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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복내 사랑 ♣ 원문보기 글쓴이: 이완노
『우리는 이러다 모두가 다 망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러잖습니까. 「金大中씨의 4者 必勝論(필승론)은 역사적인 죄악」이라고. 지금와서 金大中씨가 망국적인 지역정치 어쩌고 운운하지만, 그것을 현실 속에서 만들고 아주 씻을 수 없는 정치폐해로 고착화시킨 것이 바로 4者 必勝論을 내걸고 나온 金大中씨 그 자신이다 이 말입니다』 姜慶植씨의 일기장 한나라당의 李重載(이중재) 의원을 말할 때 정치인들은 흔히 그의 이름보다는 「晤峯(오봉)」이라는 雅號(아호)로 부르기를 좋아한다. 1925년 전남 보성 출생인 그와 동년배인 사람들은 그저 「晤峯이 말이야…」라는 식이고, 그보다 젊은 후배들은 뒤에다 선생이라는 호칭을 덧붙여 「晤峯 선생」이라고 부르곤 하는 것이다. 그를 굳이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것은 이제 6選(선)의 관록을 가진 그의 이력이나 나이를 생각해서 대접을 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 아호가 주는 독특한 語感(어감) 때문인 것도 같다. 「오봉」이라는 말에는 친근감과 재미스러움이 느껴진다. 李重載 의원은 그의 雅號가 주는 어감처럼 친근하면서도 40년에 이르는 정치관록의 무게를 하는 사람이다. 그는 1963년 6代 국회에서부터 의원생활을 시작해 정치 생활 내내 야당의원이었다. 1997년 大選(대선) 직전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통합 후 몇 달간에 걸친 여당시절은 이름뿐이었다. 의원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특이하게도 재정경제 위원회(과거엔 財務委)에만 있었다. 이런 경력의 李重載 의원 관련한 흥미로운 대목을, IMF 경제위기 사건으로 기소되었던 姜慶植(강경식) 前 경제부총리의 검찰 수사기록에서 최근 우연히 발견했다. 姜慶植씨가 자신의 노트북 컴퓨터에 입력해 놓은 일기장이 검찰수사 자료로 첨부되어 있었는데, 그중 1998년 2월4일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DJ는 혼자서 다 하는 스타일」 <12시 이중재 의원과 오찬. 청문회 대책, 정국전망 등에 대한 의견을 듣고 향후 정치적 문제에 대해 자문해 줄 것을 요청, 승낙을 받다. 이미 특감(特監·외환위기에 관한 감사원 특감을 지칭)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타이밍」에 대해 신경 쓸 것 없이 해명할 것은 해명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게 李의원의 조언(이하의 내용도 李의원이 姜씨에게 해준 말을 姜씨가 옮겨놓은 것임). DJ는 장점과 단점이 함께 있는 사람. 백 년에 한번 나올까 하는 사람. 머리가 조직적이고 열심히 노력하고 독서를 많이 하고 업무에 철저한 것 등은 장점. 단점은 혼자서 다 하는 스타일. 2인자가 없다. 동지가 없고 추종자뿐. 그러나 매우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성향의 사람. 그리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 이제 대통령이라는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에 달라지지 않겠는가, 아마 매우 잘할 것이다가 총평. YS는 공부를 전혀 하지 않고 보고를 받아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할 것. 아마 보고할 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것. 한번도 보고 내용을 두고 코멘트한 일이 없다고. 이는 DJ와는 완전히 대조적. YS는 사람은 좋다고.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모이게 된 원인…> 姜慶植씨는 그러면서 李의원에 대해 「워낙 정치판에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으면서 명석한 분석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 자문을 얻기에는 적합한 선배. 자주 만나면서 좋은 얘기를 듣는 것이 현실 정치를 익히는 길」이라고 첨언해 놓았다. 李의원을 찾아가 복사한 그 수사기록을 보여주면서 『그런 말을 한 게 사실이냐』고 했더니 『허허∼ 참, 허허∼ 참』 하면서 한참 동안 읽어 내려갔다. 그가 물었다. 『이걸 전부 내가 한 얘기라고 姜慶植씨가 쓴 거요?』 ―검찰에서 압수한 디스켓 형태의 일기이니 그렇다고 믿어야지요. 기억이 납니까. 『나는 둥 마는 둥…. 전혀 틀린 것은 아니고…』 ―1998년 2월4일이면 막 감사원에서 外換(외환)위기 特監을 실시할 때인데, 자주 만났는가 보죠? 『서로가 가끔씩 점심도 사고 그랬어요. 이럭저럭 합치면 댓 번 정도 될 겁니다. 그런 과정에서 그 사람이 나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겠지…. 그것이 그 일기지, 허허』 ―그때는 姜慶植씨와 같은 당(한나라당)이었지만 姜慶植씨가 부총리 시절에는 야당(민주당. 1997년 11월 한나라당과 합당했음)이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친한 관계였습니까. 『그건 이래요. 姜慶植씨가 金泳三(김영삼) 정권 아래서 재경부 장관으로 있을 때 내가 국회 財經委(재경위) 위원으로 있었어요. 姜慶植 장관이 YS 말기 때, 그러니까 IMF사태 직전 때, 상당한 위기감을 가졌고, 우리도 이래선 큰일나겠다고 보고 있었는데, 늦게나마 정부에서 금융위기를 탈피하기 위한 금융개혁법안 등 여러 가지 정책법안을 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걸 새정치국민회의가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서 반대를 해요. 나는 그때 야당답지도 않게(당시는 민주당 소속)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 의원들에게 「이건 여당이 강행을 해서라도 통과시켜야만 한다」고 역설을 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외환위기가 온다고 했습니다. 그때 야당이면서도 내 의견에 동의한 이가 작고한 諸廷坵(제정구) 의원이었습니다. 나는 姜慶植씨에게도 밀어붙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결국 밀어붙이지도 못해 금융개혁법안들이 통과되지 못했어요. 당시 신한국당은 大選 때문에 그랬는지 경제위기가 올 위험이 있다는 것은 알면서도 미적거리기만 했어요. 그럴 때 姜慶植씨가 나한테는 상당히 고맙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도 자주 만나고 그랬습니다』 경제위기는 爲政者, 정부의 책임 ―일기를 보면 姜慶植씨가 李의원을 「오랜 경험과 명석한 분석,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매우 높게 평가해 놓았더군요. 다른 곳도 아닌 일기에 써놓은 것이라 솔직한 마음이라고 봐도 될 텐데, 의원께서는 姜慶植씨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내가 관상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정치인들을 보면요, 능력에 관계없이 어떤 운명적인 게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姜慶植씨는 굉장히 능력이 있는 사람이고, 정치인으로서는 大成(대성)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姜慶植씨를 보면 「참으로 험난한 인생을 살겠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는 겁니다』 ―능력은 뛰어난데 험난한 인생을 산다는 게 무슨 뜻이죠? 『이 IMF위기라는 게 워낙 깊고 심각해서 경제정책의 책임자로서 변명이 안되게 되어 있어요. 그런 뜻입니다』 ―그렇지만 그 경제위기가 꼭 姜慶植씨 책임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건 한마디로 爲政者(위정자)의 책임이고, 정치지도자들의 책임이에요. 더 줄여 말한다면 정부의 책임이죠. 그런 의미에서 姜慶植씨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IMF가 왜 났느냐. 법적, 제도적 결함에서 축적된 不實(부실)의 누적 아닙니까. 따지자면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제도적, 정책적 이유 때문에 온 겁니다. 그런 것을 잘 관리하라고 국민이 세금을 줘서 먹여살리는 사람들이 바로 정치인들이고 공직자들이니, 爲政者와 정부, 정책결정자에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金大中씨에게도 換亂 책임이 있지요』 ―최근 법원에서는 姜慶植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 도의적 책임은 있지만 그들에게 법률적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정치를 잘못했다고, 옛날 군주국가시대도 봉건사회도 아닌데, 법률적으로 처벌한다는 겁니까. 姜慶植씨가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정치적, 도의적 책임이지요. 법률의 처벌보다 더 무섭고 국민들의 용서를 받기 어려운 것이 바로 정책의 실패 책임입니다. 그런 책임은 영원히 져야 됩니다. 내가 姜慶植씨의 관상에서 어떤 운명적인 것을 느꼈다고 한 것은, 그 사람이 그렇게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이면서도 그런 험난한 길을 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IMF 사태가 온 데는 당시 야당 총재였던 金大中(김대중) 대통령의 책임도 있다고 봅니까.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 나라의 경제위기는 부실과 폐단이 누적된 구조적인 것에서 온 것이고, 그걸 바로잡지 못한 정부에 일차적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간파하고 바로잡도록 하지 못한 야당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더구나 정부가 그런 위기의 징후를 뒤늦게 깨닫고 시정하기 위한 노력으로 금융개혁법안을 냈는데, 그나마도 통과되지 못하도록 물고 늘어진 그때의 야당, 金大中씨와 그가 이끈 새정치국민회의도 상당 부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金大中씨와 국민회의는 심지어 한국은행을 독립시키는 문제도 韓銀노조가 반대하니까 결사 반대했잖습니까』 ―그러나 어쨌든 집권하고 나서는 경제위기를 극복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지금은 잘하고 있다고 봅니까. 『다행히 집권 후에 경제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분투하는 金大中씨의 그런 노력은 정말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나는 오랫동안 그 사람과 같이 있었고, 그 사람 당에서 수석부총재를 했습니다(평민당 시절). 姜慶植씨 일기에도 그렇게 쓰여 있지만, 金大中씨는 머리도 좋은 사람이고,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쓰고, 거기다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삶에 대해 정말 노력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金大中씨가 민주화 투쟁의 지도자였으면서도 대통령이 되어서는 정치 사회 문화 모든 것을 해결해 나가는 데 있어서 민주적이지 못하고 오히려 獨斷的(독단적)이라는 겁니다. 獨斷도, 군사정권에서처럼 아무 것도 모르고 하는 무식한 獨斷은 오히려 문제가 쉬워요. 이 사람은 상당히 공부하고 연구해서 논리를 세워서는 자기가 모든 것을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하라는 식이죠. 거기에 대해서는 누구도 反論(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말을 못해요.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겁니다. 민주주의적인 지도자라면, 나라를 통치하고 이끌어가는 데도 시스템으로, 제도로써, 조직으로써 해야 하는데, 말하자면 대화와 토론을 통해 결론을 도출해 내야 하는데, 내가 머리 좋고 내가 연구했으니 이것이라고 하는 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름만 시장경제고 민주주의지, 야당 말 맞다나 金大中씨 집권 후에 시장경제가 어디 있고 민주주의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이 결국 성과보다는 부작용을 내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독재는 아니지만 獨斷家 기자가 『그래서 야당에서는 이미 金대통령에 대해 獨裁(독재)라고 규정해 놓았는데, 그렇다는 의미이냐』고 물었더니 『나는 獨裁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저 독단적인 면이 너무 강하다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金대통령의 경제정책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런 말을 꺼냈다. 『나는 이것이 활자화되면 내가 곤란해지고 해서 말을 삼가 왔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나는 金大中식의 경제개혁, 경제정책에 대해 상당한 부분에서 공감하고 있어요. 그렇게 정책의 방향에 대해서는 이해가 가지만, 방법에서 문제가 많다고 보는 것입니다. 특히 무리한 소위 「빅딜」은 잘못이었어요. 저는 정부의 정책이 금융개혁을 통해 금융기관으로 하여금 산업경제 개혁, 나아가 재벌개혁까지도 하도록 유도해 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는 金大中 대통령과 오랜 정치적 인연을 갖고 있다. 6대 국회에서 첫 당선되었을 때 그는 金大中 의원과 같은 財務委 소속이었다. 그 전 민주당 정권 시절에는 민주당에 함께 소속되어 있었다. 당시에도 財務委는 이른바 인기상임위로 여야의 元老(원로)들이 포진해 있었는데, 金大中 李重載 의원은 가장 젊은 야당의원들로 일종의 「투사」들이었다. 李의원 자신은 그 시절에 대해 『나와 金大中은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모르니까 알려고 밤새워 공부했고, 악착같이 싸우고 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재경위에 필요한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말했다. 1985년 2·12 총선(12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李敏雨(이민우) 총재의 신민당 시절, 정치규제에 묶이거나 미국에 있던 金泳三, 金大中 두 사람은 상임고문이었다. 그런데 李敏雨 총재가 金泳三계였기 때문에 수석부총재는 金大中계였던 李重載 의원이 맡게 되었다. 그러다 1987년 大選을 앞두고 金泳三씨가 李敏雨씨와 결별하고 통일민주당을 만들자, 다시 李의원은 가택연금상태의 金大中을 대리해 金泳三 총재 하의 통일민주당 수석부총재를 맡게 되었다. 李의원은 이어 그해 大選 직전 金大中씨가 평민당을 창당하면서는 또다시 평민당의 수석부총재를 맡게 되었고, 그 당의 선거대책본부장으로서 13代 大選을 치렀다. 결국 그는 金大中, 金泳三 두 사람의 당에서 세 번의 수석부총재를 지낸 셈이며, 그것이 모두 金大中 대통령과의 인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1987년 大選에서 金大中 대통령이 출마한 것은 「망국적인 행위」였다고 비판한다. 『「4者 필승론」은 지역정치를 고착화시킨 역사적 죄악』 『그건 왜 그랬느냐. 金大中씨가 통일민주당에서 나와 평민당을 만들 때, 나와 楊淳稙(양순직·現 자유총연맹 총재), 朴燦鍾(박찬종), 李哲(이철), 張基旭(장기욱) 이런 이들이 맹렬히 반대했어요. 그러나 평민당이 만들어지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나와 楊淳稙은 평민당으로 가 부총재가 되고 나머지는 무소속으로 갔습니다. 그때 우리는 金大中씨에게 갖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分黨(분당)을 하면 안 된다고 얘기하다가 할 수 없이 끌려갔지만,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이 분열하면 즉, 金大中·金泳三이 다같이 출마하면 반드시 패배한다고 몇 번이나 泣訴(읍소)하다시피 했습니다. 대통령 直選制(직선제), 민주화가 다 날아가고 민정당이 또 집권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 얘기를 金大中 총재에게 직접 했다는 말씀인가요. 『물론이지요. 한두 번도 아니고, 나만 그런 것도 아니고, 매일같이 했어요. 또 내 성격에 가만히 있나요. 우리는 이러다 모두가 다 망한다고 했습니다. 국민들을 무슨 면목으로 보려고 하느냐. 그래서 내가 분명히 그러잖습니까. 「金大中씨의 4者 必勝論(필승론)은 역사적인 죄악」이라고. 지금 金大中씨가 망국적인 지역정치 어쩌고 운운하지만, 그것을 현실 속에서 만들고 아주 씻을 수 없는 정치폐해로 고착화시킨 것이 바로 4者 必勝論을 내걸고 나온 金大中씨 그 자신이다 이 말입니다』 金大中 대통령이 1987년 大選을 앞두고 내건 「4者 필승론」이란 무엇인가. 李의원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그게 뭐냐. 전라도표, 충청도표, 경상도표가 전부 몰려가면 경상도표는 두 사람(盧泰愚, 金泳三)이 나눠먹을 것이니까 내가 당선된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 얘기를 金大中씨는 공공연히 했어요. 분명히 우리가 집권할 수 있는데 왜 반대하느냐. 그것도 金大中씨는 그때 쉬쉬하면서 그렇게 얘기한 게 아니라, 기자들 앞에서도 아주 노골적으로 얘기하고 그랬습니다. 우린 절대 못 이긴다고 알고 있었지요』 그러던 李의원은 1987년 大選에서 金大中 후보가 3등으로 패배하고 난 직후인 1988년 초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그 과정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大選에서 지고 통일민주당하고 평민당을 합쳐야겠다 해서 統合推進委(통합추진위)가 만들어졌어요. 제가 그 위원장이었습니다. 그것이 1988년 2월10일입니다. 그 날짜도 잊지 못해요. 그런데도 金大中씨는 「이념과 정책이 달라 통일민주당과는 합칠 수 없다」며 통합추진위를 깨버렸어요. 그래서 楊淳稙이와 나는 정치를 그만둔 겁니다. 漁父之利로 盧泰愚(노태우)씨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이 야당 분열의 역사적 죄악을 범하고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野圈統合(야권통합)마저 안되게 되었으니 더 이상 정치를 할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어진 13代 총선에도 출마를 안한 겁니다』 『「컴퓨터 부정」 주장은 넌센스』 ―돌이켜 보면 당시 金泳三, 金大中 후보간의 단일화가 안 된 것은 누구의 책임이라고 봅니까. 『후보단일화가 안 된 데는 金大中씨나 金泳三씨나 똑같은 거죠. 물론 엄밀히 따지고 보자면 金大中씨가 잘못이에요. 金泳三씨가 정정당당하게 競合(경합)을 하자고 했는데도 金大中씨가 안 한다면서 당을 깨버리고 나갔으니 책임은 金大中씨에게 더 있지요. 하지만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길게 보아 金泳三씨는 후보를 양보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그러나 金泳三씨가 양보를 안 하니까 우리가 金大中씨에게 「당신이 양보하시오」라고 졸랐던 겁니다. 「당신이 양보하시오. 그러면 당신이 역사 앞에 위대한 성인이 될 수 있소」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金大中씨는 「왜 나보고 양보하라고 하느냐. 반드시 이길 선거를 두고」라면서 펄쩍 뛰어요』 ―궁금한 것은 그때 金大中 대통령은 정말 그렇게 네 명이 나서면 자신이 당선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느냐는 겁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선거에 나갈 때는 누구나 자기가 당선된다고, 좋게 말하면 확신, 나쁘게 말하면 妄想(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정치인은 그런 선거에서 한번 쉬어버리면 밀려난다고 생각해요. 출마를 해야 기득권이 확보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金대통령은 당시 자신이 패배할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大選 후의 기득권 확보를 위해 출마를 한 것이고, 4者 필승론은 그런 출마를 위한 명분이었단 말입니까. 『나는 그렇게 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떨어지면, 정권은 못 잡아도 전라도黨을 갖고 있게 되고, 그것은 내 보루고 내 성곽이라고 생각한 거지요』 ―그렇게 뻔히 질 줄 아는 선거에서 李의원은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잖습니까. 『구차한 변명을 하자면 그거야 내가 수석부총재이니까 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선거 뒤에 金大中 총재는 개표과정의 소위 컴퓨터 부정을 주장했었는데, 李의원께서도 그걸 믿었습니까. 『턱도 없는 얘기지요. 말도 안 되는 얘기, 한마디로 넌센스nonsense인데도 거기에 솔깃한 국민도 참으로 무지했습니다. 그때도 우리는 무슨 컴퓨터 부정이냐고 그랬는데 그렇게 주장하더군요』 ―李의원께서는 그렇게 金대통령과는 결별했으면서 왜 14代 총선(1992년)에서는 다시 金大中 대통령의 민주당으로 출마했습니까(李 의원은 14대 총선에서 서울 강남서 출마, 金東吉씨에게 패배했다). 『결정적인 이유는 金泳三씨가 3당 합당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 3당 합당을 한 金泳三씨에게 따라가지 않은 이가 李基澤(이기택)씨였죠. 李基澤씨는 잔류한 몇 사람과 꼬마 민주당을 만들고선 金大中씨의 黨(신민당)과 통합을 했는데, 그 통합을 추진할 때 나를 찾아와 그래요. 「선배님은 야당통합이 안 되어 金大中씨와 갈라선 게 아닙니까. 이제 金大中씨와 야당통합을 하게 되었으니 같이 합시다」 그래요. 그래서 그 당에 들어가 상임고문을 맡은 겁니다. 그러나 金大中씨는 늘 떨떠름해 했죠. 그렇게 통합해서 만든 당(민주당)을 15대 총선 전에 金大中씨가 또 다시 깨고 나가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든 것입니다』 『국민회의 新黨은 상습적 위기 돌파책』 李의원이 기자의 무릎을 당기더니 이렇게 속삭이듯이 얘기했다. 『이봐요, 내가 분명히 얘기할 수 있어요. 대통령 선거나 총선 같은 큰 선거가 다가오면 金大中씨는 자신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타개책으로 반드시 新黨(신당)을 만들어요. 선거에 대비한 어려움을 金大中씨는 新黨을 만들어 넘어가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야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고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번 국민회의의 新黨 창당도 그런 선상에서 봐야 한다는 말씀이냐」고 물었더니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新黨 발기인 「지명」한 것을 보세요. 지금 金大中씨도 자기가 인기가 없다는 것은 알 것 아닙니까. 겉으로 나타나는 여론조사는 어떤지 몰라도, 국민들의 마음은 그것하고 다릅니다. 新黨이 무슨 21세기를 내걸고 있지만, 속셈에는 다 그렇게 분칠을 해서 새 포장을 하려는 것일 뿐이에요』 ―金대통령이 왜 인기가 낮다고 생각합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것은, 대통령이 되어 勝者(승자)로서 敗者(패자)나 다른 사람들에게 아량을 베풀고 더불어 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金大中씨는 상대방을 司正(사정)이다 뭐다 하면서 뒤를 캐고 약점을 잡고 눌러서는, 요새 흔히 쓰는 말로 워크아웃시키는 데 세월을 보내고 있잖습니까. 대통령이 되었으면 말이죠. 아무리 야당이 숫자가 많고 힘을 쓴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민주지도자로서 투쟁을 해 온 사람이, 더구나 정치개혁을 하겠다는 사람이 맨날 야당 의원 뒷조사나 하고 약점이나 캐면서 공포와 알력과 대립을 격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민주화 운동을 해 대통령까지 된 사람이, 야당을 정치 파트너가 아니라 파괴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몰두하는 행태를 보여주었으니 국민화합이 될 리가 없고 인기가 올라갈 리가 있습니까. 국민들은 말을 하지 않아도 그런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이 집권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우리 나라 정치사에서 여당이 야당을 정치적 동반자, 대화의 상대라고 본 적은 드물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않죠. 군사정권에서는 그렇더라도 金大中씨처럼 민주주의를 부르짖고 그를 위해 투쟁해 온 사람은 그러면 안 되지요. 金大中씨를 군사정권의 연장이 아니라 민주화 지도자로서 대통령이 된 사람으로 보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행태에서 더 큰 국민의 실망이 있는 겁니다』 ―金大中 대통령과는 1960년 초부터 40년이 다 되도록 우여곡절 많은 정치적 인연을 맺어 왔는데, 金대통령에 대해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대목을 소개해 준다면 어떤 부분을 들려줄 수 있습니까. 『그런 거야 내가 말할 수 없지요. 지금 와서 충심으로 충고를 해도 헐뜯는 것으로 비쳐지기 십상이죠』 ―金대통령의 나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說들이 있던데, 공식적으로 말하는 1925년 생이 맞습니까. 『金大中씨와 나는 한 살 차입니다. 金大中씨는 1923년 생이고, 나는 호적상 25년 생이지만 실제는 24년 생이죠. 金大中씨가 돼지띠고 나는 쥐띠예요. 나는 甲子生(갑자생)이고 金大中씨는 癸亥生(계해생)입니다. 우리는 옛날에는 친구라서 잘 알아요』 (金大中 대통령의 生日은 공식적으로는 음력 1925년 12월3일생으로 되어 있다) 『金泳三씨는 죽어도 공부를 안 해요』 그는 金大中 대통령뿐만 아니라 金泳三 前 대통령과도 오랜 정치적 인연을 갖고 있다. 민주당 정권 시절 그는 金泳三 전 대통령과 함께 舊派(구파)에 속해 있었고 金大中 대통령은 新派(신파)였다. 그 때문에 그는 오랫동안 金大中 대통령보다는 金泳三 전 대통령과 같은 정치적 계열이었다.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다음 3金이 大權(대권)을 놓고 경합을 했잖습니까. 그때부터 내가 金泳三씨와 갈라서고 金大中씨와 같이 했어요. 그걸 설명하려면 또 너무 길어 생략하겠어요. 다만 이런 얘기는 할 수 있습니다. 金泳三씨는 말하자면 지독한 호남 기피자예요. 金泳三씨가 1960년대 원내총무를 할 때 내가 대변인을 했어요. 金泳三씨도 나보다 세 살밖에 어리지 않아 맨날 같이 어울려 다녔습니다(金 전 대통령은 1927년생이다). 그런데 金泳三씨는 항상 이런 말을 해요. 「李의원, 李의원은 호남이지만 친하니까 이런 말을 해도 되겠는데, 호남 사람은 말이지…」 이러면서 항상 호남에 대한 부정적인 얘기들을 해요. 또 입에 붙은 소리가, 「호남 사람은 절대 정권 못 잡는다. 그걸 모르나」 하는 거였습니다. 경상도에서 절대 안 준다는 소리예요. 물론 그게 정말로 호남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 아니라 金大中씨를 염두에 두고 하는 소리였지만, 金泳三씨와 그런 문제들로 트러블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朴正熙 대통령이 죽고 난 뒤 金泳三, 金大中 두 사람이 천하의 자웅을 겨루는 국면에서 金大中씨가 나와 자꾸만 같이 하자고 해서 같이 하게 되었죠. 물론 그렇다고 金泳三씨와는 이제는 말도 안 한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 金大中씨와 정치적 노선을 같이 했다는 것이지요』 ―그런 金泳三 대통령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姜慶植씨 일기에는 「YS는 사람은 좋지만 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요. 『姜慶植씨가 노트도 안 했는데 그걸 다 기억해 적어둔 걸 보면 정말 머리가 좋긴 좋은 모양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나는 金泳三씨가 심보는 좋은 사람이라고 봅니다. 호남 사람을 싫어하고, 정권을 못 잡는다고 입버릇처럼 그러지만, 그건 인간성이 나빠서가 아니라 지역적인 편견에 사로잡혀 그런 것이라고 봐요. 문제는 그가, 이번 대통령 때 여실히 그게 드러났지만, 공부를 죽어라고 안 해요. 6代 국회 때 자기가 총무이고 내가 대변인이었을 때, 국회의사당이 광화문에 있었는데(현재 서울시의회 건물), 그 2층에 가면 야당 총무실이 있었습니다. 그 방에 총무와 대변인, 기자들이 함께 아침마다 모이곤 했는데, 그때도 金泳三씨는 신문에서 읽는 것이 가십gossip밖에 없어요. 사설 한 번 읽는 법이 없습니다. 정당의 주요한 당직자나 정치인이라면 신문의 주요 사설 정도는 읽어야 하는데, 우리가 읽어보라고 해도 「뭐라고 써있드노」 하고 말로 들으려 해요. 대통령으로서도 마찬가지예요. 金大中씨와는 아마 정반대였을 겁니다. 물론 대통령이 많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올바르게 판단은 할 수 있어야지요. 올바르게 판단하려면 평소의 공부, 노력이 필요한 겁니다. 본인의 마음이 나쁜 것은 아닌데도 공부를 안 해 뭘 모르니 판단을 못하는 겁니다. 아니면 그런 자리에 걸맞은 자질, 능력을 갖춰야지요. 대통령 한 사람의 잘못이 우리 국민들에게 어떤 재앙을 몰고 왔습니까』 ―그래도 金대통령은 학력상으로는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머리가 나쁘다기보다는 내가 보기엔 노력이 부족해서 그래요. 공부를 하려고 하지를 않아요』 ―그런 金泳三 전 대통령 본인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아마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니 머리는 남의 것을 빌려도 건강은 못 빌린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지요』 『金鍾泌씨는 친근감이 안 생기는 사람』 ―3金 중의 金鍾泌(김종필) 총리와도 역시 5·16 이후부터 알고 있었겠습니다. 『5·16 때야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후에 정치를 하면서 알게 되었죠』 ―金鍾泌 총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한참 말을 않다가) 그 사람은 머리도 좋고, 많은 경륜이랄까, 씻기고 닦여 차돌 같은 사람이지만, 항상 굽히고 그러면서 실리를 취한 사람 아닙니까. 나로서는, 솔직히 말하면, 친근감도 안 생기고 존경심도 안 나는 사람입니다』 ―아마 金鍾泌 총리와는 평생 다른 길을 걸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나야 평생 야당만 했고 같은 당을 해본 적이 없으니까…』 기자는 金鍾泌 총리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질문들을 했지만 李의원은 거의 대답을 하지 않았다. 듣는 체 마는 체 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열의를 가지고 정력적으로 다른 두 金씨를 평하던 그는 金총리에 대해서는 評(평)을 할 생각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대신 이렇게 한번 물어보았다. ―朴대통령 때 金鍾泌 총리는 2인자였는데, 그 시대에 의원께서도 야당의원으로서 많은 수난을 당했습니까. 『많은 정도인가요. 내가 7代 선거(1967년)에서 떨어졌다가 부정투표로 선거가 무효화돼 再(재)선거(1969년 전남 보성 벌교 1부)에서 당선됐습니다. 그게 우리 정치사에 남는 역사적 사건이에요. 그때 재선거 참관인으로 왔던 金相賢(김상현), 李基澤(이기택)씨가 다 얻어터졌잖아요』 『朴正熙는 국민의식을 개혁한 사람』 ―朴正熙 대통령과 직접 만난 적도 있습니까. 『국회의원을 오래 했으니 당연히 있지요. 나는 朴正熙 대통령의 나쁜 면만 얘기하라면 끝도 없어요. 쿠데타해서 정권을 뺏고, 비상 조치 해서 헌법 깨버리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을 한 사람이지요. 그러나 朴正熙 대통령에 대해 우리가 얘기할 때는 긍정적인 면도 함께 생각해야 해요. 물론 이제 다 지나간 과거라서 좋은 면만 얘기하는지도 모르지만, 그 사람이 우리 나라의 근대화에 위대한 공로가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메모지를 꺼내 「첫째. 국민의식 개혁」이라고 쓰고는 밑줄을 그었다. 그의 朴正熙에 대한 생각은 정리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첫째, 朴正熙 대통령은 우리 민족사에서 국민들의 의식을 개혁한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하면, 우리도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이런 신념을 심어준 사람이라고 나는 봅니다. 그전까지는 우리가 어땠느냐. 「조선 엽전들은 안 돼, 씨를 갈아야지」 이런 관념이 모든 국민들 머리 속에 꽉 차 있었어요. 그런데 朴正熙 대통령이 「아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주는 위대한 개혁을 한 것입니다. 둘째, 朴正熙 대통령은 어떻든 우리 나라의 고도경제성장을 이룩한 사람 아닙니까. 그것을 어떻게 이뤘느냐. 바로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강력하게 밀고 간 때문입니다. 그걸 위해 금융, 稅制(세제) 등에서 온갖 특혜를 기업들에 줘가면서까지 輸出 第一主義(수출 제일주의)를 밀고 갔어요.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경제 속에서 이만큼이라도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이 바탕 위에서 만들어진 겁니다. 또 하나 朴正熙 대통령은 고도경제성장을 위해 과감한 外資(외자) 도입 정책을 썼어요. 나도 그때는 그 정책을 공격한 사람 중 하나이고, 투자의 우선 순위에서나 특혜 등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있었지만, 총체적으로 봐서는 옳은 정책이었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 나라가 고도성장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 다음, 우리 나라 국민들은 세계적 시각에서 볼 때 상당히 높은 교육수준, 노동의 질을 갖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걸 잘 활용하는 정책을 썼습니다. 그런 것이 다 종합적으로 이뤄져서 우리 나라 경제가 고도성장을 했고, 朴正熙 대통령이 위정자, 통치자로서 역사에 남는 기여를 했다고 봅니다. 물론 그 도중에 엄청난 독재를 하고, 비상조치다, 維新(유신)이다, 3選 改憲(개헌)이다 하면서 수용할 수 없는 일들도 많이 했지만, 그런 것들은 그런 것대로 평가받더라도 경제적 측면에서는 긍정할 것은 긍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국민들이 朴正熙, 朴正熙 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일이지요. 金大中씨도 말이죠, 나는 야당이지만, 이 경제위기를 잘 넘기고 산업 구조조정을 잘해 경제를 튼튼하게 해 놓으면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될 거라고 봅니다. 지금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여러 가지 말들이 있고 문제도 많지만, 여하튼 너무 서두르지 말고, 금융개혁을 통해 차분히 해 나가면 된다고 봅니다』 李承晩 박사에 대한 평가 ―朴대통령처럼 우리 현대사의 인물들에서 역사적 평가를 논할 때 가장 그 평가가 양 극단으로 갈리는 또 한 사람이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이지요. 건국 대통령이자 초대 국회의장이라는 측면과, 장기집권을 시도하고 분단의 책임자라는 시각이 충돌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볼 때는 발전적인 과정에서 봐야 합니다. 역사는 정지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건 무슨 말이냐. 李承晩 박사가 일생 동안 조국의 광복을 위해 노력했는데 그걸 떼놓고 李承晩을 평가해선 절대 안 된다는 겁니다. 또 李承晩 때문에 單政(단정)이 되었고 그래서 分斷(분단)이 되었다는 것은 말 그대로 語不成說(어불성설)이에요. 그 당시 세계의 힘의 균형이 그렇게 작용한 겁니다. 어떻게 남북 분단이 李承晩의 책임입니까. 당시 李박사는 초대 대통령으로서 온 국민의 숭앙을 받았습니다. 단지 장기집권을 하다 보니 終身(종신)에 대한 욕심이 생기고, 주위에 둘러싸여 판단력이 흐려져 末路(말로)가 그렇게 된 것이지요. 李承晩 박사를 옛날 군주시대의 악덕군주처럼 봐선 절대 안 됩니다』 ―국회에서 그 동안 여러 차례 초대 국회의장인 李承晩 대통령의 흉상을 세우려고 했으나 반대에 부딪쳤지요. 『나는 李박사의 흉상을 세워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것까지 반대해선 안 돼요. 우리가 역사를 볼 때, 부정적인 측면들이 있다고 해서 긍정적인 것들, 역사적으로 엄연한 사실까지도 부정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李承晩 박사의 부정적 측면들, 백색테러에다 부정선거 등 온갖 것을 다 거론할 수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李박사가 일평생 쌓아 올린, 이 나라 민족사에 기여한 훌륭한 足蹟(족적)까지 부인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 대통령들의 얘기들을 하면서 李의원은 金大中 대통령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얘기들을 했다. 大選 前에는 텔레비전에 나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국민회의 총재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해 놓고서는 지금까지도 총재직을 붙들고 있는 것을 비판하기도 했고, 「대통령이 되면 우선 IMF 경제위기를 극복한 다음에 통일문제에 착수하겠다」고 하고선 실제는 집권하자마자 햇볕정책을 내세워 통일문제부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길게 덧붙였다. 식량 주는 대신 北 인권문제 거론해야 『참으로 내가 걱정되는 것은, 안보문제, 對北(대북)정책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與野(여야)가 대립을 한 시대는 없었다는 겁니다. 이 말은 뒤집어서 말하면, 안보 對北문제는 여야가 없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나라의 숙명이에요. 대통령은 그런 문제에서는 국민적 일체감이 형성되도록 해야 해요. 우리가 이제 와서 무슨 공산당 두드려 잡자, 멸공통일하자 이러는 것은 아니지만, 안보문제·對北문제에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도록 하는 것이 대통령의 할 일입니다. 지금 金大中 정권에 대해 국민들이 말은 안 하지만, 상당한 저항심리를 갖고 있는 것도 여기에 큰 이유가 있다고 나는 봅니다. 햇볕정책은 넓은 방향에서는 결국 그렇게 갈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그 추진 방법에 있어서 너무도 성급하고 조급합니다. 나 혼자서 다 하겠다는 모습으로밖에는 비치지 않는 것이지요』 ―李의원께서는 그럼 우리가 북한문제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봅니까. 『물론 북한에 대해 식량원조도 하고 의약품도 지원해 주어야죠. 또 꾸준히 대화하면서 협상을 해 나가야지요. 그러나 그것에는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경제부터 우선 안정시키면서, 金大中씨가 평소에 주장한 대로 주변 4대국의 안전보장 속에서 對北문제가 추진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북한에서 3백만 명이 굶어죽는 기아사태에 대해서는 어떻게 봅니까. 金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침묵하고 있는데요. 『金大中씨는 지금 북한 金正日(김정일)이 비위에 거슬리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 아닙니까. 그건 정말 잘못이에요. 말할 것은 해야지요. 식량 원조도 나는, 북한의 지금 참상을 생각하면 지금보다 더 해줘도 된다고 봅니다. 다만 그러려면 분명한 조건을 걸고 해야 해요. 식량을 주는 대신 인권문제에 대해 강력하게 얘기를 해야지요. 세상에, 자기 나라 국민을 굶겨죽이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南北 교류 문제에 대해서도, 아무리 以北(이북)이 폐쇄국가이고 자기들의 정권유지를 위해 안 하려고 한다 해도, 식량을 주는 대신 무엇인가 진일보한 것을 얻어내도록 해야 하지 않습니까. 하다못해 우선 편지교환이라도 해야지요. 지금 이북과 동경은 전화통화도 되잖습니까. 물론 당국의 통제하에 하지만, 그것이라도 해서 서로 生死(생사)를 확인하고 안부를 묻는 정도는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것도 없이 자꾸만 뭘 지원해 준다 어쩐다 하니, 국민들이 걱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국가안보문제, 對北문제에 대해 여야간에 이렇게 대립하는 것은 우리 역사에 없는 일입니다. 그게 다 국가정책을 혼자 하려는 金大中씨의 獨斷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李會昌 총재는 포용력이 아쉬워』 李의원에게 마지막으로 그가 소속된 한나라당의 李會昌 총재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가 난처한 입장임을 알면서도 던진 질문에 뜻밖에도 선선히 대답했다.『李총재는 머리도 퍽 좋은 사람이고, 현명한 사람입니다. 또 바탕이 정말 깨끗한 사람이에요. 반면에 내가 다년간 정치를 해 오면서 보아온 것인데, 법률가들이 정치를 할 때가 지닌 한계를 느낍니다. 淸濁(청탁)을 다 삼킬 줄 아는 자세, 다른 사람들을 다독거릴 줄 아는 포용력 같은 데서 좀 아쉬운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李총재는 다음 大選을 향해 뛰고 있는데, 李의원께서는 다음 大選에서 李會昌 총재가 대통령이 될 것으로 봅니까. 『그렇게 봐요』 ―어떤 이유에서 그렇습니까. 『우선 金大中 정권이 국민의 신임을 받는 결과가 될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지요. 내각책임제는 어떻든 안 되는 것이고. 결국 우리 나라 정치를 망국적인 지역정치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李會昌 총재가 될 것으로 보는 겁니다』 ―그런 차원에서 李총재는 지금 3金정치 청산을 최대의 정치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고, 당내에 소위 3金청산 특별위원회까지 만들었는데, 현실적으로 권좌에 있는 분들을 어떻게 하겠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말하는 청산은 사람의 청산이 아니에요. 이 나라의 지역 대립 정치, 보스정치, 밀실정치를 청산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거지요. 金泳三씨의 정치再開(재개)에 대해 반대하는 것도, 그 사람이 그런다고 해서가 아니라 金泳三씨가 다시 정치를 한다고 나올 경우 또다시 지역대립구도를 격화시키기 때문이죠』 ―李의원께서는 올해로 일흔 다섯의 나이이신데, 혈색으로 본다면 젊은 티가 납니다. 또 평소에 조용조용하면서도 야당이 국회에서 농성을 할 때는 젊은 의원들과 똑같이 밤을 새고 그러더군요. 『혈색이 그런 것은 우리 집안이 원래 그래요. 그리고 건강은 스스로 생활을 절제하면서 사는 데 이유가 있을 겁니다. 술도 맥주 한 병이 최대 주량이고, 마작 같은 걸 하면서 밤을 새거나 안 하지요』 ―李의원에 대해서는 주변에서 성실한 분이라는 평들을 많이 하더군요. 『자랑 같지만 그게 내 생활신조예요. 내 공식 프로필에도 盡人事待天命(진인사대천명)이 좌우명으로 되어있지요. 늘 盡人事를 못했다는 생각이지만 그러려고 노력합니다』 ―晤峯이라는 雅號는 어떻게 지은 겁니까. 『원래는 내 고향(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의 지명에서 따온 것입니다. 내가 호를 갖지 않고 있으니까 주변에서 고향 지명을 따 五峰(오봉)이라고 불러요. 그래서 나도 그렇게 갖고 있었는데, 어느 날 時祭(시제)를 지낼 때 집안 어른들이 五峰은 우리 中始祖(중시조)의 號라고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漢字(한자)만 바꿔 晤峯이라고 한 거예요』 ―정치를 한 40년 해보니 재미있습니까. 『나는 옛날부터 기자들에게 「정치는 내 취미」라고 했어요.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애국심이 더 많고 애족심이 더 강해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정치가 취미라서 정치한다고 그랬습니다. 그건 정치를 그저 즐기려고 한다는 뜻이 아니라, 정치를 하려면 정치에 취미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아들들에게도 정치하지 말라고 해요. 나는 취미가 있으니 하지만, 나라를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다른 길이 많기 때문입니다. 정치는 그만큼 어렵고 힘들고 고난스러운 일입니다』 (참고로 李의원은 세 명의 아들을 두고 있다. 장남 李鍾九씨는 현재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이며, 차남 鍾旭씨는 한국외국어대 경영학과 교수, 삼남 鍾午씨는 수원지방법원 부장판사이다) 『옛날엔 마땅찮은 얘기들을 야당에서 해도 묵묵히 들어줬는데』 그와 지금까지의 대화를 하는데 걸린 시간이 세 시간이었다. 金대통령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평가에 대해 오해가 없도록 부연설명을 해주고, 1960년대의 정치와 요즘의 정치를 비교하면서 한숨을 쉬기도 했다. 『옛날에는 국회가 야당과 정부간의 논쟁장이었고 여당의원들은 듣기에 마땅찮은 얘기들을 야당에서 해도 묵묵히 참고 들어줬는데, 요즘은 어찌된 판인지 야당의원들이 뭐라고 한 마디 말만 하면 정부 사람이 아니라 여당의원이 먼저 나서서 공격을 해댄다』고 안타까워했다. 그가 그러면서 누누이 강조한 것은 「정치란 대화와 설득, 타협」이라는 가장 원론적인 정치의 원칙이었다. 그에게 「정치인으로서 남은 꿈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했더니 『좀더 어른스러운 정치를 봤으면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 「어른스러운 정치」란 「寬容(관용)의 정치」라고 했다. 『특히 勝者(승자)의 관용입니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이기도 합니다. 관용이 있어야 대화가 가능하고 양보와 타협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金大中씨에 대해 비판을 하지만, 정말 성공한 대통령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려면 그런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겸허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獨善(독선)과 獨斷에 빠지지 않습니다. 또 그래야 국민의 이해와 협력을 얻고 결국에는 지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반대의 길로 가면, 아무리 본인이 똑똑하고, 노력하고, 완벽한 논리를 갖고 있어도 소용없어요. 국민의 협력을 받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정책도 실패하는 법입니다』 |
첫댓글 부디 좋은 곳에 가셔서 편히 쉬세요 ..........
명복을 빕니다.....
"가 苦人 의 冥伏 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