리: 약 60.91Km
●소요시간: 46.38h
●누구랑: 나홀로
●경비: 고속33,700원, 직행8,300원, 라면5,500원, 편의점도시락6,900원, 직행10,800원, 닭꼬치,후랑크쏘시지3,700원, 고속46,800원
●날씨: -1~3, 바람세고 날씨 좋음, 마지막날 오전 잠깐 눈
●산행경과:
* 2. 20.(목) : 14.8km
- 15:15 : 진도대교
- 15:31 : 망금산
- 16:47 : 금골산
- 18:46 : 창재
- 19:13 : 철천산(161.2m)
- 19:31 : 성재
- 19:56 : 262m봉
- 19:58 : 용장산성
- 20:16 : 상봉
- 20:48 : 출일봉
- 21:09 : 오목재
* 2. 21.(금) : 30.8km
- 05:15 : 오목재
- 06:34~07:16 : 임도
- 06:56~07:02 : 첨찰산
- 07:47 : 수리봉(388.5m)
- 08:33 : 성죽재
- 08:43 : 226m봉
- 09:08 : 양미굴봉
- 09:21 : 188m봉
- 09:30 : 왕무덤재
- 09:56,11~10:34 : 남산갈림봉, 행동식
- 10:20 : 남산(240.7m)
- 11:08 : 282m봉
- 11:24 : 228.5m봉
- 11:58 : 천방재
- 12:10 : 영매산(170.2m)
- 12:58 : 붉은재
- 13:30 : 155m봉
- 13:50 : 200.4m봉
- 14:03 : 가단재
- 14:11 : 대덕산(219.7m)
- 14:29 : 돌박재/ 상미고개
- 14:55 : 대학봉(190.4m)
- 15:10 : 용수봉(170.7m)
- 15:26 : 죽청고개
- 15:37 : 매듭재, 행동식
- 15:55 : 봉호산(193m)
- 16:04 : 무지개재
- 17:57 : 밀매실재(375m)
- 18:12~15 : 여귀산(458.4m)
- 18:42 : 386m봉
- 19:19 : 구암사
- 19:26 : 상만리 빈집
* 2. 22.(토) : 15.3km
- 04:15 : 상만리 출발
- 04:28 : 귀성삼거리
- 04:55 : 160.1m봉
- 05:11 : 130.1m봉
- 05:40 : 148.6m봉
- 05:57 : 임도
- 06:23 : 182.7m봉
- 06:38 : 굴포고개
- 07:15 : 연대산
- 07:43 : 신동삼거리, 행동식
- 08:23 : 월출산
- 08:52~09 : 희여산삼거리
- 09:00~03 : 희여산(269.3m)
- 09:40~10:00 : 석성삼거리/ 무궁화동산, 행동식
- 10:15 : 134.7m봉
- 10:27 : 남두재
- 11:08 : 앞산
- 11:32 : 한복산
- 12:26 : 129.5m봉
- 12:45~56 : 서망고개, 행동식
- 13:21 : 173m봉
- 13:39 : 93.2m봉
- 13:53 : 한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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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도지맥(珍島枝脈)이란 ?
진도지맥(珍島枝脈)은 해남반도와 진도를 잇는 진도대교에서 시작해 진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며 남쪽끝 서망항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로서, 망금산(112m), 도암산(122m→1.2km), 금골산(198m), 고두산(252.2m→1.4km), 챙재, 철천산(161.2m), 상봉(266m), 출일봉(226.7m), 첨찰산(485.2m→0.7km), 수리봉(389m), 여귀산(458.7km), 연대산(148.8km), 월출산(110m), 희여산(269m→0.2km), 한복산(232m)을 지나 백도앞 갯바위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47km인 산줄기이다. 망금산, 첨찰산, 여귀산을 거쳐 희여산에 이른 산줄기는 북쪽 지력산으로 가는 산줄기를 내보내고 한복산을 거쳐 백미도 앞에 이르러 끝이난다.(지력산으로 가는 산줄기가 더 길게 이어지지만 거제지맥, 남해지맥, 여수지맥, 고흥지맥, 사자지맥, 땅끝기맥과 같이 대양을 향해 남쪽으로 뻗어가는 산줄기를 주된 산줄기로 봤다)
♤ 진도지맥 개념도
♤ 진도지맥을 지나는 동네
* 진도군(珍島郡)
전남 서남부에 위치한 군으로 대한민국에서 제주도, 거제도에 이어 세번째로 큰 섬이다. 육지인 해남군 문내면과 연륙교인 진도대교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다리는 현재 진도군의 공식로고에도 사용한다. 진도(珍島)는 제주도 거제도에 이어 대한민국에서 세번째로 큰 섬임에도 섬이라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다. 진도대교(珍島大橋) 때문이다. 전남 해남군의 화원반도와 진도군 군내면 사이를 흐르는 물길이 울돌목이다. 물살이 세고 거칠다. 한자로는 명량(鳴梁)이고, 옛 이름은 돌맥이다. 병목처럼 생겼는데, 큰 물결과 커다란 파도가 좁은 해협을 만나 요동을 치며 격렬하게 소리친다. 이 거친 물살을 타고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 싸워 크게 이겼다. 1984년에 다리가 놓였다. 진도군 최고의 명승인 운림산방과 동석산, 삼별초의 도읍이던 용장성, 임진왜란 당시의 명량해전 격전지와 신비의 바닷길 등 괜찮은 관광사업자원을 갖고 있는 군이지만, 차가 없으면 관광이 매우 어려울 정도로 군청이 대중교통 관리에 무심하며, 결정적으론 세월호 여파 때문에 아직 분위기가 상당히 무거운 편이고 이 때문에 진도군의 이미지가 크게 나빠져 버려서 관광 수요도 많이 줄었다. 과거에는 옥도(玉島)로 불리기도 했는데, 진도는 섬 치고는 상당히 토질이 비옥한 편이라서 예로부터 농업만으로도 자급자족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겨울에도 웬만해서는 기온이 영하권으로 떨어지지 않아 사실상 1년 내내 농사가 가능한 곳이다. 그래서 다른 섬지역과는 또 다른 진도만의 독특한 문화가 등장한 배경이 되기도 하다. 오랜 기간에 걸친 간척지의 확장으로 해안 부근에 비교적 넓은 평야가 많다. 제주도를 제외하면 섬 자체의 문화가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벽파진(碧波津)은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있는 항구다. 진도와 육지를 건너는 가장 가까운 곳이 울돌목이지만, 물살이 거칠어 배를 띄우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진도대교가 놓이기 전까지 해남을 오가는 배는 벽파항이 최상이었다. 목포와 완도·목포와 제주를 오가는 배들의 기항지였으며, 제주 사람들이 미역과 귤을, 쌀과 소금으로 바꾸어 간 곳도 이곳이었다. 1597년 이순신 장군은 조선 모든 수군 이끈 채 배 12척이 전부였지만, 이곳에서 명량해전 최후의 전술을 고민했다. 뒤로 높지 않은 바위 언덕에 정자 하나가 풍경처럼 서있다. 벽파정(碧波亭)이다. 1207년(고려 희종3) 처음 세워졌다. 2016년에 다시 지었다. 유배형을 받고 진도로 들어온, 제주도로 건너가는 이들의 사연과 시구가 서리맞은 감나무에 홍시처럼 주렁주렁 걸려있다. 벽파진은 삼별초 대몽항쟁의 중심이었던 용장성의 관문이기도 했다. 고려 무신정권은 몽고군에 쫒겨 강화도로 들어가 39년을 머물렀다. 원종이 항복하고 개경으로 돌아갈 때, 삼별초군은 이를 거부하고 왕온(溫)을 황제로 추대했다. 총지휘관 배중손(裵仲孫)은 일천여 척의 배를 이끌고 1270년 6월 2일 강화도를 출발하여 2개월 17일 항해 후 벽파진에 도착했다. 용장성에 터를 잡았다. 상륙하여 적응하기도 벅찼을 터인데, 짧은 시간에 13km 성벽 쌓고, 궁궐까지 짓는 것은 불가능했을 터, 만약을 위해 후방기지를 준비해 놓은 듯하다. 1271년(원종 12)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 정부군과 홍다구의 몽고군도 벽파진에 상륙했다. 5월 15일 여몽연합군은 삼별초를 깨뜨렸다. 진도를 남으로 휩쓸며 남도진성까지 몰아붙였다. 왕온도 배중손도 죽었다. 김통정(金通精)은 생존자를 이끌고 제주도로 후퇴했다. 세력을 키우지만 1273년 4월 여몽연합군에게 완전 진압되었다. 삼별초 전쟁은 진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많이 죽고 많이 끌려갔다. 용장성 홍보관을 나와 진도읍 쪽으로 4km 남짓, 진도군 고군면 도평리 송우산 기슭 왼쪽 언덕에 꼬막 껍데기를 엎어 놓은 듯한 묘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정유재란 순절 묘역'이다. 명량에서 대승을 거둔 조선 수군은 곧바로 북상하여 신안 당사도로 후퇴하였다. 왜군은 진도로 상륙하였다. 이때 싸우다 죽은 이들이 묻힌 곳이다. 약 230여 명의 죽음, 그 232기의 무덤 중 그러나 딱 16기 이외에는 주인이 없다. 삶의 터전을 지키며 이름도 채 남기지 못한 죽음들이다. 진도의 토착 문화가 잘 보존된 것에는 진도 특유의 역사도 기인한다. 진도는 삼별초 항쟁 때 삼별초의 주요 거점 중 하나로 고려 정부군과 몽골군에게는 커다란 골칫거리였다. 이 때문에 몽골은 삼별초를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를 제외한 서남해안 섬들의 주민들을 모두 본토로 강제 이주시키는 공도령(空島令. 섬을 비움)을 내렸다. 몽골이 물러난 뒤에도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서남해안이 쑥대밭이 되자 고려 정부에서는 공도령을 계속 유지시켜야 했다. 이 때문에 각 섬 주민들이 지켜오던 토착 문화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진도는 정작 삼별초가 진압된 뒤 공도령이 곧 해제되었고, 왜구의 침입 때도 가까운 영암 지역에 이주했다가 곧 진도로 돌아와서 그나마 섬 문화를 지켜나갈 수 있었다. 1년 내내 먹고 살기에 걱정이 없고, 예전의 진도(珍島)는 유배의 섬이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고려부터 조선까지 무려 180여명이 진도에 유배당한 것으로 기록에 나타나며, 조선시대 귀양 온 선비들이 머물다 간 곳이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예향(藝鄕)이기도 하다. 유배당한 사대부들은 대부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시 관직에 오르기 때문에 유배지 인근에서 일정한 세력을 유지했다. 오죽하면 당시 유배자들 때문에 진도 주민들이 먹을 게 없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하지만 진도 주민들의 핏속에 유전되는 넉넉함과 예술적인 기질은 유배자들에게서 고급 문화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장점을 흡수해서 진도만의 독특함으로서 발전시켰다고 하며, 진돗개·구기자·돌미역의 삼보(三寶)와 노래·서화·홍주를 일컫는 삼락(三樂)의 섬이 진도(珍島)다. 조선시대까지 호랑이가 많이 살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현대 한국인에게 호랑이하면 깊은 산에 사는 동물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사실 호랑이는 산보다는 습지나 섬 등 물이 있는 곳을 좋아했지만 조선 중기~후기 때 물가가 사라지자 남은 호랑이들이 산으로 간 것이다. 아무튼 호랑이가 많이 서식했던 적이 있어서 마을 이름이 호동리거나 호랑이를 피하기 위해 바다가 갈라진 길을 건넜다는 뽕할머니 전설도 있고 농사하러 갔다가 호랑이를 봤다는 진도에서 오래 산 어르신들의 이야기도 있다. 또한 진도는 조선시대에 말을 중점적으로 방목하는 목장 지대여서 호랑이에게 먹잇감이 풍부한 곳이었다. 진도군 진도읍, 지산면, 임회면을 중심으로 사육되는 진돗개(천연기념물 53)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매년 4~9월에 심사하여 우수한 것은 족보에 올리기도 한다. 진돗개는 구기자·돌미역과 함께 오래 전부터 진도군의 3대 보배로 손꼽힌다. 현재 진도군청에서는 보호종 및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진돗개의 수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진돗개를 군외로 반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도군수의 승인 또는 진도군청에서 발행한 허가증을 받아야만 합법적으로 반출할 수 있다. 때문에 이 지역을 드나드는 차량들은 진도대교 입구 검문소에서 진돗개 반출 여부를 검문받게 되며 진돗개의 무단반출이 적발될 경우 진돗개를 전량 압수하여 진도 본토로 돌려보낸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살아있는 진돗개는 모두 회수된다. 오직 진도군 관내에만 한정하고 있는데 전라남도도 예외는 없다. 진도군민 및 진도군 거주자 또는 영주자는 누구나 진돗개를 키울 수 있으며 외지인이 키울 경우에는 반드시 진도군청의 허가 및 승인절차를 거쳐야 한다. 특산품으로는 양파, 마늘, 대파, 봄동, 구가지, 울금 정도가 있다. 특히 대파는 전국 물량의 40%를 진도에서 생산한다. [통합포털에서 발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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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간별 세부거리
진도대교-0.3km-망금산-2.5km-도암산(-1.2km)-1.4km-금골산-2.3km-고두산(-1.4km)-2.4km-챙재-0.5km-철천산-1.5km-선황산(-2.5km)-0.2km-상봉-1.4km-출일봉-2.1km-첨찰산(-0.7km)-0.4km-제봉(-0.6km)-1.1km-수리봉-4.2km-왕무덤재-0.3km-남산(-0.4km)-3.6km-붉은재/칠전고개-1.8km-대덕산/삼막봉(-2.1km)-0.8km-돌박재-6.3km-여귀산-5.1km-연대산-2.2km-월출산-0.5km-희여산(-0.2km)-3.3km-한복산-2.8km-백미도앞
* 구간거리
- 진도대교 ~ 왕무덤재 (2차선도로) 29.3km
-. 진도대교 ~ 챙재 12.5km
-. 챙재 ~ 오목재 4.3km
-. 오목재 ~ 왕무덤재 12.5km(첨찰산 왕복 1.4km 포함)
- 왕무덤재(2차선도로) ~ 18번도로(귀성고개) 18.6km
-. 왕무덤재 ~ 붉은재 6km
-. 붉은재 ~ 무지개재 6.6km
-. 무지개재 ~ 귀성고개 6km
- 18번도로(귀성삼거리) ~ 서망항 14.7km
-. 귀성고개/ 귀성삼거리 ~ 백동고개 4.2km
-. 신동삼거리 ~ 서망항 10.8km
-. 석성삼거리/무궁화동산 ~ 합수점/ 한바위 6km
* 식수 공급지 및 산행 정보
- 챙재: 주유소 물보충 가능
- 오목재: 인가 물보충 가능
- 왕무덤재: 주유소, 싸우나, 요양원, 어린이집
- 붉은재: 인가 물보충 가능
- 죽청고개: 고개 왼쪽 송정리 인가 물 보충 가능
- 귀성삼거리: 국립국악원 약 200m
- 석성삼거리/백동고개: 정자, 화장실 물보충 가능
- 서망고개 오른쪽 서망교차로: 편의점(세븐일레븐)
- 목포종합버스터미널근처/24시간 대송한방건강랜드사우나 전화: 061-285-3102)
- 진도개인택시 전화: 061-544-0082
- 진도여객 전화: 061-544-2062, - 진도공용버스터미널 전화: 061-544-2121
- 목포버스터미널 ~ 목포역: 10번, 13번 버스
- 임회면 개인택시: 061-543-9449, 061-543-3433, 061-544-7800, 010-3828-1161, 임회택시: 010-2055-8370
- 진도터미널 근처 24시모텔사우나찜질방(태평사우나): 061-542-7000, 1만원
* 서울에서 진도지맥 분기점 내려가는 길
- 서울 센트럴시티 ~ 진도터미널 06시, 08:10, 17:10, 4.40h, 40,900~53,200
- 진도터미널 ~ 진도각휴게소 택시 약 13,000
- 서울센트럴시티 ~ 목포종합버스터미널: ~08:30, 10시, 11:30, 13시, 14시, 15시, 18:30~, 3.50h, 36,000원
- 목포종합버스터미널~녹진버스정류장~진도공용버스터미널 버스: 06:30, 06:50, 0.45h, 6,300원
- 진도대교 건너자마자 녹진버스정류장에서 하차, 도로따라 진도대교로 이동
* 진도지맥 합수점에서 대중교통 이용하는 방법
- 서망삼거리버스정류장 ~ 진도공용버스터미널: 18:20, 0.30h, 2,200원
- 서망항 ~ 진도공용버스터미널: 택시 31,500원 (임회 개인택시: 010-5917-1311, 010-3605-2270)
- 진도항 ~ 진도공용버스터미널: 07:10 ~ 16:30, 18:20, 0.30h, 현금 1,000원
- 진도공용버스터미널 ~ 목포종합버스터미널: 18:10, 19:00, 20:20, 1.10h, 8,300원
- 목포종합버스터미널 ~ 센트럴시티(서울): ~16:40, 18시, 19시, 20:30, 3.50h, 33,700원~4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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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망하게도 60이 안됐는데 갈수록 총기가 사라집니다. 08:10분 진도행 고속을 이용할렸는데 퇴근시간을 07:15분으로 착각한 덕분으로 용장산성을 야밤에 지나야 했구요. 서울 10시 출발, 목포 14시 출발, 녹전에 내려 라면 한그릇 먹고 출발해 첫날 오목재 고성중버스정류소에서 1박, 둘쨋날 05:15분 출발 상만리 빈집에서 1박, 셋째날 04:15분 출발 마지막 합수점에 13:53분에 도착하였습니다. 백미도앞 합수점에서 서망항으로 나오는데 약 20분 소요되네요. 기왕지사 난생처음 가본 진도이기에 동석산과 세방낙조는 언젠가 패키지로 연결해얄것 같고, 벽파진에 가볼까했는데 왠걸 버스로는 한가지 일정을 소화하기도 무리더군요. 서망에서 16:40분 나와 진도 18시, 목포 19시에 서울로 상경 중입니다. 저 혼자만의 많은 에피소드를 간직하며 악명높은 진도지맥 60.91km를 2박3일에 걸쳐 졸업하였는데 우선 먼저 이길을 가신 선배님들께 무한한 감사와 약 15년 전 5회에 걸쳐 이길을 처음 뚫어주신 원로 준희, 박성철선생님, 아름다운강산(띠지에 7차 백두대간 진행 중이라 기재되어 있음), 여영선배님께 존경을 보내드립니다. 이 시기를 택하고 선답자 덕분에 전지가위를 한번도 꺼내지 않았음에도 명감나무에 긁혀 이마에 세줄 상처를 남기고, 진행하며 낚시바늘 처럼 날카로운 가시가 주디를 잡아당기면 코가 꽨것처럼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재빨리 되돌아서야 했습니다. 오늘 홀대모 부뜰이부부운영자님께서 영광스런 162지맥 졸업식을 황학지맥서 가지는데 직접 참석하여 축하를 드려야 함에도 진도를 택했어요. 그 예의 총기가 떨어지는 바람에 날짜가 겹친 지를 몰랐고, 이번 준비한 기회를 놓치면 1년 뒤로 미뤄지게 되놔서 부득불 강행했네요. 탁트인 바다에 점점 떠있는 섬들을 세아리며 원없이 걸었습니다. 챙재에서 오목재까지 야간에, 여귀산에서 국립국악원을 내려다보며 주차장 대기소를 비박지로 눈여겨 두었는데 헐~ 글쎄요, 해가 져서 귀성삼거리로 직접 치고 내리기가 여간 부담이 아니더군요. 구암사 해우소 소변실은 나프탈렌 냄새가 너무 심해 실격, 다행히 상만리 빈집을 장만해 바닷가 똥바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2만원짜리 텐트와 3천원짜리 은박매트리스 두장으로 2박3일의 배낭을 꾸리며 과연 계획대로 무사 졸업할 수 있을지 침낭을 넣기엔 무리였고, 먹거리도 양갱5, 튀김건빵1, 다이제스트1로 최소한으로 꾸리고 나름 만족해 했는데 산에서는 바람을 피하는 장소 선정이, 그리곤 비닐하우스, 재각, 사당, 산신각, 산불감시초소, 마을회관, 공중화장실 등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추위에 떠는건 기본이었습니다. 다행히 진통제를 먹고 무릎 통증을 피해 바짝 쪼그려 자는둥마는둥 할 수 있어서 새벽 일찍 출발하고 밤늦게까지 걸을 수 있었기에 막판에 시간 쫒기지 않고 여유있게 졸업을 손에 쥘 수 있었는데 추천할 만한 방식은 아닌것 같구, 다만 붉은재에 있는 외딴집에서 물을 구할 수 있고 석성삼거리 화장실은 훌륭한 비박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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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진버스정류장에 내려 진도대교로 걸어갑니다. 진도대교에서 도로를 무단횡단해 군내대로라 부르는 18번 국도를 건너고 진도대교 준공탑이 있는 진도지맥의 들머리로 향합니다. 준공탑 뒤쪽으로 진도타워를 바라보며 잡목을 헤치면서 올라서는게 진도지맥의 시작입니다.
♤ 진도대교/ 울돌목/ 서해랑길 5코스
전남 진도에는 해남반도를 사이에 두고 유리병의 목처럼 갑자기 좁아진 해로가 있는데, 이것을 울돌목이라 한다. 바닷물이 간조와 만조의 때를 맞추어 병의 목 같은 좁은 곳을 일시에 지나가므로 울돌목의 조류는 거세기로 이름이 높다. 남곤(南袞)은 시에서 ‘붉은 비 내리고 녹음은 살찌는데 거센 바람이 물결을 치매 조수(潮水)소리가 장하구나’라고 했다. 조수가 요란한 곳임을 표현하는 글귀이다. 조수는 썰물 때 물을 따라 해벽에 부딪혀 요란한 울음 소리같이 들리므로, 명량(鳴梁)으로 통용하기도 한다. 진도군 군내면 녹진과 해남군 문내면 학동사이에 놓인 길이 484m, 폭 11.7m의 국도 18호선인 전국에서 유일한 쌍둥이 사장교로 1984년 10월 18일 준공되어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으며, 2005년 12월 15일 제2의 진도대교가 개통되고 특히 낙조와 야경이 아름답고 다리 아래의 울돌목 물살은 장관을 이루는 곳으로 울돌목은 이충무공의 3대 해전 중의 하나인 명량대첩지로 잘 알려진 서해의 길목으로 해남과 진도 간의 좁은 해협을 이루며 바다의 폭은 한강 너비 정도의 294m 내외이다. 1984년 진도대교의 개통으로 인해 한반도의 최남단 지역이 된 진도는 연간 외국인을 포함하여 약 260만여 명이 찾는 국제적 관광 명소가 되었다. 아름다운 경관과 수많은 특산물 문화예술이 살아 숨쉬는 고장 진도로 오는 첫 번째 관문이다.
오도숙(吳道淑)이 《상경해정기》에서 울돌목을 한자로 울도항이라 표현한 것을 보면, 목이 곧 항인 것만은 분명하다. 또한 ‘동서가 물길로서 분리된 해안에는 석벽이 솟아 있고 바다의 넓이는 수십 보밖에 안 되나, 파류(波流)가 세어 소용돌이 일고 상경하는 배들은 이를 피하여 옆으로 세웠다’라고 기록했다. 이처럼 해로의 목에 해당하는 울돌목이 조류가 세고, 그것을 임진왜란 당시 이충무공이 전략에 이용함으로써, 명량대첩을 거둔 전략적 요새지가 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명량(鳴梁)은 우리말로 울돌목이라 부른다. ‘울’은 ‘운다’의 뜻이고 ‘돌’은 ‘돌다’의 의미인데, 물길이 휘돌아 나가는 바다가 마치 우는 소리를 내는 것처럼 들려 붙은 이름이다. 남해에서 들어온 바다는 명량을 지나며 엄청난 속도의 조류로 돌변한다. 초속 6미터가 넘는다. 여느 바다에 비하면 네 배나 빠른 속도다. 밀물과 썰물도 하루 네 차례다. 더구나 불규칙한 수중 암반 때문에 물이 솟구치거나 회전하는 회오리 현상이 일어난다. 이순신 장군은 이런 지형의 특성을 이용해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적을 물리쳤다.
♤ 진도군 군내면(郡內面)
전남 진도군 북부에 있는 진도군에 속한 1읍 6개 면 중의 하나로 보리섬·안치섬 등 여러 개의 무인도를 포함하고 있으며, 동쪽은 고군면, 남쪽은 고군면, 의신면, 진도읍, 서쪽은 진도읍, 조도면, 북쪽은 무안군 장산면과 해남군 문내면에 각각 닿아 있고 대부분이 300m 미만의 구릉지로 군내면 남부에 100~200m의 구릉성 산지가 동서로 뻗어 있다. 하천이 흐르는 산간의 곡저평야를 중심으로 논농사가 활발하며, 특히 방조제를 쌓아 조성된 둔전리 일대와 녹진리·덕평리의 평야가 중심을 이룬다. 둔전리·송산리 일대의 간석지는 간척사업으로 농경지화되었으며, 서부해안에서는 한의·진덕·녹진 염전을 중심으로 천일제염업이 활발하다. 녹진리에는 농공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국가지정문화재로는 백조도래지(천연기념물 101호, 나리 담수호 일원), 금골산 오층석탑(보물 529호, 둔전리 산94-1번지), 진도 용장성(사적 126호, 용장리 106번지관련항목 보기)이 있고, 도(道)지정문화재로는 용장사 석불좌상(유형문화재 17호, 용장리 산 90번지), 망금산 관방성(기념물 204호, 녹진리 산 1번지), 금골산 마애여래좌상(문화재자료 110호, 둔전리 산 392번지)이 있다. 이 외에도 녹진 진도대교 일원 명량해전지, 해언사지, 해언사지 삼층석탑, 세등리성지, 한사리사지 석탑재 및 석불 등을 비롯한 유적지와 많은 지석묘군이 남아 있다. 녹진리와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사이의 해협을 가로질러 진도대교가 놓여 있다. 이 다리는 해남 방면의 국도를 남북으로 길게 이어준다.
진도대교 휴게소에서 출발을 서두른다고 빠른 라면을 시켰는데 소고기대파국을 먹을걸 그랬습니다.
♤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鹿津里)
면의 북부에 있으며, 동쪽과 북쪽은 바다, 서쪽은 나리, 남쪽은 덕병리와 각각 접하고 있다. 교통은 진도의 첫 관문인 진도대교를 지나오기 때문에 도로의 여건이 좋아 교통편은 아주 편리하다. 지형이 사슴의 뿔처럼 생겼으므로 녹진이라 하였다. 동쪽의 망금산(望金山, 111m), 서쪽에 도암산(122m)이 있을 뿐 대부분 지역이 낮은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1984년 해남군 문내면 학동과 진도를 잇는 484m의 진도대교가 완공되자 녹진국민관광지가 개발되었다. 이곳은 물살이 세기로 이름난 울돌목으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이 왜군을 크게 물리친 곳이다. 해상케이블카, 해양에너지공원등이 조성되어 있다. 정상부에 설치된 진도타워에서는 진도대교와 울돌목 및 인근 다도해 풍경을 조망할 수 있으며 울돌목 물살체험장, 판옥선 등 다양한 즐길거리가 있다.
인근 군내면에 만금리라는 동네가 있네요. 날씨가 좋아 망금산에서 첨철산이 바라보이는군요. 망금산에서 넓게 울돌목을 감상하고 도로를 따라 내려서는데 도암산이 정면으로 바라보입니다. 첫번째 만나는 암거를 통과, 오른쪽으로 18번국도에 올라 갓길을 따라 한참을 걷습니다.
♤ 망금산(望金山, 106.5m)/ 전망대/ 관방성
망금산은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와 둔전리의 경계로 진도타워가 자리하고 있다.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에 위치한 진도타워는 망금산 정상에 세워졌는데, 이전에는 이곳에 녹진전망대가 있었으나 2011년 7월 이를 허물고, 2013년 10월 21일 진도타워를 새롭게 건립했다. 승전광장(진도타워)은 420년 전 이순신 장군을 도와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우리 조상과 진도군민들의 훌륭한 호국정신을 계승시키고자 만든 상징물이다. 진도의 관문산으로 명량해협이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위치에 있는 망금산은 산꼭대기에 가로 30m, 세로 20m의 토성을 쌓았던 흔적이 있으며, 백제시대 때부터 바다 물목을 지키는 군대 주둔지였다. 망금산은 한자로 바랄 망(望)자와 쇠 금(金)자를 쓰는데, 진도의 울돌목을 건너오는 길목에 있고, 백제 때 군사가 주둔하였으며, 토성을 쌓은 것으로 보아 망을 보는 것과 관련되어 붙여진 이름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옛 토성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지금은 산정상에 진도타워가 세워져 있다. 호남지도에는 망금봉산으로 표기되어 있고 주변에 금골산 및 녹진과 함께 명량도를 마주하고 있으며 망금봉을 지나 간재를 지나 진도군 치소로 이어지는 길이 묘사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 군일면의 신동리에 위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충무공 이순신이 진도를 남도의 요충이라 하였고 조선 선조 때 판중추부사 윤두수가 진도를 가장 중요한 관방지역이라 한 점과 『동국여지지』에 해로요해지지라 한 것에서 울두목을 일컫는 것임을 알 수 있는데 망금산성은 이를 지키기 위한 관방성이고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유인하여 명량해협(울돌목)에 모아 놓고 이 산에서 아녀자로 하여금 떼를 지어 강강수월래 놀이를 하게 했고 이에 넋을 빼앗긴 왜병과 적선 300여 척을 섬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곳 정상에는 강강술래터가 있는데 망금산은 13척의 배로 3백여척의 왜선을 물리친 명량해전지 (울돌목)에 연접하여 울돌목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해발 106.5m의 나지막한 산으로 명량해전 당시 이순신 장군은 적으로 하여금 우리 군사가 많이 보이게 하기 위하여 이 망금산에 토성을 쌓고 부근의 부녀자들을 모아 남장을 시켜 산봉우리를 원을 그리며 반복하여 돌게 하였다고 한다. 주로 추석날 밤 곡식의 풍년을 기원하며 추던 부녀자들의 민속놀이를 의병술로 사용한 것으로 지금도 망금산 산봉에는 망터가 있고 그 밑으로 강강술래터가 뚜렷하게 남아 있다. 망금산에서 18번국도로 내려서서 도로삼거리에서 왼쪽 간이도로를 따라 18번 국도를 따라 진도읍 방면으로 왼쪽으로 진행한다. 약 1.6km를 같이하다가 오른쪽 아래 신동교차로로 내려서면서 맥길로 진입한다. 방음벽이 끝나는 지점에서 금성교를 지나 옹벽으로 올라서기도 한다.
♤ 113.4m봉
흑염소 목장을 지나는데 도암산 갈림봉이지만 다녀오기엔 너무 멀다. 능선상의 하이디 염소농장을 빠져나가, 가시잡목길을 지나고, 69번 송전탑을 지나면 만나는 113.4m봉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 도암산(122m)/ 독굴산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에 있는 산으로 금골산과 연결되어 있으며 맥길에서 서쪽(오른쪽)으로 약 1.2km 떨어져 있다. 도암산 또는 독굴산으로도 불리며 뿔처렴 뾰족하게 생긴 빼어난 산세가 산꾼의 눈길을 잡아 당긴다.
♤ 132m봉
암릉으로 이루어진 봉우리이다. 금골산 오른쪽 옆으로 대야제와 도암산이 환하게 바라보인다.
♤ 136.6m봉/ 삼리봉(군내면 둔전리, 녹진리 → 덕병리)
망개나무와 잡목이 어우러진 등로라 힘들게 진행한다. 지맥의 오른쪽이 군내면 녹진리 → 덕병리로 바뀌는 삼리봉 지점이다.
삼거리에 배낭을 내려놓고 계단을 올라 정상을 다녀왔는데, 우회하지 않고 정상을 넘어서도 다시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서둘러야 하기에 시간관계상 마애여래좌상은 준비작업하며 블로그 사진을 본것으로 만족하고...
♤ 금골산갈림길
안농마을 갈림길에서 지맥길은 오른쪽 아래로 내려가지만 맥길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금골산을 향한 데크목 계단으로 향한다. 10분 정도 왕복하여 금골산 마애여래좌상을 보고 정상부에 올라 해언사 방향으로 내려서다가 지맥은 해언사와 연산마을 갈림길삼거리에서 오른쪽의 연산마을로 내려가야 한다.
금골산 정상에서 원경을 둘러봅니다. 북쪽으로는 월출산·흑석산이, 동쪽으로는 주작산·두륜산· 달마산·완도 상왕봉이, 서쪽으로는 양덕도·주지도·가사도·신의도·하의도·장산도·안좌도·팔금도·암태도·자은도가, 남쪽으로는 첨찰산이 다가옵니다. 근경으로는 지나온 망금산과 진도대교, 진도대교 넘어 해남 화원반도와 울돌목 아래로 떠 있는 넙섬, 굴섬, 녹도 그리고 둔전저수지 풍경을 바라봅니다. 화원지맥의 옥매산도 눈에 들어옵니다.
♤ 금골산(金骨山, 202.2m)/ 개골산(皆骨山)/ 상골산
진도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금골산은 산 전체가 거대한 바위로 우뚝 솟은 기이한 산이다. 개골산(皆骨山)이라고도 부르며 산 전체가 기암괴석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또 다른 이름으로 상골산이라고도 부른다. 금골산은 높이는 낮지만 정면에서 바라보면 마치 조각가가 바위에 예술작품을 조각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수십 길 절벽에는 층층바위를 이룬 곳 구멍이 숭숭 뚫린 곳이 있는가 하면 보는 방향에 따라 사람 또는 짐승으로 연상케 하는 기암괴석들이 산 전체를 수놓고 있다. 금골산 정상 부근의 석굴에는 금골산 마애여래좌상(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10호)이 새겨져 있다. 마애불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이 굴속에는 늙은 스님과 상좌한 사람이 살았는데 바위 구멍에서 매일 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쌀만 나왔고 식객이 더 늘더라도 절대 욕심을 버리고 그 나온 쌀만으로 먹고 살아야 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의외로 많은 손님들이 찾아와 두 사람분 쌀만 가지고는 음식을 함께 먹을 수 없게 됐다. 그래서 늙은 중이 화를 내며 '이놈의 구멍은 인정사정도 없더란 말이냐'하면서 더 많은 쌀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쌀구멍을 쑤셨다. 그러나 쌀은 더 나오지 않고 홧김에 쑤신 구멍만 망가지고 그 이후로는 구멍에서 한 톨의 쌀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놀라움과 후회에 잠긴 노승은 상좌와 함께 더 이상 먹을 것이 없는 이곳을 떠나고 말았다고 한다." 이주(李胄)는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1498년(연산군 4) 정언으로 있다가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 관직을 빼앗기고 진도에 유배되었으며, 1504년 갑자사화 때 김굉필 등과 함께 사형되었다. 「금골산록」은 이주가 1502년 9월 유배지인 진도의 금골산에 23일간 머물 때 금골산의 아름다움에 감탄해 금골산에 대해 기록했는데, 서거정의 『동문선』에 실려 오늘에 전해오고 있다. 금골산이란 이름의 유래는 없으나 금골(金骨)은 귀중한 물건을 뜻하며 속세를 벗어난 고상한 풍채와 골격, 즉 부처의 골격을 의미한다. 쇠 금(金)자에 뼈 골(骨)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산 전체가 철분함량이 높은 화산암과 누런 금빛의 응회암으로 이루어졌고, 뼈처럼 골격미가 드러나 있는 산지 모습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62.4m봉
등로가 희미한 연산마을 뒷산을 오르니 정상에서 관리가 부실한 이동통신망기지 울타리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걸려 있다. 내려서는 등로가 잡목이 심하고 험악하다. 연산마을로 내려서며 군내면 둔전리 내안으로 들어선다.
♤ 18번 국도(연산리)/ 진도군 군내면 둔전리 연산마을
연산마을로 이어지는 도로로 내려서서 왼쪽으로 향한다. 삼거리에 도착하니 연산버스정류장과 그 옆에 용인마을입구라는 표지석이 보인다. 군내면 둔전리에 속해있는 연산마을의 지명은 마을 뒤쪽의 산이 서로 이어져 있다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고 한다. 정류장 뒤쪽 연산길 2차선 도로를 잠시 따르다가 왼쪽 양회임도를 따라 18번 국도로 향한다음 국도를 무단횡단 하지 말고 왼쪽으로 굴다리를 통과하여 임도로 진입하면 이어가기가 수월하다.
♤ 220m봉/ 고두산분기봉/ 군내면 둔전리 - 분토리
오른쪽으로 약 1.4km를 가면 간재(진도터널)를 지나 고두산으로 향하며, 둔전리 내안을 지나온 지맥 마루금이 분토리와의 리계를 만나고 경계를 따라 왼쪽으로 이어진다.
♤ 설매봉(雪梅峰, 234.9m)/ 군내면 둔전리 - 분토리
황소선배님의 237m산패가 나무에 매어 있다. 진도군 군내면 둔전리와 분토리의 경계로 다음 지도에 설매봉으로 나오며 반바지님 코팅지에는 설매봉으로 적혀있다.
♤ 문텅바위/ 삼리봉(군내면 둔전리, 분토리 → 송산리)
설매봉에서 잠시 안부로 내렸다가 올라선 봉우리로 지맥의 오른쪽이 군내면 분토리에서 송산리로 바뀌는 삼리봉 지점이다.
♤ 진도군 군내면 송산리(松山里)
진도군 군내면에 있는 송산리는 소나무가 많아 솔뫼 또는 송산이라 하였으며, 입향조로 조씨가 먼저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본래 진도군 군일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가리를 병합하여 송산리라 하여 군내면에 편입되었으며, 서쪽에 있는 고두산(高頭山, 252m)이 지맥의 동쪽에 해당되며, 동쪽에는 철천산(161.2)]이 있고, 마을 앞으로는 면소재지와 벽파로 연결된 도로와 고군면의 오일시리에서 만나는 국도 등이 있어 교통이 편리한 편이다.
♤ 204m봉/ 삼리봉(군내면 송산리, 둔전리 → 세등리)
둔전재로 내려서는 봉우리로 지맥의 왼쪽이 군내면 둔전리에서 세등리로 바뀌는 삼리봉 지점이다.
♤ 둔전재(165m, 屯田峙)
한여름에는 가시잡목과 칡넝쿨이 되덮고 있는 어마무시한 안부이다. 반바지님의 코팅지가 나무에 매어 있다. 둔전이란 고려·조선시대에 군량을 충당하기 위하여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설치한 토지를 말하는데 고려시대에는 영토가 확장되어 가는 과정에서 군량 확보를 위하여 변경 지대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둔전병(屯田兵) 또는 방수군(防戍軍)을 두어 경작하였다. 말기에 이르면서 둔전을 경작하는 농민의 부담이 증가할 뿐만 아니라 농장(農莊)의 발달과 함께 권세가에 겸병되는 폐해를 가져왔기 때문에 새로 왕조를 개창한 조선 전기에는 둔전문제 해결책의 하나로 일부를 제외하고는 혁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점차 국방문제와 군량 확보가 문제가 되면서 치폐(置廢)를 반복하다가 성종때(재위: 1469~1494)에 제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이러한 둔전은 설치 목적에 따라 군둔전과 관둔전으로 나뉘었고, 설치방법도 다양하였으며, 그 경영도 부역노동에 의한 경작이 사라지고 영(營) ·아문(衙門)의 둔전에서는 병작제가 행해졌는데, 때문에 영·아문과 둔전 경작자 간에는 지주제에서와 같은 대립관계가 형성되었다. 조선시대 둔전이 설치되었던 군내면 둔전리로 넘나드는 고개로 보인다. 실재 왼쪽으로 둔전리로 내려가는 등로가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듯 보인다.
♤ 제각산(222m)
준희선생님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둔전재에서 올라선 봉우리로 군내면 송산리와 세등리의 경계이다. 도로에 내려서서 자동차공업사 왼쪽으로 간다.
여몽연합군이 용장산성을 세군데에서 공격했다는데, 그 전투전적지 중에 하나가 창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챙재에 내려서니 깜깜한데 오목재까지는 가야 다음 일정이 수월할거 같아 야간산행으로 오목재까지 가기로 합니다. 주유소 왼쪽 담벼락 끝이 들입구이고 올라서자마자 표고재배 참나무와 임도가 나오네요. 오른쪽으로 이동해 묘지 위에서 올랐습니다.
♤ 챙재/ 창재/ 2차선도로/ 진고개/ 버스정류소/ GS진고개주유소
진도군 군내면의 송산리(松山里)와 세등리(細登里)를 나누는 고갯길로 진도대교를 건너 진도읍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고개였으나 2003년 진도터널이 뚫린 후에는 이용이 줄었다. 이곳 사람들은 진고개라 부른다. 챙재 동쪽과 서쪽에는 구릉이, 남쪽과 북쪽으로는 논과 밭이 펼쳐져 있으며, 동쪽으로 철천산이 위치한다. 남쪽과 북쪽으로는 논과 밭이 펼쳐져 있다. 챙재는 총 9km이며 챙재에서는 18번 국도와 801번 지방도로가 만난다. 챙재에서 진도읍까지는 6.8㎞ 거리이고 진도읍의 옛 나루터인 벽파리까지는 7㎞ 거리이다. 챙재에서 주유소와 근처는 옹벽이 가로막아 들머리를 찾기가 쉽지 않아 대부분 오른쪽으로 내려가다 가옥 있는 곳에서 왼쪽 밭으로 무작정 치고 올라가 묘지길을 따라 지맥에 합류한다. 마을 표지석 건너 마루금에 공장이 있고, 챙재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가서 세등삼거리 주유소 지나 옆으로 등산로가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챙재보다는 진고개라고 부른다.
♤ 155m봉/ 면계/ 삼리봉(군내면 세동리, 송산리 → 고군면 도평리)
진고개 뒤쪽 주유소 옹벽에 가로막힌 곳으로 오르면 금방인 것을 들입구를 찾지 못하면 한참을 돌아 지맥에 합류한다. 지맥의 오른쪽이 군내면 송산리 → 고군면 도평리로 바뀌는 면계이자 삼리봉 지점이다. 155m봉에서 좌틀하여 철천산으로 향하는데 잡목과 가시덤불과의 싸움이다.
♤ 진도군 고군면(古郡面)
고군면은 오래된 군이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 백제 때 고군면 고성리에 진도군의 관부를 두었고, 고려 때도 고성리에 진도군의 치부를 두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촌락이 형성되었다. 고군면의 동쪽은 군내면, 진도읍, 의신면과 각각 접하고 있다. 북동쪽은 울돌목이 지나는 해안으로 바다 건너편의 해남군 황산면과 마주하고 있다. 과거 진도로 통하는 유일한 길목이 벽파리의 벽파나루였기 때문에 고군면은 진도의 출입구에 해당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진도대교가 연륙되어 주요 유통로에서는 벗어나 있다. 고군면은 진도의 최고봉인 첨찰산(485.2m)을 중심으로 북동쪽 사면에 자리하고 있다. 고군면의 가장 북쪽인 오류리의 산줄기가 성황산(229m)-성재(208m)-상보(267m)-칠천산(161m) 산줄기로 이어지면서 군내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어서 석현리 뒷산에서 칠산(179m)-돌갯재(148m)-제봉(303m)-첨찰산(485m)-덕신산(389m) 산줄기를 따라서 진도읍과 의신면을 가르면서 고군천과 향동천 등의 분수계를 형성하고 있다. 백제시대 현재의 진도군 고군면 일대는 인진도군(因珍島郡)으로 진도에서 유일한 군이었다. 667년부터 687년에 걸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인진도군은 진도현으로 격하되어 무안군에 속한 현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 전국의 행정구역과 주·군(州郡)의 이름을 고칠 때 진도군을 독립시키고 그 관부를 현재의 고군면 고성리에 두었다. 1018년(현종 9) 2월 고성리에 있던 관부를 현재의 군내면 용장리로 옮겼다. 조선시대 때는 고군면을 고군내면이라 하였다. 해안지대는 간척사업으로 방조제를 건설하여 점차 농경지화되었다. 진도의 동부 해안에 속하는 고군면은 첨찰산이 바람막이 역할을 하고, 난류가 흘러 진도의 서부 해안에 비해 바람이 적고, 상대적으로 겨울철 기온이 높고, 안개일수도 적다. 고군면의 주요 관광지로 회동리에는 진도 신비의 바닷길 축제, 가계해수욕장, 진도 해양생태관, 진도청소년수련원 등이 있다. 벽파리에는 이충무공전첩비와 벽파정이 있다. 도평리에는 임진·정유왜란 무명용사 묘역이 있다.
♤ 철천산(161.2m)/ 면계/ 삼리봉(고군면 도평리, 군내면 세동리 → 용장리)
여영대선배님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진도군 군내면과 고군면의 경계로 지맥의 왼쪽이 군내면 세동리에서 용장리로 바뀌는 삼리봉으로, 아무런 전망도 없고 볼품도 없는 산이지만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 표기되어 있는 산이다. 해발고도는 낮지만 오름길과 내림길 모두 잡목과 바위로 지나기 쉽지않은 구간이다.
♤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龍藏里) 용장마을
용장리 하면 한자로 용을 품는다 또는 감춘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용은 예로부터 임금을 상징하는 말이다. 한양도성에서 천리 먼 길 떨어진 이곳이 이런 이름을 갖게 된 데에는 필시 곡절이 있을 것이다. 군지에는 1772년 남양홍씨가 처음 입향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995년(성종 14)에 진도군을 옥주군(沃州郡)으로 개칭하였다가 1018년(현종 9)에 옥주를 다시 진도로 고치고 현재의 고성(古城)에 있던 관부를 현재의 군내면 용장으로 옮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훨씬 이전부터 마을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진도 역사에서 용장마을은 중요한 기점이었고, 왕과 관련된 여러 가지 역사적 전개가 지명과 무관하지 않다. 1270년(원종 11)에는 삼별초군 배중손이 왕족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용장에 도읍을 정하여 궁성인 용장성을 지어 항거하다가, 1271년 여몽연합군에게 패할 때까지 약 9개월간 왕을 품고 있었던 곳이 바로 용장마을이다. 바로 이 궁성터는 지금 대궐터골로 불려지고 있다. 또한 용장마을의 용장사(龍藏寺)에 대해 옥주지(1761)에서 추정한 것을 보면, 무신정권의 왕족이 된 최충헌의 손자인 최항이 이곳 용장사에 머물면서 전횡을 하였다는 기록 또한 이 마을 지명과 무관하지 않는 듯싶다. 용장마을은 진도읍에서 북서쪽으로 약 8㎞ 거리로 18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오일시를 지나 801번 도로로 빠져 챙재(56m) 너머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진도대교가 착공되어 진도의 주간선도로인 국도 18번이 고두산 간재터널을 뚫고 지나면서 곧바로 진도읍으로 들어가지만 진도대교가 착공(1984)되기 전에는 내륙에서 진도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과 물자는 해남 삼지원과 벽파항 뱃길을 이용해야 했다. 1928년에 백파~용장~세등을 연결하는 도로가 연결되면서, 그 덕에 용장리는 진도의 주요 길목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벽파항의 뱃길은 사라지고 적막함 속에 남아 있는 간판에서 옛 영화의 흔적을 느낄 뿐이다. 용장마을에도 그런 쓸쓸함이 곳곳에 배어 있다. 용장마을은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완만한 산록면에 자리하고 있다. 상봉(267m) 아래 용장산성지(262m) 봉우리를 등에 지고 북쪽을 향하고 있다. 이 배후산지는 상봉을 중심으로 좌로 철천산(161.2m)으로 이어지고 그 맥은 다시 고도 60~80m의 낮은 구릉대로 이어지면서 과거에 바다였던 지금의 둔전저수지에 맞닿아 있다. 반면 상봉에서 남동방향으로 200m~250m에 달하는 연봉들인 서낭산(208m)~성황산(229.2m)~망바위(90m)로 이어진다. 이 맥은 용장마을을 남동-북동쪽으로 감싸고도는 모습이다. 이 낮은 구릉들은 오룡초등학교 뒤로 끊어질 듯 이어지면서 벽파항을 남서-북서 방향으로 감싸고돌다가 바다로 함몰한다. 이처럼 용장마을은 북쪽을 제외한 모든 방향이 산으로 둘러쳐져 있다. 북쪽 방향은 열려 있으나 그 끝은 산줄기가 바다를 살짝 가려주는 분지형국이다. 이 배후 산줄기를 따라서 1984년에 사적 126호로 지정된 용장산성이 석성과 토성형태로 약 13㎞ 정도가 남아 있다. 주위 산에서 발원하는 물은 7.91㎢의 유역면적과 길이 4.61㎞의 지방2급 하천인 용장천을 이룬다. 이 용장천은 상봉 오른쪽 줄기에서 발원하여 대궐터골과 용장사를 적시면서 용장저수지를 이루고 다시 마을 앞쪽으로 돌아 북쪽으로 흘러가면서 간천지를 적시기 위해 만든 둔전저수지에 합수된다. 산과 물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면서, 뒤쪽과 좌우는 산지이고 앞쪽은 바다이니 북쪽에서 다가올 여몽연합군을 바라보면서 맞서 싸울 만한 곳으로 손색이 없다. 이런 자연지세를 갖춘 마을은 언덕배기에 자리하고 있어 남쪽의 풍수해엔 대비할 수 있으나 북쪽에서 불어 닥치는 겨울바람은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마을 안쪽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삼별초의 짧은 천하를 이루었던 궁성은 바다에선 전혀 보이지 않는 후미진 곳으로 산속에 들어가 있어 용장마을에서도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곳이다. 드러내고 위용을 과시하면서 적을 위압하는 것이 아니라 숨듯이 감춰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 궁성인 용장성을 보면 영락없는 그 지명 그대로인 것이다. 바다가 보이는 높은 망바위에서 적의 침입을 관찰하면서 항몽투쟁을 이어갔던 이 용장마을의 용은 입도 9개월 만에 적들이 바다가 아닌 내륙의 우회를 통해 공격함으로써 허를 찔려 그만 막을 내려야 했다. 과거 이곳 삼별초 무리들은 용장마을의 기반이 되는 용장천을 따라 1㎞의 내외에 좌우 폭 500m 정도에 펼쳐진 곡저와 챙재를 넘어 남쪽의 고성리에 있는 분지와 곡저평야에서 나오는 토지 생산성에 의존했기 때문에 그 규모에 맞춘 왕궁을 건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용장리는 대국을 건설할 만큼의 큰 용 터는 아니었다. 마을의 서쪽에 있다고 전해지는 흑색의 큰 바위를 ‘망바등’이라고 부르는데, 그 바위 속에 창고가 있어 보물이 가득하며, 도선이 억달새풀로 주문을 외우며 탁 치면 바위굴이 열린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또한 지금은 신선이 잠적해서 열지 못하나, 장차 신선이 오면 열릴 것이라는 아기장수설화 유형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용장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에 세워진 3기의 입석은 선독이라고 부르며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고 있다.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에 ‘망제’라는 마을 제사를 지내면서 이 입석에 금줄을 치고 제를 지내고 당산굿을 한다.
철천산에서 성재로 내려서며 앞쪽으로 262m봉과 상봉이 바라다 보인다는데...
♤ 성재(城峙, 95m)/ 서해랑길 7코스
반바지님 코팅지가 편백나무에 매어 있다.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에서 고군면 도평리를 넘어가는 고개인데, 성황당 흔적인듯 돌무지가 있으며 주변에는 수령(樹齡)이 꽤 된 편백나무들이 보인다. 서해랑길이라는 트레킹 코스와 겹쳐지는 고개로 양 마을로 이어지는 뚜렷한 등로가 보이고 용장성 가는 안부이다. 서해랑길은 서낭당의 흔적같은 돌무더기를 넘어 도평리로 넘어가고 지맥길은 성재를 가로질러 용장성 방향으로 향한다.
♤ 삼별초(三別抄)
삼별초는 고려 무신정권 때의 특수군대로 1219년(고종 6) 최충헌(崔忠獻)의 정권을 계승한 최우(崔瑀)가 방도(防盜) 등 치안유지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별초(別抄)란 ‘용사들로 조직된 선발군’이라는 뜻이다. 그 뒤 야별초에 소속한 군대가 증가하자 이를 좌별초·우별초로 나누고, 몽골 병사와 싸우다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병사들로 신의군(神義軍)을 조직, 이를 좌·우별초와 합하여 삼별초의 조직을 만들었다.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전위로서 다분히 사병적인 요소도 있었으나 항몽전에서는 그 선두에서 유격전술로 몽골병을 괴롭혔으며,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몽골과 강화가 성립되고 고려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개경정부 및 몽골과 대항하여 항쟁하였다. 서기 1200년대 초 중앙아시아 대륙에서 강력한 세력이 일어났다. 테무진(Temujin: 鐵木眞)은 몽골족을 통일한 뒤 1206년 칭기즈칸(成吉思汗: Chinghis Khan)이라 칭하고 원(元) 나라를 세웠다. 칭기즈칸은 중앙아시아 대륙을 통일하고 중국대륙의 금(金)나라까지 멸망시켰다. 칭기즈칸과 그 후예들은 지금의 남부러시아와 아라비아, 유럽 이탈리아반도 북부까지 정복했다. 아시아와 유럽이 유목민인 몽골족의 말발굽 아래 짓밟혔다. 몽골족은 강인했다. 칭기즈칸은 뛰어난 전술과 기동력으로 카스피해 연안과 남유럽 일대의 각국을 격파했다. 고려가 몽골과 맞부딪친 것은 금나라 유민인 거란족이 몽골 군사들에게 쫓겨 고려 땅으로 들어오면서부터이다. 1225년(고종 12) 1월 원의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국경지대에서 살해된 사건이 발생했다. 원은 이를 고려의 소행이라면서 고려에 책임을 물었다. 고려는 거란족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고려와 원의 관계는 험악해졌다. 고려가 굽히지 않자 마침내 원은 고려침략을 결정하게 된다. 7차에 걸친 원의 침입은 고려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다. 원은 고려왕이 강화도에서 나오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고려는 원나라 군사가 철수해야 고려왕의 입조ㆍ출륙(出陸)이 가능하다고 버텼다. 그 배후에는 어떻게든 정권을 유지하려는 최씨 무인정권이 있었다. 최씨 무인정권은 고려가 원과 강화(講和)하게 되면 자신들이 몰락할 것을 두려워해 어떻게든 강화도에 머물려 했다. 1258년(고종 45)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최의가 김준(金俊)에게 피살됐다. 고려조정은 원과 화친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1259년 고종이 죽자 태자가 왕위에 올라 원종(元宗)이 됐다. 원종은 청의 압력으로 연경(燕京)에 들어갔다가 1270년(원종 11)에 귀국해 개경환도를 결정하게 된다. 1232년 강화도로 들어간 뒤 38년 만이었다. 원종은 개경환도를 선포한 뒤 삼별초를 해산시켰다. 원종은 1270년 5월 29일 장군 김지저를 보내 삼별초의 명부를 압수한 뒤 삼별초 해산을 공식 통보했다. 삼별초는 친원(親元) 쪽으로 돌아선 대신들이 삼별초의 신상을 몽골군에 모두 넘기면 이는 곧 앉아서 죽음을 당하는 것이라 여기고 분개했다. 그리고 봉기했다. 삼별초를 이끌고 봉기를 일으킨 사람은 배중손(裵仲孫)이었다. 삼별초는 난을 일으킨 지 이틀 뒤인 6월 3일, 강화도를 급히 빠져나왔다. 조정의 군대가 대부분 개경으로 가버린 탓에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강화도를 지키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삼별초 무리가 탄 배는 모두 1천척에 달했다.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 강화도를 떠난 삼별초 세력들은 진도를 근거지로 택했다. 1271년 5월 15일, 삼별초 군은 위기를 맞는다. 고려의 김방경장군과 몽골의 홍다구, 힌두등이 이끄는 여몽연합군이 진도를 공격해온 것이다. 400여척의 전선에 타고 온 여몽연합군의 병력은 1만 명이 넘었다. 여몽연합군은 세 방향으로 군사를 움직여 삼별초를 공격했다. <고려사 김방경열전>에는 여몽연합군의 부대편성 및 공격방향이 다음과 같이 세군데로 기록돼 있다.
Ⅰ. 고려의 김방경, 몽골의 힌두 중군-벽파정 공격
Ⅱ. 영녕공의 아들 희, 옹 및 홍다구 좌군-장항 공격
Ⅲ. 대장군 김석과 만호 고을마 우군-진도 동면 공격
<고려사>에는 삼별초가 벽파정의 중군을 공격하자 좌군의 홍다구가 진도의 삼별초 본진에 ‘불을 질러가며’ 협공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 ‘불을 질러가며’라는 표현은 몽골군이 화약무기를 사용했음을 의미한다. 몽골군은 일본을 침략했을 때 화약무기를 사용했는데 이 화약무기는 삼별초 진압에서도 위력을 발휘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별초는 병력과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전세는 불리해졌다. 결국 용장성이 무너졌다. 배중손은 남도포로 퇴각했다. 김통정은 왕을 호위해 의신포(금갑포)로 후퇴했다. 남도포로 물러선 배중손부대는 여몽연합군의 추격을 받아 전멸된다. 배중손은 남도석성에서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여몽연합군은 진도공격에서 남녀 1만여 명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이 중에는 강화도에서 삼별초를 따라온 백성들뿐만 아니라 진도에서 대대로 살아왔던 백성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몽골군은 포로로 잡은 진도사람들을 삼별초 무리와 죄 없는 백성으로 구분하지 않고 모두 몽골로 끌고 갔다. 여몽 연합군의 삼별초 섬멸 이후 진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 돼버렸다. 제주도로 들어온 김통정은 항파두리에 성을 쌓고 여몽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항파두리성의 내성은 돌로 쌓은 석성(石城)으로 둘레가 700m정도이다. 외성은 언덕과 계곡의 지형을 이용해 토성으로 쌓았다. 둘레가 6Km에 달한다. 삼별초는 여몽연합군을 맞아 처절하게 싸웠다. 항파두리성이 함락당하자 삼별초를 이끌던 김통정장군과 휘하 군사들은 한라산 자락의 붉은오름까지 퇴각했다. 그러나 여몽연합군의 추격을 피할 수 없었다. 김통정장군은 이곳에서 마지막까지 싸우다 이미 일이 글러버린 것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삼별초는 거대한 제국 원을 맞아 고려인들이 목숨을 걸고 싸운 의로운 투쟁이었다. 원나라를 상대로 해 그렇게 오랫동안 전쟁을 벌이고, 또 임시왕조를 세워가면서까지 투쟁했던 민족은 고려인들이 유일하다.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거대한 외세에 맞서 40여 년 동안 항쟁했던 삼별초의 대몽항쟁은 우리가 잘 기념하고 간직해야 할 자랑스러운 역사다.
시대가 인물을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시대가 인물을 삼키기도 한답니다.
♤ 김방경(金方慶, 1212~1300)
고려 최씨 무신정권은 강화도(江都)에 천도하여 대몽항쟁을 벌였다. 그러나 최씨 무신정권의 마지막 권신 최의는 그의 종 김준에 의해 제거되고, 김준은 또 그의 종 임연에 의해 제거되었다. 권신이 제거될 때마다 정권의 하수인인 삼별초의 힘을 빌렸던 것이다. 그것도 권신의 최측근인 종에 의해 당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적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임연은 원종 10년(1269)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 창을 왕으로 즉위시키려고 하였다. 이 때 세자(충렬왕)가 몽고에 있으면서 황제에게 청하여 임연을 토벌하게 하였다. 황제의 명을 받은 몽장 몽가독은 충렬왕이 보낸 김방경장군을 대동하고 고려로 돌아왔다. 이에 문책에 겁이 난 임연은 원종을 복위시켰다. 그리고 몽가독이 평양을 지나 개경까지 진군하려 하자 김방경장군이 조서(詔書)를 이유로 이를 중지시켰다. 이듬해인 1270년 6월 고려 무신정권의 하수인 배중손 등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켜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른바 '삼별초의 난'이다. 삼별초는 강화에서 민심을 얻지 못하자 거점을 진도로 옮겼다. 1271년 김방경장군은 몽장 혼도와 함께 진도의 삼별초를 토벌하라는 명을 받았다. 반란군 수장 배중손은 죽고, 김통정 등이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탐라로 들어가서 계속 항전하였다. 1273년 김방경장군은 몽장 혼도, 홍다구와 함께 탐라로 들어가 삼별초를 완전히 평정하였다. 이 때 여몽연합군은 추자도 즉 후풍도에 주둔하였다가 순풍을 기다려 중군 김방경장군은 함덕포로 좌군 홍다구는 비양도를 거쳐 명월포(한림항)로 상륙하였다. 경순왕의 후손 안동김씨 상락군개국공 김방경장군의 묘소는 안동시 북쪽의 녹전면 깊은 골짜기에 있다. 삼별초 하면 배중손, 김통정장군만 떠올리는데 반대편인 고려 조정의 정부군 장군이었다. 1270년 배중손 등이 삼별초난을 일으키자 원나라 쿠빌라이칸과 고려 원종의 결정으로 김방경은 어제의 전우였던 삼별초를 진압할 수밖에 없었다. 삼별초의 난을 평정한 김방경은 고려 최고의 관직 시중에 올랐다. 그는 전장에 나가면 장군이었고 들어오면 재상이었다. 삼별초의 입장에서 보면 원나라의 앞잡이이고 왕의 입장에서 보면 나라를 지키는 충성스런 신하였으니, 원나라에 항복한 고려의 비애였다. 1273년 10월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고려군 8천명을 이끌고 몽골 군사들과 함께 출정했다.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은 10월 19일 모모치바라에 상륙한 뒤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둔다. 이때 고려군은 용맹하게 싸워 명성을 날렸다. 이에 반해 몽골군은 상당히 소극적으로 전투에 나선 것으로 전해진다. 몽골군을 이끌었던 홍다구는 아버지가 고려인이었다. 일본 원정기간 동안 홍다구는 김방경장군의 전공을 시기했으며 작전을 짜면서 자주 갈등을 빚었다. 1277년 김방경장군이 모함을 받아 옥에 갇혔을 때 홍다구는 모질게 김방경을 고문하기도 했다. 1281년 2차 일본 정벌군의 고려군 도원수로 임명돼 고려군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웠다. 삼별초의 대몽항쟁을 높이 평가하는 민족주의 역사가들로부터는 몽골의 앞잡이라고 비난받고 있지만 실제로는 왕명에 따라 충직하게 자신의 소임을 다한 무인이다. 수차례나 모함을 받아 모진 고문을 받는 등 고초를 겪었지만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 당시 준엄하게 영을 세우고 철저하게 준비를 시켜 고려 군사들이 승리할 수 있도록 했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을 지키다 순절했던 진주목사 김시민이 김방경 장군의 12대손이다. 백범 김구 선생은 25대손이다. 여몽연합군으로 1, 2차에 걸쳐 일본을 점령하려 출병한 어찌보면 역사적 인물인데, 몽골에 끝까지 대항한 삼별초에 가려진, 고려말 영욕의 세월을 살다간 장군이다. 충직하고 근검하였으나 부하 장병들의 민폐를 막지 못하고 일본 정벌 후의 불공평한 논공행상 등으로 상하 민심을 잃어, 89세로 병사하였을 때 ‘예장’을 치르지 못하고 고향 안동에서 장례를 지냈다. 당시로서는 매우 보기 드물게 장수했던 것이다. 충선왕 때 다시 ‘벽상삼한삼중대광’이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렬’이다.
♤ 262m봉/ 용장산성
정상은 넓은 공터이고 사방으로 조망이 좋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노간주나무에 매어 있다. 벽파진을 찾아보고 건너편 땅끝기맥의 주작 덕룡과 두륜산도 찾아본다.
용장산성을 야간에 지나게 되어 유감이었습니다만 낮에도 성에서 궁궐터는 보이지 않는것 같고 궁궐터에서 올려다보이는 선황산만 보이는 모양입니다.
♤ 용장성지/ 진도 용장성( 珍島 龍藏城)
진도의 용장산성은 고려의 삼별초가 원종의 육촌인 왕족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진도를 근거지로 대몽항쟁을 이어간 진도의 도성이다. 진도군 군래면 용장리 용장산을 빙 두르고 있는 성이 용장산성이다. 이는 주로 석성이지만 부분적으로 토성이 섞인 곳도 있다. 이 안에 있는 용장성은 몽고군의 침입을 받아 치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고려 조정에 반발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며 난을 일으킨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 패해 제주도로 퇴각하기까지 원종 11년(1270) 8월부터 9개월 동안 고려의 장군 배중손(裵仲孫)과 노영희 등이 이끈 삼별초군이 항몽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용장성은 총 길이가 12.75km이고 높이는 4m 내외로, 군내면 용장리·세등리와 고군면 도평리·벽파리·오류리·유교리 일대에 걸쳐 산 능선을 따라 용장산을 빙 두르고 있으며 북벽과 서벽 및 동벽의 일부는 바다와 접하고 나머지 구간은 산 능선을 통과하고 있다. 북쪽은 우리나라에서 유속이 가장 빠른 곳으로 잘 알려져 있는 명량해협과 접해 있고, 3개의 만과 곶으로 이루어져 있고, 현재 성벽은 곶 지형인 용장산 기슭에만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궁궐의 자리와 용장사가 있던 절터가 남아 있다. 삼별초가 입도하기 훨씬 이전부터 용장산성 안에서 불력을 키웠던 용장사에는 고려 초 제작된 전남 유형문화재 제17호인 석불좌상(石佛坐像)이 남아 있는데, 현재 군내면 용장리 52번지에 복원되어 있다. 고려 현종 9년(1018)에 백제 시대 이래 고군면 고성리에 있던 읍성을 용장성으로 옮겼으며, 명량해협과 벽파진의 지리적 중요성으로 보아 그전부터도 누대에 걸쳐 거듭 성을 쌓고 보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용장성은 사적 제126호로 지정되어 있다.
♤ 선황산(230.9m) 갈림길/ 면계/ 삼리봉(진도군 고군면 도평리, 군내면 용장리 → 고군면 오산리)
용장성 끄트머리에서 용장성은 면계를 따라 왼쪽으로 내려가고 맥길은 군내면 용장리와 헤어져 오른쪽 성 아래로 내려서는데 지맥의 좌우가 완전하게 고군면으로 접어들며 도평리와 오산리의 경계를 따라 상봉으로 향한다. 용장성의 끄트머리가 선황산(230.9m)으로 가는 갈림길이다. 선황산은 용장산성 궁궐터에서 올려다 보이는 봉우리로, 성황 신당을 건립하면서 제사유적과 제물을 준비하는 장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상봉에서도 야간이라 방향을 잡지 못하고 직진으로 내려서다 곧바로 올라왔네요, 우틀해야 했습니다.
♤ 상봉(上峰, 266.4m)/ 고군면 도평리 - 오산리
삼돌이선배님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말 그대로 높은 봉우리이다. 용장산성 성곽이 왼쪽으로 꺽이는 선황산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안부로 내려서서 잠시(약 10분) 된비알을 올라서면 진도군 고군면 도평리와 오산리 경계에 있는 상봉이다. 상봉에서 서남쪽으로 출일봉을 향해 급경사로 내려선다.
날씨가 좋으면 바다 건너 해남 두륜산이 조망되는 곳입니다. 땅끝기맥과 화원지맥을 끝냈으니 여기까지 오면서도 줄곧 멀리 산줄기를 찾아보며 그때의 기억을 꺼내들었습니다.
♤ 조망바위/ 진도군 고군면 오산리(五山里)
조망바위에 바라본 오산제(五山堤)와 고군면 오산리의 들녘, 진도군 고군면에 속해있는 오산리는 외딴 산이 있으므로 오미 또는 오산이라 하였는데 또 다른 유래로 오산(五山)은 원래 오산(烏山)이었으나 까마귀를 흉조라 하여 오(烏)를 오(五)로 바꾸었다는 설도 전한다. 고군면에서 가장 큰 평야를 끼고 발달한 지역으로 첨찰산 동동북 산록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출석봉과의 안부인 오목재를 분수계로 하여 고군천이 흐르고 있는데, 고군천은 오산저수지에서 잠시 머물다 오산리 앞바다로 흘러나간다. 현재 고군천 하류는 황조리와 마산리를 잇는 방조제로 간척되어 있다.
♤ 왜덕산(倭德山, 147.3m)
진도군 고군면 내산리 왜덕산 산자락에 있는 일본 수군의 묘지라고 알려진 곳이다. 이 묘역은 조선 선조 30년(1597) 9월 16일 정유재란 중 명량대첩에서, 이순신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13척이 진도 울돌목에서 일본 왜선 133척을 상대로 승리로 이끌었고, 일본 수군 2만4천여 명 가운데 2,500여 명이 수장되었다.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이끄는 선봉대 소속이었다. 대패한 일본 수군의 시신이 조류에 의해 내산리 오산만 해안가로 떠내려오자 마을 주민들이 시신들을 수습하여 인근 야산에 매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민들의 전언에 따르면 작은 분묘까지 포함해 당초 100여 기가 넘는 묘역이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28년 당시 방파제가 조성되며 무분별한 개간 작업이 진행되어 경작지로 바뀌는 과정에서 주인 모를 뼈가 수없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왜덕산이 세상에 알려질 당시에는 묘역 인근 마을 사람들은 왜덕산을 와덕밭(瓦德田)이라 부르고 있었다. 개간 등을 거치면서 유실되어 현재 54기의 분묘만 남아 있다. 일본 수군에게 덕을 베풀었다는 의미로 왜덕산이라 불리운다.
고성리 오목재에서 용장산성으로 향하며 맨 처음 오르는 봉우리입니다. 여몽연합군 홍다구가 장항으로 상륙하여 용장산성 배후를 공격하기 위해 오목재를 넘었다지요.
♤ 출일봉(出日峰, 228.6m)/ 4등삼각점(진도 408/ 1986 재설)/ 출석봉/ 삼리봉(고군면 오산리, 도평리→ 고성리)
준희선생님의 산패가 산벚나무에 매어 있다. 지맥의 오른쪽이 진도군 고군면 도평리 → 고성리로 바뀌는 삼리봉으로 산 아래의 안부인 오목재를 분수계로 하여 고군천이 흘러 오산제를 거쳐 남해바다로 흘러든다. 또다른 지명으로 출석봉, 출도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출석봉에서 오목재로 내려서는 길이 누덕누덕 만만치가 않다.
♤ 진도군 고군면 고성리(古城里)
본래 진도군 고이면의 지역으로서 고려 때 진도읍성이 있으므로 고성 또는 고성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리와 모산리, 평산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고성리라 해서 고군면에 편입되었으며 현재는 행정리 오일시, 고성, 신리를 합쳐 법정리 고성리로 해서 고군면에 편입되었다.
지맥은 오목재에서 고성리 내안으로 들어서서 진도 진길성당 삼거리에서 왼쪽 농로따라 제각이 있는 삼거리까지 진행하고, 장흥임씨 재각(齋閣) 왼쪽으로 올라가는 들머리가 있습니다. 족욕간판이 있는 집에 들어가 물을 한잔 얻어 마시고 고성리 버스정류장으로, 미닫이문을 닫고 인근에서 스치로폼, 박스, 나마판자를 가져다 버스정류장 하단부 바람을 막고 텐트를 쳤는데 간간이 지나는 차소리가 꽤 시끄럽더군요.
♤ 오목재/ 18번 국도/ 고성리도로/ 서해랑길 7코스
지맥은 오목재에서 오른쪽 고성리 방향으로 내려서며 고성리 내안으로 진입한다. 고군면 옛 치소인 고성리와 동쪽으로 면소재지인 오산리를 넘나드는 고개이다. 반바지님의 코팅지가 가로등 기둥에 매어 있고 진도 진길성당 200m→ 표지석이 있다. 18번 국도가 산자락을 지나며 오산리까지 연결되어 있다. 출석봉과의 안부인 오목재를 분수계로 하여 지방 2급 하천인 고군천이 흐르고 고군천은 오산저수지에서 잠시 머물다 오산리 앞바다로 흘러나간다. 현재 고군천 하류는 황조리와 마산리를 잇는 방조제로 간척되어 있다.
♤ 서해랑길
전남 해남 땅끝탑에서 부터 인천 강화까지 서해안에 인접한 31개 기초자치단체의 109개 코스의 걷기길 약 1,800km 구간을 연결한 국내 최장거리 걷기 여행길을 말한다. 서쪽의 바다(海)와 함께(랑) 걷는 길을 의미한다. 서해랑 이정표 우측에는 장흥임씨 재각이 보이고, 이곳부터 첨찰산으로 향하는 임도까지는 빡센 오르막이다.
해드랜턴 불빛으로 첨찰산까지 진행했습니다. 서해랑길 가로등 불빛이 비석에 반사되어 환합니다. 재각 주위에는 잘 정리된 묘소가 있는데 조금 올라서니 버려진 공동묘지처럼 묘지위에 대나무숲이 형성되었어요.
♤ 165.4m봉
아래 장흥임씨 재각(齋閣)도 있고 이 마을의 입향조인 장흥임씨의 종중 산인 모양인데 지맥이 대밭 사이로 이어진다. 돌보지 않는 장흥임공 묘지들이 있는 대밭을 지나 빡시게 올라선다.
♤ 334.4m봉
특징없이 지나치는 봉우리이다. 등로 주변에 황칠나무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송죽골재를 지나서 까지 꽤 넓게 식재되어 있다. 병을 가져가는 만병통치약이라 나무인삼으로도 불리며 황칠나무 표피에 상처를 내면 노란 액체가 나오는데 이것을 모아 칠하는 것을 황칠이라 한다. 물건에 칠하면 영롱한 금빛을 발한다. 황칠나무는 땅끝기맥을 할 때 땅끝마을로 가며 남도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묘목이 자라면서 잎사귀 모양의 형태가 바뀐다.
♤ 361.1m봉
암봉을 지나 안부 능선을 올라서서 첨찰산 가는 능선 중턱에 편자형 임도로 향한다. 임도 왼쪽으로 죽제산(竹祭山, 424m)이 우뚝 솟아 있다. 임도에 배낭을 두고 첨찰산을 다녀온다. 진도기상대로 향하는 양회임도를 약 200m 따르다가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서며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와의 경계를 따라 첨찰산으로 향한다.
♤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斜川里)
진도군 의신면에 속해있는 사천리의 지명유래는 내가 비껴 흐르므로 비끼내, 빗내, 사천이라 하였다. 사천은 속칭 ‘빗기내 → 비끼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빗기내는 ‘핏기내’의 발음이 변형된 것으로 ‘피가 흘렀던 하천'의 뜻이 있다는 설도 있다. 옛날에 삼별초군이 이곳에서 30여 리 떨어진 용장산성에서 퇴각한 뒤, 여몽연합군과 격전을 벌였던 곳이 이곳 마을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죽은 사람들의 피가 왕무덤재에 형성된 골짜기에 흘러, 내를 이룰 정도여서 핏기내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자연마을로는 사천, 가래골, 방죽안, 사상리, 절골마을 등이 있다. 사천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유래 또한 사천리의 그것과 동일하다. 가래골마을은 가래봉 밑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방죽안마을은 앞에 방죽이 있다 하여, 사상리마을은 사천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절골마을은 쌍계사가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사천리의 생활권은 의신면 소재지가 아니라 교통이 가까운 진도읍권이다. 진도읍과 연결 도로인 군도 9호와 15호가 동서로 통과하고. 군도15호는 사상마을 앞을 관통하고 있어 교통여건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의신면 소재지인 돈지마을로 가려면 남쪽의 산지와 저수지가 장애가 되어 비껴 돌아가야 한다. 사천리에는 古刹 쌍계사와 조선 말기 남종화의 대가(大家)인 소치(小痴) 허련(許鍊 1808~1893) 선생의 운림산방이 있고, 진도 다시래기(전남 진도의 상가에서 상주와 유족들의 슬픔을 덜어주고 위로하기 위하여 행하는 놀이)가 전해 내려오는 마을이다. 진도에서 가장 큰 저수지이며 진도의 수원지 역할을 하는 사천제1저수지 사천제(斜川堤)가 있다.
첨찰산에서 다가서니 동쪽 하늘이 환하게 밝아오는데 일출을 기다릴 시간은 없네요. 높이로만 따진다면 첨찰지맥인데 아깝습니다.ㅋ^^ 첨찰산에도 옛날에 호랑이가 많이 살았다고 하네요. "진도에 악호가 돌아다니며 사람이나 가축을 해치니 매우 놀랍고 비참한 일이다." - 승정원일기 숙종 36년 10월 3일 -
♤ 첨찰산(尖察山, 485.2m)/ 2등삼각점(진도 21/ 1990 재설)/ 첨찰산 봉수 유적/ 무인산불감시대
진도군의 진산인 첨찰산은 진도군 고군면 고성리와 향동리, 의신면 사천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진도에서 제일 높은 바위산이다. 맥길에서 약 0.8km 떨어져 있어 다녀와야 한다. 백제시대 축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이 있으며 조선시대 설치한 봉수대의 유적이 있다. 첨찰산봉수는 자연적인 바위산 위에 원형의 연대(烟臺)를 쌓아 만들었다. 서해와 남해를 잇는 곳에 있어 왜구의 침투 감시에 탁월한 감제고지(瞰制高地)인 셈이다. 첨찰산봉수는 동쪽의 해남 관두산 봉수, 남쪽으로는 여귀산 봉수에서 연락을 받아 북쪽의 해남 일성산 봉수에 전달하였다. 봉수대는 방향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탁 트인 전망을 선사한다. 시계가 좋으면 멀리 다도해 비경까지 볼 수 있다. 진도군은 여귀산 봉수와 서남해안 섬들을 연결하는 진도지역의 봉수 체계, 간봉(間烽)에 대한 조사를 지속하고 있다. 봉수 유적이란 요새 기능에 중점을 둔 조선시대의 중요 군사·통신시설로서 그 시대의 군사·통신제도를 보여주며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각 문헌에 기록됐다. 진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주위를 조망하기에 적합하며, 뾰죽한 산 정상에서 적이나 지세를 살피기 적합하다는 의미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산밑에 의신면에 소재한 사천리에는 운림산방과 쌍계사가 있으며, 쌍계사와 운림산방 일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상록수림에 둘러싸여 있다. 정상석에서 남쪽으로 0.3km 거리에 보이는 둥근 지붕은 광주지방기상청 소속 진도지역 기상서비스센터이다.
사전에 임도 왼쪽에 삼면봉이 있다고 알고 갔고 올라갈 수도 있겠단 생각만 했는데 여기 능선으로 삼면봉을 지나신 분도 계셨습니다.
♤ 395m봉/ 삼면봉(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고군면 고성리 → 군내면 월가리)
첨찰산을 다녀와 갈림길에서 임도를 따르며 수리봉으로 향하는데 임도의 왼쪽으로 고군면 고성리 → 군내면 월가리로 바뀌는 삼면봉 지점을 지난다. 지맥이 진도군 고군면과 헤어지고 군내면 월가리와 의신면 사천리의 면계를 따라 7분여 진행하면 수리봉 0.5km 이정표가 서있는 임도에서 오른쪽으로 산길을 오른다.
♤ 진도군 의신면(義新面)
진도군 의신면은 전남 진도군의 동남부에 위치한 면으로 동쪽 해안을 제외하고 동,서,북쪽은 모두 산지이며 고군면 ·진도읍 ·임회면과 접하고 있으며, 면의 북쪽에 기상대가 있는 첨찰산과 덕신산의 산줄기가 고군면과 경계를 이루며, 의신천이 산지 사이로 면의 중앙부를 흐르면서 의신평과 명금평을 만들고, 이곳에 인구가 밀집해 있으며, 18번국도가 지나며 면소재인 돈지리를 중심으로 지방도와 군도를 통해 각 지역으로 연결된다. 돈지·칠전·사천·모도·금갑 등 15개 법정리를 관할하며 유인도인 접도와 모도가 있고 무저도,대삼도,중저도인 무인도가 있다. 1940년(고려 태조 23) 의신향(義新鄕)이 설치되고, 1419년(세종 13)에 금갑진이 축성되었다. 1889년(고종 26)에 의신면과 명금면으로 분리되었다가, 1914년에 다시 의신면으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광여도』에 의신면이 현재의 위치에 기록되어 있다. 왕온의 묘와 궁녀들이 몸을 던져 죽었다는 금창둥범이 있다. 바닷가로 초평항과 수품항이 있고 문화재로는 진도 쌍계사 상록수림, 왕온의 무덤, 운림산방, 쌍계사 등이 있다.
왼쪽으로 사천저수지와 오른쪽으로 진도읍이 환하게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입니다.
♤ 수리봉(388.5m)/ 진도군 군내면 월가리 - 의신면 사천리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진도군 군내면 월가리와 의신면 사천리의 경계에 있는 산이고 평범한 봉우리라 산패가 없다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수리봉에서 직진하여 암릉 조망처에서 진도읍과 사천저수지 뒤로 가야할 여귀산을 찾아보고 암릉 아래로 내려선다. 첨찰산에 비하면 조족지혈, 그래도 어느 방향에서 보면 이름값 하는 봉우리이지 않을까 한다.
직진하기 쉬운 삼읍면봉에서 잠시 방향을 잡지 못해 주춤했어요. 직진을 내려서니 묘지가 나오고 다시 방향을 잡아 우틀로 내려섭니다. 산패는 없네요. 지맥은 여기서부터 남산까지 진도읍과 의신면의 경계를 따릅니다.
♤ 320m/ 삼읍면봉(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진도군 군내면 월가리 → 진도군 진도읍 동외리)
급경사로 7분여 내려서며 임도에 닿으면서 지맥은 진도군 군내면과 헤어지고 진도읍을 만나 의신면과의 경계를 따른다. 임도에 서있는 이정표에서 공설운동장 방향으로 임도를 따른다.
♤ 진도군 진도읍(珍島邑)
진도군 중부에 있는 진도군의 중심 진도읍은 진도군의 행정, 산업의 중심지로 섬의 가운데로 깊숙이 만입한 진도만의 북동안에 자리잡고 있으며 읍소재지는 남동리, 군청은 성내리에 있다. 북, 동, 남은 200m 내외의 산지가 둘러싸여 있고 산지 사이의 낮은 곳을 통하여 섬 안의 사방으로 도로가 통하고 있다. 대체로 200m 내외의 구릉성 산지를 이루며, 연대산(257m)·북산(292m)·남산(239m) 등이 솟아 있다. 해안과 하천연안에 평야가 발달했다. 섬의 입구이면서 이순신 장군의 전승지인 명량 해협에 임한 벽파진이 있고 이 근방에 고려 명장 김방경이 삼별초군을 격파한 고전장인 위왕성이 있다. 이 밖에 충무공 전첩비, 금갑진, 쌍계사 등의 여러 명승고적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과 보리이며, 그밖에 대파·구기자·유자·키위·참깨·마늘 등을 생산하고 있다. 해안에서는 김·미역 양식이 이루어진다. 진도군청의 소재지로 읍사무소와 군청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광주지방법원 진도군법원, 진도교육지원청, 국민건강보험공단 등이 입지해 있어 군의 행정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진도씻김굿(국가무형문화재 제72호)과 진도다시래기(국가무형문화재 제81호)가 전승되고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53호인 진돗개가 서식하고 있다. 국도가 면 동남단을 경유하며, 북단의 나리방조제를 통해 군내면과 육로로 연결된다.
♤ 254m봉
임도를 따르다 국가지점번호판에서 오른쪽 산으로 들어서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평평한 등로를 따라서 올라선 봉우리이다. 송죽골 진도개테마파크에서 올라오는 임도를 만나 진도공설운동장 방향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 182m봉
임도가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이정표가 서있는 봉우리로 급좌틀하며 공설운동장 방향으로 향한다.
진도공설운동장과 가깝게 진도군 진도읍 성죽골길 35엔 천연기념물 제53호인 진도개테마파크도 있군요.
♤ 성죽재(165m)/ 팔각정, 체육시설, 이정표
반바지님의 코팅지가 나무에 매어 있다. 진도군 진도읍 동외리와 의신면 사천리를 잇는 양회임도가 있는데 진도공설운동장에서 운림산림욕장으로 이어지는 도로이다. 오른쪽으로 공설운동장 방향으로 진도 읍내가 한눈에 보이고 팔각정 쉼터와 체육시설, 이정표가 있다. 오른쪽 방향 동외리에 성죽골이 있는데 성죽골에 대한 대한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 226.3m봉
황소선배님의 226m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우틀로 휘어져 내려선다. 오른쪽으로 공설운동장이 가까이 보인다.
♤ 146.9m봉/ 양미굴/ 읍면계/ 삼리봉(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진도읍 동외리 → 남동리)
반바지님의 146m 양미골 코팅지가 나무에 매어 있다. 맥꾼들이 잘 찾지 않는 봉우리이지만 진도지맥 능선에 있는 족보있는 봉우리다. 이름은 진도읍 동외리에 있는 양미골이 정상까지 올라온 것인지 알길이 없다. 지맥의 오른쪽이 진도읍 동외리에서 남동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안부로 내려서서 이후론 본격적인 잡목지를 지난다.
♤ 188.4m봉/ 읍면계/ 삼리봉(진도읍 남동리,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 침계리)
양미굴에서 살짝 내려와 올라선 봉우리이다. 188m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지맥의 왼쪽이 의신면 사천리 → 침계리로 바뀌는 삼리봉 지점이다. 직진으로 내려서면 급경사의 도로 절개지를 만나므로 도로에 닿기 전 왼쪽으로 길이 없는 급경사를 치고 왕무덤재로 내려서는데 가시잡목지를 약 0.5Km를 내려서야 한다.
♤ 진도군 의신면 침계리(枕溪里)
진도군 의신면에 속해있는 침계리는 마을이 언제 생겼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357년 경에 제주양씨 금성군파 6세손이 제일 먼저 들어와 살았다고 전해지고, 마을 앞을 흐르고 있는 시내를 배개 삼아 터를 잡았다 하여 ‘침계(枕溪)’라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주유소와 요양원, 어린이집이 있는 왕무덤재에서 진도공영버스터미널까지는 약 1.5km이고 택시비는 약 6,000원입니다. 고로 왕무덤재에 구간을 끊는 경우가 많습니다.
♤ 왕무덤재(王峙, 90m)/ 2차선 도로/ 전왕온묘(傳王溫墓)/ 왕고개주유소
전남 진도군 의신면 침계리와 진도읍 남동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진도읍에서 약 4km정도 떨어져 있으며, 정상에는 주유소와 요양병원, 모텔 등의 시설이 있다. 고개를 넘으면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운림산방으로 통하고, 금갑만호진이나 의신면 소재지인 돈지(敦地)로 갈 수 있으며, 회동 신비의 바닷길로 연결된다. 용장성에서 논수골로 가는 사이에 왕무덤재라는 고개가 있는데, 여기에 왕온의 것으로 전하는 무덤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 왕치(王峙)로 기재된다. 부기에 "고려 원종 11년(1270)에 왕온(王溫)의 분묘가 영산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호남지도』에 '용장왕온구기(龍藏王溫舊基)' 라는 표기에서 그 왕무덤재를 확인할 수 있다.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은 대몽 항전기에 항몽전을 주도하였던 삼별초에 의하여 추대된 삼별초 진도 정부의 왕이다. 혈통상으로는 고려 현종의 아들인 평양공(平壤公) 왕기(王基)의 7대손에 해당한다. 고려후기 강화도의 고려 정부가 1270년(원종 11) 개경으로 환도하자, 삼별초는 환도를 거부하고 반몽 항전의 지속을 주장하며 봉기하였다. 이때 삼별초 정부의 왕으로 옹립되어 6월 1일 강화도를 출발, 배중손과 함께 진도로 거점을 옮겨 용장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271년 4월 용장성은 여몽연합군의 공격으로 함락되었다. 이때 성을 벗어나 급히 피신하던 중 홍다구에 의해 붙잡혀 아들 왕환(王桓)과 함께 살해되었다. 왕온은 몽골군에 합류하여 고려에 들어온 영녕공 왕준(王綧)의 형이다. 동생인 왕준은 진도 함락의 소란 속에 왕온의 목숨을 구하고자 아들들에게 자신의 친형인 왕온을 구해올 것을 지시했다. 그는 왕온이 삼별초의 인질로 잡혀가 타의로 왕이 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왕온은 삼별초가 몽골 및 고려 연합군과 맞서 싸울 때 이 고개를 넘어 물러나는 과정에서 홍다구의 칼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몽골명 찰구이: 察球爾)가 왕온을 고의로 먼저 참살하였다. 홍다구(洪茶丘: 1244 ~1291)는 고려시대에 원나라에 귀화한 무장이다. 삼별초의 지도부는 반역자로 간주되어 관련 유적이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왕온묘는 삼별초 관련 인물의 유적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다만 왕온의 무덤이 확실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전왕온묘(傳王溫墓)로 되어 있다. 이 고개 동쪽 200m 거리의 산기슭에 그의 묘가 있다. 왕무덤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까닭도 이 묘 때문이다. 이 고갯길은 객사한 고려 삼별초 왕온이 묻혀 있는 곳이라 귀신이 잘 나타난다 하여 혼자서 걷기를 꺼렸다. 고갯마루에 암반이 있어서 지나가는 길손들은 나뭇가지나 돌멩이를 던져 한 많은 왕에게 인기척을 했는데, 성황당 풍습이 겹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고개 밑 마을은 6·25전쟁 때 피난민들이 사천저수지 공사장 한산인부로 들어와 살면서 개촌하여 한때 수용소라 했으나, 지금은 삼별초군이 진을 쳤다는 의미로 진설리라 한다.
왕무덤재에서 남산갈림길까지 올라서는데 거은 죽을뻔 했어요. 정상부로 갈수록 경사도도 심하고...
♤ 남산갈림길/ 읍면계/ 삼리봉(진도군 의신면 침계리, 진도읍 남동리 → 의신면 칠전리)
남산갈림길에서 지맥의 오른쪽이 진도읍 남동리 → 의신면 칠전리로 바뀌며 진도읍과 헤어지고, 지맥의 좌우 모두 진도군 의신면으로 접어든다. 배낭을 놓아두고 진도읍의 안산(案山)인 남산과 삼각점을 다녀오는데 약 30분 소요된다.
♤ 진도군 의신면 칠전리(七田里)
의신면의 중서부에 있는 칠전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동쪽은 침계리, 서쪽은 진도읍 염장리와 임회면 삼막리, 남쪽은 창포리, 북쪽은 진도읍 포산리와 각각 접하고 있다. 진도읍에서 면소재지(돈지)로 통하는 지방도 803호선 도로와 중굴로 가는 길이 있어 버스가 하루 12회 왕복하는데 마을 동편을 돌아 진도읍으로 나가는 비포장도로는 일제강점기 때(1920년) 만들어 졌는데, 길을 낼 때 용의 목부분을 자르고 지나간다고 하여 주민들이 피해를 입을까 반대가 심하였다. 1960년대 말 마을 앞 803번 지방도가 뚫리고 포장 될 때에도 사두형국의 목부분을 자른다고 해 역시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나무에 가려 조망이 그리 좋지는 못합니다만 진도읍내와 그 뒤로 읍내를 외호하는 망적산, 북산, 철마산을 찾아봅니다. 멧돼지가 헬기장을 들쑤셔 뒤집어 놓았네요. 삼각점은 찾다가 포기했습니다.^^
♤ 남산(南山, 240.7m)/ 3등삼각점(진도 301/ )
남산갈림길에 선답자 시그널이 주렁주렁하다. 배낭을 두고 남산을 다녀온다. 준희선생님의 '그곳에오르고싶은산' 산패가 달려있다. 위쪽으로 몇 발자욱 더 진행하면 독도대선배님 240.7m봉 산패가 있고 삼각점이 있다. 암릉으로 되어 있는 남산은 진도군의 진도읍 남동리와 의신면 칠전리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북산과 함께 진도읍을 남북으로 감싸고 있으며, 진도읍 앞으로 진도천이 서쪽으로 흘러 배산임수형의 형국을 이루고 있어서 진도읍의 안산(案山)이라 할 수 있다. 남산제 옆에 왕온(王溫)의 묘로 알려진 왕무덤과 말무덤이라 불리는 2기의 고분이 있는데 옛날 삼별초 항쟁에서 왕이 몽고군에게 쫒겨서 왕무덤재까지 왔을 때 논실골에서 패배하여 왕온과 아들 왕환(王桓)도 함께 잡혀 죽어서 진도 사람들이 묻어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호남지도(진도)에 진도군 치소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고 해동지도에 내남산(內南山)의 표기가 보이고 외남산이 내남산보다 먼 곳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조선지지자료에 부내면 두정리 앞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 245m봉/ 조망바위
왼쪽으로 지나온 첨찰산 남쪽 아래 포근하게 자리한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斜川里)의 모습을 바라본다.
♤ 282.2m봉
준희선생님 산패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급우틀하여 급경사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 224.6m봉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는 작은 굴곡의 연속이다.
♤ 228.5m봉
안부에서 힘겹게 올라서면 높다란 전파송신탑 철탑을 만난다. 지맥은 우틀하여 철탑을 지나 만나는 묘지에서 내려선다.
♤ 천방재(105m)/ 임도
반바지님 코팅지가 나무에 매어 있다. 진도군 의신면 칠전리 폭포골과 침계리 서당골을 넘나드는 경계에 있는 고개로, 한쪽은 비포장, 한쪽은 양회임도이다. 길을 건너 산으로 들어선다.
♤ 영매산(170.2m)/ 삼리봉(의신면 칠전리, 침계리 → 창포리)
국토정보지리원의 지도에는 그냥 170.2m봉이라 표기가 되어 있다. 반바지님 영매산 코팅지가 나무에 매어 있다. 지맥의 왼쪽이 진도군 의신면 침계리 → 창포리로 바뀌는 삼면봉 지점이다. 영매산이라고 표기가 되어 있는 지도도 있다 한다. 지맥은 우틀로 이어지고 내리막길이다.
♤ 114.9m봉 갈림길
Y자 갈림길이 나오고 뚜렷한 등로인 직진으로 가면 마루금에서 꽤 벗어나 있는 충재봉(114.9m)으로 간다. 지맥은 시그널이 안내하는 왼쪽 내리막으로 향하고, 규모가 좀 되는 태양광발전소가 지맥길을 차지하고 있다. 왼쪽 산길로 들어서지 않고 발전소 사잇길 임도로 빠져나와 분뇨 냄새가 나는 농장입구에서 좌틀하여 차량의 소통이 거의 없는 붉은재를 지난다.
왕무덤재에서 붉은재까지 거리는 약 6Km로 3시간여 소요됩니다. 외딴집이 있어 들어가니 방문 옆에 수도가 있네요. 물을 구할 수 있음을 확인합니다. 버스를 타려면 의신면 돈지리마을까지 약 2.5Km 걸어나가야 합니다.
♤ 붉은재(35m)/ 803번도로/ 죽엽돈지로/ 칠전고개
붉은재는 진도군 의신면 창포리와 칠전리를 넘나드는 포장2차선이 지나가는 고개이다. 고개 주변의 농장에는 제주도의 가로수인 종려나무를 식재한 밭과, 진도의 특산품인 봄동, 겨울 배추밭이 보인다. 지명은 칠전리의 지명이름을 따 칠전고개(붉은재)라 부르는 곳으로 진도군 의신면에 있는 칠전리(七田里)는 당초 옻나무가 무성해서 옻밭이라 하였으며, 이 옻밭을 의역해서 마을 이름을 칠전(漆田)이라 하다가 알기 쉬운 칠전(七田)으로 고쳐 쓰고 있다. 마을 서편으로는 사분산, 동북으로는 광중산(光中山), 동남으로는 노적봉 그리고 남쪽으로는 삼막봉(三幕峰)을 각각 바라보고 있으며, 포전들(간척지), 연둥들, 꿀태들 등의 평야가 있어 농토가 넓으며, 1954년에 준공된 칠전저수지(천망제)를 비롯한 웃골저수지, 넘엔들저수지(월치제, 뱀골저수지)가 있어 수원도 풍부하다. 하천은 속칭 벼락박골(진도읍 남산 뒷편)에서 발원한 큰보천(길이 5㎞)과 남쪽의 뱀골천이 각각 칠전저수지로 흘러들고 있으며, 상부에는 높이 10m의 폭포(천방폭포)가 있다. 도로 건너 왼쪽의 양회임도로 올라서서 대나무밭과 배추밭 사잇길로 들어서 산으로 진입한다.
♤ 155m봉
엄청 심한 잡목과 된비알을 잠깐 올라 155m봉에 도착하여 좌틀한다. 순간의 힘듦은 졸업의 환희를 위해 그때그때 지워나가야 하는 장애물이다.
♤ 200.4m봉
비실이부부대선배님 띠지가 자리를 지키고 있고, 먼 저 이 길을 가신 세종 홀산아선배님의 산패가 나무 밑에 떨어져 있다.
♤ 가단재(175m)/ 진도군 의신면 창포리(昌浦里)
고개 왼쪽으로 역할을 잃어버린 듯한 희미한 등로가 진도군 의신면 창포리 가단마을로 내려가 지도상에는 가단재로 표기가 되어 있으나 그냥 지나치기 딱 좋은 고개인데 반바지님 코팅지는 수명을 다해 이름이 지워졌다. 가단마을에서 이름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의신면 창포리에 있는 가단리마을은 창포 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이 마을에서 매년 음력 1월 14일 밤 10시경에 지내는 마을 동제(洞祭)가 유명한 곳이다. 산신을 모시는 산신제와 특별한 신체 없이 ‘가리대신’, ‘열성대신’, ‘본향대신’을 모시는 거리제를 함께 묶어서 지내는 동제이다.
지맥이 마지막 면단위 행정구역인 진도군 임회면과 처음 만나는 지점입니다. 대덕산에서 상미고개로 내려서는 길이 희미해 궤적을 보며 내려섭니다.
♤ 대덕산(大德山, 219.7m)/ 삼막봉갈림봉/ 면계/ 사리봉(의신면 칠전리 → 임회면 명슬리, 의신면 창포리 → 거룡리)
가단재에서 올라선 대덕산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고 반바지님 대덕산 코팅지도 있다. 지맥의 오른쪽은 의신면 칠전리 → 임회면 명슬리로 바뀌고, 왼쪽은 의신면 창포리 → 거룡리로 바뀌는 사리봉 지점이다.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그냥 219.7m봉이라 표기가 되어 있으나, 다음지도와 트랭글앱에서는 대덕산이라 일러준다. 대덕산에 대한 자료는 없으나 이 산 왼쪽 아래에 있는 창포리에 대한 자료에는 서남쪽으로 대덕산의 끝자락에 입지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도목방조제 간척으로 조성된 농경지가 펼쳐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삼막봉(三幕峰, 257.6m)/ 진도군 의신면 칠전리
전남 진도군의 남동부에 위치한 봉우리이다. 의신면과 임회면의 경계에 있는 산지로 산줄기가 남동부로 뻗어 의신면 칠전리를 감싸고 있다. 임회천과 칠전천 및 염대천의 분수령으로 이곳에서 발원한 하천은 모두 서북쪽으로 흘러 대홍포구로 빠져 나간다. 삼막봉과 삼막산이 혼용되어 쓰이고 있다. 삼막봉 밑에 삼막골 또는 삼막이 있다. 『호남지도』(진도)에는 삼막봉산(三幕封山)이 진도군 남쪽에 남산과 여귀산, 의신면 지명과 함께 표기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 임일면 상미리에 소재한다고 기재되어 있으며, 『조선지형도』(인지리)에도 삼막봉(三幕峰)으로 표기되어 있다.
♤ 진도군 임회면(臨淮面)
진도군 남부에 있는 면으로 진도의 최남단에 있는 면으로 동쪽과 북동쪽은 의신면, 북쪽은 진도읍, 북서쪽과 서쪽은 지산면과 각각 접하고 있다. 백제시대에는 매구리현(買仇里縣)이었다. 삼국 통일 후 지방 행정 제도 개편으로 757년(경덕왕 16) 첨탐현(瞻耽縣)으로 바뀌어 뇌산군(牢山郡)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초인 940년(태조 23) 임회현이 되었으며, 1018년(현종 9) 진도에 병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현 지산면 일대를 병합하여 목장면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임일면과 임이면을 다시 통합하여 옛 임회현의 이름을 따라 임회면으로 바꾸었다. 북쪽의 진도읍에서 이어진 18번 국도가 임회면의 서쪽과 남쪽을 지나 의신면으로 이어져 있다. 18번 국도에서 갈라진 2차선 도로와 소형차로가 임회면의 각 마을까지 연결되어 있다. 여귀산(女貴山, 458.7m)을 제외하고는 한복산(220m), 희여산(269m), 백야산 등 300m 이하의 구릉성 산지가 대부분이며 이들 산지에서 발원하는 석교천·고방천·백동천 등의 하천 연안에는 소규모 평야가 분포하고 있다. 남쪽은 남해와 면하고 있다. 면소재지는 석교리이며 13개의 법정리를 관할한다. 남해에는 죽도·사자도·신도 등 많은 섬들이 산재한다. 18번국도와 803번 지방도가 지나며 서망항과 팽목항이 있다. 문화재로는 진도 상만리 비자나무, 진도 상만리 오층석탑, 진도 남도진성 등이 있으며 국립남도국악원이 소재하고 있다.
주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네요. 반대편 박배낭을 메고도 훌쩍 올라설 수 있는 가슴 높이의 옹벽이 있습니다.
♤ 돌박재/ 상미고개/ 803번지방도로/ 2차선도로/ 용호거룡로
돌박재는 진도군 의신면 거룡리와 임회면 명슬리를 넘나드는 2차선도로가 지나가는 고개이다. 옹벽 위로 올라서기도 하고 왼쪽 의신면 방향에서 임도를 따르다가 임도 끝에서 오른쪽 밭두렁으로 맥길에 진입하기도 한다. 지도에는 돌박재로 표기되어 있으나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아무런 표기가 없는 무명고개에 불과하다. 이 지역 사람들은 상미재라고 부르는데, 상미란 지명은 우측의 명슬리 마을에 있는 지명을 음차해 온듯한데 임회면 명슬리(鳴瑟里)는 본래 진도군 임일면 속해 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상미리와 중미리를 병합하여 명슬리라고 해서 임회면에 편입되었다. 예전에는 ‘매시리’, ‘매스레’로 부르다가 매가 미로 변하였으며, 마을 위치에 따라 상미· 중미·하미로 구분하였으며, 또 다른 유래로는 큰 산에서 내려다보면 마을 형체가 ‘매화꽃 형국을 이루어 매시리’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 176.9m봉
돌박재에서 잡목이 많은 등로를 따라 가파르게 20여 분 오르면 산패는 없고 선답자 띠지가 지키고 있다. 등로는 남서쪽으로 살짝 꺽어져서 맥길을 이어간다. 약 5분 정도 더 오르면 대학봉이다. 왼쪽으로 거룡리 신정마을에 청룡뿔산을 찾아본다.
♤ 대학봉(大鶴峰, 190.4m)/ 태학봉(太鶴峰)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진도군 임회면 명슬리와 의신면 송정리, 거룡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명슬리의 마을 유래에는 태학봉(太鶴峰)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한글 표기로 대학봉이라 해놓아 흔히 우리가 알고있는 대학교의 대학이 아니라 ‘큰 대(大), 학 학(鶴)’이라는 기록을 보면 커다란 학(鶴)과 관련된 지명인듯 하나 대학봉에 대한 시원스런 기록을 찾을 수 없다.
♤ 용수봉(龍首峯, 170.7m)/ 면계/ 삼리봉(진도군 임회면 명슬리, 의신면 거룡리 → 송정리)
자손들이 잘 되었을까 묵묘가 하나 있고, 준희선생님 산패가 커다란 참나무에 높이 매어 있다. 지맥의 왼쪽이 진도군 의신면 거룡리 → 송정리로 바뀌는 삼리봉 지점으로 지명 유래는 알 수 없다. 용수봉이란 지명은 다음 지도에는 표기가 되어 있으나, 국토정보지리원의 지도에는 용수봉이란 지명 표기없이 그냥 170.7m봉으로 표시되어 있다.
♤ 진도군 의신면 송정리(松亭里)
송정리는 주로 낮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어 용수봉, 제봉 등이 분포하며 송정저수지가 위치해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송정, 오촌, 죽청, 탑곡, 활곡 등이 있다. 송정은 송정리의 본 마을로 지명은 소나무 정자가 있던 것에서 유래되었으며, 오촌은 죽청 앞에 있는 마을이고, 죽청은 송정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대나무가 많아 푸르렀다고 하여 죽청이라 불리는 마을이고, 탑곡은 송정 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탑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활곡은 송정 남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활처럼 되어 있다고 하여 활곡이라 하며, 활곡 동쪽에 진일 염전에 있어 제염(製鹽) 등이 행해진다.
♤ 진도군 의신면 송정리 죽청(竹靑)마을
죽청마을은 대학봉과 봉호산으로 이어진 산릉 완경사면에 입지하고 있으며, 죽청리의 오른쪽에는 성주봉이 솟아 있고, 왼쪽에는 용수봉이 뻗어내려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마을로 북동쪽으로 송정리와 접하고 있고, 서쪽으로는 봉호산을 경계로 임회면과 접하고 있으며, 18번 국도에서 갈라진 2차선 도로가 죽청리까지 연결되어 있는데 자연지명으로는 나팔재, 사장등, 민등, 송지등, 큰덜, 안골, 느진골, 깊은골 등이 있다.
고개 위에 비닐하우스 한동이 있는데 비박지론 최고로 보입니다. 마을은 왼쪽으로 2~300m 내려가 있네요.
♤ 죽청고개/ 2차선도로/ 매실로/ 서해랑길 8코스/ 고개 왼쪽 송정리 인가 물보충 가능
진도군 의신면 송정리 죽청마을에서 임회면 용호리와 명슬리 싹바위골로 이어지는 2차선도로가 지나는 고개이다. 왼쪽 전신주방향의 포장임도를 따라 올라간다. 사통팔달로 이어지는 농로같은 시멘트 도로 고개 주변으로 봄동과 대파밭이 많이 보인다. 죽청고개에서 왼쪽으로 50m정도 내려서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서해랑길이 지나는 곳이다. 오른쪽으로 꺽어져 양회임도를 따라서 매듭재가 있는 매실골 방향으로 향한다.
지맥은 매듭재로 가는 임도를 따르다가 147m봉으로 올라 봉호산으로 향하는데 잡목이 많아 고생길입니다. 들입구가 임도를 조금 따르다 왼쪽으로 오를줄 알았는데 시작부에 있어서 놓쳤네요. 매듭재까지 올랐습니다.
♤ 매듭재/ 147m봉/ 면계/ 삼리봉(진도군 의신면 송정리, 임회면 명슬리 → 용호리)
임도따라 능성이로 오른 매듭재를 넘어서면 의신면에서 임회면으로 들어선다. 임도를 잠깐 따르다가 오른쪽으로 휘어지는 곳에서 매듭재로 올라가는 도로를 버리고 잡목이 환영하는 왼쪽 산으로 들어선다. 매듭재에서 올라오는 곳과 만나는 147m봉에서 지맥의 오른쪽이 임회면 명슬리 → 용호리로 바뀐다.
지맥이 좌우 모두가 완전하게 임회면 내안으로 들어서서 죽림리와 용호리의 경계를 따릅니다.
♤ 봉호산(峰虎山, 193.2m)/ 4등삼각점(진도 420/ 1986 재설)/ 면계/ (진도군 임회면 용호리, 의신면 송정리 → 임회면 죽림리)
준희선생님 산패와 독도대선배님의 192.9m 코팅지가 나무에 매어 있다. 은신처로 삼을 대밭도 갖추고 있으니 여귀산 호랑이의 서식지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다. 지맥의 왼쪽이 진도군 의신면 송정리에서 임회면 죽림리로 바뀌며 좌우 모두 완전하게 임회면 내안으로 들어선다. 우틀로 휘어져 잡목능선을 내려서는데 바닷가로 접도가 바라보인다.
♤ 진도군 임회면 죽림리(竹林里)
진도군 임회면에 속해있는 죽림리는 여귀산 앞의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동쪽으로 바다를 끼고 있는 해안지역이며, 작은 하천이 흘러 논농사가 주로 행해지는 마을로 예전에는 죽림리 지역이 속에 깊숙이 있다하여 ‘속동’이라 칭하였는데 ‘죽림’으로 변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비봉귀소(飛鳳歸巢)라는 명당에서 연유하였다고 하는데, 예부터로 봉은 죽실(竹實)을 먹는다는 이유로 붙여진 것이며, 봉치(峰峙)라는 재의 이름도 있다. 1350년경 나주임씨가 입향하여 정착한 것이 시초라 전해지며, 이후 김해김씨와 전주이씨 등이 입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북쪽의 봉호산과 남서쪽에 있는 여귀산(459m)의 줄기가 마을 뒤로 뻗어 분기한 산릉에 둘러싸여 있으며, 동쪽으로는 멀리 의신면에 속한 접도가 한눈에 들어오며, 여귀산에서 흘러온 물을 모아 죽림제를 만들어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제공하여 농사를 경작하고 있다.
♤ 무지개재(105m)/ 양회임도/ 죽림리 무지개골 - 용호리 매실골
반바지님 코팅지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무지개재는 진도군 임회면 죽림리 무지개골에서 용호리 매실골을 넘나드는 고개로, 봉호산을 내려와 만나는 양회임도 삼거리에서 직진 오르막 도로로 지맥길 능선인 옹골산과 여귀산으로 이어지는 양회임도이다. 10분 정도 임도를 따르다가 바리케이드가 막는 지점에서 좌틀하여 옹골산으로 진입한다. 비포장임도이고 들머리는 양회임도이다. 다음지도에는 무지개재로 표기되어 있으나,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아무런 표식이 없는 무명고개이다. 지명은 고개 왼쪽 아래에 있는 무지개골에서 올라온 듯 하나 무지개에 대한 정확한 유래는 실전되어 알 수 없다.
차단기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오르나 임도를 따라 패스하기도 합니다.
♤ 옹골산(211.5m)/ 임회면 용호리 - 죽림리
준희선생님 산패가 나무에 높이 매어 있다. 임도를 따라 우회하기도 하는 봉우리이다. 10분여 오르는데 잡목이 심해 상당히 고생스럽다. 진도군 임회면 용호리와 죽림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국토정보지리원의 지도에는 211.5m라고 표기되어 있으나 다음 지도에는 옹골산이라 표기되어 있는 산으로 밋밋한 봉우리에 키가 큰 갈참나무 한 그루가 정상을 지키고 있다. 지명은 이 산 남쪽 아래에 죽림리 “옹골”이란 지명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며 "옹골"이란 옹기장이가 흙을 짓이겨 질, 오지그릇, 독 등을 만드는 골짜기로 "옹기골"의 준말일 수도 있겠다. 임도를 따르다가 왼쪽으로 빡시게 올라 능선 위에 오르고 여귀산 정규등로를 만나게 된다.
♤ 접도(接島)/ 접섬/ 금갑도/ 갑도/ 접배도
접도는 본도인 진도와 접해 있어 접도 또는 접섬·금갑도·갑도·접배도라고도 불리며, 섬가운데 남망산(165.9m)이 우뚝 솟아 있다. 진도군 의신면 급갑리에 있는 접도는 조선시대에 유배지였던 이 섬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며, 진도의 남서쪽 끝과 접도의 북서쪽 끝을 잇고 있는 곳인데, 접도를 '섬 속의 섬'이라 일컫는데 예전에는 그만큼 접근하기 어려웠던 섬이다. 수품항같은 인근에 풍부한 어장을 보유한 도서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예로부터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영향으로 어업을 경시해온 탓에 어업의 비중이 낮다고 하며, 진도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인들의 유배지였기 때문에 어업을 천시하던 양반들의 유배생활로 인해 그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진도 본섬에 연한 접도는 멸치잡이, 김, 미역, 톳 양식을 비롯해 어업에 오랫동안 종사해왔으며, 수품리 포구에는 고깃배들이 제법 정박해 있어 진도와는 다르게 어촌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섬이다.
오를 땐 힘들었는데 시원스런 바다 풍경, 다가오는 여귀산 봉우리에 카메라를 꺼내들게 만드는 지점입니다.
♤ 309.6m봉/ 조망바위
뒤돌아보니 금갑리와 접도, 진도 앞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폐헬기장인 듯, 펑퍼짐한 바위 봉우리 조망점들을 지난다. 여귀산과 벌바위봉으로 향하는 약 1.2km의 능선에 여름엔 진행이 불가할 정도로 가시잡목이 엄청나다.
일반등산로와 만나 별바위로 향하는데 여귀산과 별바위 사이로 해가 기우는 정면이 멋진데 사진을 찍기가 어렵네요. 아직은 북풍인듯 남풍을 부르는 바닷바람이 엄청 세게 붑니다.
♤ 317.2m봉/ 작은여귀산/ 별바위
준희선생님 산패가 나무에 매어 있다. 뾰족한 오봉산(200.5m)과 귀성리가 조망되는 조망 맛집이다. 전후로 잡목 넝쿨이 엄청 심하다. 바다로는 접도, 상구자도와 하구자도가 떠있다. 가파르고 삐걱거리는 철계단으로 내려선다.
♤ 진도군 의신면 구자도리(九子島里)
진도군 의신면에 속해있는 구자도리는 본래 진도군 명금면의 지역으로서 모양이 개처럼 생겼으므로 개섬 또는 구자도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소구자도, 갈명도, 밀매도를 병합한 후 구자도리라 하여 의신면에 편입하였고, 1982년 1월 1일에는 구자도리(拘子島里)를 구자도리(九子島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의신면 금갑리 접도 아래 남부 바다에 떠있으며, 상구자도와 하구자도의 2개의 작은 섬으로 되어 있으며 회동과는 11.6㎞에 있는 섬으로 교통망은 옛날에는 정기 여객선이 왕래하였으나 인구 감소로 현재는 수품항(1종항)에서 사선으로 가거나 굴포에서 갈 수 있다고 한다.
♤ 405.5m봉/ 산태바위봉
철계단을 내려서서 안부에 닿는다.
♤ 오봉산(五峰山, 200.5m)
진도군 임회면 죽림리와 상만리에 걸쳐있는 오봉산을 멀리서보면 마치 꼬깔처럼 보이는데, 해안가에서 올라오는 봉우리가 다섯 개여서 오봉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오봉산에는 돌로 쌓은 도리장(둥글게 빙 돌려서 베거나 파다)이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 사람들이 마을 사람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쌓았다고 구전하며, 이에 따르면 태평양전쟁 말기 도리장에 포를 장치해 배가 지나가면 쏘기 위한 포진지이다.
♤ 밀매실재/ 375m
반바지님의 코팅지가 이정표에 묶여 있다. 급경사의 암봉을 망가진 계단을 따라서 내려오니 동백나무 숲이 나오고 잠시후에 탑립마을에서 올라오는 갈림길을 만난다. 여귀산이 360m 남았고, 지나온 140m지점에 밀매실재라는 이정표가 있으나, 반바지님의 코팅지는 이곳이 밀매실재라고 이정표에 묶어 놓았다.
♤ 409.9m봉
여귀산으로 가는 길은 암릉의 연속이다. 조망바위에서 서쪽으로 눈을 돌리니 첨찰산과 더불어 진도의 명산으로 소문난 동석산(銅石山, 217.7m)도 찾아본다. 틈이 벌어진 암릉 사이를 통과하니 멀리서 멋지게 보였던 409.9m봉으로 올라선다.
여귀산 정상은 암봉으로 되어있어 바로 오르지 못하고 바위 왼쪽으로 반바퀴 돌아서 올라가는데 철난간이 부식되어 조심스레 오릅니다. 옛 봉수대 자리에는 무인산불감시초소가 서있고 사방으로 조망이 좋습니다. 첨찰산은 물론이고 바다쪽으로는 월평리 황금기미 포구가 눈에 들어옵니다.
♤ 여귀산(女貴山, 458.4m)/ 정상석 2개/ 봉수대/ 무인산불감시탑/ 삼리봉(임회면 용호리, 죽림리 → 상만리)
여귀산은 진도군 남동부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북동쪽에 위치한 첨찰산에서 직선거리로 약 12.5km 거기를 두고 능선이 연결되어 있다. 첨찰산에서 수리봉을 지나 왕고개에서 잠시 가라앉았다가 남쪽으로 휘어져 의신면 칠전리와 침계리 경계를 이루며 남진한다. 여자 산신령이 다스리는 산으로 귀한 여인이 나올 풍수를 지녔다고 전해지며 옛날 진도에 명당이 있다는 말을 듣고 배로 굴포를 지나던 지관(地官)이 여귀산을 바라보니 서남쪽에 명당혈이 뭉쳐 있으므로 배에서 내려 장군바위를 찾아왔는데 이미 묘가 있어 탄식하며 돌아갔다는 전설이 있는데, 아직도 임회면 여귀산 자락에는 복토망월(伏兎望月: 엎드린 토끼가 달을 바라본다)과 비봉포란( 飛鳳抱卵: 나는 봉황이 알을 품다), 보검장갑(寶劍藏甲), 호승예불(胡僧禮佛形: 부처앞에서 목탁을 예불한 형상), 비룡상천(飛龍上天: 용이 하늘로 오르다), 천녀등공(天女登空: 예쁜 선녀가 하늘을 오르는듯한 형국) 등 명당이 많다고 한다. 귀한 여자 산이라는 여귀산(女貴山)의 정기 때문인지 산 아래에 있는 귀성마을에서 태어난 여자들은 모두 똑똑하다고 하며, 또한 여자가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형상 때문에 소변을 보는 앞쪽 지형은 물이 많고, 그 반대쪽은 물이 부족하다고 한다. 중생대 백악기에 화산 폭발로 분출된 화산재가 용결하여 만들어진 용결응회암 지질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산 정상은 제법 오르기가 험난한 바위가 암괴지대로 노출되어 이뤄진 반면 정상을 중심으로 좌우로 흘러내린 지능선들은 부드러운 산세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두 얼굴을 가진 산이다. 350m 고동에서 급경사를 이루고 특히 남사면 쪽이 더욱 급경사이다. 진도읍에서 18번 국도를 타고 30여 분 가면 산의 입구인 상만리에 도달한다. 산세의 규모도 커서 임회면 동북부를 거의 덮고 있다. 임회천의 발원지이며, 18번 국도가 남쪽 산록을 지난다. 진도군 임회면 용산리 용호마을에서 보면 산의 모습이 단정하게 차려입은 선녀처럼 보인다고 한다. 여귀산은 밖에서 올려다보면 그저 평범하게 보이지만 산에 들어서면 산록은 후박나무, 동백나무 등 식생이 무척 우거져 기존 등산로를 벗어나서는 육지의 여느산과 달리 수림지대를 뚫고 나아가기가 어렵다. 반면 산 정상은 상당히 오르기 힘든 바위산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일단 주능선이나 정상에 오르면 남서쪽으로 시원하게 터지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을 비롯한 바다 풍경이 황홀한 파노라마를 펼치고, 아래로 오봉산과 연대산을 볼 수 있다. 바다를 주홍빛으로 물들이는 이곳의 일출과 낙조는 유명하다. 여귀산에는 국립남도국악원이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지로는 구암사가 있는데 원래 옛 이름은 상만사였다. 고려시대에 건립되었다는 구암사에는 5층석탑이 있다. 여귀산 남사면 곡저에 자리한 귀성마을은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의 찰영장소였다.
♤ 여귀산봉수지(女貴山烽燧址)
정상부의 산죽 군락지는 그 옛날 정상에 봉화대가 있어서 봉화대를 지키던 봉수꾼들이 기거했던 곳인데 호랑이의 접근을 막기 위해 심었다는 전설이 있다. 여귀산봉수지가 있는 여귀산 정상은 자연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봉수대는 약 450㎝ 높이의 암벽이 잘라진 틈에만 특별히 보완 축석하고 석벽의 가장자리에 몇 단의 석축을 원형으로 쌓았으며, 50×30㎝ 정도의 막돌을 이용하여 ‘막돌 허튼 쌓기’에 의해 구축한 연대의 직경은 대략 6m 정도로, 현재는 완전히 도괴(倒壞: 건물 따위가 무너져 붕괴함) 되었는데, 봉화대 불을 피우기 위하여 봉화수들이 기거했던 건물의 기왓장이 산죽숲 사이에 널려 있다고 한다. 봉수는 횃불과 연기로 변방의 정세를 중앙에 알리던 제도로 조선시대 봉수는 전라도에 43개가 있었는데 진도에만 여귀산, 굴포, 삼당산, 첨찰산 등 다섯 곳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에 따르면 진도는 다섯 곳의 봉수대뿐 아니라 주변 해안지역에 벽파진을 비롯한 수군진까지 설치될 만큼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으며, 삼당산봉수와 굴포봉수는 여귀산의 보조봉수로서 여귀산봉수에 연락했고, 여귀산봉수는 첨찰산봉수에 연락했으며, 첨찰산봉수에서는 이를 받아 해남 화원봉수와 현산면 관두산봉수에 연락했다. 왜적이 나타나면 여귀산봉수의 봉화가 올라 진도 첨찰산과 해남 일성산, 목포의 유달산을 연결해 한양에 알렸다고 한다.
여귀산에서 약 20분 정도 진행합니다. 등로는 아주 좋습니다.
♤ 386.4m봉/ 삼리봉(임회면 상만리, 용호리 → 봉상리)/ 모싯굴봉
여영대선배님의 산패가 동백나무 가지에 매어 있는 작은 봉우리로 국토정보지리원의 지도에는아무런 표식이 없는 무명봉이다. 살짝 왼쪽으로 내려 내리막길을 따라 10분 정도 진행하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독도에 주의할 지점이다. 지맥길은 직진으로 이어지는 제도권 등로를 버리고 왼쪽 숲속 가시잡목으로 내려서며 연대산에 이르기까지 상만리 내안을 통과한다. 직진으로 가면 천연기념물 제111호로 지정된 상만리 비자나무와 고려시대에 번창한 사찰로만 기록되어 있을뿐, 자세한 기록이 없는 구암사(鳩巖寺)로 향하는 등로이다. 절과 천연기념물 비자나무도 볼겸 좋은 등로로 직진하는 경우가 많다.
♤ 구암사(鳩巖寺)/ 전남 진도군 임회면 상만길 58
구암사는 고려시대에 번창하여 여귀산 자락에 여러 암자가 있었는데, 이는 중방골이나 불당골 등 불교와 관련 있는 여러 암자로부터 유래된 산의 명칭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사찰에 있는 오층석탑은 백제 후기나 고려 초기에 지어진 탑으로 보고 있으며, 해체 보수 때 사리를 넣었던 흠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대웅전의 실내탑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처럼 선조의 얼이 담긴 문화 유적지가 폐허인 채 내버려져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뜻있는 주민들이 구암사 복원불사 후원회를 조직하여 1988년에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뒤, 1991년 복원불사를 착수하여 현재에도 불사에 계속 임하고 있다. 상만리 5층석탑(전남 유형문화재)은 임회면 상만리에 있는 상만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는 구암사라는 사찰이 있다. 탑의 조성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74년 4월에 새로이 절을 지으면서 정지작업을 하던중 고려자기 2점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고려후기로 추정된다. 또한, 상만리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비자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높이 25m에 둘레가 6m이며 사방으로 7 ∼8m 가량의 가지가 뻗어나 있는 500년 이상의 수령을 지닌 거목이다. 고령으로 어려운 여건을 겪으면서 고사위기에 처했으나 수차례의 수간 주사 등으로 다시 살아나 매년 많은 양의 비자를 수확하고 있다. 주목과에 속하는 난대성 상록침엽수로 부근에는 모기가 서식하지 않으며 나무에서 떨어져도 다치지 않는다는 신비스런 나무이다.
요즘 농촌에는 빈집이 많아요. 혹시 마을회관이 있을려나 기대는 했으나 예상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상만리 마을 빈집을 찾아 하루를 지웁니다.
♤ 진도군 임회면 상만리(上萬里)
옛날에 마방역이 있던 마을로 상마(上馬)라 하였으며, 상만리는 상마에서 유래된 마을로 1440년 경 경주김씨가 처음으로 들어왔으며, 1550년 경 밀양박씨·전주이씨 등이 옮겨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여귀산과 연대산 산릉 사이에 발달한 곡저평야를 끼고 여귀산 남쪽 산록 완경사면에 입지하며, 남서쪽으로는 정금제(井金堤), 서쪽으로는 개용제가 각각 위치한다. 자연마을로는 상만흥, 기차바웃골, 탑동, 불당골, 서당골, 비자나뭇골마을 등이 있으며, 상만흥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유래 또한 상만리의 그것과 같으며 기차바웃골마을은 기차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 곳이라 하여, 탑동마을은 만흥사탑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불당골마을은 불당이 있던 곳이라 하여, 서당골마을은 서당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비자나뭇골 마을은 비자나무가 무성하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하며 상만리의 비자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진도에 진도견이 아닌 호환(虎患)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635건이나 된답니다. 호랑이(범)가 나타났다는 기록은 350건, 표범은 51건입니다.
♤ 진도와 호랑이
우리 땅에서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백두산 호랑이, 한국호랑이가 100년까지만 해도 백두대간을 거쳐 내려가 바다 건너 한반도 최서남단의 섬, 진도에서 왕성하게 활동해왔다고 한다. 조선시대 가장 큰 목장인 말목장이 있기 때문이었다는데, 지금도 진도엔 이 호랑이와 관련된 여러 목격담과 뽕할머니 같은 전설, 호랑이굴 등이 남아있다. 백두산과 지리산에만 호랑이가 살던 게 아니었다. 오히려 국영목장이 있고 사람이 많이 없던 섬에 호랑이의 밀도가 더 높았던 거 같다. 인천 강화도나 전라도 섬 등에서 호환 기록이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호랑이는 내륙의 높은 산에 살것이라는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주로 저지대의 습지대에 서식하며 수영에도 능숙했다 때로는 섬과 육지를 오가며 바다를 건너가기도 했다. 14세기 무렵 한반도에선 대규모 생태적 변화가 일어난다. 고려시대 동물과 사람이 윤회로 순환한다는 불교적 세계관을 배격하고 성리학적 민본주의로 무장한 조선의 신진사대부들이 나타나면서부터다. 이들은 농본주의 정책을 펴면서 농지개간에 나섰다. 1389년 80만결에 지나지 않던 농경지는 1406년 무렵 126만결, 16세기 후반에는 150만~170만결로 늘어났다. 인간에게 서식지를 침범당한 호랑이는 호환을 일으켰다. 농지개간과 동시에 조정은 호랑이 사냥을 전담하는 ‘착호군’과 ‘착호갑사’를 신설하는 등 대대적인 호랑이 잡기에 나선다. 어떻게 보면 요즈음 서식지 축소로 인해 도시에 들어와 ‘난동’을 부리는 멧돼지와 비슷하다. 진도에서 호랑이는 1920년대께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군면 향동리 등 호랑이굴은 모두 점찰산, 여귀산, 가인봉 등 200m 안팎의 산을 끼고 있다. 1903년 진도에 와서 호랑이를 사냥한 영국인 포드 바클레이의 목격담으로만 4마리가 살았는데, 호랑이굴 수와 두어 곳의 큰 산을 고려하면 최소 4마리, 최대 10마리 안팎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식 밀도는 높은 편이다. 한국 호랑이의 마지막 서식지로 알려진 러시아 아무르 지방의 한마리당 서식 면적이 400㎢인데, 비슷한 크기의 진도(363㎢)에서 수마리가 살았으니 말이다.
♤ 18번 국도(귀성삼거리)/ 임회면 상만리 귀성(貴星) 마을/ 국립남도국악원/ 서해랑길 9코스
진도군 임회면 상만리 귀성마을에 있는 Y자 삼거리로 왼쪽으로 가면 국립남도국악원과 아리랑 마을이 조성되어 있고, 귀성마을은 오른쪽 바닷가로 향한다. 귀성마을의 유래에 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 중 하나는 귀성마을이 옛날부터 항상 고기가 많이 잡혀서 황금리로 불렸으나, 어느 해부턴가 마을 위로 남극노인성이 비추면서 장수마을로 알려져 귀성(貴星)마을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지명유래라기보다 산 이동담에 가까운 이야기로, 귀성마을 앞으로 섬이 떠내려 오는데, 한 여자가 이 모습을 보고 “섬이 떠내려 오네!” 하고 외치자 섬이 그 자리에 멈춰 버렸다고 한다. 섬이 멈추지 않고 떠내려가서 대천리에 붙었으면 왕후(王侯)가 나올만한 지세로 변했을텐데, 멈춰버려 그렇지 못했다고 한다.
왼쪽으로 200m거리에 국립남도국악원에서 물을 구할 수 있을지, 매점은 없고 카페테리아는 있네요. 국립남도국악원(상만리)버스정류장에서 진도읍 나가는 버스가 17:10분 막찹니다. (40분 소요) 만약 힘들어 버팅기지 못하면 여기서 택시를 불러 임회면 여관에서 자거나 진도읍 찜질방으로 나가는 생각도 가져보았습니다.
♤ 국립남도국악원과 아리랑 마을
진도군 임회면 상만리에 있는 국립남도국악원은 2004년 7월 개원하였으며 국악 연주공연과 국악연수 및 전통문화체험 그리고 국악연구 등을 담당하는 곳으로 수려한 산세의 여귀산을 등지고 드넓은 남해바다를 마주보고 있는 천혜의 자연경관 속에 위치한 국립남도국악원은 국악전문연수와 공연을 통한 국악 보급 활동과 국악을 통한 건전한 여가문화 선도와 이를 통한 국민정서 함양 및 문화 소외지역 주민에게 국악문화를 체계적으로 보급함으로써 전통문화 향수권 제공 및 자연환경과 국악 활성화를 통한 지역문화예술 관광자원화의 토대 마련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야산이지만 해발 높이라 봉우리마다 만만하지는 않아요.
♤ 160.1m봉
귀성삼거리에서 임도를 따르다가 산길로 들어선다. 임도를 계속 따라서 우회하기도 하는 봉우리이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 130.1m봉
잠시 임도를 따르다가 또 산으로 접어든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 148.6m봉
또 임도에서 산으로 올라선다. 준희선생님 '힘힘힘' 격려 산패를 지나 오른 봉우리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우틀로 내려선다.
♤ 168.1m봉
내려선 안부 오른쪽으로 태양광시설이 보인다. 여귀산에서 질러가면 좋으련만 바닷가 쪽으로 U자 형태로 마루금이 돌아가는 구간이다.
♤ 182.7m봉
준희선생님 산패가 나무에 매어 있다. 굴포재로 내려서는 길은 조금전에 올라온 길과는 정반대로 등로도 뚜렷하고 잡목이 없는 편안한 길이다.
굴포고개는 사진으로 남길 별다른 특징이 없어 그냥 지나쳤어요. 임도를 따라 성배성님 띠지를 보고 산으로 진입하니 개가 짖는 농막이 나옵니다. 진돗개 두마리가 지키고 있는 입구에 문패처럼 "I'm free"라 쓰여 있네요. 물이라도 얻을까 하여 올라서서 헛기침을 하며 계십니까!! 하며 들렸더니 출입문에는 열쇠가 걸려져 있고 비어 있습니다. 비데가 있어 일보고 출발합니다. ㅋㅋ
♤ 18번 국도(상만리)/ 굴포고개(屈浦峙)/ 서해랑길 9코스
귀성삼거리에서 헤어진 서해랑길을 다시 만난다. 귀성삼거리에서 올라선 임도가 여기까지 이어진다. 진도군 임회면 상만리에서 굴포리를 잇는 고개로 18번 도로가 지나가며, 왼쪽으로 내려가면 굴포리와 짝별리 사이 만입부에 있는 굴포진(屈浦津)이라고도 부르는 굴포나루이고 윤고산사당이 있다. 용장성을 빼앗긴 뒤 배중손 장군은 남도진성으로 터전을 옮겼다. 그러나 이곳마저 무너지고 바닷가를 따라 물러나다 굴포에서 마지막을 맞았다. 이를 바탕으로 마을 당집이 배중손 사당으로 바뀌고, 배씨 문중에서는 이곳에 동상을 세웠다. 배중손 장군은 오른손을 치켜들고 굴포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굴포 바닷가에 있었던 배중손 장군 사당은 2020년 용장성에 고려항몽충혼탑이 세워지고 그 옆에 삼별초 추모관이 세워지며 배중손 장군 사당에 있던 현판과 배중손 장군 동상, 배중손 장군 항몽순의비가 2021년 2월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남동쪽에는 보물섬 소동으로 잘 알려진 죽도(竹島)가 있으며 오른쪽으로 가면 천연기념물 제111호로 지정된 상만리 비자나무가 근처에 있다. 지맥은 왼쪽의 임도를 따르는데 농장주가 까칠하게 나와 직진으로 밭을 지나는게 낫겠다.
♤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屈浦里)
굴포리는 동쪽과 남쪽으로 바다를 끼고 있는 해안지역으로, 수산업과 함께 논농사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자연마을로는 굴포, 웃굴포, 아랫굴포, 염전, 도적골, 대섬, 서당골마을 등이 있다. 굴포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이고, 웃굴포마을과 아랫굴포마을은 굴포의 위쪽, 아래쪽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염전마을은 아랫굴포 앞에 염밭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도적골마을은 도적이 있었다 하여, 대섬마을은 대나무가 많은 섬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서당골마을은 서당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박배낭에 전지가위를 장착했지만 선답자님들의 노고로 꺼내지를 않았습니다. 겨울이라 누릴 수 있는 혜택이고 여름에 진도지맥 종주는 무모한 일입니다.
♤ 연대산(蓮大山, 150.9m)/ 4등삼각점(조도 415/ 1986 재설)/ 임회면 상만리 - 백동리
준희선생님 산패가 나무에 매어 있다. 연대산은 진도군 임회면 상만리와 백동리 경계에 있으며, 정상은 좁은 공터에 잡목에 가려 조망은 없고, 조선시대에 이곳 정상에 연대(煙臺)가 있었다고 해서 지명이 된 산으로, 진도군 임회면 백동리연대지(白洞里烟台址)를 보면 이곳이 백동리 신동마을 북동쪽 100m 지점의 연대산 정상부에 있는 조선시대의 연대터로서 조선시대의 연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정치와 군사적으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통신수단이고 주로 구릉이나 해변지역에 설치하고 봉수대는 산 정상에 설치하였는데 그런 연대가 있었던 터이다. 자연석을 이용하여 연대를 축조하였는데 현재는 붕괴되어 석재만 산재해 있는 상태이고 현존하는 석축의 흔적으로 보아 원형 연대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지름은 6.8∼7m 정도이다. 연대산 동쪽은 상굴포와 짝벌 사이에 형성된 해안 지역이며 북동쪽으로는 여귀산 봉수대가 있다. 이제까지 지나온 산봉의 삼각점의 도엽명은 ‘진도’로 표기되어 있었는데 이곳은 ‘조도’로 표기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있는 섬이 총 3,237개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제일 많은 곳이 전남으로 1,964개나 되는데 그 중에서 유인도가 276개, 무인도가 1,688개라고 한다. 군 단위로는 신안군이 유인도 72개, 무인도 932개 등 총 1004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데, 신안군에 속한 섬 숫자는 우리나라 전체 섬 숫자의 26%에 달하며, 면 단위로는 진도군 조도면이 178개에 달하는데 이 중 142개가 무인도이고, 사람이 사는 유인도가 36개라고 한다. ‘새들이 바다 위에 점점이 내려 앉아있는 듯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조도는 ‘새 조(鳥)’에 ‘섬 도(島)’를 쓰며, 상조도(上鳥島)와 하조도(上鳥島)가 있지만 지금은 두 섬 사이에 연도교(連島橋)가 이어져 하나의 섬처럼 되어 있다.
버스시간표도 없는 서망교차로에서 3시간 가까이 기다려 버스를 타고 진도읍으로 나오며 백동리를 지나더군요.
♤ 진도군 임회면 백동리(白洞里)
백동리는 진도군 임회면에 속하는 행정리로 희여산(269m)과 월출산을 배후산지로 완경사면에 입지하며, 남쪽으로는 밭이 있고, 동쪽으로는 넓은 논이 있으며, 북서쪽으로는 백동저수지가 있다. 백야동, 만세동, 신동리를 병합하면서 백야와 신동의 이름을 따 백동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백동, 문텅골, 서당골, 병풍바웃골, 소엎진바웃골마을 등이 있으며, 백동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이고, 문텅골마을은 물탕이 있다 하여, 서당골마을은 서당이 있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고, 병풍바웃골마을은 병풍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다 하여, 소엎진바웃골마을은 소가 엎드린 것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삼리봉/ 삼리봉(진도군 임회면 백동리, 상만리 → 봉상리)
연대산에서 안부로 내려섰다 오른 지점으로 지맥의 오른쪽이 임회면 상만리에서 봉상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지맥은 봉상리로 들어서서 18번국도가 지나는 신동삼거리로 향한다.
♤ 진도군 임회면 봉상리(鳳翔里) 송월마을
진도군 임회면 봉상리는 풍수지리상의 지형이 봉황의 날개에 해당한다는 데서 유래하였으며, 자연마을로는 봉상, 가는골, 마방, 송월, 송정마을 등이 있는데, 봉상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유래 또한 봉상리의 그것과 같다. 가는골마을은 가는 골짜기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마방마을은 전에 이곳에 마방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송월마을은 봉상 남쪽에 있는 마을이며, 송정마을은 송월 서쪽에 자리한 마을로 소나무 정자가 있다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대파밭을 지나 신도로 공사중인 신동삼거리로 향한다.
18번 국도를 건너 오른쪽으로 조금 내려가 철망경계를 따라 오르다 잘 관리되고 있는 묘지대에서 국가유공자, 진도다시래기 기능보유자 혼유석에 배낭을 올려두고 행동식을 하고는 뒤로 오릅니다.
♤ 18번 국도(신동삼거리)/ 진도군 임회면 신동리(新洞里)
신동삼거리는 진도군 임회면 백동리에 속해 있으며 18번 국도가 지나간다. 오른쪽으로 진도읍과 해남으로 나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진도지맥의 끝지점인 서망항과 팽목항으로 가는 길이다. 18번국도 확장개설공사로 절개지에 안전철망이 설치되어 오른쪽으로 돌아 팬스를 따라 산으로 올라 지맥에 합류한다. 백야동, 만세동, 신동리를 병합하면서 백야와 신동의 이름을 따 백동리라 하였으며, 신동리는 새로 생긴 마을이라 붙혀진 지명이다. 뒷쪽으로는 조금전에 지나온 굴포재와 굴포포구, 윤고산 사당으로 가는 길이다.
♤ 고산둑 윤고산 사당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본관 해남(海南), 호는 고산(孤山)으로 조선시대의 문신이며 시조작가로 유명한데, 정철, 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詩歌人)의 한 사람으로, 서인 송시열에게 정치적으로 패해 유배생활을 했다. 우리나라 간척 1호인 이곳 고산 둑은 고산공(孤山公)이 1650년에 둑을 축조하여 굴포, 남선, 백동, 신동 4개의 마을 농민들에게 나누어 농사를 짓게 하였다. 이 둑은 높이 3m, 길이 380m이며 지금까지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4개 마을 주민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년 정월대보름이면 풍년과 풍어를 기원하면서 고산 감사제를 지낸다고 한다. 고산둑 간척지 축조 시기를 윤선도가 완도 보길도와 진도를 오가던 1640년부터 1660년 사이로 추정되며, 1646년 무렵 윤선도는 이곳 굴포리 처자 경주 설씨와 혼인했고, 1남 2녀를 낳았다. 윤선도는 간척사업을 통해 완도군 노화읍 석중리에 130여 정보,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에 200여 정보의 갯벌을 농토로 만들어 주민을 돕고 부를 축적했다. 윤선도가 이곳 굴포리에 원둑을 쌓을 때의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온다. 윤선도는 이곳 사람들과 함께 제방을 쌓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큰 파도에 쉽게 무너져버렸다. 다시 쌓으면 무너지고 쌓으면 또 다시 무너져서 깊은 시름에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는데 제방을 쌓는 곳으로 큰 구렁이가 기어가는 꿈을 꾸었는데 꿈을 깬 윤선도가 제방을 쌓는 곳으로 가보니 꿈속의 구렁이가 기어가던 자리에 서리가 하얗게 내려 있었다. 윤선도는 뱀이 지나간 형상으로 석축을 쌓도록 했고 그 뒤부터 둑은 무너지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 월출산(月出山, 110m)/ 진도군 임회면 봉상리 - 백동리
아무런 특징이 없이 준희선생님 산패가 나무에 매어 있다. 진도군 임회면 봉상리와 백동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 주변이 잡목으로 꽉 막혀 있어서 달맞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으며 산 아래 마을에서 올려다 보는 경관일 수도 있겠다. 준희선생님 산패만 없으면 무심코 지나치기 딱 좋은 무명봉이다. 진도군의 어느 자료에도 이곳 월출산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다. 월출산에서 안부로 내려서서 희여산갈림길까지 잡목도 많고 바위도 많은 된비알(고도 150m정도 오름)로 힘들고 까칠한 구간이다.
희여산으로 가는 암릉지대로 오르며 뒤돌아 보니 바닷가로 굴포항이 보입니다.
♤ 굴포항
굴포항은 전남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에 있는 나루로서 예전 중선(中船)이 다니던 시절에는 조기잡이 배들이 많이 출항하였으며 1978년 6월 14일 지방어항으로 지정되었다. 굴포나루는 진도군 임회면 남부의 굴포리와 짝별리 사이 만입부에 위치하고 있고 굴포나루 남동쪽에는 보물섬 소동이 일어났던 죽도(竹島)가 위치하며 굴포나루를 나서면 구자도와 조도면의 독거도(獨巨島) 등으로 갈 수 있었는데 18번 국도가 굴포나루를 지난다.
희여산 암릉지대에는 흑염소가 떼로 돌아다니네요. 자신있게 리지로 올르다 마주했는데 서로 깜짝 놀라고, 어디가 삼거리인지 몰라 정상 직전까지 배낭을 메고 올랐습니다.
♤ 희여산갈림봉(227m)/ 진도군 임회면 백동리, 봉상리 → 연동리)
지맥의 오른쪽이 임회면 백동리에서 연동리로 바뀌는 지점으로, 희여산갈림봉삼거리에서 북서쪽으로 약 200m 떨어져 있는 희여산을 다녀옵니다.
희여산에서 진도지맥의 날머리는 의견이 세군데로 갈리기도 합니다만 일관성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와! 바다다다~ 내렸다그쳤다 하는 눈도 멎고 하늘이 개어가네요. 동석산도 보이고 어쨋거나 조망 맛집입니다.^^
♤ 희여산(白也山, 269.3m)/ 지력산갈림봉
준희선생님 '그곳에오르고싶은산' 산패가 노간주나무에 매어 있다. 희여산은 진도군 임회면 백동리와 연동리의 경계에 있는 암봉으로 중생대 백악기 활발한 화산활동으로 이루어진 산인데 ‘본래 임회면은 봉상리에 있었고, 봉상리 앞산은 희여산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희여산을 작은 봉화산이라 했다는데 봉화대의 흔적은 없다. 목장면과 임회면 사이에 있는 산맥 아래에 남도진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산에 대한 정확한 유래는 알 길이 없다. 지나온 여귀산이 보이고 날씨가 좋으면 첨찰산까지 조망이 가능하다. 희여산에서 지력산으로 와우재 서측 분기봉~지력산~범호산~망뫼산~-대흥포구 독수리부리로 가는 약 14km의 산줄기가 더 길게 이어지지만 거제지맥, 남해지맥, 여수지맥, 고흥지맥, 사자지맥, 땅끝기맥과 같이 대양을 향해 남쪽으로 뻗어가는 산줄기를 주된 산줄기로 봤다. 다시 희여산갈림길로 와서 내려서는 길은 가시잡목이라 길이 희미하여 자칫 알바하기 쉽다.
♤ 185.4m봉
석성삼거리로 내려서는 오른쪽으로 약 0.6km 떨어진 붉은오리봉(130m)이 보인다. 임회면 연동리 붉은 오리골에서 음차된 봉우리 이름인듯 하다. 백동재 내려서는 길이 잡목지라 시간이 꽤 걸린다. 고개로 다 내려서는 즈음에 잊혀진 공동묘지인지 나무가 자라 가려진 묘지대를 지난다.
무궁화동산 화장실은 물보충, 비박장소로 염두에 두었는데 과연 깨끗하게 관리되고 내부가 넓었습니다.^^
♤ 18번 국도(51m)/ 석성삼거리/ 임회면 백동리 - 연동리/ 백동 무궁화동산/ 정자, 화장실
석성삼거리 18번 국도 삼거리에서 절개지를 만나 왼쪽으로 절개지를 따른다. 석성삼거리는 연동리와 백동리를 이어주는 고개로 18번 국도가 지나고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왼쪽으로 남도진성으로 가는 길이며, 길 옆에 백동 무궁화 동산은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공간이 있다. 전남 진도군 임회면 백동리에 위치한다. 진도군은 이 지역이 호국의 얼이 깃든 고장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1980년대부터 진도군 자체 사업으로 꾸준히 무궁화를 심어 왔다. 그 결과 녹진관광지와 백동리 관내에 약 220㎞에 달하는 무궁화 꽃길을 만들었다.
♤ 134.7m봉/ 삼리봉(진도 임회면 연동리, 백동리 → 남동리)
준희선생님 산패가 나무에 매어 있다. 도로를 따라 남두진으로 향하면서 패스하기도 하는 봉우린데 지맥의 왼쪽이 임회면 백동리에서 남동리로 바뀌는 삼리봉 지점이다. 이곳에서 직진으로 가면 맥길에서 많이 떨어져 있는 질매봉(259m)으로 이어지는 능선이고, 서망항으로 향하는 진도산줄기는 우틀로 꺽어 내려가야 한다. 세월호 기억의 숲 왼편으로 들어서서 정자를 지나 능선으로 올라간 다음에 10분 정도 길이 없는 곳을 치고 올라선다.
남도진성으로 넘어가는 고개, 남도재가 남두재로 바뀌지 않았을까요. 마지막 고비라고 보여지는 아주 힘든 오름입니다.
♤ 남두재(65m)/ 남도석성로
도강김공 묘지로 이어지는 오른쪽의 도로를 내려가니 2차선도로가 지나가는 남두재가 나온다. 진도군 임회면 연동리와 남동리의 경계에 있는, 석성삼거리에서 남도진성으로 가는 중간에 위치한 고개로 반바지님 코팅지가 산벚나무에 매어 있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이정표가 서있고 지맥은 오른쪽 밭을 가로질러 벌목지로 올라선다.
왜구를 막기 위해 바닷가에 쌓은 성인데 용장성을 빼앗긴 뒤, 배중손 장군이 이곳으로 와서 싸웠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지맥을 마치고 서망교차로에서 진도읍으로 나가는 버스편에서 남도진성을 가까이 바라다보았네요.
♤ 진도 남도진성(珍島 南挑鎭城)
전남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일원에 위치한 해안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삼국시대의 석성으로, 백제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는 삼별초가 이곳에서 몽골과 항쟁을 벌였고, 제주도로 옮겨 갈 때에도 여기서 출발했다고 전한다. 13세기부터는 왜구가 나타나서 노략질을 계속해오자 고려 충정왕 2년(1350)에 진도의 관청과 백성들이 내륙지방으로 피해서 살다가 세종대왕 초에 돌아오기도 했다. 결국 세종 20년(1438) 해안지방에 주로 설치되던 군사조직인 만호부가 이 지역에 생기게 되고 1500~1501년경에 왜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축성되어 전라우수영 임치진관 혹은 가리포진관에 소속되어 진도 남해안의 일부 권역과 서쪽 해안 등을 관할하였던 조선시대의 수군진성이다. 2022년까지 7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축성법, 문지, 내부 시설, 선소 등이 확인되었고, 15세기~19세기의 고고 자료들이 확인되어 성곽의 축조 시기와 폐성 시기를 알려 준다. 왜구를 방어할 목적으로 설진된 남도포진(南桃浦鎭)은 1438년(세종 20) 정월에 설치되어 전라 수영에 속하였다가, 1479년(성종 10) 정월에 전라수영이 좌‧우수영으로 분리 개편된 후에 전라우수영 임치진관(臨淄鎭管)에 속하였다. 그 후 1522년(중종 17)에 전라우수영 가리포진관(오늘날 완도)으로 옮겨 속하게 되었고 1895년 갑오개혁 때 폐진되었다. 남도포진은 상대적으로 허술한 진도군의 서쪽 해안과 그 주변의 섬뿐만 아니라 오늘날 신안군 남부의 정산, 신의, 하의도와 그에 딸린 섬들까지를 방어 구역으로 삼았다. 남도포진에 축성된 남도진성의 축조 시기에 대한 관련 기록은 『남도포진지가 불에 타 버려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도진성의 규모(1,233척)와 시설(우물 1, 샘 1)이 기록되어 있다. 전라도 수군진의 2차 축성 작업은 마도포진, 달량포진, 어란진, 금갑도진, 남도포진, 목포진 순으로 이루어졌다. 마도포진은 1499년 진성 축조 논의가 이루어진 후 1500년 마도왜변 때 이미 완성되어 있었고, 목포진성은 1501년(연산군 7)에 축성된 것으로 보아 남도진성은 1500∼1501년경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1555년(명종 10) 5월 을묘왜변 때 서해안으로 북상하던 왜구들에게 남도포진이 함락되어 불바다가 되기도 하였다.
남두재에서 이 봉우리까지 막산으로 아주 힘들게 올랐습니다.
♤ 176.3m봉/ 3등삼각점(조도 304/ 1986 재설)
준희선생님 산패와 독도대선배님 코팅지가 나무에 매어 있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앞산으로 향하며 암봉으로 올라서니 오른쪽으로 암릉미가 뿜뿜한 동석산(銅石山, 217.7m)도 보인다.
♤ 동석산(銅石山, 217.7m)
진도군 지산면 심동리에 있는 산으로 급치산(223.5m) 낙조대의 동북쪽에 있는 화산암 계열의 암릉으로 된 산으로 능선이 남동쪽~북동쪽으로 뻗어 있으며, 거대한 성곽과 같은 암릉과 칼날같은 나이프리지 암릉이 1.5km정도 남북으로 뻗어 있으며, 조망이 뛰어나서 진도평야와 남해바다, 다도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산이다. 산의 서쪽으로는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늦게진다는 세방낙조(細方落照)가 있고, 동쪽 6부 능선쯤에 동굴이 있어 마파람이 불면 은은한 종소리를 낸다는 ‘종성골(鐘聲窟)’이 있고 산자락엔 천 개의 종을 매달았던 천종사(千鐘寺)라는 절이 있는데, 동석산에 대한 지명유래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없다고 한다. 지방도 801번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진도읍에서 30분 거리이다. 등산로는 하심동에서 출발하여 미륵좌상암굴을 지나 동석바위전망대, 칼바위전망대, 동석산 정상, 삼각점, 석적막산, 가학재, 작은애기봉, 세방낙조휴게소로 이어지는 코스이며 워낙 가파른 절벽이기 때문에 위험한 구간 군데군데 철제로 안전난간과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앞산과 한복산은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줄곧 조망이 좋고요. 한복산 가까이 다가서다 왼쪽 아래로 남도진성 전체가 환하게 내려다 보이기도 합니다.
♤ 앞산(236.5m)/ 임회면 연동리 - 남동리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앞산 이후로 조망이 좋다. 오른쪽으로 동석산이 계속 바라다보이는데 일대에 산이 모두 하얀 암릉으로 솟아 있다. 은 전남 진도군 임회면 연동리와 남동리 경계에 솟아 있는 산으로 진도군 의신면 연주리란 마을의 이름을 낳게 하였는데 앞산이 구슬처럼 생겼다하여 연주(連珠) 또는 연지동이라 한데서 연주리가 유래하였다고 한다.
앞산에서 내려서며 축대 위에 봉분은 없고 문인석과 비석이 서있는 묘가 있다. 가선대부 호조참판 김해김씨 묘로 조도를 바라보는 명당지지이다. 진행하며 지맥의 끝자락과 서망항이 보이고 그 뒤로 조도 군도가 보인다.
절벽이라 과연 어디로 어떻게 내릴것인가 잠시 주춤했어요. 오른쪽으론 팽목항이 내려다 보이고 직진하여 살펴보니 나무를 잡고 내려서는 골이 있네요.
♤ 한복산(漢福山, 231.6m)/ 임회면 연동리 - 남동리
층층암벽에 주상절리가 명품인 한복산 암봉에서 팽목항을 내려다 본다. 진도군 임회면 연동리에 솟아있는 산으로 산자락 서쪽 비탈에 팽목 유물산포지가 분포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서망해수욕장이 펼쳐져 있는 산으로 이곳 역시 산의 지명유래는 찾기가 어렵다. 지형지세를 살펴보면 한복산, 질매봉(259m), 천둥산(198.9m)이 진도남도진성의 외곽성이다. 정상석도 없고 준희선생님 산패가 전부이지만 올망졸망한 섬들이 점점이 떠있는 바다와 팽목항 방조제와 안쪽에 드넓게 펼쳐진 간척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 팽목항(彭木港)
팽목항은 진도군의 서남쪽 끝에 위치한 항구로 행정구역으로는 진도군 임회면 팽목리이고, 교통은 진도대교를 통하여 국도 18호선의 종착지인 서망항에 이르기 2㎞ 전에 위치하고 있다. 1996년 12월 해양수산부에 연안항 지정신청을 내어 1998년 2월 24일 국가지정어항으로 지정되었다. 진도의 관문 역할을 하는 항구이다. 과거에는 목포-팽목-제주도를 잇는 항구였으며, 현재는 진도 근해의 섬, 그 중에서도 특히 팽목과 조도를 연결하는 항로의 출발지가 되고 있다. 진도군은 팽목항이 연안항으로 지정, 개발되면서 항구다운 항구를 갖추게 되었다. 2013년 2월 진도항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나, 팽목항이라는 명칭도 통용되고 있다. 2014년 4월16일 전남 진도 앞바다 맹골수도에서 세월호가 침몰해 희생자 304명이 10도 안팎의 차가운 바다 아래 가라앉았다. 그 중 대다수가 제주로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다.
석성삼거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준희선생님께 보고를 드리니 한복산에서 내려서서 중간에 바위가 나오면 좌우로 우회하면 된다며 물을 가르는 능선으로 마루금을 정확히 잘 따르라고 조언을 주신 구간입니다. 왼쪽으로 진행하며 바위 암릉 능선을 따라 내려서면 대나무 지대가 나오며 임도를 잠시 따릅니다.
♤ 129.5m봉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연동리와 경계를 지나온 진도지맥이 마지막 행정구역인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내안으로 들어서는 지점이다. 이 봉우리에서 임도로 내려서면 서망고개로 우회하기도 하는 지점으로 지독한 잡목숲이라는데 가시가 없어서 밭 왼쪽 윗쪽편으로 숲으로 들어서면 잡목 사이로 갈만하다. 잡목을 헤치고 서망고개로 내려선다. 서쪽으로 서망재를 넘어 탈상바위봉(145.6m)을 넘어 팽목항으로 향하는 산줄기가 바라다 보인다.
서망고개 정상에서 왼쪽으로 내려가 쇠사슬로 막아놓은 임도에서 오른쪽 잡풀 속으로 들어섭니다. 합수점에서 지맥을 졸업하고 서망항으로 탈출까지 이제 1시간 가량 남았습니다.
♤ 서망고개(西望峙)/ 18번 국도/ 서망삼거리/ 서해랑길 9코스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와 연동리의 경계에 있는 18번 국도가 지나가는 고개로 서망항과 팽목항(진도항)으로 향하는 길목이다. 서망리의 원래 명칭은 서망(鼠望)으로 쥐가 앞의 쌀섬(白米島)을 바라보며 어떻게 건너갈지를 생각하는 형세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나 후에 마을 이름에 쥐를 의미하는 서(鼠)자를 쓰는 것은 좋지 않으며 마을의 위치가 서쪽이니 발음이 같은 서(西)로 바꾸어 서망(西望)이 되었다 한다.
진도지맥은 마지막까지 쉽게 내어주지 않네요. 대부분의 지맥 종주꾼이 지치고 시간에 쫒기는 구간인데 마음이 바싹 타들어 가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 173.1m봉/ 돌탑
마지막 오름으로 지쳐서 오르기 힘든 구간이다. 게다가 가팔르기까지 하다. 정상엔 준희선생님 173m봉 산패가 동백나무에 매어 있다. 정상을 찍고 서망항쪽으로 꺾어져서 내려선다.
풍문으로는 바닷가로 해안길이 조성되었다길래 배낭을 메고 줄을 잡고 합수점으로 내려섰는데 삼거리까지 다시 올라와야 했네요. 산을 넘어 탈출하던 길이 지름길 격으로 해안쪽 사면으로 해안길을 따른다는 말이었습니다.
♤ 93.2m봉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는 진도지맥의 마지막 봉우리이다. 93.2m봉에서 내려서니 삼거리가 나오고 왼쪽으로 내려가면 절개지를 내려서는 밧줄이 있고 바닷가로 향한다. 오른쪽으로 난 뚜렷한 등로는 합수점을 찍고 다시 올라와 서망항으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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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와~~ 백미도와의 사이에 바다가 소리도 요란하고 물살이 대단합니다.
♤ 합수점/ 한바위
백미도(白米島) 맞은편 바닷가로 내려서니 바위에 부딪치는 거친 물살이 울돌목처럼 엄청나다. 합수점 맞은편에는 쌀섬이라 불리는 백미도가 있고 왼쪽은 각거도다. 왼쪽 더 멀리 사자도를 찾아보며 진도지맥을 마무리 하고 삼거리로 다시 올라와 왼쪽으로 서망항까지 0.8km를 20분을 걸어나간다. 진도(팽목)항까지는 약 2km이다.
서망교차로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2:30분차는 없어졌고, 다음은 3:50분 버스라길래 백반을 먹을려고 식당을 찾았는데 혼자에게는 파는 식당이 없어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까먹었어요. 진도읍까지는 택시비 35,000원, 임회면 읍내 석교리까지는 15,000원입니다. 버스시간을 알 수 있었더라면 석교리까지 나오면 교통편이 더 많았을텐데...
♤ 서망항(西望港)/ 진도연안해상교통관제센터
전남 진도군 서망항은 가을 꽃게잡이가 풍어를 이루는 전국 꽃게 주산지다. 진도에서도 남쪽 끝자락인 진도군 임회면 서망리에 위치한 해양수산부에서 관리하는 국가어항으로 진도읍에서 약 40분 정도 소요된다. 국가어항의 지정 요건은 현지 어선의 수가 80척 이상이고, 그 합계 총 톤수가 200톤 이상인 항구·포구이다. 외래 어선이 연간 100척 이상 이용할 것으로 예상되는 항포·포구 및 도서에 위치하여 기상 악화 시 대피항의 기능을 해야 한다. 어획고는 연간 1,000톤 이상이어야 한다. 진도군 임회면 남서쪽 끝에 위치하여 황해와 남해의 중간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황해와 남해에서 조업하는 어선들의 입항항이 된다. 진도군 조도면 해역에 매일 40여 척이 출어해 1척에 200kg가량을 잡아 하루 위판량이 3t~5t에 달한다. 냉수대가 형성돼 플랑크톤 등 먹이가 풍부한 진도 조도면 해역은 갯바위 모래층으로 꽃게 서식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또 연중 적조가 발생하지 않는 청정해역으로 다른 지역보다 꽃게의 상품성이 좋아 관광객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 곳이다. 서망항에는 싱싱한 횟감과 수산물을 살 수 있는 수산물 시장과 맛집들도 있다.
첫댓글 어려운 진도지맥 무사히 잘 마치셨네요.
희여산 오름은 순전히 바위길로 기여서 올라갔고 내려갈 때도 벌벌거리며 내려갔네요.
퐁라라 운영자님은 바위를 좋아하니 신이 났겠지만 나는 바짝 쫄았었습니다.
그리고 대파밭이 어찌나 넓은지 그것도 볼만 하더군요.
날머리에서 장마철에 협곡으로 쏟아져 내려가는 듯한 바닷물이 무섭기도 했습니다.
진도지맥 졸업 축하합니다.
부뜰이운영자님!
우선 형수님과 162지맥 무사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저도 황학지맥 공부는 이미 마쳤고 그리 갔더라면 별하님을 만날뻔 봤네요. 하지만 겨울 아니면 어렵다는 진도를 가게 되었습니다. 의당 부뜰이부부운영자님 졸업산행에 참석해야 했는데 사정이 빗나가게 되어 죄송한 마음입니다.
저는 162지맥을 다 하게될지 장담이 어려워요.
체력이 있다고 가능한 것도 아니고, 의지만으로도 가능한게 아니네요. 주변이 평안해야 합니다. 단기간에 소진하고픈 생각도 없고, 우선은 클라이밍이 먼저입니다. 지맥은 가끔 나가다가 정년 이후 집중해도 늦지 않을것 같네요.
진도지맥 넘 멋지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3월에 변산 계획이 있는데 진도나 변산이나 아껴서 해야하는 아름답고 멋진 지맥인데 연거푸 해도 될련지 모르겠네요. 나이가 있어선지 이틀을 쉬다가 오늘 첨 운동을 다녀왔습니다. 그간 노고 많으셨고 봄모임에 뵙겠습니다.^^
퐁라라운영자님의 진도지맥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60km, 46시간에 걸쳐 삼일 동안의 긴 여정을 마무리하셨네요.
주야없이 진행한 섬 주변의 남녁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광경입니다.
해남쪽 산줄기를 비롯한 명소가 시야에 압권입니다.
상처로 점철된 여정속에 한줄기 마무리하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멋진 여정담을 즐감합니다.^^
네, 방장님!
진도지맥을 어떻게 해야할지 다각도로 고심했습니다.
공불 할수록 변수에 묘수가 나오더군요.
이틀에 30Km를 할 수도 있지만 그 경우
목포역에서 기찰 타야되는데 시간에 데기가 만만치 않았고요.
최대한 가볍게 꾸렸지만 그래도 무게가 있는데 끝날 때까지 땀을 한방울도 흘리지 않았어요.
은근 봄소식을 전하는 야생화를 기대했는데 아직은 아니었구요.
끝내고 보니 효율적으로 잘 해낸듯 싶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