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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___전예숙
혼자만의 방
전예숙
부츠 속으로 시린 바람이 들어왔다. 양모털이 구두 속을 꽉 채우고 있지만 들어오는 바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몸에서 열이 나도록 실컷 달리고 싶은 욕망을 나는 가까스로 눌렀다. 어릴 적 겨울철이면 숨이 턱까지 차올 때까지 달리곤 했었다. 그런데도 신발 속에 있는 두 발은 늘 꽁꽁 얼기만 했다. 그럴 때마다 과학 시간이 엉터리라고 생각하곤 했다. 어떤 물체에 열을 가하면 에너지가 발생한다는 논리를 비웃게 만들어서였다. 내가 아무리 달려도 추위를 이기지 못하는 것은 과학이 틀렸거나 내가 에너지를 일으키지 못한 것이리라. 그러나 조금만 더 달린다면 심장이 겨울점퍼 위로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아버지는 두 손으로 내 두 발을 열이 나도록 비벼 주었고, 어머니는 내 발에 양발을 한 켤레 더 신겼다. 그래도 발은 솜이불 속에 들어가야만 서서히 녹았다. 왜 발만 시리다고 하는지 모르겠네. 손은 따뜻한데…. 어머니는 내 시린 발을 이상하게 여겼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왜 손은 시리지 않았던 것일까. 나는 이런 증상을 결핍이라고 부른다. 과학으로 설명되지 못하는 것. 부족함. 가난. 콤플렉스. 모자란 것을 채우려는 욕망. 찬 겨울 때 신발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한기가 딱딱하고 뾰족하게 되어 지속적으로 발바닥을 찔러대는 것이라고. 이런 주관적 통증을 객관적으로 이해시킨다는 데에 무리가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이런 비유로 부족함을 불특정 다수에게 설명하곤 한다.
50평대의 아파트로 이사를 한 것은 일종의 치기였다. 평생 가지고 싶었던 나만의 방을 갖고 싶다는 욕심은 서울에서 한참을 벗어난 소도시의 아파트에서 종지부를 찍었다.
나는 결혼을 하면 경제적으로 윤택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졌었다. 그러나 신혼여행 기간에 그 꿈은 풍비박산이 났다. 남편은 결혼 첫날부터 경제권을 틀어쥐었다. 내가 호텔 방안에 있는 냉장고 문을 벌컥 열고 외국어로 쓰인 백포도주의 코르크 마개를 따는 순간 남편은 비싸겠는데…, 하며 내게 긴장감을 주었다. 와인은 잔 안으로 쿨럭쿨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와인이 입술에 닿은 첫 느낌은 떫기만 했다. 그 와인 맛이 달콤했다고 해서 윤택한 결혼생활일리는 없겠지만 나는 지금까지 와인 맛처럼 떨떠름한 결혼생활을 이어갔다. 수돗물을 콸콸 틀어본 적이 없었고, 쓸데없이 빈 방에 불을 켜놓은 적이 없었다. 내가 와인을 꺼내든 것이 경제적으로 멋모르고 부린 치기였다면, 50평 아파트를 산 것은 마지막 부린 호기가 될 것이었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한량이라 했다. 역사적 의미로 한량閑良이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의 직역職役이 없는 한량 기로耆老·한량 품관品官· 한량 자제子弟 등의 통칭이고, 호반 출신으로 아직 무과武科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을 말한다고 민중서림이 만들어낸 국어사전에서 말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무과나 잡과雜科 응시자 또는 무술 궁예에 뛰어난 사람을 말하지만 오늘날의 한량은 돈 잘 쓰고 잘 노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란다.
아버지는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었다. 우스갯소리도 잘하며 정도 많았다. 아버지의 단점은 술값을 잘 낸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농사철이 끝나면 동네 술집에서 ‘섯다’를 하고 막걸리를 마시며 겨울을 보냈다. 막걸리를 마시기 위해 ‘섯다’를 했는지 ‘섯다’를 하다가 막걸리를 마셨는지 모르지만 아버지의 풀린 눈동자는 늘 빨갛게 충혈이 되어 있었다. 농사철이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섯다’는커녕 술집에 갈 시간도 없을 터였지만 겨울철만은 달랐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아궁이에 불을 지펴 아이들 세숫물을 끓여놓으면 할 일이 딱히 없었다. 우리 세 자매는 아버지가 끓여준 물을 세숫대야에 퍼 담아 얼굴을 닦았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학교에 가면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늦잠을 잔 다음 늦은 조반을 어머니와 드셨다. 그런 다음 자전거를 타고 큰 동네로 갔다. 동네 술집에 모인 사람들은 도란도란 봄철에 지을 농사 이야기를 하고 그 시대의 정치 이야기로 핏대를 올리거나 간밤에 있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화투짝을 돌리거나 했을 것이다. 거기에서 막걸리 값을 내는 것은 번번이 아버지였고, 아버지의 외상값은 갈수록 쌓여만 갔다. 아버지의 속을 들어갔다 온 것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는 어머니는 저녁 때가 되면 털실로 두툼하게 짠 스웨터를 입고 목도리를 목에 친친 감았다. 썩을 놈의 손모가지를 확 분질러버려야지, 원. 분기가 탱천한 어머니가 대문을 나섰다. 머지않아 아버지가 ‘즐거운 나의 집’을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오고 있을 것이고 거기에 맞춰 누렁이가 대문을 박차고 나간다면 아버지가 5분 안으로 들어오신다는 뜻이었다. 개의 후각이 사람보다 70배 이상 발달했다니 동생과 나는 누렁이의 움직임만 주시하다 보고 있던 텔레비전을 시간에 맞춰 끄면 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술을 마시다 어머니에게 혼쭐이 날 것은 생각하지 않고 당신의 자식들이 텔레비전을 보며 시시덕거리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아버지가 술이 취하건 맑은 정신이건 외출 후 제일 먼저 하는 것은 미닫이문이 달린 텔레비전 수상기를 열고 브라운관 위에 손바닥을 얹는 일이었다. 이마를 만지며 열이 있나 확인하는 것처럼 브라운관의 윗부분을 손바닥으로 짚어보았다. 그것은 우리 세 자매가 텔레비전을 얼마나 오랫동안 봤는지를 가늠하는 기준이었다. 아버지에게 텔레비전을 오랫동안 본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찬물에 젖은 수건이 필요했다. 동생과 나는 누렁이가 뛰쳐나가는 것과 동시에 젖은 수건으로 브라운관 위의 열기를 공격적으로 식혔다. 그러고는 마른 걸레로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깨끗이 닦아냈다.
아버지의 술주정 소리가 크다는 것은 어머니의 화풀이의 강도가 높다는 뜻이었다. 정신이 있어, 없어? 하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빈 논바닥을 타고 바람결에 들려왔다. 아버지의 노랫소리도 함께 들렸다. 즈을거운 곳에서어는 나알 오라하지만.
서재가 있어 좋아? 남편은 내게 물었다. 좋지, 그럼! 나는 남편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어릴 적 나는 언니와 동생과 같이 한 방을 썼고, 언니가 대학에 들어간 다음에도 동생과 한 방을 썼다. 결혼 후로도 나는 내 방을 갖지 못했다. 나만의 공간을 갖고자 하는 것은 버지니아 울프가 그렇게도 갖고자 하던 자기만의 방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녀는 여자가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픽션을 쓰든 안 쓰든 나만의 공간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결혼 후에 아내들이 자기만의 공간을 갖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특히 대한민국의 아파트 값을 계산해 볼 때 부부 방이지 남편을 위한 혹은 아내를 위한 공간이 가당키나 하냔 말이다. 나는 늘 내가 혼자이고 싶을 때 일회용 커피의 궁둥이를 엄지와 검지로 돌려 딴 다음 커피 잔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러고 나서 식탁 의자를 빼고 앉아 커피를 마시며 부엌을 차지했다. 아이들과 남편이 나간 다음 비로소 나 혼자 집에 있을 때에도 나는 나만의 공간을 확보하지 못했다. 식탁에서 가계부를 쓰거나 요리책을 보거나 했다. 내 속으로 난 자식의 방에 들어갈 때도 방문을 덜컥 열고 들어가 보지 못했고, 침실에 들어갈 때도 나는 왠지 모르게 조심스러웠다. 가족들 사이에서도 사적 공간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어서 남편이 침실에 혼자 있을 때 나는 문의 손잡이를 조심스럽게 돌리고 슬그머니 문을 밀고 부부 방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그런 내가 비로소 나만의 공간을 얻었다. 책상도 사고 책장도 구입하고 가죽으로 만든 의자도 장만했다. 순전히 나만을 위한 물건들이 내 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어릴 적부터 언니가 입었던 옷과 책가방을 물려받았으며 심지어는 구두까지 물려받던 내가 아니던가. 언니가 썼던 손때가 묻은 영어사전을 봐야 했고, 몇 년이 지난 전과로 공부를 해야 했다. 내가 물려받지 않았던 것은 오로지 일기장이었지만 그 일기장을 나만의 공간에 둘 수 없었다. 나만의 비밀을 적어두는 일기장을 나만이 알고 있는 공간에 둘 수 없다는 것은 나에게 비밀이 들어설 공간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나의 일기장에는 너무나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간단하게 나열될 뿐이었다. 그런 내용을 담임선생님은 일기쓰기 숙제검사를 한답시고 읽고 또 읽곤 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의 흘러내린 바지를 확 끌어내리고 싶었다.
좋기만 해. 좋아 죽겠지. 나는 남편에게 나만의 공간을 허락해 준 것에 대해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사실 나의 오래된 권리를 찾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지금이라도 찾았으니 다행이었고 남편에게 고마웠다. 남편은 그렇게 좋으냐며 새로 산 책상과 의자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마치 아버지가 텔레비전을 얼마나 오랫동안 봤는지 진단하는 절차처럼 진지했다. 아버지는 찬 물수건으로 브라운관의 열을 식혔던 것을 몰랐고 남편은 왜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 하는지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남편도 자신만의 공간에 자신의 비밀을 감출 공간이 필요할 터였다. 그러나 나는 남편의 마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만의 공간을 확보한 것으로 지금까지의 결혼 생활을 보상받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동안 아무도 진정으로 결혼 생활을 포기하지 않고 잘 살아왔다고 칭찬해주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두 아들 대학 입학시키고 군대 보냈어도 키워줘서 고맙다 하지 않고 25년이 넘도록 남편의 뒷바라지를 했어도 남편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남편은 그저 뼈빠지게 일해서 먹여 살렸다고만 하지 내가 남편을 위해 희생한 것은 계산하려 들지 않았다. 인생이 다 그런 거지, 뭐. 당신 매미가 한여름에 나무기둥에 붙어서 왜 맴맴 우는 줄 알어? 제 살 새끼들에게 다 주고 빈 껍질로 남는 게 서러워서 우는 거야. 나는 그 때마다 남편에게 싱거운 소리하고 있네, 하며 면막을 주었다.
나는 나만의 공간을 서재로 꾸미기로 했다. 나를 위한 방에서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을 원 없이 읽고 싶었다.
아버지는 가난하다는 이유로 나를 대학에 보내주지 않았다. 밥이 많아야 맨밥으로도 먹고 물에 말아서도 먹고 비벼도 먹는 것이다. 아버지는 대학을 보내달라고 울며 조르는 내게 말했다. 대학 가봤자 다 쓸모없는 일이다. 그건 아버지 생각이잖아요. 나는 지지 않고 말했다. 아버지를 봐라. 대학을 나왔어도 농사짓지 않냐. 공부하는 사람은 엉덩이가 무거워야 하는데 너는 책만 보면 잠만 자지. 엉덩이 딱 붙이고 공부하는 언니를 봐라.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그렇지만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한다면 누구보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책을 펴면 금세 졸음과 싸워야 했고 매번 졸음에 쉽게도 무너졌다. 나는 아버지에게 억지를 부렸다. 내 방도 없는데 어떻게 공부를 해요? 새 책 한 권도 없고. 아버지는 물었다. 도대체 왜 대학을 가려고 하냐? 공부는 대학에 가야만 하는 것이 아니고 평생 하는 거다. 나는 다시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내 방만 따로 주면 나도 공부를 잘 할 수 있다니까요. 그리고 아버지가 술 안 마시면 되잖아요. 아버지는 내 말이 끝이 나기도 전에 자리끼로 둔 물이 든 대접을 던졌다. 다행히 대접으로 맞지는 않았지만 물벼락은 조금 맞았다. 다음은 성냥곽이 날아들었다. 재떨이와 세트 메뉴처럼 붙어있던 것이었다. 붉은 황이 발라진 성냥개비들이 내 머리 위로 잠자리 떼처럼 쏟아지고 나는 신경질적으로 얼굴로 떨어지는 성냥개비들을 잡아챘다. 아버지 담배 끊으면 언니방도 하나 생기겠네, 뭐. 이번에는 뭐가 날아올지 몰라 잽싸게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뭐야! 이런 싸가지 없는 것 같으니라고. 저런 걸 가르쳐 뭐하냐? 뭐가 되려고 그래? 나는 문 밖에서까지 아버지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그럼 언니는 왜 대학에 보내줬냐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어머니가 빗자루로 등짝을 후려쳤다. 언니만큼만 공부해 봐. 대학 할아비라도 보내주지.
아버지는 돈이 없어 나를 대학에 보내주지 못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순전히 나의 싸가지 없는 성정 때문에 대학을 보내줄 수 없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잠이 많고 공부를 못하는 것은 이유에도 들지 않았다. 어머니는 고등학교만 졸업한 내게 직장생활을 강요했다. 여자는 참하게 집에 있다가 좋은 남편 만나 시집가서 잘 살면 된다는 어머니의 굳건한 논리 속에는 여자는 온실 식물처럼 자라야 하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이론을 내게는 적용시키지 않았다. 여자고 남자고 가르쳐 놨으면 돈벌이를 해야잖어? 거렁뱅이도 밥 얻어 먹겄다고 십리를 걸어. 집구석에 처박혀 있는 건 거렁뱅이보다 못한 거 아니고 뭐냐? 어머니의 성화 속에 나는 반항도 못하고 직장에 나갔다. 고속버스 터미널 부스 안에서 표를 파는 일이었다. 나는 첫날부터 대도시의 이름을 외우고 버스 시간을 달달 외웠다. 일주일 만에 완벽하게 전국 버스 시간표를 외운 다음에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것만 같았다.
나는 때론 막차를 타고 서울로 도망칠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대전, 전주, 마산 등지로 가서 아버지 몰래 혼자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거나 대학에 가는 꿈을 꾸기도 했다. 가끔 대학에 간 친구들이 중간고사 시험 이야기를 하면서 논술하라, 하는 시험지를 받으면 당혹스러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자꾸만 의기소침해졌다. 대학에 간 친구들은 미팅이니 축제니 하며 한가한 나와는 놀아주지도 않았다. 나도 그들을 만날 시간이 점점 적어졌다. 나도 그 당시에 남자친구가 생겼으니 말이다.
진교라는 아이는 내게 처음으로 좋아한다고 고백한 친구였다. 나는 진교에게 내가 어디가 좋으냐고 당돌하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쭈뼛거렸다. 말도 못하는 거 보니 안 좋아하지? 하고 따지듯이 물어봤다. 그러자 진교가 얼떨결에 말했다. 너는 말을 너무 싸가지 없게 해. 나는 그 아이를 처음 본 날 대학 다니냐? 하고 물었던 기억이 났다. 진교는 당혹스런 나머지 얼떨결에 안 다녀, 하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피싯 웃어줬다. 나도 안 다녀. 나는 그 시절 대학 다니는 친구들이 무척이나 부러웠기 때문에 진교가 대학생이라면 오리엔테이션은 뭐고, 축제는 뭐고, 대학에서의 체육대회는 고등학교 때와는 무엇이 다른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틀려버렸다. 방학 때만 내려오는 언니는 며칠 만에 공부를 핑계로 다시 서울로 올라가버렸다. 그러니 언니에게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차이를 물어볼 수 없었다.
나는 진교와 데이트를 하기 위해 몇 정거장 전에 버스에서 내렸다. 별이 하늘에 총총 박혀있는 모습이 황홀할 정도로 예뻤다. 입을 벌리면 별들이 입 안으로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고 나는 기꺼이 윗옷을 벗어 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별들을 보는 내 뒷목이 자꾸만 뒤로 젖혀지고 순간적으로 발이 삐끗했다. 내 몸의 무게 중심이 흐트러지는 순간 진교가 두 손으로 내 허리를 받쳤다. 진교의 얼굴이 내 얼굴과 맞닿자 진교가 얼른 얼굴을 피했다. 나는 슬쩍 장난기가 돌았다. 진교야! 진교의 얼굴이 내 앞으로 다가오고 나는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얼마 후 진교가 서울에 올라가서 학원에 다녀야겠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은 이제 대학에 안 다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말로 들렸다. 나는 깊은 수렁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그와 마지막 만나던 날, 진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선인장을 신문지에 싸서 주었다. 종류가 모두 다른 것이었고, 화분에 담긴 것이 아니라 화분에서 함께 자라고 있던 것들 중 하나씩 뽑아 신문지에 둘둘 말아온 것이었다. 진교는 애써 내게 하나씩 보여주며 뭐라 뭐라 이름을 알려주었지만 나는 하나도 그 이름을 기억할 수 없었다. 나는 진교에게 배신감마저 들었다. 그것은 나만이 대학에 가지 못한다는 자괴감이기도 했다. 나는 진교가 보여주는 선인장들을 보며 왜 가시가 없는데도 선인장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냐며 어이없는 투정을 부렸다. 그러자 진교는 할 말을 잃은 채 그런 질문을 하는 나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키우던 거에서 하나씩 뽑아온 거야. 내 것을 너에게 나눠준 거라고. 네가 잘 키워달라고. 나는 알았어, 하고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대신 꼭 대학에 들어가. 나는 가볍게 헤어져 줬다. 그러나 여운은 오래갔다. 내가 대학에 다니지 않아서 진교가 떠난 것만 같았다. 진교가 대학생이었다면 나는 그렇게 쉽게 헤어지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화가 나서 진교가 준 선인장들을 화분 몇 개에 무작위로 심어둔 채 방치해 버렸다. 그러나 선인장들은 물도 주지 않았는데도 잘도 자랐고, 내가 진교를 잊어버릴 즈음 선인장들도 내 기억에서 벗어났다.
남편은 진교와 같은 풋사랑을 몇 번 더 겪은 다음에 만난 사람이었다. 나는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나온 뒤 몇 군데 회사를 더 전전했다. 그러다 건설회사에서 경리업무를 하다가 만난 사람이었다. 남편은 대기업의 건설회사 대리였고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화를 삭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내가 약속 시간에 늦게 나타나도, 그가 선물한 물건을 잃어버리곤 해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렇게 비싼 거 아니었다, 하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는 어머니처럼 험하게 욕설을 하지 않았고 아버지처럼 술을 즐기지도 않았다. 진교가 주는 불확실한 미래를 보여주지 않았고, 몇몇 남자친구들처럼 양다리를 걸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학에 안 다닌다고 업신여기지 않았다. 그 때 나는 다시 또 직장 생활에 조금 신물이 날 즈음이기도 했다. 내 능력이라고는 한낱 계산이나 하고 차 심부름을 하는 것이 아니면 불특정 다수에게 승차권을 파는 일 뿐이었다. 그러니 세상사는 재미가 있을 턱이 없었다.
남편과 데이트를 해오다 그마저 실증이 날 즈음, 나는 남편에게 물었다. 나, 대학 보내줄 수 있어요? 나는 지겨운 데이트를 끝내자는 말이었는데 남편은 청혼으로 받아들였다. 남편은 큰 눈을 몇 번 껌뻑껌뻑 하더니 내 어깨를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 당겼다. 남편의 가슴에서는 늘 땀냄새가 풍겼다. 남편은 아버지처럼 왜 대학에 가려고 하는지 묻지 않고 바로 그럼, 하고 대답했다. 그 두 음절의 울림 속으로 나는 풍덩 빠져들었다.
남편이 말했다. 뭐부터 하고 싶은데? 나는 책상 앞 의자에 앉아있는 것만으로 좋았다. 원목 냄새가 좋고 가죽의자에 허리를 깊숙이 넣고 앉는 기분이 좋았다. 식탁 의자와는 차원이 다른 쿠션감을 나는 오래도록 만끽하고 싶었다. 실컷 책 읽고 싶어. 남편은 내 머리를 손바닥으로 몇 차례 문지르고 내 방에서 나갔다. 내 방에서 남편의 뒷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다.
다음 날 나는 혼자서 대형 서점에 갔다. 어디를 가든 남편과 동행을 하던 때와 다르게 나 혼자 서점에 가겠다고 남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서점에 도착한 나는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 책장에 꽂아 두면 좋을 법한 책들을 주섬주섬 집어 들었다. 나는 책들을 집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기왕이면 두툼한 책을 골랐고 값이 비싼 책을 집었다. 역사책, 인문서적, 소설책들을 구입했다. 그러고 나서 서점에서 마련한 서비스센터로 가서 보무도 당당하게 배달 서비스를 부탁했다. 책들이 배달되자마자 책꽂이에 하나씩 꼽았다. 손바닥으로부터 피돌기가 일어서는 것이 느껴졌다. 짜릿했다. 이런 기분은 남편과의 잠자리에서도 느끼지 못한 쾌감이었다. 그날 저녁부터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어댔다. 고전문학, 이해되지 않는 월가이야기, 역사책들. 나는 책들을 스펀지로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읽어댔다. 그렇게 책들을 읽어가면서 가슴 속 깊이 숨겨 놓았던 대학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현대철학에 이르기까지. 들뢰즈, 비트겐쉬타인 등 내가 알고 있는 철학자의 이름이 방안을 비눗방울처럼 떠다녔다.
아버지는 술이 취해 들어와서도 책을 읽었다. 같은 책을 여러 번 읽기도 했다. 아버지는 읽을거리가 없으면 글자들을 읽어댔는데 옥편을 첫 장부터 끝 장까지 읽은 적도 있었다. 이야기도 없는 책을 읽는 아버지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활자 중독증으로 보아서는 딸을 대학에 보낼 법도 한데 그러지 않은 아버지를 어찌 생각해야 하는지. 아버지는 대학에서 법 공부를 한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자식 교육을 위해 생선이 든 대야를 머리에 이고 동네를 돌며 생물들을 팔았다. 아들의 학비를 벌어야 하는 할머니는 자신의 노동이 고생이 아니라 기쁨으로 여겼고, 아버지에 대한 기대치는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아버지는 할머니의 기대를 손바닥 뒤집듯이 배반해버렸다. 판검사를 깨끗하게 집어치우고 시골에 와서 농사를 지으니 할머니는 늘 아버지를 자신의 전 인생을 걸고 분노의 대상으로 삼았다. 대학만 나오면 뭐해! 밥값을 해야지. 할머니가 원하는 것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 아버지의 효도를 받으며 떵떵거리고 사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학생 운동에 몇 차례 가담한 뒤 꿈을 접었다고 들었지만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어머니고 아버지고 입을 다물었다. 대신 어머니는 지나간 일 끄집어내서 뭐하냐는 말로 더 이상의 질문을 거부해버렸다. 할머니의 희망을 잡초 뽑아내듯 한 아버지는 한량이 되었고, 할머니의 분노는 자연스럽게 딸만 줄줄이 낳은 어머니에게 불똥으로 튀었다. 이놈의 집구석은 되는 일이 하나도 없지. 마침내 할머니는 아버지와 살 수 없다며 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삼촌댁으로 거처를 옮겼다.
직장을 다니면서부터 나는 아버지에게 대학가겠다고 조르지 않았다. 등록금이 없으면 벌어서 가면 되지 하는 오기가 발동한 것은 월급날에 받아든 봉투 때문이었다. 월급봉투를 받은 다음 날은 어머니가 밥상 위에 돼지고기 볶음을 푸짐하게 올렸다. 나는 천천히 돼지고기의 비곗살을 젓가락으로 떼어내고 먹는 여유를 부렸다.
결혼 25년 만에 남편이 입시학원 종합반 수강증을 끊어 왔다. 남편이 받은 보상금 중 일부를 축냈을 터였다. 결혼할 때만 해도 나는 남편이 흰머리가 새하얗게 돋을 때까지 같은 직장에 다닐 줄 알았다. 그러나 대기업이라던 건설회사는 10년도 다니기 전에 부도처리가 되었고, 퇴직금조차 그 망해가는 회사의 깡통 주식으로 받았다. 남편은 몇 개월의 실업자 생활을 정리하고 대기업의 하도급 건설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하도급 건설 회사를 몇 군데 더 전전하다 오래된 주택을 헐고 재건축을 하는 일을 맡아 했다. 그러는 동안 남편은 엉성한 디딤판을 밟아 추락했다. 그 사고로 6개월 이상을 병원에 입원해야 했으나 남편의 허리는 아직도 구부정하게 되었고 왼쪽 무릎은 아직도 나사로 고정되어 있다. 그런 와중에도 서울에 우리 가족이 살 보금자리를 마련한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 보금자리를 담보로 대출을 받아 생활을 이어가고 있으니 서울생활을 고집한다는 것은 부채만 누적되는 꼴이었다. 이제는 남편에게도 기댈 수 없는 상황이 아니던가. 지금까지 일한 남편을 쉬게 해주고 싶었다. 남편의 머리는 흰머리가 앉더니 이제는 알감자를 필러로 돌려 깎다만 것처럼 대머리가 된 지 오래 전 일이었다. 남편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해서인지 월급이 밀렸어도 임금을 정당하게 요구하지 못했다. 나는 이럴 때 어머니처럼 앙칼지게 따지지 못한 것이 억울하기만 했다. 어머니가 내 입장이라면 분명 팔을 걷어붙이고 돈을 받으러 갔을 터였지만 나는 악다구니도 쓰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30년이 지난 다음에 찾은 입시학원은 낯설고도 신비했다. 학원장은 강의실 문을 열자마자 알은체를 했다. 숨기라도 해야 하나, 하고 망설이는 동안 학원장은 학원의 이미지를 위해 접수를 받으면 안 되었지만 남편의 간곡한 부탁 때문에 접수를 해주었다고 해석하기 모호한 웃음을 띠고 말했다. 나는 불법 유턴을 하다 단속된 범법자의 얼굴로 학원장을 바라보았다. 봐줄 것인지, 딱지를 끊을 것인지 하라는 배짱이 목젖을 타고 나올 것 같아 침을 꿀꺽 삼켰다. 학원장은 이미 남편과 계약을 하지 않았나. 나는 학원장에게 물었다. 학원비 전액 환불되죠? 그러자 학원장은 꼬리를 바로 내렸다. 뭐, 사장님 부탁도 있고 해서 말이죠. 헤헤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결과 있어야죠.
첫날의 학원 수업은 기대와는 달리 졸음이 쏟아졌다. 강사들이 핵심 내용을 콕콕 찌르며 칠판에 몇 개의 별들을 형형색색으로 그려대고 있었지만 내 고개는 물을 먹지 못한 화초의 꽃대처럼 쉽게도 꺾였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부동자세로 앉아 들어주는 것이 이렇게도 졸리는 일인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음 시간에는 아예 고인 침을 훔치며 잠을 잤다. 조그만 소리에도 잠을 깨던 신경줄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졸음은 내게 시험을 걸었고 나는 쉽게 넘어졌다.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남편은 학원 밑에 차를 세워놓고 운전석에 앉아 졸고 있었다. 태양은 남편의 알감자 대머리의 땀방울까지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내가 보조석 문을 열자 남편은 깜짝 놀라 눈을 뜨면서 대뜸 물었다. 할만 해?
아버지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부러졌다. 후두암. 호기롭던 아버지는 쇠약한 늙은이로 전락했다. 살가죽이 뼈와 달라붙었고 체중은 급속도로 빠져갔다. 술과 담배를 끊었지만 병을 치유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기였다. 우리 가족들은 속수무책으로 아버지를 보내드렸다. 그래서 아버지가 가신 것이 더 믿어지지 않았고 그리움이 짙었다. 나는 결혼을 해서도 아버지에게 왜 나만 대학을 보내주지 않았느냐고 시비를 걸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마른기침을 한 다음 말했다. 밥이 많아야 비벼도 먹고 물에 말아도 먹지. 나는 지지 않고 말했다. 밥이 조금이면 거기에 각종 채소를 넣고 비비면 밥 양이 많아지는 걸 생각 못해 봤어요? 시집 갔으면 네 남편에게 보내달라고 해라. 남편이 대학 보내는 사람이에요, 아버지? 나는 이제 아버지의 최대의 단점을 잡아 싸가지 없게 대들 수가 없게 되었다. 술을 마시고 부르는 ‘즐거운 우리집’을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지식인이었지만, 자식들에게는 그 지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지 않았고 무능한 한량의 이미지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할만 하냐고? 남편은 재차 내게 물었다. 나는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첫날부터 잠을 잤다는 말을 어찌 하는가. 어깨에 맨 가방은 어깨를 무겁게 눌렀다. 나는 대답대신 신경질을 부렸다. 여태 집에 안가고 여기서 기다렸던 거야? 내가 길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드디어 나만의 공간인 서재에 들어왔다. 입시공부 책들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내일의 시간표를 점검했다. 입시 책들 위로 철학자들의 이름이 떠다녔다. 하필이면 철학이라는 단어가 떠올라 발음하게 되는지. 철학. 두 음절을 발음할 때 혀끝이 입천장을 닿았다 떨어졌다. 묵직하면서도 고고한 느낌이 들었다. 공자, 맹자, 순자, 장자, 한비자 하고 중국철학자들을 입으로 되뇌어 보았다. 벌써 중세로부터 고대로 내려가면서 오래된 시간으로 여행을 가는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는 잠들기 직전까지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었다. 참나무로 만든 책상은 아버지의 손때가 묻어 색은 더 진해지고 윤이 나 멋스러웠다. 아버지는 양반다리를 하고 허리를 좌우로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책장을 넘겼다. 스르륵 하는 소리가 방안을 청량하게 울렸다. 아버지 옆에는 어머니가 털실로 갖가지의 물건을 떠냈다. 아버지의 조끼를 완성하는 것은 일도 아닌 성 싶었다. 밥상포를 뜨고, 커튼을 뜨고 언니가 입던 털 원피스를 풀어 나를 위한 개바지를 떴다. 어머니의 털실 바구니 옆에서 우리 세 자매는 어머니의 빠른 손놀림을 구경하며 털장갑을 자연스럽게 뜨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의 책장 넘기는 손은 진지했고 콧구멍조차 벌름거리지 않았다. 그럴 때 아버지는 너무나 근엄해서 감히 대들 수 없었다. 그렇게 책밖에 모르는 아버지가 내게는 왜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을까. 공부를 해서 뭐 하려고? 아버지는 대학 보내달라는 내게 질문인지 자문이지 모르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아버지는 세상 모든 것을 아는 사람 같았다. 동네에서 말다툼이 일어나도 경찰보다 아버지를 찾았고, 동네 주민들이 함께 먹는 정수장의 수도가 얼어붙어도 아버지를 찾았다. 사람들은 아버지가 술이 취하든 아니든 상관없이 찾았다. 부부싸움을 해서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집으로 찾아와 며칠이고 잠을 자고 갔으며, 도박을 하다 경찰에 쫓겨도 우리 집 벽장에 숨어들었다. 사람들은 두고두고 감사했지만 우리 세 자매는 방을 비워줘야만 했다. 그리고 이불 대신 어머니가 뜬 털옷을 두껍게 입고 새우잠을 자야했다.
결혼 후 남편은 나를 대학에 보내주겠다던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나 역시도 결혼 초에는 아이가 생겨 대학갈 생각조차 못했고, 아들 둘이 커가는 동안 대학이라는 말을 입에 붙이지 못했다. 그래서 모든건 시기가 있나보다 하고 포기할 즈음이었다. 더 이상 남편은 건축 일로 돈을 벌수 없었다. 오래된 집을 헐어내며 집을 지어도 건축업자를 돈 벌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주의 주머니만 두둑해질 뿐이었다. 또한 남편의 사고는 건설업에 종사할 수 없다는 선전포고와도 같았다. 남편과 나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하나 있는 집으로 노후까지 견뎌내야 하는 마당이라 자못 심각했다. 무엇보다 빚을 줄여야만 했다. 이참에 이사 가자. 나는 더 이상 집에 많은 돈을 묻어두고 싶지 않았다. 집을 팔아 부채를 청산하고 소도시로 이사한다면 노후 자금을 은행에 적금 형식으로 묻어둘 수도 있었다. 부부가 소박하게 살 집을 찾던 중 큰 평수와 작은 평수의 아파트 가격이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큰 평수에서 살자는 쪽으로 결정을 하니 50여 년 동안 주장했던 혼자만의 방은 싱겁게 해결이 되어버렸다. 대신 이제라도 대학에 들어가야지 하는 생각만이 간절해 졌다.
저녁밥을 먹으며 남편이 물었다. 뭘 공부하고 싶다고? 남편이 처음으로 내게 무슨 공부를 하고 싶은지 물은 것이었다. 철학, 하고 대답하자 남편은 잘못 들었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철학이라고! 나는 무표정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사회복지학이니 노인복지 그런 게 아니고? 남편은 또다시 물었다. 나도 늙어가는 마당에 얼어 죽을 노인복지야? 이 나이에 양로원이라도 차리란 말야? 나도 노인이야. 그 나이에 공부하려면 쓸 만한 공부를 해야지? 해외여행 가서 한 마디라도 써먹으려면 중국어라도 하든지. 철학 공부해서 뭐하게? 뭐하긴? 철학자들의 사상을 공부한다는 거지. 소크라테스, 공자 뭐 그 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했나 알아보는 거. 왜 내가 그런 거 공부하면 안 되는 법이라고 있어? 나는 숟가락을 탕, 소리가 나도록 놓았다. 당신은 왜 그 나이가 되도록 철이 안 드냐. 남편도 숟가락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철학을 공부하고 싶은 것은 나의 근원을 찾는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터미널 부스 안에서 표를 팔 때 티켓 한 장으로 서울로, 부산으로, 대구로, 광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무작정 버스에 올라보고 싶었던 시절. 그러나 단 한 번도 일탈의 꿈을 실현해 보지 못했다. 대학에 들어간 친구들과는 자격지심으로 만날 수 없을 때, 남자친구들마저도 대학에 가거나 군대에 가겠다고 나를 떠나갈 때부터 였다. 아버지가 책 속에 혹은 술 속에 빠져 있는 이유를 알고 싶었을 때 나는 그 이유를 누군가에게 물어보기보다는 한없이 산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야트막한 산길을 오르면 몇 백 년이 넘게 살아온 소나무가 있었는데 거기서는 물이 흐르는 강을 볼 수 있었다. 그 강물 역시도 수만 년, 수억 년을 그렇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강물을 흘려보냈을 터였다. 나는 그 소나무 밑이 좋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도도하면서도 유유히 흐르는 강물의 근원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 보는 것이 좋았다. 그 무렵 나는 고속버스 터미널에 더 이상 근무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부스 안에 들어서면 갑갑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월급을 챙긴 다음 사표를 냈다. 이유는 대학을 가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갑갑하고 답답한 기분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속이 터질 것 같아서 못 다니겠다고요. 나는 갑자기 직장을 그만 둔 이유를 묻는 어머니의 질문에 솔직하게 말했지만 어머니는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가 처음으로 나를 두둔하셨다. 애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잖아. 평양감사도 지 싫으면 그만인 거 몰라? 답답한 건 당신이야. 그럼 돈 버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았어?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만 뒀지.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는 동안 나는 운동화를 갈아 신고 소나무 밑으로 천천히 걸었다. 대학에 다녀도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일까. 대학교 졸업을 해도 직장을 다녀야 하나? 언니는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보란 듯이 중학교 영어선생이 되었고 여름 방학 때 한 번 다녀갔다. 언니는 큰 소나무 같고, 나는 그 소나무에 기생하고 있는 버섯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오솔길로 오르는 길에 소주 한 병을 샀다. 그리고 그 소주를 소나무 밑에서 멀리 흐르는 강물을 보면서 홀짝홀짝 마셨다. 술을 마시니 웃음도 나고 기분도 좋아졌다. 하늘도 파랗고 물도 파랗고 마음도 파랗고 하며 나는 연신 웃음을 흘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그 때였을 것이다. 파란 마음이 왜 되는 것인지 그 마음속을 파고들어 가보자고.
달포도 되지 않아 나는 다시 직장에 나가게 되었다. 이번에는 인쇄소였다. 인쇄소에서 내가 하는 일은 학교에서 쓰는 시험지를 인쇄하면 그 개수를 세거나 파지를 찾아내 다시 인쇄를 하는 일이었다. 일은 무척 쉬었으나 눈은 하루 종일 아팠다. 나는 6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그만 두어야 했다. 이번에 발목을 잡은 것은 몹시도 심한 안구 건조증 때문이었다. 내가 직장을 그만둘 때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싸움 강도가 높아졌고 나는 다시 소주 한 병을 사서 소나무 밑으로 올라갔다. 도도히 흐르는 물줄기는 한 번도 역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아버지에게 술주정을 했다. 왜 물은 한 방향만 흘러간대요, 아버지? 아버지는 세상 것 다 아시니까 대답해 주세요. 지진도 안 나고 태풍도 안 불어요? 아버지에게 술주정을 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갑자기 나타나서 싸릿대로 만든 빗자루로 등허리를 후려쳤다. 지랄을 한다, 지랄을 해.
다음 날 아침 나는 아버지 앞에 두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가 물대접을 날린다 해도 겁날 것이 없었다. 아버지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내게 물었다. 너, 뭐 잘못했냐? 말해 봐라.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것은 없었다. 잘못한 거 없는데요, 아버지. 그러면 왜 무릎은 꿇었냐? 잘못한 거 없다면서? 나는 한 2초쯤 생각하다 양반다리로 고쳐 앉았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다. 싸가지 하고는. 똑바로 못 앉아! 순식간에 베개가 내게 던져졌다. 내가 가르쳐 줘? 너는 첫째도 싸가지 둘째도 싸가지가 없어. 근데 왜 아버지는 나를 쥐 잡듯이 잡는 건데? 어디다 대들기를 대들어? 싸가지 없이.
학원 숙제를 하기 위해 책상에 앉았지만 졸음이 쏟아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수학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영어. 단 한 문장도 해석되지 않았다. 국어. 뭐가 그리 복잡한 것인지. 시험 안 보고 가는 대학은 없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 책상에 엎드렸고, 침을 흘리고 잠을 잤다. 선잠을 자다 일어나 다시 수학책을 뒤적이다 좌절을 했고 영어 단어를 외우다가 나의 한계를 깨달았다. 천천히 진도를 나가자고. 내가 당장 신학기에 대학 들어가는 것은 아니잖아. 나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도 좌절의 늪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그래도 학원은 빠지지 않고 나갔다. 한 달만이라도 채워야 하지 않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한 달을 공부해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한국말이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인지. 학원 공부가 끝이 나면 아이를 마중 나온 학부모처럼 남편은 알감자를 내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은근히 포기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말이다. 할만 해? 하고 묻는 남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완연했다. 이 좋은 날 어디 여행이라도 가면 얼마나 좋겠냐, 여보. 남편은 은근히 내 속을 떠 봤다. 대학 들어간 다음에. 나는 기죽지 않으려고 그렇게 말했다. 다 때가 있는 법이야. 남편은 다시 싸움을 걸어왔다. 있지 그럼. 고진감래라는 말이 있고말고.
남편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아무 말 없이 차를 모는 남편은 집 쪽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핸들을 돌렸다. 편백나무들이 큰 아름을 이루고 있는 가로수 길이었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나는 조금 전에 학원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날리는 기분이었다. 저절로 와~ 하고 탄성이 나왔다. 남편이 말했다. 차를 어디다 세워두고 걸어볼까? 나는 순간 학원숙제, 하는 말이 터지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남편의 탄식도 흘러나왔다. 남편은 숨을 깊게 내쉰 다음 금세 평정을 찾았다. 한 번에 가자! 딱 한 번에! 나는 남편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한 번에 대학갈 실력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는 안 돼. 나는 일단 꼬리를 내렸다. 그러자 남편의 일장 연설이 시작되었다. 이제 황혼을 평안하게 여행하며 즐길 때라고, 우리는. 그 나이에 학원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어야겠냐. 대학 나온다고 달라지는 게 있어? 이제 와서 이력서를 쓸 것도 아니잖아. 아이들 제 앞가림 하는 나이고. 남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꿈꾸었던 대학은 어떻게 되고? 나는 남편에게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또 해야 했다. 내가 왜 당신과 결혼한 줄 알아? 당신이 대학 보내준다고 해서였다. 당신 좋아서 결혼한 거 아니었다구. 우리 아버지가 나만 대학 안 보내고 직장 다니게 해서 두고두고 원망한 거 당신은 몰라? 그걸 아는 사람이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나는 수십 년간 되풀이한 말을 다시 해야 했다. 남편이 오리구이나 먹으러 가자, 하고 나의 신파조를 잘라버렸다. 남편과 신경전을 벌이다 보니 그 아름답던 가로수 길도 사라져버렸다. 배도 고팠다.
훈제 오리구이 집은 남편과 몇 번 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남편은 음식이 나오는 동안 나를 설득하려 들었다. 요즈음 대학 등록금이 엄청난 거 알지? 꼭 가야만 하겠냐? 그동안 고생도 했으니 좀 편안하게 좋은 거 먹으면서 여행도 가고 그렇게 안 되겠어? 나는 남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러는 사이 불판에는 고기가 먹음직스럽게 구워지고 있었다. 나는 훈제오리를 젓가락으로 이리저리 뒤집으며 한 점을 골라 남편 입에 넣어주었다. 이제 아무 말 없이 오리구이나 먹자는 뜻이었다. 나는 잘 구워진 오리 한 점을 소스에 찍어 쌈무에 얹졌다. 소주 생각이 간절했지만 남편의 굳은 표정 때문에 사이다를 시켰다. 남편은 내가 주문한 사이다를 병째 꿀꺽꿀꺽 마셨다. 나는 카운터에 대고 콜라, 하고 외쳤다. 콜라의 톡 쏘는 맛은 소주를 진하게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제 학원에서 졸기는 하지만 대놓고 자지는 않는다. 조금씩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이 오기 시작했다. 수학은 중학교 시절로 돌아간 지 오래였지만 머지않아 미적분을 공부할 날이 올 것이다. 학원에서 돌아오면 남편이 차려놓은 식탁에 앉아 남편과 저녁을 먹으면서 학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남편은 나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 주었다.
혼자만의 방에서 영어 CD를 들으면 무슨 말을 하는지 조금씩 귀가 터지고 있을 즈음이었다. 남편이 나만의 방에 들어오겠다며 노크를 했다. 나는 의자에 앉아 남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당신, 버스타고 집에 올 수 있겠나? 나는 입술을 쭉 빼물고 남편이 무슨 말을 더 해 주길 기다렸다. 저기, 박 사장이 일을 같이 하자고 해서. 박 사장? 나는 깊은 숙면에서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다소 과장되고 호들갑스런 표정을 지어 물었다. 박 사장은 남편과 옛집을 헐고 재건축하는 일로 함께 일했던 사람이었다. 홍천에서 실버타운을 짓는데. 그래서? 나는 남편의 손을 잡아 방바닥에 주저 앉혔다. 출퇴근을 할 수 있는 거리도 아니었다. 남편이 동의를 했다면 넓은 집에서 나 혼자 살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또한 남편을 더 이상 일 시키지 않겠다던 결심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나는 다급해졌다. 노인들을 위한 빌라 촌을 만드는 모양이야. 한 2년은 걸린데.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한 2년만 고생하다 오면 돼. 안된다고!
나는 남편의 왼쪽 다리를 상기시켰다. 안전장치도 없다시피 한 작업장에서 일을 하다 허리를 다치고 무릎 뼈가 부러져 나사로 고정되어 있는 그 다리를 말이다. 그 다리에 박혀있는 나사를 빼기 위해 또 한 번의 수술이 기다리고 있었다. 험한 일을 하지 않으려 지방으로 내려온 것이 아니던가. 남편도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닐 터였다. 남편의 거친 손이 내 손을 덮으며 말했다. 당신 대학 들어갈 때까지만 하려고.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남편의 속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긴 한 숨을 쉬었다. 남편도 덩달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서로를 설득하여야만 할 것이었다. 하필이면 이런 와중에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밥이 많아야 비벼도 먹고 물에 말아도 먹지. 나는 각종 채소를 넣어서 밥의 양을 부풀려 보려 하지만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전예숙 / 1966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났으며 1992년 『자유문학』 소설, 1996년 시로 등단했다. 시집 『비보호 좌회전』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