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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몽규 宋夢奎〔1917 ~ 1945〕】 “몽규의 뼈 한 점이라도 이 왜놈들의 땅에 남길 수 있겠느냐!"
한국의 독립운동가. 윤동주의 사촌이자 문인으로 활동했다. 윤동주의 고종사촌 형제로서 어린 시절 같이 자라고 학업과 유학을 함께 했으며 윤동주와 함께 잡혀가 똑같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아명은 송한범(宋韓範). 문호는 문해(문학의 바다). 필명으로 몽규(夢奎)를 한국어로 풀어쓴 "꿈별" 등이 있다. 본명은 그의 어머니가 꿈에서 큰 별을 보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가명으로는 고문해(高文海), 왕위지(王偉志)가 있다. 아명은 '한범'으로 어린 시절 송몽규를 알던 사람에게는 '한범이'로 불리는 일이 많았다. 일본식으로 창씨개명한 이름은 소무라 무게이(宋村夢奎)인데 보면 알겠지만 자신의 이름에 그냥 마을 촌(村)이라는 글자 하나만 더 집어넣은 것으로 당시 조선인들의 상당수가 이런 식의 창씨개명을 많이 했다.
성격이 부끄럼 많고 조용한 윤동주와는 대조적으로 소년 시절부터 활동적이고 리더십이 강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윤동주와 거의 모든 생애를 함께 한 형제 같은 인물이다. 다만 윤동주와는 달리 그리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윤동주 평전>에 회고한 문익환 목사에 따르면 그 당시 어려서부터 성적을 보면 송몽규, 윤동주, 윤영선, 문익환 자신이 항상 선두 그룹이었는데 그 중에서 윤영선은 나중에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문익환은 윤동주가 자신보다 한 발 앞선다는 것에 열등감을 느꼈고, 윤동주는 또 자신보다 송몽규가 한 발 앞선다는 것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동주는 몽규를 보고 "대기는 만성이다"라고 벼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뒤집어보면 현재는 내가 뒤쳐진다는 걸 인정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라고 했다. 윤동주가 약관의 나이에 쓴 시가 사망한 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뭇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을 보면 그 윤동주가 열등 의식을 가졌던 당시 송몽규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199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1917년 9월 29일 만주 길림성(吉林省) 연길현(延吉縣) 지신사(智新社) 명동둔(明東屯)(현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룡정시 지신진(智新鎭) 명동촌(明東村))의 외가에서 북간도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로 근무하던 아버지 송창희(宋昌羲, 1891~1971)와 어머니 파평 윤씨 윤신영(尹信永, 1897~?)[16]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윤신영이 쏟아져 내리는 별을 자신의 품에 받는 태몽을 꾸어 태명은 '꿈별', 아명은 한범(韓範), 이름은 꿈 몽(夢)과 별 규(奎)로 짓게 되었다. 아래로 여동생 송한복(1923년생), 남동생 송우규(1931년생)이 있었다.
할아버지 송시억(宋始億)은 5세 때 충청도에서 연해주로 가다가 함경도 경흥도호부 노면 웅상동(현 함경북도 라선시 웅상동)에 머물러 가문을 일으켰으며 송창희는 한성부에 유학을 다녀왔다. 은진 송씨 문중은 북일학교(北一學校)라는 교육기관을 세웠으며 송몽규의 첫째 숙부 송창빈은 홍범도 부대에서 독립군으로 싸우다 1920년 전사하였고 둘째 숙부 송창근은 일본·미국으로 유학하여 1931년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송창희는 25세 때 경기도 경성부에서 유학을 마치고 명동둔에 왔는데 체격과 인물이 뛰어나서 윤동주의 어머니가 큰 시누이의 신랑감으로 소개하였고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가 자기 큰 딸과 선을 보게 하여 결혼시켰다고 한다. 송창희는 윤 장로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며 명동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여 조선어와 양잠을 가르쳤다.
송몽규의 출생 이후 12월 30일 파평 윤씨 문중의 외아들 윤영석의 슬하에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윤동주이다. 이 둘은 3달을 차이 두고 함께 태어나 5살이 될 때까지 한 집에서 자랐다. 윤영석이 따로 집을 구하고 송창희가 처가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1925년에 8살 나이로 같은 마을의 또래였던 윤동주, 문익환, 김정우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했고 교장이자 외숙부 김약연 선생에게 사사하였으며 문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활발하고 리더십이 강한 인물로, 학생들을 모아서 연극 등을 공연하는 것을 주도했고 5학년 때는 윤동주와 함께 《새 명동》이라는 등사판으로 찍은 문예지를 내기도 했다. 이 때 윤동주와 함께 서울에서 수입해온 아동지 《어린이》,《아이생활》을 구독하여 읽고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윤동주와는 정 반대의 성격이었다.
김신묵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명동소학교가 '교회학교'에서 '인민학교'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송몽규가 큰 일을 했다고 한다. 김신묵 장로는 문익환 목사의 어머니이다.
1929년 봄 아버지 송창희 선생은 교회학교를 인민학교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송몽규 역시 고작 12살 나이에 송창희 선생의 주장에 따라서 연설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워낙 다부진 성격이라 어린 나이였음에도 어른들 앞에서 당당하게 연설을 했다고 한다.
1931년 3월 명동소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고종사촌 윤동주와 함께 대랍자에 위치해 있던 중국인(한족) 학교인 화룡현립제1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 동안 20여 리의 등교길을 매일 윤동주와 함께 다녔다고 한다. 1932년 3월 화룡현립제1소학교을 졸업한 뒤 캐나다 장로회가 설립한 미션스쿨인 은진(恩眞)중학에 입학하며 송몽규는 윤동주의 집에서 함께 기거하게 된다.
1934년 12월, 중학교 3학년으로 18세 나이로 꽁트 《숟가락》을 써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했다. 투고는 아명인 송한범으로 했으며 지금도 문인으로서는 가장 선망받는 등단 루트인 신춘문예가 당시 기준으로는 중앙일간지 숫자 자체를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었고 다른 등단 경로가 없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지금보다도 훨씬 더 높은 권위를 가진 데서 빼어난 성과를 거둔 것으로서 이는 윤동주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고 한다.
1934년부터 문해(文海)라는 호를 썼는데 글(文)의 바다(海)라는 뜻으로 그가 문학에 품고 있었던 큰 뜻을 짐작케 한다. 그는 문해장서(文海藏書)라고 크게 새긴 사각도장을 마련하여 자신의 책을 정리하고 분류하는 데 사용했는데 윤동주의 유품 가운데 이 도장이 찍힌 게 몇 권 있다고 한다.
4학년이 시작된 1935년 4월경 그는 돌연 은진중학을 중퇴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소재해 있던 남경으로 떠났다. 은진중학교에서 한학을 가르치던 명희조(明羲朝) 선생은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 동양사학전공 출신의 민족주의자로서 송몽규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그에게 감화된 송몽규는 본격적으로 독립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학업을 중단한 뒤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상해 임정을 찾아간 그는 중화민국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에 설치된 한인반(韓人班) 제2기에 입교했다.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의 한인반이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하여 장개석 총통에게 지원을 받게 되면서 항일무력투쟁에 종사할 한국광복군의 기간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1934년 2월부터 편성된 것으로서 100여 명의 조선인 학생이 군사 교육을 받는 곳이었다. 당시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장개석은 이를 극비에 부쳤기 때문에 1935년 제2기생으로 입교한 송몽규는 '왕위지'라는 중국식 가명으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한인반의 존재는 일제의 정보망에 걸리고 말았고 일본 정부가 강력하게 항의해오자 중일전쟁 개전 이전이었던 당시 중화민국 정부에서는 1년 8개월여 만인 1935년 10월 중앙군관학교의 한인반을 해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연유로 그는 채 몇 달 되지 않은 상태에서 군관학교를 마치지 못했고, 이후 김구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임정 내부의 격렬한 파벌 투쟁에 염증을 느끼게 되면서 1935년 11월 제남지구(濟南地區)로 넘어가 독립운동가 이웅 일파에 투신하여 활동하다가 1936년 4월 산동성 성도 제남(濟南)에서 일본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되었다.[17]
6월 27일 조선으로 압송된 그는 본적지인 함경북도 웅기경찰서(雄基警察署)에 구금되어 수사를 받다가 8월 치안유지법 위반과 살인 등의 혐의로 청진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어 취조를 받았다. 다행히 검사국에서는 고작 만 17세에 불과했던 그의 나이 등을 고려해 담당검사가 불기소 처분하였으며 웅기경찰서로 돌려보내진 뒤 9월 14일에 석방되었다. 제남시에서 체포된 후 5개월 동안 일제 공안당국에 구속되어 고초를 겪었으며 재판에 넘겨지진 않았지만 이 때부터 그는 일본 제국 경찰의 요시찰인 명부에 등재되어 악명 높은 고등계 형사들의 밀착 감시 대상이 되었다.
용정으로 돌아온 그는 1937년 4월 용정의 대성중학교에 편입학하여 학업을 재개했다. 대성중학교는 만주국 체제에서 국민고등학교(國民高等學校)로 이름이 바뀐 중국인 중학교(4년제)로서 일본제국의 구제중학교(5년제) 대비 수학연한이 1년 짧았기 때문에 일본의 구제고등학교/대학예과에 진학하기 어려웠고 구제전문학교에 들어가려고 해도 전문학교입학검정시험(전검시험)에 먼저 합격해야 했다. 이러한 연유로 윤동주와 문익환 등이 은진중학교 4학년 중퇴 후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유학했으며 북간도로 돌아와서도 조선총독부 교육과정을 따르고 일본 제국 내무성과 외무성의 해외지정(인가) 학교인 광명중학교(광명학원 중학부)에 들어갔던 것이다. 송몽규는 요시찰인 딱지가 붙어 어쩔 수 없이 다른 학교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938년 연희전문학교 입학,...
1938년 연희전문학교 합격자 명단
붉은 동그라미로 표시되어 있는 사람이 윤동주와 송몽규[18]
대성중학교 졸업 후 4년제 출신이란 핸디캡을 안고 있었음에도 두뇌가 매우 뛰어났던 그는 1938년 봄 윤동주와 함께 서울로 가서 연희전문학교에 나란히 합격하였다. 송몽규와 윤동주 둘 다 경성의전이나 세브란스의전 같은 의대 또는 경성법전 같은 경제적으로 유망한 학과에 가길 바라는 가족들의 기대와는 달리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들어갔다. 군관학교 한인반 사건을 통해 조선인이 무력투쟁으로 일본에 승리하여 독립을 쟁취하려는 것은 성공 가능성이 너무도 희박함을 절실하게 깨달은 송몽규는 문화에서 대일항쟁의 수단과 방법을 찾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연희전문학교 입학 후 그는 1938년 8월 조선일보에 시 《밤》을 발표하였으며 1932년에 창간된 연희전문학교 문과 학생회의 문예잡지 《문우(文友)》를 이어받아 문예부장으로서 활동했다. 문우의 마지막 호인 1941년 판에서 필명 '꿈별'로 '《하늘과 더불어》'[19]를 발표했다. 윤동주는 이 때 「새로운 길」、 「우물속의 自像畵(자상화)」를 문우에서 함께 발표하였다. 편집인은 일본 유학을 함께 하게 된 강처중(姜處重).
『원고에다 광고에다 검열에다 교정에다… 도저히 2-3명으로는 어림도 없음을 느꼈다.(중략) 이 잡지를 받은 사람들은 내용의 빈약함, 편집의 형편없음에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고 경험이 없는 학생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동분서주하며 모은 원고의 대부분을 게재할 수 없었던 점을 양해 받고 싶다. 국민총력운동에 통합하여 학원의 신 체재를 확립하기 위하여 문우회는 해산하게 된다. 그렇기에 교우회의 발행으로써는 이것이 최후의 잡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잡지 발행 사업은 연맹으로 계승되어 더욱 더 좋은 잡지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새로운 것에 합류하는 것을 기뻐하며 그것에 힘쓸 것을 맹세하며 이번 마지막 호를 보낸다(후략)』
『原稿やら、広告やら、検閲やら、校正やら・・・・・・とても、二三人の手に依るべきでないことをつくづく感じた。(中略)この雑誌を受け取る人々は、内容の貧弱、編集のまづさなどのために顔をしかめるだらう。然し、これは若い、経験のない学生達の手によって出来上ったものであると云ふことと、東奔西走して、かき集めた原稿の大部分が載せられなかったことを諒解してもらひたい。国民総力運動に統合して、学園の新体制を確立せんがために、文友会は解散するやうになる。そして国民総力学校連盟は徹底的に活動しなければならないやうになる。そこで、交友会の発行としては、これが最後の雑誌になるわけである。然し雑誌発行の事業は連盟に継承されて、もっといい雑誌が出るだらうと思ふ。我々は新しきものへの合流を喜び且つそれへの尽力を誓ひながらこの最後の号を送る(後略)』(원문)[20]
그는 자신들이 참가하게 된 문우 마지막 호에서 안타까운 심경이 가득한 후기를 남겼다.
대학에서 그는 일제의 민족동화정책이 조선어를 폐지하고 일본어를 쓰게 하여 고유의 문화와 민족 정신을 말살하는 데 있다고 보았고 민족문화를 지키고 향상시키는 데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939년 2월 부터 동급생 윤동주, 백인준(白仁俊), 강처중(姜處重) 등과 함께 기숙사에서 모임을 가지고 동인잡지 간행, 문학작품 품평회를 열어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활동을 벌였다.
1941년 12월 27일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차석으로 졸업(우등상 수상)하고 1942년 봄에 윤동주와 일본 내지로 유학을 떠나면서 도항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 창씨개명을 했다. 윤동주는 후에 이 때의 감정을 <참회록>이라는 시로 드러내었다.
소무라 무게이(송촌몽규, 宋村夢奎); 1942.2.12
히라누마 도쥬(평소동주, 平沼東柱); 1942.1.29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의 선과생[21] 선발시험에 합격한 송몽규는 교토제대에 들어가 공부하게 되었고 이 시험에 낙방한 윤동주는 도쿄의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선과생으로 들어갔다가 여름방학 때 도호쿠제국대학 법문학부 선과생 입시에 응시했으나 탈락하자 1942년 10월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 문학부 영문과 선과생으로 옮겨 입학하여 송몽규와 재회했다.
1942년 10월부터 1943년 7월까지 그는 윤동주, 그리고 제3고등학교 학생 고희욱(高熙旭) 등과 함께 교토 시내에서 자주 모임을 가졌고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이 기회를 노려서 민족의 독립을 기획하는 한편 민족정신을 부흥시킬 수 있는 학문적 연구를 하는 활동을 했다.
943년 7월 10일 그는 "재경도(在京都) 조선인학생 민족주의그룹사건"으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윤동주는 7월 14일 체포되었다.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된 후 시모가모 경찰서의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1944년 봄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으며 1944년 4월 13일에 윤동주와 함께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송몽규는 일제의 조선어문 소멸 유도 등의 민족말살정책을 비판하였으며, 대동아전쟁은 일본이 무력으로 종결시키기 어려우므로 조만간 강화조약이 체결될 가능성이 크며 이때 버마와 필리핀 등이 독립국으로 참가하려 할 것이므로 조선 독립의 여론을 환기시켜 세계 각국의 동정을 얻어 조선 독립을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형이 확정되어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윤동주와 함께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2월 16일 윤동주가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3월 7일 송몽규 역시 2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여 순국했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옥사에 대해서는 윤동주 항목 참조. 사후 송몽규의 시신은 후쿠오카의 한 화장장에서 화장되었는데 화장된 후 남은 뼈를 절구에 빻을 때 뼛가루가 자꾸 절구 밖으로 튀자 송몽규의 아버지가 "내가 어찌 몽규의 뼈 한 점이라도 이 왜놈들의 땅에 남길 수 있겠느냐!"라고 분노하여 그의 뼈가 튄 흙까지 쓸어 함께 수습했다고 한다.
송몽규의 시신은 용정 명동 장재촌 뒷산에 묻혔으며 윤동주의 비문을 지었던 윤동주 아버지의 친구 김석관이 《청년문사 송몽규 지묘》라는 비문을 썼다.
송몽규와 친척지간으로 송몽규의 조카가 되는 송우혜는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면서 송몽규의 일생도 함께 정리하였다. 그동안 무덤이 완전히 황폐화되어서 찾을 수 없었으나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면서 수록된 증언 덕분에 올바른 묘지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90년 4월에 송몽규의 묘는 윤동주가 묻혀 있는 용정으로 이전하여 윤동주의 묘에서 10m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에 함께 묻히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