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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遺産踏査 驪州地域(4-2): 驪州 英陵과 寧陵-江漢祠
驪州 英陵과 寧陵 -사적 제195호-
英陵은 조선 제4代王 世宗(재위 1418∼1450)과 妃 昭憲王后 沈氏(1395∼1446)의 무덤이다.
※영릉∙녕릉→여주 英陵과 寧陵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1.07.28)
世宗 28년(1446) 昭憲王后가 昇遐하여 서울 瑞草區 內谷洞 大母山 獻陵 서쪽 산줄기에 雙室
무덤인 英陵을 만들어 동쪽 방은 왕후의 무덤으로, 서쪽 방은 왕이 살아 있을 때 미리 마련한
무덤으로, 世宗이 昇遐하자 文宗 즉위년(1450)에 합장하여 朝鮮王陵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서로 다른 房을 갖춘 合葬무덤이 되었다.
世祖 이후 英陵자리가 좋지 않다고 무덤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徐居正이 반대하여,
옮기지 못하다가 睿宗 1년(1469) 驪州로 移葬하였다.
무덤 주변에는 12칸의 欄干石을 둘렀으며, 무덤을 옮길 때 전에 있던 床石, 長明燈, 望柱石,
神道碑 등 石物은 그 자리에 묻었으나, 1974년에 발굴하여 서울 동대문구 淸凉里洞
世宗大王記念館으로 移建했으며 서울 世宗 英陵 神道碑는 2002년 서울시유형문화재
제42-1호로 지정되었다가 2013년 보물 제1805호로 昇格 지정되었다.
앞면의 碑銘은 學易齋 鄭麟趾가, 뒷면의 碑陰記는 拙齋 金銚가 지었으며, 글씨는
安平大君 李瑢이 썼다. (*拙: 옹졸할 졸 *銚: 가래 조 *瑢: 패옥 소리 용)
寧陵은 조선 제17대 孝宗(1619~1659, 재위 1649~1659)과 仁宣王后 德水 張氏 의 능으로,
王과 王妃의 陵이 같은 언덕의 위아래에 조성된 同原上下封陵이다.
효종왕릉은 1659년 京畿 楊州 健元陵(현 九里市 東九陵)의 서쪽에 조성하고, 陵號를
翼陵이라고 했으며, 그 앞에 齋室을 건립하였으나 1673년 石物에 틈이 생겨 현 위치로
옮겨오면서 능호를 寧陵으로 고치고 재실도 함께 移建하였다.
驪州 孝宗 寧陵 齋室 -보물 제1532호-
齋室은 祭官의 휴식, 祭需장만 및 祭器 보관 등의 제사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陵의 부속건물이다.
재실은 齋房, 安香廳, 祭器庫, 典祀廳, 행랑채(대문 포함), 우물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조선 왕릉 재실의 기본형태가 잘 남아 있고, 空間構成과 배치가 잘 되어 있다.
또한 경내의 齋享과 관계 있는 향나무와 느티나무, 회양목(천연기념물 제459호) 등의 古木도
함께 어우러져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寧陵 齋室은 1659년 경기도 楊州郡(현 九里市)에 陵을 조성할 때 인근에 건립하였으나
1673년 寧陵을 遷陵하면서 현 위치로 移建하였다
朝鮮王陵의 齋室은 日帝强占期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滅失되어 그 일부만 남아있으나
寧陵 齋室은 조선시대 왕릉재실의 기본형태가 가장 잘 보존되어있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學術的∙歷史的 價値가 높이 평가되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03) 驪州 孝宗 寧陵 齋室 全景
(04) 驪州 孝宗 寧陵齋室 行廊채
(05) 행랑채 附屬 棟
(06) 齋室
(07) 祭器庫
(08) 安香廳
나라의 제사에 쓰는 香을 안치하는 곳.
(09) 우물
(10) 驪州 孝宗大王陵(寧陵) 淮陽木 -천연기념물 제459호-
이 회양목은 잎이 두껍고 타원형이며 꽃은 4∼5월에 피고 열매는 6∼7월에 갈색으로 익는
사철 푸른 나무로, 慶北 北部, 忠北, 江原道, 黃海道 지방의 석회암 지대에 주로 自生한다.
원래 회양목은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로 이와 같이 齋室 내에 크게 자란 나무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생물학적인 가치가 큰 老巨樹일 뿐만 아니라 1673년에 조성한
寧陵 재실에서 300여년 동안 자라온 나무로서 그 유래 및 역사성이 매우 깊다.
(11) 寧陵으로 가는 숲길, ‘王의 숲길’
거리 약 700m의 ‘王의 숲길’은 英陵과 寧陵을 연결하는 길로 朝鮮王朝實錄에 1688년 肅宗,
1730년 英祖, 1779년 正祖임금이 직접 행차하여 寧陵을 먼저 參拜하고 英陵을 참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驪州 孝宗 寧陵
(12) 寧陵 홍살문[紅箭門]과 參道-丁字閣 (*箭: 화살 전)
홍살문은 神聖한 곳을 알리는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으로 紅箭門∙紅門이라고도 하며,
화살모양의 살대는 法度의 곧고 바름을 의미하며, 나라의 威嚴을 상징한다.
陵域의 들머리에는 홍살문이 서있고 祭官들이 찾을 때 절하는 拜位가 조성되어 있으며,
홍살문에 도착한 祭官은 拜位에서 절하고 돌길인 參道를 따라 丁字閣에 이르는데 가운데
높은 길은 神道로 先王의 魂靈만 출입할 수 있고 參道 오른쪽의 약간 낮은 부분은 御道로
임금이 출입한다.
(13) 守僕房 (*僕: 종 복)
王陵을 지키는 守僕이 지내던 곳으로 丁字閣 동쪽에 지었으며, 터만 남아있던 것을 발굴하여
1977년 원형대로 復元하였다.
(14) 수라간(水剌間) (*剌: 수라 라)
山陵祭禮 때 제사음식을 데우고 준비하던 곳으로, 터만 남아있던 것을 발굴 조사하여
2006년에 복원하였다.
(15) 丁字閣
祭享을 올리는 곳으로 皇帝는 ‘日’字 모양으로 寢殿을 조성하고, 王은 ‘丁’字 모양의
丁字閣을 조성한다.
정자각에 올라갈 때는 동쪽에서, 내려올 때는 서쪽으로 내려와 이를 東入西出이라고 한다.
丁字閣 내부에는 祭床, 香床, 祝床이 있다.
(16) 丁字閣 계단
정자각 동쪽에 있으며 난간이 없는 御道와 난간이 있는 神道로 구성되었다.
(17) 예감(瘞坎, 일명 望燎位) (*瘞: 묻을 예 *坎: 구덩이 감 *燎: 횃불 료)
丁字閣 뒤 서쪽에 있는 四角形 石函으로 제사가 끝난 뒤 撤床(제사음식을 치움)하면서
祝文을 태워 묻는 곳이다. (*撤: 거둘 철)
(18) 寧陵 碑閣
(19) 寧陵 碑
본래 京畿 楊州(현 九里 東九陵)에 있던 孝宗大王陵을 顯宗 14년(1673)
이곳으로 遷葬한 사실과 그 후(1674년) 仁宣王后의 陵을 앞쪽에 따로
모신 것을 기록한 石碑로 碑閣과 함께 그 당시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世宗大王陵(英陵)이 合葬陵인데 비해 왕과 왕비를 따로 모셨으며,
寧陵은 孝宗王陵을 상단 좌측에 ,仁宣王后陵은 하단 우측에 모신
同原上下封陵이다.
(20) 寧陵 陵寢과 沙草地
寧陵은 孝宗과 仁宣王后의 陵이 같은 언덕의 위아래에 조성된 同原上下封陵이다.
*沙草地는 丁字閣 뒤에서 陵寢 下階에 이르는 잔디가 깔려있는 언덕으로 風水에서
땅의 生氣를 모으는 岡의 역할을 한다. (*岡: 산등성이 강)
(21) 孝宗王陵
陵에 갖추어진 石物은 石羊∙石虎 각 2쌍, 魂遊石 1좌, 望柱石 1쌍, 文人石∙石馬 각 1쌍,
長明燈 1좌, 武人石∙石馬 각 1쌍이다. 후면과 좌우에는 曲墻을 설치하였다.
*孝宗은 仁祖의 둘째 아들로 7세 때 鳳林大君에 봉해졌다. 1636년 丙子胡亂으로 江華로
피신했으나 仁祖가 淸 太宗에게 항복하자 昭顯世子와 함께 淸나라 瀋陽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8년 만에 돌아와 1649년 제17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孝宗은 大同法 반포, 貨幣改革 등으로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曆法 개정, <國朝寶鑑>,
<農家集成> 등을 간행하여 국가의 紀綱을 바로잡고 농업생산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무엇보다 北伐政策을 수립하고, 軍備를 改編하고 군사훈련을 강화했으나 淸나라에 당한
한을 가슴에 묻고 北伐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재위 10년 만에 41세로 昌德宮 大造殿에서
昇遐하였으며, 不運했던 시대의 不幸했던 왕이다.
(22) 孝宗王陵 陵寢(封墳)
조선왕조 왕의 무덤배치에 하나의 轉換期가 된 형태로 陵寢에 屛風石을 세우지 않았으며,
왕릉 바깥쪽으로 나지막한 담을 쌓았고, 봉분을 감싸고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였다.
(*屛: 병풍 병)
陵寢 앞에는 長明燈과 魂遊石이 있다.
*屛風石: 陵寢(封墳)을 보호하기 위하여 봉분 밑부분을 두르는 12개의 돌(十二支神像)을
해당 方位에 맞게 陽刻하였다.
*長明燈: 王陵의 長生發福을 기원하는 뜻으로 세웠다.
*魂遊石: 일반인의 묘에는 祭物을 올려놓는 床石이나 王陵은 丁字閣에서 祭를 올리므로
魂靈이 앉아 노는 곳이므로 魂遊石이라고 한다.
(23) 孝宗 妃 仁宣王后陵
孝宗王陵과 같은 언덕의 아래에 조성된 同原上下封陵이다.
長明燈, 魂遊石, 欄干石, 望柱石 등은 孝宗陵과 같으나 뒤에 孝宗王陵이 있어 曲墻이 없다.
*欄干石: 陵寢(封墳) 주위를 보호하기 위하여 둘레에 설치한 돌난간으로, 제일 높은
기둥을 石柱, 석주를 가로지르는 橫石柱를 竹石, 죽석의 중간을 받쳐주는
작은 기둥을 童子石柱라고 한다.
*望柱石: 陵寢 좌우 양측에 1柱씩 세우는 기둥으로 肉身에서 분리된 魂靈이 멀리서
능침을 찾게 하는 標識라는 說과 陰陽의 調和를 이루게 한다는 설,
王陵의 風水的 生氣가 흩어지지 않게 한다는 說이 있다.
(24) 孝宗 妃 仁宣王后陵 石羊
石羊은 死者의 冥福을 빌며 邪惡한 것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설치한다.
(25) 孝宗 妃 仁宣王后陵 石虎
石虎는 陵寢을 지키는 호랑이모양의 守護神으로 石羊과 함께 陵寢을 守護하는 의미로
밖을 지켜보는 모습으로 설치한다.
英陵(世宗大王陵)
공사 중으로 丁字閣에서부터 英陵을 볼 수 없었으며 陵寢 부분은 출입금지로 능침을
자세하게 볼 수 없었던 것이 조금 아쉽다.
(29) 沙草地 옆에서 陵寢으로 올라가는 계단
(30) 英陵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陵寢에 서로 다른 房을 갖추고 있는 合葬무덤이다.
魂遊石 2기가 있어 合葬陵임을 알 수 있다.
*合葬陵: 王과 王妃를 하나의 陵寢 아래에 함께 모신 陵
(31) 英陵 陵寢
陵寢에는 역시 屛風石이 없고 欄干石만 있다. (*欄: 난간 난)
앞에 있는 魂遊石의 鼓石이 잘 보인다. (*鼓: 북 고)
*鼓石: 魂遊石의 받침돌로 북[鼓]을 닮았다고 鼓石이라고 하며, 邪惡한 것을 경계하는
의미로 귀신의 얼굴 모양[鬼面]을 새기기도 한다.
(32) 長明燈
왕릉의 長生發福을 祈願하는 뜻으로 세웠다. 조선왕조 최초인 貞陵의
장명등은 4각지붕이었으나 조선초기 8각지붕으로 바뀌었다가 제19대
肅宗의 陵(明陵, 高陽 西五陵 사적 198호)부터 다시 4각지붕으로 바뀌었다.
(33) 武人石
下階에 있는 武人石은 石馬를 대동하고 있으며 왕을 호위하고
왕이 위험에 처했을 때 신속하게 대처하기 위하여 長劍을 짚고
威嚴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34) 文人石
中階에 있는 文人石은 언제든지 王命에 복종한다는 자세로 양손으로 홀
을 쥐고 서 있다.
*홀(笏): 조선 시대에, 벼슬아치가 임금을 만날 때에 손에 쥐던 물건.
(*笏: 홀 홀)
(35) 曲墻 (*墻: 담 장)
王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左∙右∙後 三面에 둘러놓은 담장이다.
(37) 英陵에서 보이는 案山
朝鮮王朝의 陵制를 가장 잘 나타낸 陵의 하나로 風水地理說에 따라 主山을 뒤로 하고
중허리에 封墳을 이룩하였으며, 좌우에는 左靑龍과 右白虎를 이루고 앞쪽(남쪽)으로는
멀리 案山인 北城山(해발 262m)을 바라보고 있다.
*案山: 風水地理에서, 집터나 묏자리의 맞은편에 있는 산
(38) 英陵 碑閣
(39) 英陵 碑
世宗大王陵은 원래 獻陵(서울 內谷洞) 서쪽 산줄기에 있었으나
睿宗 1년(1469) 이곳으로 遷葬했으며, 王妃 昭憲王后와 合葬하였다.
英陵碑는 世宗大王과 昭憲王后의 略歷, 英陵으로 移葬한 사실들을 기록한
비석으로 英祖 21년(1745) 碑閣과 함께 建立하였다.
碑文에는 ‘朝鮮國 世宗大王 英陵 昭憲王后 祔左(조선국 세종대왕 영릉
소헌왕후 부좌)’라고 새겨 王妃가 세종대왕의 왼쪽에 묻혔다는 것을
기록하였다.
*祔左: 夫婦를 合葬할 때 아내를 남편의 왼쪽에 묻음 (*祔: 합사할 부)
(40) 丁字閣, 뒤에 水剌間이 보인다. (*剌: 수라 라)
水剌間은 山陵祭禮 때 제사음식을 데우고 준비하던 곳.
(41) 守僕房
陵을 지키는 守僕이 지내던 곳.
江漢祠 -경기도유형문화재 제20호-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정치가인 尤庵 宋時烈의 뜻을 기리고 제사 지내기 위해 正祖 9년(1785)
왕이 金亮行에게 사당을 짓게 하고 宋時烈에 대한 존칭인 ‘大老’의 명칭을 붙여 사당 이름을
‘大老祠’라고 했으며, 高宗 10년(1873) 江漢祠라고 개칭하였다.
(*尤: 더욱 우 *亮: 밝을 량/양 *祠: 사당 사)
건물은 講堂과 祠廟, 관리인이 거주하는 부속건물로 이루어졌으며, 비교적 간단한 규모이나
배치가 특이한데, 출입문인 長隣門이 서쪽으로 나있고 祠廟도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寧陵(孝宗의 陵)을 바라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高宗 8년(1871) 興宣大院君이 전국의 書院을 撤廢할 때 宋時烈을 모시던 44개의 書院이
모두 헐렸으나 오직 大老祠만 江漢祠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남게 되었다.
(01) 內三門인 長隣門 (*隣: 이웃 린)
尤庵 宋時烈의 影幀을 봉안한 祠堂의 장린문은 祭享이 있을 때만 개방하고 평상시에는
굳게 닫혀있다. (*幀: 그림족자 정)
(02) 大老祠(江漢祠)
앞면 3칸, 옆면 2칸, 면적 14평의 맞배지붕건물로, 大老祠 편액은 대제학 夢梧 金鍾秀의
글씨이다. (*梧: 오동나무 오)
(03) 大老書院
講堂으로 앞면 5칸, 옆면 3칸 면적 30평의 팔작지붕건물이다.
(04) <大老書院>, <瞻栢堂> 편액 (*瞻: 볼 첨 *栢: 측백 백)
大老書院 정면에 걸어 놓은 편액이다.
(05) 江漢祠 편액 - 桓齋 朴珪壽 글씨 (*桓: 굳셀 환 *珪: 서옥 규)
熱河日記를 쓴 燕巖 朴趾源의 손자로 개화파를 이끌고 平安道 觀察使를 지낸 桓齋 朴珪壽가
興宣大院君의 명을 받아 쓴 <江漢祠> 편액으로 大老書院 마루에 걸려 있다.
*江漢과 秋陽은 [孟子] <滕文公上>에 曾子가 孔子의 德望을 칭송하면서 ‘江漢의 물에
깨끗이 세탁해서 秋陽에 말리면 그보다 더 깨끗할 수 없는 것과 같다. [江漢以濯之
秋陽以暴之 皜皜乎不可尙已(강한이탁지 추양이폭지 호호호불가상이)]’라고 한 글에서
借用한 것이라고 한다. 江漢은 중국의 長江(揚子江)과 漢水를 가리킨다.
(*滕: 물 솟을 등 *濯: 씻을 탁 *皜: 흴 호)
*秋陽: 가을의 광선이 강한 태양. *漢水: 長江의 최대 支流
(06) 秋陽齋
江漢祠의 중앙에 있는 건물로 漢文과 禮節을 배우는 곳이라고 한다.
(07) 秋陽齋 정면 편액
一中 金忠顯 글씨 <秋陽齋> 편액 아래로 띠살문과 柱聯이 보인다.
(08) 大老祠 碑閣
尤庵 宋時烈(1607∼1689)을 기념하기 위하여 1787년(정조 11)에 세운 것이다.
大老祠碑는 네모 반듯한 臺石 위에 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 모양의 갓돌을 얹었으며,
대석과 갓돌은 화강암, 비신은 대리석이다.
전체높이 3.77m, 비의 높이 2.24m, 너비와 두께는 각각 66㎝이다.
(09) 大老祠 碑 -경기유형문화재 제84호-
碑 앞면에는 ‘大老祠碑名幷書(대로사비명병서)’라는 篆書 제목이 있고,
뒷면에는 正祖의 친필로 된 碑文과 御製御筆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끝에
‘皇明崇禎紀元後三丁未冬十一月 日立(황명숭정기원후삼정미동십일월
일립)’이라는 건립 年紀가 있어, 이 비를 1787년 11월(음력)에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幷: 아우를 병 *篆: 전자 전 *禎: 상서로울 정)
-景福34 제72차 文化遺産踏査 驪州地域(4-3): 鳳尾山 神勒寺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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