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춤, 언제까지 야반도주
발걸음을 멈추게 되는 일은 생각보다 잦다. 가을로 향해 가는 파아란 하늘이 눈에 보일 때, 나뭇가지 위 지저귀는 새소리를 듣게 될 때, 계절이 바뀔 때면 달라지는 풍경을 새롭게 눈에 담을 때… 서둘러 걷던 발걸음을 멈추던 마음이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일상에서 걸음을 멈추는 건 쉽지 않았다. 특히, 출근길은 세상을 외면해도 되는 타당성을 부여받은 것처럼 일터를 향해만 달려가는 시간이었고, 일터는 생각과 감정이 탈곡된 채로 한 달에 한번 쥐어지는 그것을 받고 실실거리는 곳이었다. 늘 그렇듯 나 자신을 세뇌하고 세뇌당하는 직장인으로서의 일상은 반복되었다.
옹헤야 어절시구 옹헤야 저절시구 옹헤야 에헤헤헤 옹헤야1)
베틀을 노세 베틀을 노세 옥난간에다 베틀을 노세 에헤요2)
허기야 디야차 갈방아야 에야 디야 갈방아야3)
엉허야 뒤야 엉허야 뒤야 어기여뒤여 방애여4)
에헤야~디야~ 노동요라도 불렀다면 좀 달라졌을까? 지루함도 잊고, 풍성한 수확을 기원하며 마음 또한 풍요로워져 일에 대한 생각도 달라지도록. 노래를 불렀다면. 일을 하는 내내 노래를 불렀다면,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면, 같은 일을 하는 이들과 더불어 함께.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날이었다. 개미떼의 행렬처럼 검은 옷을 입은 무리들이 곳곳에 보인 퇴근길, 스물 넷 교사의 절규를 듣고 서성거리다 돌아선 그 길은 날이 어두워 더 슬퍼지는 하루였다. 그리고 잊지 못할 단어가 같은 그림으로 되살아난 날이기도 하다.
세상은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내게는 교육 또한 정치와는 유리될 수 없는 영역이다. 사실 정치가 세상 모든 것에 관여하며 그 흥망을 조합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현실에서, 교육 또한 마찬가지인 현실에서 교육만 정치투쟁이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것을 차치하고서도 “신성한 선생님을 스스로 노동자로 격하시킨 단체”라는 노동에 대한 편협한 인식을 가진 이들에게는 어떤 형태로든 투쟁적이어야 한다.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끝없는 천박하고 저열한 인식은 언제부터 만들어진 것일까. 이 왜곡된 프레임이 여전히 ‘먹혀’ 가는 세상이라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1980년대도 아닌 2023년, 서빙 로봇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노동이란 단어는 너무나 쉽게 왜곡되어 처참하게 쓰이고 있다. ‘노동’과 ‘노동자’는 광기이자 적대적인 단어의 상징이지 않은가. 하나의 단어가 유독 우리나라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건, 단어에 투영된 프레임을 유지하여야만 할 세력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저런 말들을 내뱉을 수 있는 것일 게다. 그래서 내 기억에 노동은 어떤 이미지로 남아 있는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 공장에 다니는 언니들이 옆방에 살았다. 그 언니들이 떠나고 난 뒤 남은 물건은 우리 집으로 옮겨졌다. 특별히 마주친 기억도 없는 그녀들을 기억하는 건, 여전히 내 방 책꽂이에 있는 그녀들이 남기고 간 몇 권의 책과 기억 속에 박혀 버린 그녀들의 이미지 때문이다. 나는 그녀들을 야반도주한 여공으로 기억하고 있다. 새삼 생각해보니 스물 몇은 되었을까 싶다. 그녀들이 정말로 한밤중에 사라진 것인지, 어떤 이유로 그러했는지, 내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그렇대도 어린 내가 그녀들이 사라진 이유를 노동운동을 하다 경찰에 쫓겨서라고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이유 말고 무엇이 있을까. 특별히 얘기를 나누었던 기억도 없지만 한밤중에 사라져 다시 되돌아오지 않은 그녀들의 빈 방을 보며 오래도록 이유모를 안타까움과 서글픔을 느꼈었다. 그리고 그녀들이 붙잡히지 않기를 빌었다. 어린 내게 노동자라고 하면 야반도주라고 자동으로 떠올리듯 만들어 주었건만 경찰에 쫓겼대도 경찰보다는 그녀들을 더 응원하게 되었다. 어린 내게도 그저 선량한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과 폭정이 느껴졌던 것일까.
‘공교육 멈춤의 날’ 집회는 연차와 병가 등을 이용한다는 교사들에 대한 징계와 탄압 소식과 함께 했다. 그래서 집회 시간이 늦은 시간으로 결정된 것인가 하며 야반도주한 그녀들을 떠올렸던 것인데, 이젠 내 단어장의 의미를 바꾸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노동하는 이에게 노동가는 필요하고, 노동하는 이가 노동자라는 것은 단어조합상 자연스럽고 타당하다. 노동가와 투쟁가가 불리지 않을 이유는 없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한 즐거운 외침과 정당한 요구를 억압하는 그 모든 것에 위축되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분노해야 할 일이다. 잘못된 프레임에 세뇌되어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
1) 보리타작 소리 '옹헤야' 中
2) 베짜는 노래 '베틀가' 中
3) 전어잡이 노래 '사천 마도갈방아소리' 中
4) 제주도 어업 노동요 '멸치 후리는 소리'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