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태고종 송암 대종사가 2000년 2월 1일 열반했다. 승랍 67세, 세수 86세였다. 운허 스님을 은사로 봉원사에서 출가한 송암 대종사는 1998년 태고종 승정에 이어 1999년 대종사로 추대됐다.
송암 대종사는 태고종의 최고위직이었으면서, 영산재(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던 모습을 재연한 불교의식)를 우리나라 불교문화의 대표적인 전통의식으로 되살려낸 인물이다.
1973년 벽응 스님과 함께 중요무형문화재 50호 보유자로 지정됐고 1987년 ‘봉원사 영산재’가 ‘종묘제례악’과 ‘전주대사습놀이’에 이어 무형문화재 단체지정을 받은 이후 영산재 보존회의 총재를 맡아왔다. 스님은 출가 이후 당시 범패(부처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의 최고로 꼽혔던 월하 스님을 시봉하면서 어깨 너머로 범패를 배웠다. 영산재에만 그치지 않고 봉원사 강원을 졸업하고 여러 선원에서 6안거(해마다 여름과 겨울에 3개월씩 선방에서 수행함)를 성만하는 등 선교를 두루 섭렵하기도 했다.
영산재 보존회 부설 범음대학 학장도 지냈으며 1994년 정부로부터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조선
[1991년] 데 클레르크 남아공 대통령, 인종차별법 폐지 발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본격적인 개혁은 1989년 총선으로 집권한 대통령 드클레르크(de Klerk, Frederik Willem, 1936~ )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 결과 1990년 2월 ANC의 의장 넬슨 만델라(Mandela, Nelson, 1918~ )가 석방되고 흑백분리법이 폐지되었으며, 1991년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드, Apartheid)의 근간법인 인구등록법의 폐지가 의회를 통과했고, 신헌법제정이 추진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때 평화협상이 좌초되기도 했지만, 1994년 4월 27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다인종 자유선거가 실시되어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naver
[1989년] 한국-헝가리 국교 수립(공산권 국가 최초)
← 최호중 외무장관(오른쪽)과 호른 주라 헝가리 외무담담 국무비서가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에 관한 합의 의정서’에 서명 후 악수하고 있다.
한국과 헝가리 양국정부가 1989년 2월 1일 대사급 공식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공산권 국가와의 첫 공식 외교관계 수립이었다. 최호중 외무장관과 방한중인 호른 줄라 외무담당 비서(차관)는 이날 오전 서울과 부다페스트의 상주대표부를 상주대사관으로 격상시키기로 합의, 양국수교합의 의정서에 서명했다. 이에따라 양국은 이날 서울과 부다페스트에 상주대사관을 개설, 각각 현판식을 가졌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수교국수는 모두 1백31개국으로 늘어났다. 우리나라의 헝가리 주재 초대 대사에는 한택채 상주대표부 대표가 임명됐으며, 헝가리 역시 에트레 산도르 상주대표부 대표가 초대 대사에 임명됐다. 최 장관은 이날 호른 줄라 비서와 문화협정-외교관 및 관용여권소지자에 대한 사증 면제협정에, 곰보스 졸탄 무역부차관과 무역 및 경제협력 협정에 각각 서명했다. 한편 북한은 헝가리와 맺어왔던 대사급 수교관계를 대리대사급 수준으로 낮춰 한국-헝가리의 수교에 대한 불만스런 심기를 드러냈다./조선
[1979년] 이란의 종교지도자 호메이니 귀국
← 호메이니
프랑스에 망명 중이던 이란의 최고 종교지도자 호메이니(Khomeini, Ayatollah)가 1979년 2월 1일 에어 프랑스 특별기편으로 테헤란 공항에 내렸다. 1964년 팔레비 정권에 의해 이라크로 추방된지 15년만의 귀국이었다.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군중 앞에서 그는 팔레비 왕(Pahlevi, Mohammad Reza Shah)이 임명한 바크티아르 내각을 ‘불법’으로 선언했다. 2월 9일 테헤란 교외에서 호메이니를 지지하는 군인들이 봉기했으며 이틀 뒤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그 해 말 국민투표를 통해 채택된 이란의 새 헌법은 호메이니에게 최고 정치-종교 지도자의 지위를 부여했다.
호메이니는 이란을 알라신과 이슬람 법률이 지배하는 국가로 변모시켰다. 서양음악과 음주가 금지되고 남녀공학이 폐지됐으며 여성들은 얼굴을 베일로 가려야 했다. 호메이니는 또 팔레비 정권의 핵심인사는 물론 자신에게 비판적인 인물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이란 현대사의 두 주역은 팔레비 국왕과 호메이니였다. 1960년대 초 이란 국민의 90%를 차지하는 이슬람 시아파의 최고지도자 `대 아야툴라`가 된 호메이니는 반정부 운동의 선봉에 섰다. 팔레비 정권은 1963년 그를 투옥했고 1년 뒤 강제추방했다. 이라크에 머물며 반팔레비 운동을 계속하던 호메이니는 1978년 10월 후세인에 의해 여기서마저 쫓겨나자 프랑스 파리로 옮겨갔다. 1978년 말 이란의 상황은 급박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12월 초 이란 전역에서 종교지도자, 야당, 인권운동가, 학생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시위대들은 호메이니의 대형 사진을 내걸고 팔레비 국왕의 사퇴를 요구했다. 시위 진압 과정에서 수천명이 사망했고 이란은 내전상태로 들어갔다.
이란 혁명은 팔레비와 호메이니의 운명을 뒤바꾸어 놓았다. 1979년 1월 6일 팔레비는 이란을 떠나 1980년 7월 이집트서 사망했고, 호메이니는 죽을 때까지 이란의 절대적 통치자로 군림하며 이슬람 혁명의 수출에 힘씀으로써 인접 아랍국가의 지도자들을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다. /조선
[1977년] 현대인의 근원을 일깨워준 ‘뿌리’ 방영
← 앨릭스 헤일리
1977년 2월 1일 미국인들은 TV 앞에서 한동안 떠날 줄 몰랐다. ABC가 8일간 연속 방영한 미니시리즈 ‘뿌리(Roots)’가 끝나자 그들의 눈에선 눈물이 분출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와 자유를 찾는 감동적인 ‘흑인 스토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뿌리’에 대한 향수와 미국 땅에 흘러 들어온 과정을 반추하는 이민자 특유의 감상도 작용했다.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식을 치른 다음 해에 일어난,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었다. ‘뿌리’는 흑인 작가 앨릭스 헤일리(1921∼1992)가 자신의 가계를 9년 동안 추적해 완성시킨 소설이었다. 주인공은 서부 아프리카 감비아에서 노예로 잡혀온 쿤타 킨테로, 6대에 걸친 모계측 내력을 담았다. ‘뿌리’는 37개국에 번역됐고, 전 세계 수억명이 이 드라마를 시청했다. 텔레비전에서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능가할 정도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 작품으로 헤일리는 1977년 퓰리처상을 받았지만, 일부 흑인들로부터는 비판을 받았다. "흑인들의 ‘과거’를 재조명하는데 기여했으나 ‘오늘’을 밀도 있게 발언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헤일리가 흑인 인권운동에 소극적이었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뿌리’를 본 시청자는 미국 TV사상 최대 숫자였다. 흑인뿐 아니라 현대인 모두에게 잃어버린 ‘근원’을 일깨운 것이 성공의 비결이었다./조선
[1968년] 경부고속도로 기공
경부고속도로(京釜高速道路)는 부산과 서울을 연결하는 고속도로이다. 고속국도 제 1호이다. 총길이는 417Km이다. 건설에는 한일기본조약에서 얻은 차관이나 미국에서 베트남전쟁에서 파병의 대가로서 받은 자금이 사용되고 이른바 한강의 기적의 상징으로서 소개된다.
1968년 2월 1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착공되었다. 1970년 7월 7일에 모든 구간이 왕복 4차선 도로로 개통되었으며, 중부고속도로가 건설될때는 왕복 6차선으로 확장 되었다. 특히, 1995년 2월부터는 서초 나들목에서 신탄진 나들목까지 버스전용차로가 지정되어서, 대중교통이용의 효율성을 높이고 있다. /위키백과
[1955년] 동아일보에 만화 ‘고바우’ 연재 시작
← 고바우, 만화캐릭터
김성환(金星煥, 1932~ )의 만화 '고바우 영감'은 1955년에 탄생했다. 동아일보에서 '고바우 영감'이 연재되기 시작하자 경향신문에 김경언의 '두꺼비', 서울신문에 김규리의 '도토리' 등이 속속 생겨났고, 이후 4컷 만화와 1컷 짜리 만평 등 신문 시사만화의 전성시대가 도래했다. '고바우 영감'은 동아일보를 거쳐, 80년대에는 조선일보, 92년부터는 문화일보에서 국민들과 호흡을 함께 해왔다.
그의 만화는 암울했던 독재정권 시대에 날카로운 풍자로 이름을 날렸다. 선우휘는 "나는 고바우를 보면서 남몰래 웃는다. 그것은 나 스스로에 대한 위안의 웃음이요, 자책의 비웃음이며, 더러는 작은 저항의 웃음이기도 하다."라고 했다. 때문에 김 화백은 필화사건도 수 차례 겪어야만 했다. '경무대 변소통'(1958.1.25)이나 '인혁당 무죄판결'(1965.1.21)은 널리 알려진 만화다.
가장 무서웠던 순간은 잔치 중에 쥐가 들어와 개가 이를 쫓으려다 상을 엎는다는 내용의 만화를 냈던 60년대 어느날이었다. 군복 입은 괴한들을 태운 지프차가 집 앞에 나타나 가족들을 위협했다. 이들이 ‘선혈’이니 어쩌니 암호를 대던 소리도 들렸다. 만화의 개는 군부를, 쥐는 '빨갱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분명 대통령이 그 만화를 보고 화를 냈을 게야..." /<신문과방송> 2000년 12월호 /Google
[1952년]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창설
대한민국 재향군인회는 재향군인의 친목을 도모하고 국가발전과 사회 공익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1952년 2월 1일 부산에서 제대장병 3만여 명의 회원을 시작으로 창설되었다. 1961년 5월 8일 WVF(World Veterans Federation:세계재향군인연맹)에 회원국으로 가입하고 이사국으로 선임되었다. 1961년 5월 10일에는 대한민국재향군인회법이 공포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해산되었으나, 같은해 12월 12일 재건총회를 열고 활동을 재개하였고, 1965년 6월 8일 제49차 국무회의에서는 대한민국재향 군인회가 WVF에 가입한 5월 8일을 ‘재향군인의 날’로 정할 것을 의결하였다. 재향군인회는 조직활동으로 각급 회를 증설 및 조정하고 해외조직을 설치하며 체육대회 등 각종 행사를 개최하고, 안보활동으로는 향토예비군과 민방위대 창설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으며 총력안보운동본부와 차량기동계도반, 특별안보계도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복지활동의 일환으로 복지기금을 조성하여 불우회원 생활보조, 장학금 지급, 국군장병위문 등의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1919년] 대한독립선언 선포
일명 무오독립선언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대한독립선언’은 1919년2월1일 중국 동북부 길림성에서 만주와 러시아지역의 항일 독립운동지도자 39명이 모여,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맞춰 조국독립을 요구한 선언을 말한다. 독립선언서는 조소앙이 기초하고, 박은식 등 독립운동가 39명이 모여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최초로 선포한 것으로서, 이후 2.8독립선언과 3.1독립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음력으로 1918년 무오년에 선포되었다 하여 '무오독립선언서'라고 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서이다. 독립선언서 전문의 내용으로는 다음과 같다. ① 일본의 합병동기는 범일본주의(汎日本主義)를 아주(亞洲)에 펼치는 것으로 동양의 적이며, ② 일본의 합병수단은 사기·강박·불법·무력에 의한 것이고, ③ 일본의 합병결과는 정치적·경제적 압박으로 종족을 말살하고 종교를 협박하며 교육을 제한하여 세계문화를 저해하는 것으로 인류의 적이라고 규정하고, 하늘의 뜻과 인간의 도리와 정의와 법리(法理)에 비추어 합병은 무효이다.이 독립선언서에는 김교헌, 김규식, 김동삼, 김약연, 김좌진, 김학만, 여 준, 유동열, 이 광, 이대위, 이동녕, 이동휘, 이범윤, 이봉우, 이상룡, 이세영, 이승만, 이시영, 이종탁, 이 탁, 문창범, 박성태, 박용만, 박은식, 박찬익, 손일민, 신규식(신정), 신채호, 안정근, 안창호, 임 방, 윤세복, 조용은, 조 욱, 정재관, 최병학, 한 흥, 허 혁, 황상규 등 39인이 동참하였다.
[1919년] 한국 최초의 근대적 문예 동인지 ‘창조’ 창간
← <창조> 창간호(1919. 2)
1919년 2월 1일 일본에 체류하던 유학생들이 도쿄[東京]에서 한국 최초의 종합 문예동인지 <창조>를 창간했다. 창간동인으로는 김동인·주요한·전영택·김환·최승만 등 5명이 참여했다. 국판 100면 안팎의 체제인 이 동인지를 통해 시 70여 편, 소설 21편, 희곡 4편, 평론 16편, 번역시 49편이 발표되었다. 이 동인지는 그때까지 신문학이 가진 계몽주의 성격을 청산하고 구어체 문장을 확립했다. 또한 새로운 문학사조인 자연주의 및 사실주의 문학을 개척했으며, 본격적인 자유시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과 <배따라기>, 주요한의 <불놀이>, 김소월의 <그리워> 등이 <창조>를 통해 발표되었다. 이 동인지는 1921년 5월 30일 통권 9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브리태니커
[1917년] 독일, U보트를 동원한 무제한잠수함작전 본격 전개
1917년 2월 1일. 독일이 150척의 U보트를 동원해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주변해역에서 무경고무제한 잠수함작전을 재개했다. 1916년 5월부터 독일은 미국의 참전을 막기 위해 무제한 잠수함작전을 중지했었다. 그러나 영국의 해상봉쇄로 독일국민은 식량난에 시달렸고 전쟁전부터 소비식량의 20%를 수입에 의존해오던 독일에 있어서 해상봉쇄는 타격이 컸다.
1917년 1월 29일 독일은 자국의 기업과 국민이 전쟁에서 받은 손해를 배상하라는 내용의 강화조약을 연합국에 제시했으나 연합국은 당연히 이를 거부했고 독일은 이를 핑계삼아 이날 무제한 잠수함작전에 돌입했다. /조선
무제한잠수함전 [Unrestricted Submarine Warfare]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적국, 특히 영국을 공격하기 위하여 취한 해전전술.
독일은 1915년 초부터 잠수함으로 영국에 대한 통상(通商) 파괴작전을 개시하였으며 영국은 이에 대해 해상봉쇄를 감행하여 맞섰다. 1917년 독일 군부와 보수정당은 영국의 해상봉쇄에 대항하기 위하여 무제한 잠수함전의 실시를 정부에서 강요하게 되었다. 이에 독일정부는 2월 1일부터 유럽 대륙과 영국 본토 주변간의 지정해역의 항행을 금지하고, 교전 당사국의 선박 및 중립국 선박의 이 해역항행은 침몰을 각오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유럽 여러 나라 및 미국 선박을 무차별 격침하기 시작하였다.
이 작전으로 독일은 영국을 반 년 이내에 항복시키게 될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이 작전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국내 여론을 자극하는 결과가 되어, 대(對)독일국교 단절과 참전의 계기가 되었다. 이후 연합국측은 독일의 잠수함전에 대비하여 호송선단(護送船團) 방식을 채용하였기 때문에 5월 이후 무제한 잠수함전의 효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naver
[1901년] 미국 영화배우 클라크 게이블(Clark Gable) 출생
← Clark Gable
미국 오하이주의 유전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게이블(Clark Gable, 1901.2.1~1960.11.16)은 농부·유전(油田)인부·외무사원·벌채인부 등 잡다한 직업을 거쳐 지방극단 배우에서 영화계로 들어가 갱(gang)역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의 우람한 체격과 넉살 좋은 성격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고, 특히 여성관객들 사이에는 할리우드 제1의 성적 매력을 가진 남자배우라는 평을 받았다. “어느날 밤에 생긴 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이후 오랫동안 할리우드의 왕자로 군림하면서 많은 대작에 출연하였다. 이 후 “바운티호의 반란, Mutiny on the Bounty(1935)”과 비비안리와 함께 출연한“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1939)”에서 아카데미상 수상후보자에 지명되었다. 3번째 부인이었던 여배우 캐롤 롬바드가 죽은 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공군에 입대하여 항공 훈장을 받고 소령까지 진급하기도 하였다.
[1883년] 고당 조만식(曺晩植) 선생 출생
← 조만식
1883년 2월 1일 태어남 / 1950년 10월 18일 죽음
"고향을 묻지 말자. 우리가 고국에 돌아가게 되면 피차 고향을 묻지 말고 일하자. 인화와 단결이야말로 국권을 회복하는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나라가 독립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다." - 조만식
조만식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정치가이다. 그는 인도의 독립운동가 마하트마 간디의 무저항주의와 인도주의에 공감해 이를 독립운동의 본보기로 삼았다. 3·1운동 직후 보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1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평양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평양 기독교청년회(YMCA) 총무로 취임하는 한편, 이듬해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해 국산품 장려운동을 전개했다. 41세가 되던 1923년에 김성수(金性洙)·송진우(宋鎭禹) 등과 연정회(硏政會)를 발기해 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했다. 1927년 신간회 활동에 참여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1932년에는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사를 인수해 언론을 통한 비폭력·무저항·불복종의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해방 후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취임했으며, 조선민주당을 창당해 당수로서 신탁통치반대운동을 벌였다./브리태니커
[1881년] 파나마 운하 기공
파나마운하(Panama Canal)의 굴착 계획은 1529년 코르테스의 건의를 받은 에스파냐 국왕 카를로스 5세에 의해서 구상되었으나, 실제로 공사가 착수된 것은 1880년 이후이다. 이보다 한 해 앞서 수에즈 운하를 완성시킨 프랑스의 레셉스(Lesseps, Ferdinand-Marie de, 1805~1894)는 7년 만에 운하를 완공하겠다고 장담하고 동시에 1881년 양대양(兩大洋) 주식회사를 설립,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복잡한 지형 때문에 수평식 굴착계획을 변경하여 갑문식 운하를 파기로 하였으나 황열(黃熱) ·말라리아 등이 만연한 데다 자금이 달려 9년 만에 공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1894년에 프랑스계 새 회사가 설립되었으나 이 회사는 그 당시 파나마 횡단철도를 완성하고 운하건설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있던 미국에게 가능한한 비싸게 운하굴착권을 팔아넘기는 데 가장 큰 목적이 있었을 뿐이었다. 1903년 미국은 프랑스 회사로부터 운하굴착권과 기계 ·설비 일체를 4,000만 달러에 구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콜롬비아 정부로부터 운하건설에 필요한 지역의 치외법권(治外法權)을 사들이려던 계획은 콜롬비아 상원에서 거부되었다. 그 후 파나마는 미국의 지원으로 콜롬비아로부터 독립을 획득하였으며, 이듬해 5월 4일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운하건설공사를 정식으로 인계받았다. 처음 2년 동안은 군의(軍醫) 고거스를 중심으로 철저한 방역대책이 실시되었으며 그 후 8년 동안 잇달아 일어난 절벽붕괴를 막는 한편 증기삽(steam shovel), 준설선(浚渫船) 등 새로운 공학(工學)의 진수(眞髓)가 모두 동원되었다. 또, 유럽에서 1만 2000명, 서인도 제도에서 3만 1000명 등 방대한 숫자의 노동력을 투입한 끝에 1914년 8월 15일 마침내 운하가 완성되어 8만 1237톤의 퀸엘리자베스호가 사상 최초로 이 운하를 통과하였다.
이후 85년 동안 미국이 관리해 온 파나마운항권은 1999년 12월 31일을 기해 파나마로 이양되었다. /naver
[1019년] 고려, 강감찬(姜邯贊) 구주(龜州)에서 거란군 격멸(구주대첩)
← 강감찬 장군 영정
귀주대첩(龜州大捷)은 고려 현종 때 거란 침략군을 구주(龜州)에서 물리쳐 승리한 싸움. 고려는 태조 때부터 발해를 멸망시키고 압력을 가해오는 거란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북진정책을 계속 시행하였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993년(성종 12) 소손녕(蕭遜寧)이 이끄는 제1차 침입이 있었으나 서희(徐熙)의 담판으로 압록강 동쪽의 땅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강동6주(州)가 군사적 거점이 되자 이를 차지할 목적으로 거란은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1010년(현종 1) 성종(聖宗)이 제2차 침략을 시도하여 개경까지 함락했으나 별다른 소득없이 다시 철수하였고, 이에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1018년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제3차 침략을 감행해왔다.
이때 고려는 강감찬(姜邯贊, 948~1031)을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천의 대군으로 맞서 싸우게 하였다. 거란군은 흥화진(興化鎭)을 통하여 내려오다가 그곳에서 패배했지만, 자주(慈州)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서경(西京)을 거쳐 개경 부근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병력의 손실이 크자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황해 신은(新恩)에서 회군하여 가다가 청천강 유역의 연주(漣州)·위주(渭州)에서 강감찬의 공격을 받아 대패했으며, 특히 구주(龜州)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였다. 이때 살아남은 병력이 수천 명에 불과하였을 정도로 거란의 패배는 심각하였고, 그 결과 거란은 국왕의 친조와 강동6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naver
그 밖에
2009년 베이징올림픽 8관왕 펠프스 마리화나 흡연 시인
2007년 서예가 김응현씨 별세
2003년 美 컬럼비아호 공중폭발, 승무원 7명 전원 사망
1994년 한국-오만, 문화협정 체결
1992년 승용차 10부제 실시
1989년 분단 후 처음으로 북한산 무연탄 2만t 남포에서 인천항에 직수입
1989년 ‘라디오 코리아’ 미 LA에서 개국
1989년 개인-기업의 해외부동산 투자 전면 자유화
1989년 세계일보 창간
1982년 서울지법, 윤노파살해사건 고숙종 피고에 무죄선고
1974년 브라질 사웅파울루시 호텔화재 220명 사망
1973년 비상각의, 국정감사폐지법 의결
1963년 장충체육관 개관
1963년 정치정화법 해당자 268명 2차 해제
1962년 한국광업제련공사 발족. 울산공업센터계획 발표
1962년 국민은행 개점
1962년 서울특별시, 내각수반 직속으로 승격
1961년 일본 우익청년, 중앙공론사장 살해
1958년 통일아랍공화국 성립
1953년 일본 NHK, TV 방송 개시
1953년 한국 바둑인 서봉수 출생
1952년 무기명 정기예금 취급 시작
1946년 헝가리 인민공화국 성립
1946년 비상국민회의 개최. 맥아더사령부, 이왕직(李王職)을 폐지
1944년 미군, 마샬군도 상륙
1944년 추상미술 운동의 대표적인 화가 몬드리안 사망
1943년 철도국을 교통국으로 개편(세관, 해사, 항공 등을 관계부문에 이관)
1939년 월간문예지 ‘문장’ 창간
1935년 최초로 종두법 도입한 지석영 선생 사망
1931년 러시아 연방 대통령 보리스 옐친 출생
1928년 한국 정치인 조순 출생
1924년 영국 소련 승인
1920년 독일, 나치스강령 발표
1909년 상해에서 제2회 아편금지회의
1908년 포르투칼 카를로스1세 암살, 2세 즉위
1906년 조선통감부 설치
1905년 미국 물리학자 세그레 출생
1902년 청조, 만인(滿人)과 한인(漢人)의 통혼 허락하는 유서와 전족금지령 공포
1901년 만주에 관한 러청밀약성립
1851년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셸리 사망
1801년 미국 낭만파 풍경화가 토마스 콜 출생
1689년 기사사화
1662년 명나라 정성공, 네덜란드가 36년동안 지배해 온 대만 점령
1395년 우리나라 처음 목활자로 대명률직해 간행
1309년 각염법 제정, 소금판매권 장악
561년 신라 진흥왕 창령에 척경비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