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낳은 위대한 지리학자 김정호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바는 극히 일부다. 그가 언제, 왜 죽었는지 조차 알 수 없다. 그는 오늘날로 따지면 융합형 인간이다. 나무를 캐고, 목판을 만들고, 조각을 하며, 지형을 새기며, 지형의 뜻을 책으로 펴내는 일들을 해 냈다. 국가의 반역자로 몰릴 수 있는 지도 만드는 일도 소신을 잃지 않고 밀어부친 담력자다. 그는 왜 목숨을 걸고 지도를 만들었을까? 그의 가정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본다.
김정호의 아버지는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토벌군으로 차출된다. 토벌군들이 사용했던 지도는 관가에서 내 준 것이다. 근데 문제는 현재 지형과 전혀 맞지 않았다는 점이다. 결국 눈 덮힌 산 속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죽음을 당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정호는 백성을 위한 지도를 만들겠다며 가슴 속 한을 품고 오직 한 길로 걸어간다.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는 일반 백성들이 사용하기 편하도록 분철식으로 되어 있다. 본인이 가고자 하는 지역이 있다면 그 지역이 나온 부분만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제작했다. 백성의 눈높이에서 만든 지도다. 산의 높고 낮음 뿐만 아니라 거리도 10리 단위로 점을 찍어 나타냈다. 지도를 사용하는 백성들의 생활이 편리해 질 수밖에 없었다.대동여지도는 백성들에게 저울과 같았다.
"사람살이의 저울이요 세상살이의 균형추요 생사갈림의 나침반이다"
"지도는 백성들에게 목숨줄이었다"
사람의 좁은 등짝에다가 세상의 만물을 다 새겨놓은 꼴이었다. 전국을 정밀하고 일목요연하게 구획한 절첩식 지도였다. 마땅히 지도는 나라의 것이기에 앞서 백성의 것이라야 했다. 대동여지도를 목판본으로 새기고 절첩식으로 고안한 것도 그 때문이다. 지도는 당연히 나라만이 소유할 수 있다는 편협한 생각 때문에 결국 아버지가 죽었다고 생각한 그는 더 이상 아버지와 같은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하자는데 지도를 만드는 목적이 있었다.
전 국토를 남북으로 백이십리 간격 22첩이 되게 분할하고 동서는 필십 리 간격에 따라 여러 절로 쪼갠 것은 온 백성이 필요한 판만 분리해 가볍게 소지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지도는 오로지 나라의 것일 뿐이라는 관리와 사대부들의 유아독존적인 생각에 대한 저항이었다.
김정호가 살았던 시대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권력 다툼을 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순조,헌종,철종,고종에 이르기까지 특정 가문에 의해 움직여지는 혼돈의 시대였다. 올곧은 법치보다 뇌물 잘 쓰고 줄만 잘 대면 만사형통의 세상이었다. 천주교 박해가 있었던 시기로 그의 딸 순실이도 천주교 신자였기때문에 죽을 뻔 했다. 중인의 신분으로 권력자인 양반들에게 모함을 받아야 했던 시기였다. "지도가 사람을 죽이는 " 시대였다. 청나라 첩자로 몰리기도 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독도가 그려져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축적을 무시하고 다른 지도들처럼 울릉도에 바짝 붙여서 그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빈 목판을 끼워맞춰 지도를 찍어내는 것도 불편했었다. 결국 제작과정의 어려움이나 효용성 때문에 우산도(독도)를 뺀 것이다. 그에게 있어 지도의 가장 큰 목적은 효용성이었고 휴대성이었다. 만약 우산도를 새기려면 울릉도에서 팔십 리 간격의 절이 두 세개가 더 필요했다.
조선 당국에서 무관심하게 버려 두었던 간도를 실측하고 두만강의 녹둔도, 압록강의 신도를 지도에 그려 넣은 것은 정치적 성격을 넘어 그 지역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 의도였다.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대마도를 누락시킨 것은 아쉬움 대목이다. 중인 신분이었던 김정호에게 정치적 갈등을 해결할 힘이 없었기때문이다.
영화로 상영된 것을 책으로 먼저 읽어보았다. 늘 가지고 있는 생각이지만 영화보다 책으로 먼저 접한 후 보는 것이 더 유익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