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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뒷모습
요코는 기어이 5월부터 우유 배달을 하기로 했다. 4월은 눈이 완전히 녹지 않아서 길이 나빴다. 그래서 5월부터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게이조는 요코가 그저 순진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립심이 강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물론 일을 한다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게이조나 나쓰에, 그리고 도오루는 어렸을 때 일을 할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역시 피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이시는 열여섯 살 때 광부로 팔려 갔다고 하더니…..’
게이조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병원 문을 들어섯다. 아직 나무의 싹이 돋아나지 않은 4월초의 병원 뜰은 썰렁했다.
문득 앞을 보니 10미터쯤 앞에 무라이가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키가 훤칠한 그는 등을 약간 구부리고 느린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그도 게이조와 마찬가지로 모직 코트를 무겁게 걸치고 있었다.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듯한 여자가 쫓아 나와 무라이에게 고개를 숙였다. 무라이는 답례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그 여자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무라이를 돌아보았다.
‘유카코의 일 때문에 아직도 마음이 상해 있는 것일까?’
게이조는 무라이에게 우정 비슷한 것을 느꼈다. 게이조 자신도 그 일 이후로 줄곧 유카코의 일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유카코를 걱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라이는 누구보다도 게이조와 가까운 사이였다.
‘무라이도 그렇게 악당은 아니야.’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면 게이조 자신도 유부녀인 나쓰에에게 마음이 끌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무라이를 동정할수록 그의 뒷모습이 처량해 보였다.
이날 오후에 게이조는 수술복 차림으로 마스크를 벗으면서 수술실에서 나오는 무라이와 마주쳤다. 수술복 아래로 털이 긴 정강이가 보였다.
“도려내는 거였죠?”
게이조의 물음에 무라이는 미소를 지었다. 수술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듯 혈색이 좋아 보이고 눈이 빛나고 있었다. 아침에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가던 무라이의 뒷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수고가 많군요.”
게이조의 위로의 말에 무라이는 멈춰 서서 뭐라고 말하고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게이조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말없이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나중에 방으로 찾아가도 되겠습니까?”
무라이가 욕실 앞에 멈춰 서서 말했다. 수술 후에 목욕을 하는 것이 이 병원 의사들에게는 일종의 관례였다.
“아, 언제든지 와요. 마쓰사키 일 때문인가요?”
게이조가 말했다. 무라이의 얼굴이 흐려졌다.
“아니, 그 아가씨는 죽었어요.”
“하지만 죽을 작정이었다면 유서라도 써 놓았을 법한데요.”
“원한이 깊었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겠지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무라이는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순간 따뜻한 공기가 확 끼쳤다.
무라이의 한 마디가 게이조의 가슴을 찔렀다.
‘그래, 유서를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원한이 깊은 증거일까? 글로 써서 남기기에는 너무나 정이 깊었던 것일까?’
무라이는 목욕을 마치고 원장실로 들어왔다. 양복 위에 흰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피곤하죠?”
게이조는 이렇게 위로의 말을 던지고 위스키 병을 꺼내 놓았다.
“아니, 오늘은 마시지 않겠습니다.”
무라이는 사양했다. 수증기로 창문이 젖어 있었다.
‘원한이 깊었다.’
게이조는 무라이의 말이 생각났다.
“무슨 볼일이 있나요?”
멍하니 서 있는 무라이에게 게이조가 물었다.
“원한이 깊은 것은 유카코만이 아닌 것 같아서요.”
“뭐라고요?”
“원장님은 다카기 씨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생각하다니요? 아주 좋은 친구지요.”
“그것뿐입니까?”
“그것뿐이라뇨?”
“그럼 다카기 씨는 원장님을 어덯게 생각하고 있다고 여기십니까?”
게이조에게는 무라이의 질문이 당돌하게 들렸다.
“어떻게라뇨? 학창 시절부터 사귄 친구니까 별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염두에 둔 적도 없어요.”
다카기와 무라이는 먼 친척간으로 같은 피가 흐르로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용모나 성격으로 볼 때 이처럼 공통점이 없는 친척이 어디 또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무라이를 바라보았다.
“그럼 다카기 씨는 원장님의 사모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봅니까?”
별소리를 다 하는 사나이라고 게이조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야 별 생각이 없을 테지요.”
‘다카기는 너와는 다르다.’
게이조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럴까요?”
무라이는 문득 입가에 싸늘한 웃음을 띄웠다. 게이조는 잠자코 있었다.
“원장님도 의외로 태평이시군요.”
“………..?”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게이조는 상대하지 않았다.
“원장님, 전 사모님을 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카기 씨는 어떨까요?”
‘쓸데없는 소리 마.’
게이조는 어두워진 창문에 비친 무라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다카기 씨는 한평생 사모님을…….”
“그런 얘기라면 그만둬요.”
게이조는 애써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다카기와 난 친구 사이요.”
“우정에 먹칠을 하지 말라, 이 말씀인가요?”
무라이는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유카코의 일이 있었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거예요. 깊은 원한은 무서운 것이니까요. 다카기 씨가 무엇 때문에 독신으로 살고 있는지 아십니까?”
다카기라는 사람을 몰라도 분수가 있지 하고 게이조는 무라이의 시선을 되받아 노려보았다.
다카기가 무엇 때문에 독신으로 살고 있는지 게이조는 그다지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가 독신을 한탄한 적도 없고, 그러핟고 해서 자랑한 적도 없이 담담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혼자 사는 것을 걱정하게 할 만한 건덕지를 그는 갖고 있지 않았다. 언제나 여유 있고 쾌활했다.
‘생각해 보니 다카기도 마흔이 넘었구나.’
게이조는 지금까지 다카기에게 결혼을 권한 적이 없었다. 그것을 알아차리자 게이조는 자신이 지독하게 우정을 저버린 인간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독신으로 버틸 수 있다면 오히려 그게 더 편할 거야.’
무라이는 잠자코 있는 게이조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원장님, 다카기 씨에게는 혼담이 많이 들어왔었어요.”
의사인 만큼 여자들이 많이 따른다는 것을 게이조도 알고 있었다.
“그야 그럴 테지요.”
“그러나 다카기 씨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 왜 그랬는지 아세요?”
무라이는 나쓰에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다카기가 학창 시절에 나쓰에에게 프로포즈한 것은 게이조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나쓰에를 못 잊어서 독신으로 있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건 다카기 씨가……..”
무라이가 힘주어 말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더니 뜻밖에도 다쓰코가 들어섰다. 게이조는 놀라면서,
“아니, 병원에 다 찾아오시고, 웬일이세요?”
하고 말했다.
“아는 사람 문병하고 가는 길이에요.”
다쓰코는 하늘색 방한 코트를 벗었다. 거무스름한 적갈색 옷이 다쓰코에게 잘 어울렸다. 무라이에게 다소 진력이 나 있던 게이조는 다쓰코를 보자 구원이라도 받은 것처럼 반가이 맞아들였다. 무라이를 보자 다쓰코는,
“실례합니다.”
하고 쌀쌀맞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처음 만나는 사람치고 지금까지 다쓰코처럼 쌀쌀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남녀를 막론하고 반드시 그를 보는 순간 놀란 눈으로 숨을 죽이고 바라보곤 했다. 그런데 다쓰코는 그렇지 않았다. 다쓰코는 커다란 눈은 무라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아니, 다쓰코 씨는 무라이 씨와 처음 만나는 건가요?”
“아마 그럴 거예요.”
게이조는 얼른 두 사람을 소개했다.
“아니, 저는 전에 뵌 적이 있는데요.”
무라이는 이상하게 얼어 있었다.
“어머, 그러세요?”
다쓰코는 어디서 만났느냐고는 묻지 않았다.
“어디서요?”
게이조가 물었다.
“………..루리코 일 때…….”
무라이는 루리코의 장례식 때 거들어 준 다쓰코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보다 좋은 방이군요. 저 그림은 아사쿠라 씨의 눈(雪) 그림이죠? 이건 누구의 그림인가요?”
하고 다쓰코는 벽에 걸린 조그마한 풍경화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완전히 무라이를 무시하고 있었다.
“아, 이건…..”
게이조가 얼굴을 붉혔다.
“오…..선생님이 직접? 놀랐어요. 위트릴로(프랑스의 화가)의 그림인줄 알았는데…..”
그 그림은 게이조가 학창 시절에 삿포로의 거리를 그린 것이었다. 자기도 왠지 마음에 들어 얼마 전에 벽에 걸어 놓았다.
무라이는 처음으로 여성에게 무시를 당했는데도 웬일인지 안하무인격인 다쓰코에게는 조금도 반감이 일지 않았다.
“다쓰코 씨, 무라이 씨는 다카기의 먼 친척이에요.”
게이조는 무라이가 딱해서 말을 돌렸다.
“그래요?”
다쓰코는 흘끔 무라이를 쳐다볼 뿐이었다.
“무엇 때문에 다카기가 독신으로 있는지 무라이 씨가 추리하고 있던 참인데요…..”
게이조의 말에 다쓰코는 싱글벙글 웃었다.
“그래서 결론을 어떻게 내렸어요?”
무라이도 다쓰코 앞에서는 ‘다카기는 나쓰에를 못 잊어서 독신으로 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다카기 씨가 잊지 못하는 여인이 있다는 거였겠죠?”
하고 다쓰코가 말하자 무라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뭐, 별로 신경 쓸 것 없어요. 다카기 씨는 둥지를 틀 줄 모르는 새니까요. 우산을 들고 나가는 족족 잃어버리는 다카기 씨니까 여자를 한평생 잊지 않는 착실한 흉내는 엄두도 못 낼 거예요.”
“다쓰코 씨에게 프로포즈했다가 거절당했다더군요.”
게이조가 말했다.
“프로포즈라고 할 것도 없어요. ‘만사가 귀찮은데 다쓰코 씨하고 결혼이나 해 버릴까요?’라고 말했으니까요”
다쓰코가 우습다는 듯이 말했다. 무라이는 왠지 다쓰코에게 잔뜩 기가 눌려 방에서 나갔다. 무라이가 나가자 다쓰코가 말했다.
“무라이 선생이란 사람이 바로 저 사람이에요? 도대체 저 사람의 어디가 좋아서 그렇게 난리들일까?”
게이조는 나쓰에와 무라이의 관계를 다쓰코가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에 걸렸다.
“무라이의 일을 알고 있어요?”
“알고 있고말고요. 적어도 이름만은요. 제게 춤을 배우러 오는 아이가 안과에 입원해 있어요. 오늘 문병하러 갔더니 여섯 명의 환자가 하나같이 ‘무라이 선생, 무라이 선생’하고 떠들고 있지 않겠어요. 시시하게 집단 러브니 뭐니 하면서요. 어떤 사나이인가 했더니 여기 와 있었군요. 내 취향에는 전혀 맞지 않아요, 저런 타입은.”
게이조는 한시름 놓았다. 다쓰코는 나쓰에와 무라이의 일을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떤 타입이 다쓰코 씨의 마음에 들지요?”
게이조는 마음이 누그러져서 다쓰코에게 물었다. 다쓰코의 눈이 반짝 빛났다.
“좋아하는 타입요?”
다쓰코는 웃고 나서,
“선생님 타입도 아녜요. 마음 놓으셨죠? 그렇다고 물론 다카기 씨 같은 족속도 아니고요. 어떤 타입이라고 해 둘까요? 말하기 곤란하군요.”
“남자 같은 건 안중에도 없나요? 아까 다카기는 둥지를 틀 줄 모르는 새라고 했는데 다쓰코 씨는 어때요?”
“저도 다카기 씨와 비슷해요.”
“설마요. 아직 젊은데 슬슬 결혼을 생각해 보는 게 어때요?”
“고마워요. 아직도 여자 축에 끼워 주실래요?”
“다쓰코 씨 같은 분이 혼자 지낸다는 건 아까워요. 다쓰코 씨야말로 무엇 때문에 혼자 사시는 거지요? 돈과 일이 있기 때문인가요?”
다쓰코는 그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게이조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게이조는 문득 시선을 돌렸다. 그것은 지금까지 다쓰코에게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긴장된 아름다운 표정이었다. 겨울 햇살에 반짝이는 고드름과도 같은 아름다움이었다.
“돈이나 춤과 동거할 생각은 없어요. 선생님, 누구다 다소의 비밀은 갖고 있어요. 안 그래요?”
게이조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요코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쓰에한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그리고 요코를 맡아서 기르게 된 이유 같은 것은 다카기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쓰코에게도 남에게 말못할 비밀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다쓰코 씨에게 말못할 비밀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요.”
“있고말고요. 남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아니지만, 말하지 않는 비밀 말이에요.”
다쓰코는 부드럽게 웃었다.
“허, 알고 싶군요, 어떤 비밀인지.”
“알아서 뭐하게요?”
“그렇게 따져 물으면 곤란하지만…….”
“저 말이에요, 아기를 낳은 적이 있어요.”
다쓰코는 게이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네?”
게이조는 자기가 잘못 들었나 했다.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여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동안 도쿄에서 살던 때였어요. 전쟁 중이었지요.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었어요. 사내애였어요.”
“……….”
“상대는 마르크스주의자였지요. 뜻을 굽히지 않고 옥사해 버렸어요. 만요슈(万葉集: 일본의 고가집(古歌集)를 애독했죠. 그렇게 죽기에는 아까운 사람이었지요. 그런 남자는 아마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예요.”
게이조는 가슴이 뭉클했다. 그는 그런 비밀을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있다가 비로소 털어놓은 다쓰코에게 경탄했다. 다쓰코를 지탱해주고 있는 그 남자와의 추억에 게이조는 고개가 숙여졌다. 자신의 비밀과는 전혀 다른 다쓰코의 자랑스러운 비밀에 게이조는 자기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누가 알아도 곤란할 건 없어요. 그러니 누구에게 말해도 괜찮아요. 하지만 지금까지 저한테는 너무나 소중해서 말하고 싶지 않았답니다. 조금 어른이 된 셈인가요? 결국 말하고 말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