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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태양계 밖 행성 첫 촬영
태양계 밖 행성이 사상 처음 우주망원경 렌즈에 잡혔다. 또 지구 전체를 다이너마
이트로 덮어 폭발시킨 것과 같은 태양표면 폭발현상도 관측됐다.
미항공우주국(NASA)은 허블우주망원경
을 통해 태양계 외부에 있는 목성 2∼3배 크기의 행성 사진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고 1998년 5월 27일 발표했다.
천문학자들은 수년전 태양계 외부 행성들
의 존재사실을 처음 발견해냈으나, 실제로 그 모양이나 크기를 관측하지는 못했었다.
이번 사진촬영 성공은 허블망원경이 이룩
한 업적 중 가장 위대한 것이며, 천문학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NASA는 1996년 7월 태양의 핵열 폭발로 인한 태양진도 처음 관측됐다고 발표했다.
유럽의 태양-태양권역(SOHO) 우주위성
에 의해 관측된 이 태양진은 분출 에너지
가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 때 발생한 것의 4만배. 리히터 규모 11.3의 지진이며 전지구 표면에 다이너마이트를 1야드 높이로 덮은 뒤 한꺼번에 폭발시킨 에너지에 버금가는 것이다.
➡️2015년미국 ‘자수성가형 여성 부자’ 14위에 한국계 CEO ‘타이 리’ 선정
👉🏿 소프트웨어 기업 ‘SHI’(Software House International)의 최고경영자(CEO) 한국계 타이 리(56)가 28일 포브스가 선정한 ‘2015 자수성가형 여성 부자’ 50인에 이름을 올렸다.
포브스에 따르면 비상장회사인 SHI의 시장가치는 보수적으로 평가해도 18억달러(약 2조원)로, 미국에서 여성이 소유한 기업으로는 최대다. SHI 지분 60%를 가진 타이 리의 재산은 11억달러로 자수성가형 여성 부자 50인 중 14번째를 차지했다.
포브스는 이번 호에서 특히 부자순위 14위인 타이 리를 집중 조명했는데, SHI가 성장하는데 타이 리의 경영 방식이 큰 역할을 했다고 봤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타이 리는 25년 전 직원 5명인 쓰러져 가는 회사를 100만달러(약 11억원)도 안 되게 인수해 지난해 기준 매출 60억달러(6조6,330억원), 직원 3,000명, 거래처 1만7,500개의 대규모 회사로 키웠다. 타이 리는 경영자와 직원 간 차별을 두지 않고 모든 직원을 존중한다. 회사에서 가치를 인정 받는 직원이 고객에게도 최선을 다한다는 신념에서다. 또 자신은 기사 없이 직접 차를 운전해 출근하며 뉴저지주 소머셋에 있는 본사 주차장에도 CEO용 주차 공간이 따로 없을 정도로 특권 의식을 갖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포브스가 취재에 나서자 자기 이름을 빼라고 직원에게 신신당부했을 정도로 주목도 싫어한다. SHI의 고객 유지 비율은 99%에 이른다. 더 낮은 가격을 제시하는 업체가 있으면 오랜 거래관계도 즉시 청산하는 IT업계의 풍토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수치이다. SHI는 지난해 매출이 15% 증가했고 2019년에는 지난해 매출보다 67% 늘어난 100억달러를 목표로 하고 있다.
타이 리는 태국 방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대부분을 한국에서 보냈으며 언니와 함께 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건너 왔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MBA 학비를 벌기 위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일하기도 했다. 그의 선친은 제1차 경제개발계획 수립을 주도하는 등 한국의 근대화를 이끈 고 이기홍 전 경제기획원 차관보다. 한국인 첫 유엔 직원이었던 선친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자 한국으로 건너가 경제개발 과정에 깊이 관여했다. 한국프로야구 넥센 히어로즈 구단주 이장석 씨가 그의 동생이다.
한편 의류유통업체 ‘포에버21’의 장진숙씨도 포브스의 자수성가형 여성 부자 50인 중 4위(31억달러)에 이름을 올렸다. 1위는 혈액테스트업체인 테라노스의 CEO 엘리자베스 홈스(45억달러)가 차지했으며, 다이엔 헨드릭스(ABC 서플라이)와 도리스 피셔(갭)가 뒤를 이었다.
➡️2015년구자철, 귀국 일정 앞당겨 장애인 선수단과 함께 축구
➡️2014년전남 장성 효사랑요양병원 방화
➡️2007년 전도연, 한국 여배우 사상 첫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아시아 제작영화로 수상한첫번째아시아여배우
➡️2007년미국과 이란 27년 만에 공식회담
👉🏿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과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으로 유발된 미국과 이란의 국교 단절 이후 공식 접촉이 없었던 양국이 27년 만인 2007년 5월 28일 처음으로 회담 테이블에서 마주했다. 주요 의제는 이라크 사태. 그러나 4시간여에 걸쳐 진행된 양국 회담은 1차 탐색전으로 끝났다. 하지만,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1956 - ) 이란 대통령은 회담에 앞서, “미국이 이란과 이라크에 대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진전” 이라고 평가했다.
이라크에 주재하는 미국의 라이언 크로커(Ryan Crocker) 대사와 이란의 하산 카제미(Hassan Kazemi) 대사는 5월 28일 오전 바그다드의 미군 보호지대인 ‘그린존’ 에서 만나 비공개 회담을 가졌다. 회담 후 크로커 대사는 “이라크 안정화 문제를 의제로 실무적으로 진행됐으며, 대(對)이라크 정책에 있어서 서로 폭넓은 합의가 있었다” 고 밝혔다.
그러나 회담은 상호 신경전이 계속됐던 것으로 전해졌다. 크로커 대사는 “이란측에 대해 ‘지금까지 해오던 행동을 바꿔 (이라크 내) 시아파 무장저항 단체에 대한 자금·훈련·군수 지원을 중단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고 요구했다” 고 했지만, 이란측은 이 같은 주장 자체를 부인했다고 BBC방송은 전했다.
또 카제미 이란 대사는 회담 중에 자국과 미국, 이라크로 구성되는 ‘3자 안보 체제’ 구축과 미·이란 간 제2차 회담 제의 의사를 밝혔지만, 미 대사는 “추가 회담 여부는 본국에서 별도의 검토를 거친 뒤에야 결정될 문제” 라고 답했다고 밝혔다. 회담에 앞서 마누셰르 모타키(Mottaki) 이란 외무장관도 “앞으로 미국과의 추가적인 만남은 미국 정부가 이라크전 등에 대해 ‘실패한’ 정책을 자인하고 난 뒤에라야 가능할 것” 이라고 말했다.
1948년 미국 중앙정보국(CIA) 안에 정책조정실(OPC)이라는 비밀조직이 만들어졌다. 이 조직의 임무는 ‘적대적 국가의 체제 전복, 적대적 정권에 맞선 저항그룹과 반공 세력 지원’, 다시 말해 미국에 반대하는 나라의 정권을 무너뜨리는 공작을 하는 것이었다.
이 기구를 이끈 프랭크 와이즈너(Frank Wisner)가 저지른 공작 중 대표적인 것이 과테말라에서 농지개혁을 한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 정권과 이란의 민족주의자 모하마드 모사데그(Mohammad Mossadegh, 1882년 ~ 1967년) 총리를 축출한 일이었다.
저술가 겸 행정가·법률가로 명망을 날렸던 모사데그는 1951년 집권 뒤 영국계 석유회사인 영국-이란석유회사(현재는 브리튼석유회사)를 국유화하는 민족주의 정책을 펼쳤다. 와이즈너는 영국의 군 대외정보국(MI6)과 함께 공작을 벌여 모사데그 축출에 나섰고, 결국 모사데그는 미국과 영국의 사주를 받은 파즐롤라 자헤디 장군의 친 팔레비 쿠데타로 쫓겨났다. 2차 세계대전 뒤 중동 각국 국내정치에 깊이 관여해 친미 독재정권들을 양산했던 미국 대외공작의 대표적인 사례이자, 오늘날까지 이란에서 미국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그 후 반세기가 넘게 미국과 이란은 맹방에서 적국으로, 애증의 관계를 넘나들었다. 모사데그를 몰아낸 쿠데타에 일조했던 레자 샤 국왕의 파흘라비(팔레비) 왕조는 미국을 등에 업고 전제정치를 자행했다. 백색테러와 억압통치가 이란인들을 짓눌렀다. 이란은 이스라엘과 함께 중동에서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충실한 동맹 노릇을 했던 것이었다.
미국과 이란의 끈적끈적한 관계는 1979년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 1900년 9월 22일 ~ 1989년 6월 3일)의 이슬람혁명으로 격변을 맞게 된다. 프랑스에 망명해 있다가 반(反) 왕조 민중혁명이 일어난 후 1979년 2월 1일에 테헤란에 돌아온 호메이니는 미-소 냉전이 첨예했던 시기에 양측 어느 쪽과도 협력을 거부하며 자신들만의 ‘신정(神政) 국가’를 세웠다.
호메이니는 이슬람 공화국의 지도자는 성직자 집단에 의해 선택된 파키(이슬람 법학자)여야만 한다고 믿었다. 이 파키는 절대권력을 가져야만 하며, 같은 성직자 집단에 의해서만 권력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다. 대중은 파키를 선출하지 못하지만,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헌법에 따라 이란 국민들은 매 8년마다 이란 파키 회의라고 불리는 일단의 성직자들을 선출하며, 이들이 파키를 선출한다. 이란의 지도자는 일반적으로 “최고 지도자"라고 불린다.
1979년 11월 4일, 호메이니의 열렬한 추종자들로 구성된 일단의 학생들이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을 급습하여 63명의 미국인을 인질로 잡았다. 추가로 세 명의 인질이 이란 외무부에서 잡혔다. 63명의 인질 중 13명이 2주 안에, 그리고 1980년 7월에 한 명이 추가로 석방되었다. 나머지 남자 50명과 여자 2명은 444일간 억류되어 있었는데, 이를 가리켜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라고 부른다.
➡️2006년 인도네시아 자바섬의족자카르
타시 부근 리히터 규모 6.3의 강진 발생.
➡️2006년 안젤리나 졸리와 브래드피트가 드디어 결혼식
➡️2005년 김용덕 신임 건설교통부 차관 취임식
➡️2005년17대 최연소 의원인 한나라당 김희정 의원 결혼
➡️2005년 한,중,일 중앙은행 총재 통화스와프 계약체결식
➡️2005년 국보 1호인 숭례문 주변에 조성된 숭례문광장 준공
👉🏿 연대
1398년 - 태조 7년 숭례문 준공 태종의 맏아들이던 양녕대군이 숭례문 현액을 씀.
1448년 - 세종 30년에 개축
1479년 - 성종 10년에 중수.
1907년 - 일본 황태자가 방한하자 일제는 "대일본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날 수 없다"면서숭례문과 연결된 서울성곽을 헐어버렸다. 성곽을 헌 자리에 도로와 전차길을 내고, 숭례문 둘레에 화강암으로 일본식 석축을 쌓았고, 앞에는 파출소와 가로등을 설치했다.또한 이 때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이 사건으로 현 모양이 확립되었다.
1916년 - 고적급유물보존규칙 공표. 조선총독부에 고적조사위원회 설치
1924년 - 조선총독부가 고적급유물등록대장초록을 간행. 1호 원각사지십층석탑 등 193점의 유물을 등록함.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없었다.
1933년 8월 9일 - 제령 제6호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 공포
1934년 -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보물 1호로 숭례문을, 보물 2호로 흥인지문을, 보물 3호에 원각사지십층석탑을, 보물 4호로 보신각종을 지정하였다.
1961년 - 한국전쟁 때의 파손을 복구하기 위해 전면 해체 중수작업에 착수.
1962년 - 한국 정부는 조선총독부의 문화재 지정을 참고해서 남대문을 국보 1호, 원각사지십층석탑을 국보 2호, 동대문을 보물 1호, 보신각종을 보물 2호로 각각 지정.
1963년 - 해체 중수공사 완료.
1994년 11월 - 미술전문지「가나아트」 40호가 미술인 70명에게 여론조사한 결과 서울의 랜드마크로 국보 1호 남대문이 33표로 1위로 선정되었다.
2002년 2월 - 문화재위원회는서울시의 숭례문 근접 관광 계획을 불허했다. 불허이유는 차량으로 인해 관람객이 위험에 처할수있고 복잡한 도로사정으로 숭례문을 차분하게 감상할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2003년 - 일제가1907년에 헐어버린 서울 성곽을 숭례문 좌우로10m씩 복원했다.
2003년 9월 - 일제는 돈의문 등 조선의 왕성인 궁궐과 성곽을 항일의 상징으로 보고 철저히 파괴했으나,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숭례문을 지나갔으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흥인지문을
지나갔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있다며 보존했다고, 2002년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오타 히데하루 (太田秀春) 일본 도호쿠대 특별연구원이 서울대 국사학과 기관지인 ‘한국사론’ 49집에 발표한 논문에서 밝혔다.
2005년 5월 27일 - 1907년 일제에 의해 도로 속에 고립되었던 숭례문 주변에 광장을 조성·단장함.
2006년 3월 3일 - 중앙통로를 시민들에게 개방, 일반인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
2008년 2월 10일 - 숭례문에 방화로 인한 화재 발생.
2008년 2월 11일 - 석축과 1층 일부만을 남겨놓고2층 문루의 90%와 1층 문루의 10%가 타 버림
➡️2005년 한국 슬로바키아 정상회담
➡️2004년 호세 모리뉴 감독의 FC 포르투,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우승
➡️2004년성원-동아그룹 전 회장 등 26명 공적자금 비리 혐의 기소
➡️2003년에베레스트 최단시간 등정기록자 셰르파 ‘락파 겔루’ 헬기 추락사고로 사망
➡️2003년 러, 상트 페테르부르크시(市) 창건 300주
➡️2000년한국 천문연구원 김승리 박사팀, 국내에서 두 번째로 소행성 발견
➡️1999년항일학생결사 건아단 활동한 백세기 별세
➡️1998년파키스탄, 인도 핵 실험에 대응해 5차례의 지하 핵 실험
➡️1995년사할린 리히터 규모 7.2의 강진 발생
➡️1989년백인철 WBA 슈퍼미들급 세계챔피언 획득
➡️1989년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
➡️1987년세스나기 탄 서독청년, 소련 방공망 뚫고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착륙
➡️1986년올림픽공원 준공
➡️1985년제8차 남북적십자 본회담 12년 만에 재개
➡️1984년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서울올림픽대회 일자 승인
➡️1984년인도서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충돌 228명 사망
➡️1984년세계물리학자 50명 사하로프 석방 요구
➡️1983년국무총리실 종합청사로 이전
➡️1983년서방 7개국 정상회담 개막 (윌리암스버그)
➡️1982년교황 요한 바오로2세 영국 방문
➡️1981년국풍81 개막
➡️1980년이란 혁명헌법에 기초한 새 국민의회 개회
➡️1980년장훈 선수, 일본 프로야구 사상 첫 3000안타 기록
➡️1976년미국-소련 평화목적 지하핵실험 제한 조약 조인
➡️1973년모자보건법 시행령 공포
➡️1972년영국왕 에드워드 8세 사망
➡️1964년아랍 게릴라 조직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창설
➡️1962년미국 주식시장
➡️ 1929년 이래 주가 대폭락
➡️1961년최고회의, 부정축재처리요강 발표
➡️1959년미국, 원숭이를 태운 우주비행에 성공
➡️1957년미국 네바다서 수소폭탄 실험
➡️1949년임영신 상공장관 독직사건으로 기소
➡️1949년미국 군사고문단 이외의 주한미군 철수발표
➡️1946년미국의 정치가 카터 글래스 사망
➡️1940년벨기에 독일에 항복
➡️1937년오스트리아 정신의학자 알프레트 아들러 사망
➡️1931년기구 탐험가 오귀스트 피카르, 기구를 타고 16,940m 상공에 도착
➡️1929년미국 영화사상 최초 총천연색 토키영화 `언 위즈 더 쇼`가 뉴욕서 개봉
➡️1917년작곡가 김순남 출생1909년미국 연합주 회의 흑인차별대우 철폐를 결정
➡️1908년007 제임스 본드를 탄생시킨 영국의 스릴러물 소설가 이언 플레밍 출생
➡️1905년경부선 철도 개통식
➡️1901년천주교인·제주도민 ‘충돌’, 신축교난(이재수의 난) 발생
https://youtu.be/cAgPtnlRh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