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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78년에 기장여신도회 전국연합회에서 생명문화창조운동을 시작할 때 교육총무로 일하면서 생태운동에 관심하게 되었다. 그때 대기오염의 주범으로 자동차를 꼽으면서 자가용을 Tm지 않기로 한 것을 지금까지 실천하고 있다. 2002년 1월에 한겨레 신문에 ‘음식물 쓰레기로 연 15조원이 썩는다’는 기사가 나왔었다. 15조원이라면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액이다. 상암동의 올림픽 경기장을 30개 지을 수 있는 돈이라고 한다. 우리나라가 보리고개를 넘은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밥알 하나도 떨어뜨리면 집어서 먹어야하는 줄 알고 자란 우리세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음식을 쓰레기로 버리다니. 황당한 내 마음을 당시 기고하고 있던 새가정 잡지 여성신학 칼럼에 썼다. 기독교환경운동 연대의 유미호 실장이 그 글을 보고 생명밥상위원회의 위원이 되어달라고 연락이 왔다. 65세에야 목사안수를 받고 여성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나로서는 다른데 눈 돌릴 틈이 없었다. 그러나 나의 관심사인 생태운동이니 달리 거절할 수도 없었다. 위원회를 시작하고 우선 생명밥상을 먹어보기로 하고 우리 집에서 차리겠다고 자원했다.
우리 집에서 먹는 대로 간소한 밥상을 차리고 각자 먹을 만큼 큰 접시에 덜어서 먹게 하였다. 불교에서 하는 바루 공양처럼 음식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접시를 깨끗하게 비우자는데 이미 합의하였고 음식 가지 수도 줄이자고 하였으니 처음 만난 위원들이었지만 별 부담 없이 밥상을 차릴 수 있었다. 위원들은 만남을 거듭할수록 마음들이 맞아서 생명밥상운동을 전개하는데 열심이었다. 여성교회는 일요일 오후 3시에 모이니 예배 후에 친교하며 식사하기 좋은 시간이 된다. 다른 데서 음식을 사오던 것을 내가 밥을 짓기 시작했다. 교인도 많지 않으니 집에서 반찬 몇 가지 준비해 가면 그리도 맛있게 잘 먹는다. 시어머니 모시고 직장가진 젊은 엄마가 “남이 해주는 밥이 이리 맛있다”고 먹을 때는 정말 보람을 느끼게 된다. 여성교회의 수요마당을 우리 집에서 모이기로 했다. 수요일 낮에 모여서 성경공부를 하고 생명밥상을 나누려는 것이다. 밥을 먹기 전에 생명밥상 위원회의 생명밥상 노래를 불렀다. ‘생명밥상을 차리자’는 운동을 시작한 기독교 환경운동여대에서는 이현주목사의 '밥먹는 자식에게' 라는 글을 운동의 주제가로 만들어서 포스타에 실었다.
천천히 씹어서 공손히 삼켜라봄부터 여름 지나 가을까지
그 여러 날들을 비바람 땡볕 속에 익어온 쌀인데
그렇게 허겁지겁 먹어서야 어느 틈에 고마운 마음이 들겠느냐
사람이 고마운 줄을 모르면 그게 사람이 아닌 거여.
주님을 모시듯 밥을 먹어라
햇빛과 물과 바람 농부까지 그 많은 생명 신령하게 깃들어 있는 밥인데
그렇게 남기고 버려 버리면 생명이신 주님을 버리는 것이니라
사람이 소중히 밥을 대하면 그게 예수 잘 믿는 거여
밥되신 예수처럼 밥되어 살거라
쌀 보리 밀 옥수수 물고기에 온 만물들은
자신을 제단 위에 밥으로 드리는데
그렇게 사람들만 밥되지 않으면 어느 누가 생명 세상을 열겠느냐
사람은 생명의 밥을 먹고 밥이 되어 사는 거여
(2 3절은 다른 목사님이 쓰신 것이다)
참으로 자식을 기르는 부모의 정이 물신 묻어나는 노래이다. 기독교인들이야 의례 밥상 앞에 앉으면 먼저 머리 숙여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고 먹게 되니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러면서 저런 노래를 함께 부르며 그 뜻을 다시 곱씹어 보면 밥이 더 고마워지는 것이다. 우리 어린이들이 부모님과 함께 앉아 밥을 먹으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부모님께 감사하고, 농부에게 감사하고 땅에, 햇볕에, 바람에, 비에, 벌레에 다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먹으면 그 아니 천국이겠는가?
또 여성교회의 ‘살리미의 기도’를 드린다. 이 기도는 ‘주의 기도’를 내가 여성신학의 입장에서 초안한 것을 여성교회 교인들이 함께 공동작업한 것이다.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느님,
당신의 이름은 거룩하십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부모를 경외하며 이웃과 바르게 살도록
명하신 당신은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맨 처음에 지으신 세상을 보고 참 좋다고 하신 하느님,
만물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그 나라가 오늘 이 땅에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을 당신의 모습으로 평등하게 지으신 하느님,
저희가 청지기 일을 잘 감당하여 자연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신 당신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겠습니다.
오늘도 하루의 양식을 허락하신 것을 감사하며,
우리 몸에 필요한 음식을 소중히 여겨 올바로 먹으며
남겨서 버리지 않겠습니다.
하루의 양식보다 더 많이 쌓아두어서
다른 사람을 배고프게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하느님이 명하신 희년법 정신에 따라
우리에게 빚진 사람의 빚을 탕감해주고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함으로써
미움과 원한을 풀고 자유로이 살겠습니다.
예수께서 세 가지 시험을 겪으시고 이겨내신 것처럼
우리도 수많은 유혹을 이겨내도록 도와주십시오.
이 세상의 불의와 죄악에서 저희를 구원하여
당신의 빛 안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
사랑과 정의와 평화는 하느님께 영원히 있습니다.
생명밥상운동을 전개하려니 강연도 하게 되고 생명밥상을 해야 되는 성서적인 조명이 필요하게 되었다. 다음은 기독교인이 생명밥상을 실천해야 하는 신앙의 기본이다.
1) 일용할 양식과 하늘의 만나.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는 저희에게 기도를 가르치면서 하루의 양식을 간구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매일 하루의 양식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예수께서는 하루의 양식을 구하고, 무엇을 먹을까를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 가르침은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하늘의 만나와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출애굽기 16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이짚트를 떠나 광야를 헤맬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먹이기 위해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셨다는 기록이 있다. 하루치의 양식만을 거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도 사람들은 더 거두어다 쌓아두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면 다 썩어서 먹을 수 없었다. 하루하루 바로 거두어서 싱싱한 것을 먹어야 건강에 좋다는 오늘의 상식과도 상통한다.
호랑이도 배가 부르면 사냥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만이 음식을 쌓아두느라고 기계를 만들고, 화학 약품을 개발하고, 전기를 쓰고, 야단법석인 것이다. 내가 필요한 만큼만 거두고 나면 나머지는 자연으로 돌아가서 다음의 생명을 살리는데 쓰일 것이다. 나의 조그만 옥상 밭에서 나는 이 원리를 배운다. 이 세상에 있는 어느 것 하나도, 쓸데없이 존재하지는 않는 것 같다. 풀 한 포기라도 다 할 일이 있고 필요한 존재로 여겨진다. 식물은 우리가 먹을 만큼만 취하고 나머지는 그냥 놔두면 다른 사람이나 동물들이 먹으면 된다. 또 그냥 놔두어서 썩으면 자연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쓰레기가 되지 않는다. 과일 껍질이나 채소를 다듬은 찌꺼기는 그대로 땅에 묻으면 다 썩어서, 미생물들이 다 먹어서 분해하기 때문에 다 생명을 위해 쓰인다. 좋은 비료가 되는 것이다. 문제는 사람이 먹으려고 만든 음식을 남겨서 버리는 것이다. 음식쓰레기를 이용하려고 비료를 만들었더니 소금 끼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비료로도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
2) 하나님은 풀과 열매를 먹이로 주셨다.
창세기 1장29절에 보면, 창조를 마치신 하나님께서,
“이제 내가 너희에게 온 땅 위에서 낟알을 내는 풀과 씨가 든 과일 나무를 준다. 너희는 이것을 양식으로 삼아라. 모든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도 온갖 푸른 풀을 먹이로 준다.”
고 말씀하신다.
이때는 인간이 타락하기 전 창조 질서에 속한다. 창조질서는 하나님이 창조한 모습대로 있는 상태입니다. 창세기 3장 이후는 타락 이후의 인간의 모습이고 그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의 역사이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니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예수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도록 사람이 살아야할 길을 보여주셨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평등해야 사람이 창조된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사람과 자연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것은 과일과 곡물과 채소를 먹는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채식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창조질서를 지키는 것이다. 물론 노아의 방주 이후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육식을 허락하셨다는 기사가 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타락이후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그보다 훨씬 전의 창조 질서를 회복해야 하는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은 것이다.
3) 창조회복을 보는 이사야의 꿈
이사야서 11장에 보면 바로 창조질서의 회복을 보는 이사야 선지의 말이 나온다.
“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수 염소와 함께 뒹굴고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니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친구가 되어 그 새끼들이 함께 뒹굴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리라“
이사야선지는 동물들이 풀을 뜯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창조 회복의 꿈을 보았을 것이다. 동물이 동물을 먹이로 하지 않는, 사자가 여물을 먹는 세상을 보았다. 강자와 약자가 함께 어울려 풀을 뜯는 평화를 꿈꾸는 이사야선지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창조 회복의 세상을 보며 하나님의 뜻을 선포한 것이다. 약육강식의 경쟁질서가 아니고 강자와 약자가 어울려 조화를 이루며 사는 평화로운 나라이다. 약자는 강자의 먹이가 되는 살육의 지옥이 아니라 약자와 강자가 함께 어울려 사는 하늘의 질서이다.
요즈음 야채와 과일을 많이 먹어야 암을 예방할 수 있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육식으로 인한 성인병과 이상비만의 문제도 있다. 육식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기운이 넘쳐나서 더 폭력적이라는 말도 있다. 우리가 육식을 하면 채식을 하는 것보다 3배나 많은 양식을 소비한다고 한다. 사람이 고기를 먹기 위해서 3배나 많은 식량자원을 낭비하는 것이다. 소의 새김질이 많은 탄수화물을 발생한다는 말도 있다. 광우병 이후 소에게 동물사료를 먹인 사실이 드러나고 동물을 밀집해서 사육하는데서 오는 생태문제가 많은 것을 개닫고 채식으로 전환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채식을 한지 오래되었다.
4) 음식을 조금도 버리지 말라.
요한복음 6:1-13에 보면 예수를 따르는 수 천 명의 음식을 걱정할 때 한 어린 아이는 자기의 도시락을 내놓았다. 밥을 나누어 먹는 모범이 보인다. 그 음식을 가지고 예수께서 감사의 기도를 올리셨다. 그리고 모두 다 배부를 때까지 나누어 먹이신다. 어느 한 구석에도 배고픈 사람이 없다. 모든 사람이 골고루 나누어 먹고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나서 남은 음식을 조금도 버리지 말라는 예수님의 분부가 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가슴에 새겨두어야 하겠다. 남은 조각을 조금도 버리지 말고 다 모아들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그 동안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의 무리를 먹이고도 남은 음식이 12광주리가 되었다는 기적 이야기에만 몰두하였다. 그러나 “남은 조각을 조금도 버리지 말고 모두 모아들이라”는 말씀에는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었다.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을 가슴에 새겨두어야 하겠다. 먹고 남은 음식을 조금도 버리지 말고 다 모아들이라는 예수의 말씀이다. 우리는 집에서나 음식점에서 남은 음식을 다 내버리는데도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보고 있다. 지금도 예수께서는 남은 음식을 조금도 버리지 말고 다 모아들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바탕에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믿는 크리스천은 살림이로 살아야 한다. ‘살림이‘는 살리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여성신학을 배우게 되면서 여성과 자연이 가부장문화의 횡포에 시달려온 것을 인식하며 자연을 살리는 창조의 보전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할, 청지기의 신앙이며 여성신학을 사는 길이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나는 아파트에서도 집안에 화분을 많이 길러서 공기를 정화하고 베란다에 흙을 넣어 화초를 심고 음식 찌꺼기를 묻어서 좋은 흙을 만들어서 화학 비료나 살충제를 하나도 쓰지 않았었다. 지금은 서울의 한 복판인 창덕궁 옆의 한옥에서 살고 있다. 마당의 시멘트 부분을 부수어 내고 화초와 나무를 심으면서 25년이 지나니 마당 가득히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우리 집 문간채는 길가에 있어서 가게가 있고 그 위는 시멘트 슬러브 인데 거기에 흙을 갖다 얹어서 옥상 밭을 만들었다. 거기다 음식지꺼기와 EM을 섞어서 퇴비를 만든다. 우리 집에서는 한 번도 음식물 쓰레기가 나간 일이 없다. 쓰레기 수거하는 사람이 이 집은 왜 쓰레기가 없느냐고 화를 낸 일이 있다. 7평정도 되는 데에다가 가장자리에 꽃나무를 심고 가운데는 채소를 심어 먹는다. 거기를 아침저녁으로 올라 다니며 자라는 채소와 나무들을 보면서 창조의 오묘함을 배우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사람들이 와서 보고 이 많은 일을 어떻게 하느냐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 밭에다 내가 드리는 시간과 에너지보다 훨씬 더 많은 기쁨과 즐거움을 거기서 받는다. 밖에서 힘든 일이 있어도 집에 와서 그 풀들과 놀면 다 풀어집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창조의 보전에 동참하는 신학을 사는 것이 나로 하여금 자연과 더불어 평안을 누리게 한다. 얼마 전에 TV에서 일본과 독일의 생태 마을을 보여주면서 지붕 위에 채소밭을 가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방영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도 있다는 것이 참 반가웠다. 또 큐바에서는 도시에서 작은 땅들을 이용해서 도시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그래서 큐바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우리집은 마다 가득 나무와 풀이 가득하니 우리집에 들어와 보고는 공기가 다르다는 말을 한다. 근래에는 우리나라에도 옥상 밭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 어서 다른 사람들도 저의 이런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얼마 전에 생명밥상 강의를 하러 가서 생명문화 노래를 불렀다. 1970년대 말에 기장여신도회 전국연합회에서 생명문화 켐페인을 위한 노래를 공모했을 때 내가 응모해서 입상했던 것이다.
웬 말인가 웬 말인가 죽음 몰려온다네
물이 썩고 공기 썩어 땅이 모두 죽어가네
안 되겠네 안 되겠네 어서 모두 깨어나세
맛있다고 더 큰 것만 마구 먹어대더니
농약찌끼 방부제로 병 덩이가 되었네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우리 몸을 살리세
너도 많이 나도 많이 모두 많이 갖자고
더 만들어 더 쓰더니 자원이 바닥 났네
내버리세 내버리세 미치광이 소비성
내 말 듣소 내 말 듣소 내 말좀 들어보소
예수님이 생명의 길 몸소 보여 주셨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우리 사는 길일세
나도 조금 너도 조금 조금씩만 쓰며는
갖지 못한 이웃이랑 함께 나눠 쓰겠네
작은 것이 아름다운 것 왜 진작 몰랐나
나무 심세 나무 심세 나무를 심세
금수강산 방방곡곡 푸른 낙원이 되네
백두에서 한라까지 에덴이 멀잖겠네
지구 위의 사람들아 생명의 길 가세
사람 보호 자연 보호 청지기가 되세
우주 만물 평화로운 하늘나라 오네
하나님은 말구유에 어린 예수로 오셨는데
사람들은 고대광실 높은 것만 바라네
십자가의 죽음 뒤에 부활의 아침 오네.
밀양아리랑 곡에 맞추어서 셋째 줄에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를 곁들여 부르면서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 노래가 유효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첫댓글 ㅁㅁㅁㅁ 선배님 ... 잘 읽었습니다
젊었을적에는 제법 선배님 흉내를 내느라고 소리도 낸것 같은데 어느새 이렇게 희미해진 저를 봅니다
그래도 마음 뿌리 한편에 조금은 자라나고 있는 싹을 눈여겨 보는 나이가 되었지요
원래 천성이 자연을 좋아해서 가평에 살면서도 ... 선배님 처럼 그런 개척자 정신으로 열심히 쓰레기도 줄이기를 노력하며 잘 살지 못한것 같아요
흙을 가꾸며 맡아보는 흙냄새가 그저 좋아서 옥상의 선배님네 텃밭도 낭만처럼 그리워 하면서도 정작 선배님의 그 날카로운 실천의 모범과는 거리가 먼 저의 부족함을 고백합니다 마는 ...자연이 망가지면 정말 모든것이 끝이니까요
선배님 , 곧 뵈어요
참 대단하신 안선배님~~
정말 실천이 따르는 대단한 선배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