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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을 선용하는 신앙
사도행전 4:32~37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신앙 생활의 아름다운 점을 보여주는 귀한 대목입니다. 이 대목을 보면, 믿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한 가족처럼 지내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미 사도행전 2장 43절 이하에서 기록해놓은 바 있었는데, 오늘 본문 말씀 사도행전 4장 32절 이하에서 다시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성도들 중에는 가난한 자도 적지 않았고 노예 출신 성도들도 많이 있었을텐데, 성도들 중에서 밭과 집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넉넉한 사람들이 자기의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 발 앞에 두면 사도들이 그 드린 재물을 가지고 성도들의 형편을 살펴서 필요한 대로 나눠 주었기에 가난한 형제들이 가난의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적 구원의 감격 가운데 함께 구원받은 형제들의 사랑을 인하여 더욱 감격하며 모이기 힘쓰며 복음 증거의 사명에도 헌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밭을 팔아서 그 값을 사도들 발 앞에 기꺼이 내놓음으로써 성도들의 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분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여기 마지막 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요셉입니다. 그를 일컬어 사람들은 ‘위로자’라는 뜻을 가진 바나바라고 불렀습니다. 그 별명대로 바나바는 마음이 따뜻하고 연약한 자들을 격려하며 화해케 하는 일에 능하여 이후에 사도 바울과 이방ㄴ 저도 사역에 동역하였는데, 사도 바울은 그를 두고 사도라고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초대 교회는 재물을 서로 공유하며 교회 안에 가난한 자가 없도록 재물을 자발적으로 나누는 일을 행하였는데, 우리는 이러한 유무 상통한 초대 교회의 이 모습과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통하여 몇 가지 교훈을 함께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인간의 삶에 재물이 필요하다는 점을 기독교 신앙은 당연히 인정한다는 점입니다.
철학이나 종교 중에는 인간이 육체를 가진 것과 인간에게 당연히 필요한 먹거리 등과 입을 것과 잘 수 있는 집을 소유하고 누리는 것을 참된 자유와 진리와 행복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는 악으로 여기고 이것을 배척하는 주장들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노숙ㄴ하는 철학자 그리스 견우학파의 창시자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더 대왕이 그를 방문했을 때에 “짐이 무엇을 당신에게 해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대답하기를 “햇볕을 좀 쬐게 좀 비켜주시지요”라고 대답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들은 문명 생활의 편리함을 거부하고 걸인처럼 지내기를 고집하였습니다. 저 인도의 수많은 도인들은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을 극도로 혐오합니다. 평생 기둥 위에서 수도하거나 광야에서 홀로 지내며 깊은 영성을 추구합니다. 그들은 자기 몸을 고생시키면서 오히려 신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에서도 결혼하지 않고 무소유로 지내는 것이 해탈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연약한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 그것을 돌보기 위하여 당연히 필요한 먹거리, 입을 거리, 잘 수 있는 숙소, 함께 지내는 사회적 친분 관계 등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균형잡힌 생각입니다. 기독교 진리는 인간이 이렇듯 육체를 가진 것과 그 육체를 돌보기 위하여 물질이 필요하고 인간 관계, 사회적 관계도 필요하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말씀에서 생활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치시면서 마태복음 6:31,32 말씀에서 이르시기를,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신 대로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살아가기 위하여 먹을 것, 입을 것, 쉴 곳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대신 친히 염려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주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늘 성실하게 공급해주신 일들을 가득 차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이방 지역 사렙다의 한 과부의 집에 몸을 의탁하였을 때에 삼년 반 동안 세상이 온통 기근으로 고생하며 먹을 것이 없어서 괴로워할 때 하나님은 그 사렙다 과부의 집에 기름통과 밀가루 통에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사역할 때 그의 생도 중 한 사람이 죽고 난 후에 그 생도의 남은 가족이 빚 때문에 고생하는데 그 집의 두 아들이 빚쟁이들에게 끌려갈 위기를 맞이했을 때에 선지자 하나님은 그 집에 그릇마다 기름이 가득 채워지는 기적이 일어나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경건한 수넴 여인의 집이 선지자 엘리사를 늘 잘 대접했을 때에, 엘리사는 그 가정이 기근 시에 이방 지역에 피하도록 미리 예고해주었고 또 돌아와서는 그 가족이 평안히 먹고 살 수 있도록 왕을 감동하여 잃은 논밭을 되찾게 해주었습니다.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도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세상에 육체로 계실 때에 자기를 찾는 이들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주셨습니다. 병이 있는 자들은 고쳐주셨고 배가 고픈 모습을 보면 주리지 않도록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초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과 우리 구주만을 향한 믿음만 충만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성령의 하나 됨을 따라 형제 사랑이 충만하여 가난하여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이 없어서 고통을 겪는 자들이 그 중에 하나도 없도록 가진 것들을 서로 나누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마침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에 큰 기근이 발생하자 사도 바울도 그가 설립을 도운 이방인 교회들에게 유대 지역의 형제 자매들을 위하여 구호 헌금, 구제 헌금을 드리자고 여러 차례 권면하였습니다. 사도는 여러 이방 교회들의 충성스러운 일꾼들과 동행 방문하여서 교회들마다 구제 헌금을 거두어서 예루살렘에 방문하여 그 헌금을 전달해주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그 때 이방 교회들에게 내세웠던 캐츠플레이즈 일종의 구제 헌금 독려 광고문안은 로마서 15:27 말씀대로 하면,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에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한 교회 안에서도 이렇게 육적인 필요가 있을 때 서로 재물을 나누어 섬기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혈통이나 민족을 뛰어넘어서 주님의 한 형제 자매 된 교회의 지체들은 서로 어려울 때에 육적인 것들을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가 ‘오픈 도어즈’ 선교단체를 통하여 시리아 지역의 선교단체에 적은 기금인 200만원을 보낸 것도 주님의 한 형제 자매로서 그들의 아픔을 돕고 그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교우들과 이슬람 주민들을 도와서 비록 적지만 위로와 용기를 드리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도움을 입은 그 지역은 과거 이방 선교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안디옥 교회와 매우 가까운 지역입니다. 이번에 극심한 지진 피해를 입은 안타키아가 시리아 접경 지역 튀르키예 도시니까 이렇게 과거 이방 선교의 모교회인 안디옥 교회에 이천년 후 이 동방의 먼 이역 땅인 우리들이 안디옥 가까운 지역의 교회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의미 있고 감사한 일입니다.
이렇듯 인간의 삶에 육체적 필요를 채우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관심을 갖고 계신 일이며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이 참된 신앙으로부터 우러나온 합당한 일임을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물질적 소유를 초월하는 영성이 참 신앙의 특징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벳새다 광야에 몰려들었던 가난한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가르쳐주시고 또 병든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다가 날이 기울어가자 주님은 그들 중 노약자들과 어린아이도 많은 것을 보시고 그 광야에서 다섯 개의 보리 떡과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기적을 일으켜서 남자만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바구니에 남은 것을 담을 만큼 풍성하게 먹을 것을 공급해주셨습니다. 그들이 너무 기쁘고 놀라서 당장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덤벼들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저녁 늦게 기적을 맛보고 배불리 집에 돌아갔던 사람들은 다음 날 다시 아침부터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나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그 광야 자리에 없었고 제자들과 바다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가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우왕좌왕 예수님을 찾으려고 배를 타고 왔다 갔다 하다가 마침내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찾았을 때에 반가움과 약간의 원망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여쭈기를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한복음 6:26,27)
예수님은 그 사람들이 육신적인 생명만을 지켜주는 먹고 마시는 떡과 음료만을 추구하는 것을 책망하시면서, 진정으로 사람이 먹고 마셔야 할 생명의 떡과 생명의 음료는 예수님 자신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요한복음 6:47~51)
예수님께서 이러한 가르침을 통하여 강조하신 것은 사람은 육신만을 먹고 마시는 존재가 아니요 인간은 육신의 필요뿐 아니라 그 이상의 내적 존재의 필요 곧 영적 배고픔과 영적인 목마름이 있는 영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적, 영적 필요는 먹고 마시는 것만으로 채워질 수 없고 오직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으로, 곧 그를 영접하여 믿음으로써 채워질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땅에 사는 짐승들과 새들처럼 단지 먹고 마시기만 하면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 존재로서 하나님을 알고 그와 교제함으로써 살아야 하는 영적 존재인 것입니다. 그 거룩하시고 지존하신 하나님을 알고 믿고 섬기며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구원의 중보자로 세상에 오신 참 생명의 떡과 음료가 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전적으로 믿고 자기의 구원의 공로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인간은 비로소 참된 내적 만족을 얻고 다시는 목마르지 않고 다시는 주리지 아니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인간의 참된 생명과 만족은 육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아무리 좋은 것을 마시고 아무리 화려한 것을 입고 멋진 고가의 집에서 살고 세상에서 가장 좋은 차를 몰고 다니고 세상에서 대단한 사람들과 교제하며 여가를 즐긴다 해도 그렇게 해서 그의 생명이 충만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더 많은 상속 재산을 얻기를 원하여 자기 형과 분쟁 중에 자기를 좀 도와달라고 청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누가복음 12:15)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영적 존재이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옷과 집과 차와 각종 재산의 많고 적음으로 그 사람의 생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인간이 본래 더 존귀하고 더 영광스러운 존재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세례받으신 후에 광야에 들어가서 금식하여 주리시는 예수님께 어느날 마귀가 다가와서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고 시험하였을 때, 예수님은 마귀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태복음 4:4)
마귀는 인간이 세상의 빵과 밥으로만 사는 존재로 치부하지만 우리 주님은 빵과 밥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그의 말씀을 사랑하며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아가는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마귀 앞에서 선언한 것입니다. 인간의 참 생명은 참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참 생명의 중보자로 세상에 오신 참 떡이신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은 만큼 그의 생명이 넉넉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 것을 더 많이 소유함으로 우리의 생명이 충만한 것이 아니요 우리 구주께서 밝히 가르쳐주신 대로 하나님과의 관계, 우리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깊어짐으로써, 그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삶 속에서 사랑하며 순종함으로써 영적인 생명, 참된 생명으로 충만해지는 복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우리에게 주신 재물을 선용하는 영성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벳새다 광야의 사람들을 나무라신 까닭은 그들이 영적인 참 양식인 하나님 말씀과 생명의 떡이신 주님을 외면한 채 육신의 음식과 이 지상적 행복만을 추구했기 때문이지, 주님이 육신의 음식과 각종 필요를 죄악시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늘 설교의 첫 번째 부분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주님은 이러한 세상적인 음식, 옷, 집, 차 등 각종 편의적인 용품들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함을 잘 알고 계시고, 우리가 그러한 것들을 구하기 전에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얻기 위하여 우리에게 재물이 필요하고 유익하다는 것도 주님은 인정하십니다.
다만 우리에게 재물이 필요하지만 그 재물에 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하여도 사실 더 중요한 것들을 가진 참된 부자입니다. 또 우리가 세상적으로 남이 알아주지 않는 무명의 사람들일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주님과 천사들이 알아주는 유명한 자입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요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지극히 귀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가난할지라도 이것 때문에 스스로 불쌍히 생각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하며 가진 바를 족하게 여기는 자족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가 부자가 되었다 하여도 그 많은 재물의 소유함 때문에 마음이 높아져서 남을 깔보거나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어지는 교만함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재물이 아무리 많아도 그 재물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궁극적인 징표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며 충성한 성도들에게 재물을 주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재물을 풍성히 주셨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선물로 주셨습니다. 솔로몬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므로 전무후무한 부와 귀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풍성한 재물을 받음이 그들의 영성을 보증하지 못하고 도리어 부유함으로 인하여 넘어지고 자빠지는 경우가 그들에게도 있었습니다. 다윗도 모든 것이 넉넉하고 평안할 때 방심하여 범죄하여 모진 징계를 받았었고, 솔로몬도 전무후무한 부의 절정 속에서 타락하여 깊이 오래 미끄러져 노년에사 참회하여 간신히 돌아온 것으로 여겨집니다. 갈멜의 부자 나발도 교만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던 다윗을 향하여 저주와 모독의 말을 했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당하여 열흘만에 몸이 돌처럼 변하여 급사하고 말았습니다. 큰 부자였던 관원 청년도 구원의 문이신 주님 앞에까지 달려나와 영생을 얻는 길을 물어보았으나 그의 소유한 많은 재물에 대한 애착 때문에 영생의 주인이신 주님께로부터 제자가 되라는 복된 초대를 받았으나 영생은 버리고 결국 불타 없어질 세상으로 힘없이 돌아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재물은 축복이 되기도 하지만 재앙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에서 초대 교회 성도들이 본을 보여준 것처럼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을 가지고 가진 소유를 선용하는 영성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넉넉하게 주신 경우에는 그 재물을 자기를 위하여 누릴 뿐 아니라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향하여 기꺼이 자비의 손을 펴서 베푸는 삶을 사는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주님의 부활을 확신하자 마음에 큰 은혜를 받았을 때 그들은 자기와 함께 주님을 믿는 형제 자매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가난 때문에 고통을 겪으며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고 헐벗고 집이 없어서 잠을 자지 못하고 떠도는 형제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 마음에 성령 충만하여 은혜가 넘치자 그들은 자연스럽게 형제 자매들의 어려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자기들의 손을 펴서 돕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의 선한 손길에는 어떤 강요도 없었습니다. 사도들이 그렇게 하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심령에 성령의 충만함이 임하자 그들은 자기들의 참된 소유가 자기들이 가진 재물의 많음에 있지 않음을 자각했던 것입니다. 물질을 초월한 내적 부요함이 그들 심령이 충만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 신앙인은 재물의 강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집니다. 그들은 재물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만족과 행복이 이기적인 인간의 본래적인 욕망을 채우는 데서 얻지 아니하고, 그 이기심을 뛰어넘어 자기의 소유를 펼쳐서 다른 이들과 함께 그 재물의 유익을 나눔으로써 함께 누리는 데서 더 큰 만족을 얻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이르신 말씀을 사도 바울이 삶으로써 직접 실천함으로 실감했던 말씀이 이것입니다. 사도행전 20:35 말씀에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복되다’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마카리오스’라는 말은 마음의 행복을 가리킵니다. 누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냐면, 받는 사람도 행복한 사람이지만 더 행복한 사람은 바로 주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한없이 주는 분이셨고 그렇게 줌으로써 행복하셨던 분입니다. 그처럼 주님의 몸된 교회도 그러하고 주의 참 백성된 우리들도 그러합니다. 자기의 것을 줌으로써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바로 주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해지면, 마음에 은혜가 충만해지면, 바로 이렇듯 기꺼이 자기의 것을 펴서 부족한 이들에게 베푸는 일이 기쁘고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은혜가 사라지고 성령이 마음에서 숨어버리시면 우리 속에 이기심이 가득차고 다른 사람들을 물질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물질을 잃어버리면 내 생명을 잃어버린 것처럼 힘이 떨어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물과 소유는 결코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자기 손에 끌어모아도 결국은 다 놓고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물들을 더 끌어안기보다는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기꺼이 베풀고 나누며 우리 곁에 가난하고 힘든 이들에게 나눌 줄 아는 너그러운 손을 가진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에서 자기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 목사에게 이렇게 권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고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디모데전서 6:17~19)
그렇습니다. 재물은 우리의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절대 소망은 하나님이며 우리 구주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가를 잘 아시고 우리의 육체적 필요들도 무엇인가 아시며 우리가 구하기 전에 그것들을 친히 우리에게 주시고자 우리 대신 염려하시며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그것들을 우리에게 후히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현재와 미래를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위에게 후히 주시고 그것들을 충분히 누리게 해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보다 더 넘치게 남도록 주시는 분입니다. 그것들은 쌓아두고 자기에게만 갖고 있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가지고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주고 너그럽게 손을 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재물에 잡히지 말고 재물을 선용하는 자들이 됩시다. 손에 움켜쥐지만 말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보고 기꺼이 손을 펼 줄 아는 자들이 됩시다. 그렇게 선한 사업에 힘을 쓰며 선한 일을 행할진대, 우리 하나님은 반드시 그러한 선행을 잊지 않으십니다.
디모데전서 6장 19절 말씀에서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고 하신 대로 장차 이 세상을 떠날 때에 그 선행이 그를 주님 앞에서 증거하여 주님에 대한 참 신앙을 가진 것을 보증해줄 것입니다. 믿음의 진실성을 그 선행들이 입증할 것입니다. 그 선행을 위하여 드려진 것들은 하늘 나라에서 썩지 않는 보화가 되어 그 사람의 평생의 소유로 주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도 그렇게 선을 베푸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재물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잠언 28:27 말씀에 이르기를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크리라”
고 하였습니다. 잠언 11:24,25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여질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고 하였습니다.
또한 자신만의 삶뿐 아니라 자손들의 삶도 복이 임합니다. 시편 37:25,26 말씀에 이르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복된 은혜가 너그럽게 손을 펴는 성도들에게 임합니다. 극서은 물질로 교회와 성도들에게 헌신하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존경과 사랑과 영적인 은혜와 권세를 주십니다. 바로 그 예가 바나바입니다. 이 바나바는 그렇게 자기의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에 두고 기꺼이 형제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더니 성도들의 존경과 사랑을 듬뿍 받았고 사도들의 깊은 신뢰를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영적 권세와 은사를 주시어 그로 하여금 사도 바울과 함께 이방인의 사도의 귀한 직분을 맡아 감당하도록 세워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디모데전서 3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디모데로 하여금 감독과 집사로 세울 때 그 합당한 직분자의 조건으로 “나그네를 대접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아니하며”라고 제시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교회의 섬기는 직분자들은 세상 재물을 불의하게라도 얻기를 바라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얻어서 그 재물로 자기를 위하여 누릴 뿐 아니라 그 재물로 선을 행하기를 너그럽게 나누어주기를 좋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세상 재물로 얻지 못하는 진정한 존경과 사랑을 얻으며 세상 부귀보다 더 귀한 영적인 권세와 은사와 영광스러운 직분을 맡겨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행복한 삶의 비결은 즐거이 베푸는 삶에 있습니다. 그것은 주의 부활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충만함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확고한 믿음과 성령 충만을 통하여 평생에 재물을 선용하는 즐거움을 알아서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