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原爆으로 진 운명運命과 사랑
이 우 李 鍝
글,편집: 묵은지
새해를 기대하는 마음과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이 교차(交叉)하는 연말(年末)이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온 나라가 몰지각(沒知覺)한 한 여인과 그를 추종(追從)(?)하는 잡다(雜多)한 자들의 국정농단(國政壟斷), 그리고 탄핵(彈劾)을 받아 만신창이가 된 대통령의 몰골 등으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닙니다. 사람들 또한 절박(切迫)한 심정(心情)을 밝히려는 촛불의 강렬(强烈)한 행렬(行列)의 흐름 탓인지 길거리에 오가는 사람마다 표정(表情)들은 웃음기를 잃고 몹시 경직(硬直)되어 보입니다. 더군다나 겨울에 들어선 날씨 조차도 매우 을씨년스럽고 미세(微細) 먼지가 빈번하게 기승(氣勝)을 부리는터라 연말 분위기는 커녕 나라 걱정까지 곁쳐 이래저래 잡쳐버린 묵은지의 마음도 도통 예년의 연말 분위기(雰圍氣)를 느껴보지 못하고 바깥 출입(出入)조차 꺼려하고 있습니다.
시국(時局)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태(事態)에 휘말려 어수선한데 뭔들 잘되고 순조로운게 있겠습니까. 이렇게 사회적(社會的)으로 우울하고 어수선한 기운이 감돌고 있을때는 마음을 다스리며 평정심(平定心)을 유지(維持)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사랑의 이야기는 이런 마음의 안정감(安定感)을 주는 최고의 명약(名藥)이 아닐런지요. 기분 전환(轉換)을 위한 묵은지의 명석(明晳)한(?) 처방(處方)으로 이번엔 한 편의 '운명(運命)과 사랑'의 이야기를 펼쳐 볼까합니다. 비록 운명적인 사랑이야기라지만 나라가 외세(外勢)에 의해 좌지우지(左之右之) 되고 갖은 수탈(收奪)과 함께 힘없이 핍박(逼迫)받는 백성들과 왕족(王族)들 조차도 두려움 속에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던 부끄러운 역사(歷史)를 되돌아보고 경각심(警覺心)에 나라잃은 민족(民族)의 굴욕(屈辱)과 애환(哀歡)을 느껴보는 기회였으면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가 시작되는 시기인 1910년에 대한제국 황실(皇室)은 일제에 의해 왕실(王室)로 격하(格下) 되었습니다. 이때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强制)에 의한 병합(倂合)을 이룬 시기로 자신들의 천황(天皇) 아래 대한제국의 황제(皇帝)인 고종(高宗)을 내려 둔다는 의미(意味)로 격하시킨 것입니다. 고종에 대한 일제의 강압(强壓)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었으며 당연히 격하된 왕실은 점점 더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우(李鍝)는 이런 나라의 어려운 시기에 할아버지인 고종과 그의 아들인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우는 어릴때 당차고 의젓하게 성장(成長)을 하였고 이를 가상(嘉尙)하게 여기던차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장손(長孫)인 이준용(李埈鎔)이 아들이 없이 죽게되자 양자(養子)로 들게 하였습니다.
일제의 폭정(暴政)과 간섭(干涉)에 비교적 고분고분 했던 여느 왕족들과는 달리 이우는 사사건건(事事件件) 일제에 반항적(反抗的)이었으며 이런 점에 있어 성향(性向)이 비슷한 의친왕으로부터 총애(寵愛)를 많이 받았습니다. 비근(卑近)한 예로 영친왕(英親王)이나 이건(李鍵), 덕혜옹주(德惠翁主) 등은 조선의 왕족으로서 일본인과 정략결혼(政略結婚)을 하였습니다. 또한 일제는 자신들의 황족들에게 하듯이 조선의 왕자(王子)들에게도 예외없이 군사교육(軍事敎育)을 시켜 군대(軍隊)를 보냈습니다. 이우 역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卒業), 일본군 포병장교(砲兵將校)로 근무(勤務)를 하였습니다. 이우가 어엿한 청년(靑年)으로 성장(成長)을 하고 일본군에 입대(入隊)를 하자 일제는 이우의 혼사(婚事)를 거론(擧論)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일본인과의 혼사를 추진(推進)하려 했습니다. 일제는 조선의 왕가와 지속적(持續的)인 정략결혼을 통해 그들이 의도 하는대로 완전(完全)한 하나의 나라로 병합(倂合)을 정착(定着)시키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알아차린 이우는 일제에 의한 정략적인 결혼이 싫었고 무엇보다도 일본여성과의 결혼을 원치않았습니다. 이우는 이전에 몇 번의 만남이 있었던 박영효(朴泳孝)의 딸인 박찬주(朴贊珠)를 떠올렸고 때마침 일본에 유학(留學)중인 박찬주와 만남을 자주 갖게 되었으며 곧 그녀와의 결혼을 서둘렀습니다. 의친왕도 아비인 박영효가 비록 친일파(親日派)이긴 하지만 끊임없이 요구(要求)하는 일제의 강제혼사에 마음이 급해진 터라 그래도 일본인 보다야 낫지 않겠나 하는 마음으로 흔쾌히 허락을 하였습니다. 물론 일제의 완강(頑强)한 거부(拒否)의사가 뒤따랐지만 주도면밀(周到綿密)하게 펼친 혼사로 일제도 어쩔수 없이 허락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우는 결국 1935년 박영효의 딸, 박찬주와 도쿄에서 결혼식을 치뤘습니다.
이로써 이우는 일제의 끈질긴 간섭을 물리치고 자신이 고집한 조선의 여인과 혼인을 맺는데 성공을 하였고 이청(李淸), 이종(李淙) 등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우의 아내인 박찬주는 나중의 일이긴 하지만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대한민국의 교육자(敎育者)로서 중앙여자고등학교(中央女子高等學校)를 설립(設立)하고 추계학원(秋溪學院)의 초대(初代) 재단(財團) 이사장(理事長)을 역임(歷任)하게 됩니다. 여기까지의 파란만장한 결혼사(結婚史)는 그럭저럭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우에게는 다른 한 편의 사랑이야기가 있었는데 이 이야기는 조선왕실에서조차 쉬쉬하여 잘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였으며 놀랍게도 이우는 박찬주와의 혼인전에 이미 조선의 한 여인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당시의 일제 강점기의 상황과 왕실에서의 입단속으로 소문(所聞)이 밖으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라는데....
그 사실의 진위(眞僞)는 확실하지 않지만 여러가지 정황(情況)으로보아 전혀 근거(根據)없는 이야기는 아닐듯 하며 이우의 숨겨진 사랑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독립투사(獨立鬪士)이며 해방(解放) 직후(直後) 미군정(美軍政) 당시 국군(國軍) 창설(創設)에 힘쓰다 6.25 전쟁(戰爭) 때 납북(拉北)되어 처형(處刑)당한 유동렬(柳東烈) 장군(옆 사진)의 딸로 이 역시 독립군의 군자금(軍資金)을 운반해 주는 등 아버지와 함게 독립운동도 참여했다는 설(說)도 있는 여인인 유정순(柳貞順)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을 사랑한 이우는 불행스럽게도 일제강점기로 일제의 허락(許諾)은 가당치도 않은 상황이었고 독립군의 자녀로 왕족인 이우와의 혼사는 절대로 있을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몰래한 사랑은 계속적으로 진행(進行)되었고 일제는 이들의 결혼을 방해(妨害)하며 자신들이 정한 일본인과의 혼인을 추진(推進)하였습니다. 이를 눈치챈 이우는 친일파 박영효의 딸 박찬주와 서둘러 혼사를 치뤘던 것입니다.
독립군 투사의 딸로써 자신의 신분(身分)이 노출(露出)되어서는 않될 처지였던 유정순은 먼 산을 바라 보듯이 그저 가슴앓이만을 하며 애를 태우고 있었으니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본 묵은지의 가슴도 덩달아 안타까움에 아련하게 저려옵니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이후에도 이우가 죽음을 당하기 전까지 계속되었고 나중에 이들 사이에 태어난 이우의 아들이라 주장한 사람이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왕가(王家)의 부인(否認)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사진은 자신이 이우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이초남씨 그는 부친인 이우 보다도 증조부인 고종과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이우는 운현궁(雲峴宮)의 양아버지인 이준용의 양자로 입적(入籍)되어 공위(公位)를 계승(繼乘)해 '이우 공(公) 전하(殿下)'로 불리는 귀하신 몸이었습니다. 그러면 뭐합니까? 침략국(侵略國) 일제에 의해 강제로 군사교육을 받아야 했고 식민국(植民國) 왕족으로써 볼모로 일제의 전쟁터로 억지로 끌려 다녀야 했습니다. 하지만 일제는 자신들의 전쟁이 전세(戰勢)가 불리해지고 패색(敗色)이 짙어지자 최후(最後)의 발악(發惡)으로 다른 전선(戰線)에 흩어진 병력(兵力)들을 일본 본토(本土)로 불러들이려 본토로 부임(赴任)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우도 예외(例外)는 아니었으며 만주 지역에서 근무(勤務)하다 경성(京城)에서 마지막 휴가(休暇)를 보낸 이우는 이런저런 이유로 한 달이나 늦춘 7월 초순(初旬)에야 가족들을 뒤로하고 운명의 부임지(赴任地)인 히로시마로 떠났습니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않는 가운데 억지로 새 부임지로 향하는 이우는 자신의 운명을 예견(豫見)이라도 한 듯 떠나면서 '아마도 내가 살아 돌아오기는 힘들 것'이라며 왕가를 돌며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떠나 갔습니다. 그리고 이우가 히로시마에 부임한지 한 달 뒤인 1945년 8월 6일 운명의 그날, 말을 타고 부대(部隊)로 출근(出勤) 중이던 이우의 근처로 미국이 투하(投下)한 원자폭탄(原子爆彈)이 떨어졌습니다. 폭탄(爆彈)을 직접 맞은 것은 아니었지만 원폭지(原爆地)에서 불과 수백미터 정도의 거리로 피폭(被爆)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인접 병원으로 후송(後送)되었고 다음날인 8월 7일 오전 5시경 극심한 피폭증상(被爆症狀)과 함께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일제의 패망(敗亡) 직후 이우의 시신(屍身)은 서울로 옮겨와 서울 운동장에서 장례식(葬禮式)을 거행(擧行)하였습니다. 혼란스런 시국에 식민국가(植民國家)의 왕손으로 태어나 외세의 압력을 물리치고 끝까지 자신의 사랑을 지키려했던 이우, 비록 침략국의 패악(悖惡)질로 원폭에 희생(犧牲)되며 억울하게도 그 생을 다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자신이 선택(選擇)한 운명적인 사랑을 가슴에 안고 떨어지는 한 잎 낙옆처럼 사라져 간 것입니다. 지금 그의 유해(遺骸)는 파주에서 1966년 남양주로 천봉(遷奉)하여 흥선대원군 묘역(墓域)인 흥원(興園)에 안장(安葬)되어 있습니다.
박찬주는 해방후 교육사업에 매진(邁進)하며 살았는데 1995년 서울 북아현동 자택(自宅)에서 말년(末年)을 보내다가 숙환(宿患)으로 사망, 이곳 흥원에 부군(夫君)인 이우와 함께 안장되었습니다. 그러나 문밖의 여인이었던 유정순은 그의 아들과 함께 지금까지 왕가에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결국 왕가의 무관심(無關心) 속에 유정순은 눈을 감았고 오매불망(寤寐不忘) 그리던 님의 곁에 묻히지도 못했습니다. 그의 아들은 지금도 왕손임을 주장(主張)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왕가는 서로들 자신들의 적통(嫡統)과 정통성(正統性)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니 몰락(沒落)한 왕가의 한 단면(斷面)을 보는 것 같아 묵은지의 마음도 먹먹하고 씁쓸해집니다. 그래서인지 500여년을 이어온 왕가의 뒤안길은 너무 허접하고 쓸쓸해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