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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최철주
계절이 가을을 지나 겨울로 다가가면서 나는 앞으로 몇 년을 더 살 수 있을지 어림셈을 하기 시작한다. 아내가 떠난 지 만 11년 됐으니 잘도 버텨온 셈이다.
내가 알던 여러 명의 남자 독거노인들은 배우자를 떠나보낸 후 2~3년 사이에 세상과 작별하곤 했다. 길면 5년까지 가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어떻든 나이든 남자의 죽고 사는 자연의 이치는 결국 배우자 사후 몇 년 이내에 작동을 멈추는 게 당연한 이야기가 돼버리는 게 서글프다. 나도 머지않아 하늘의 호출 신호가 떨어지면 이 세상을 떠날 채비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는다.
게다가 나는 국가기관에 암환자로 등록돼 의료비 지원까지 받고 있다. 내 친구 몇몇이 아예 대놓고 묻는다. “야, 넌 혼자 남아서 잘도 지내는구나, 그래.” 농담인 줄 알면서도 꽤 귀에 거슬린다. 오래전에 배우자를 떠나보내고도 삼시 세끼 잘도 찾아 먹는 내게 죄책감 같은 걸 상기시켜 주는 듯하다. 얄미운 이 말투에 대들 용기는 없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눈치 없는 발언은 남성 차별일 뿐만 아니라 나에 대한 인권침해이기도 하다. 남편과 사별한 여성은 곧장 슬픔을 이겨내고 제2의 인생을 맞이한 듯 당당하게 노후를 이어가는 경우가 허다한데 왜 노년의 남성은 움츠러들며 비실비실 사라져야 하는지 의문이 꼬리를 잇는다. 지나치게 여성에게 의존하는 남성의 생활 패턴은 도대체 고쳐질 수 없는 것인지 궁금한 일이다. 의학적·생리학적 근거야 어떻든 남자의 평균수명이나 건강수명이 여성보다 6~7년이나 뒤처지는 건 결국 남성들의 자업자득이 아닐까.
나는 은퇴하면서 아내와 아들의 권유에 따라 요리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2007년의 일이다. 비단 누가 떠밀어서만이 아니라 이젠 남자도 요리를 할 줄 알아야 하고 가족을 위한 음식 서비스도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 있는 요리학원에 등록하러 갔을 때 작은 해프닝이 벌어졌다. 대개 예비신부인 젊은 학생들 틈 사이에 처음으로 남자를 끼워 넣는 게 쉽지 않았던 듯 입학이 보류됐다. 더구나 노년의 남성이 요리 공부를 하겠다니 학원 측이 난감했을 듯하다. 원장과 몇 차례 논의를 거친 후에야 어려운 입학 문턱을 넘어섰다.
나는 열심히 한식·중식·양식 코스를 속성으로 마치고 내가 배운 요리법대로 아내의 아침 밥상을 마련하는 일상을 시작했다. 딸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후 상실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내가 기획한 ‘식사 챙겨주기’였다. 형편없는 요리 솜씨 때문에 차라리 라면으로 때우자는 혹평도 들었지만 어떻든 그때의 배움이 지금의 나를 생존하게 하는 비결의 됐다. 아마 요리 배우기를 게을리했더라면 나도 다른 남자들처럼 아내와 사별한 후 2~3년 정도에서 무슨 사단이 일어났을지 모른다.
외출할 때는 시장바구니를 챙겨 다닌다. 필요한 식료품을 구매하고, 이것으로 요리하는 요리본능은 삶의 원동력이다. 안혜리 기자
요리에 관한 내 관심은 먼 인류의 역사로까지 뻗어 갔다. 내가 참여해 온 북클럽에서 『요리본능』(리처드 랭엄)이나 『요리를 욕망한다』(미셸 폴란) 등을 놓고 토론하면서 인간이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들여다보는 데 흥미가 돋았다. 요리 공부가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요리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말을 가슴에 새기며 뚝배기 달걀찜도 만들어 보고 굴소스 야채볶음 등으로 영양식을 갖추어 먹었다. 요즈음에는 위암 환자가 소화하기 어려운 파스타면 대신 국산 막국수를 삶아 파스타 소스를 뿌려 먹는 간단한 요리법에 길들여졌다.
요리는 나 같은 독거노인이 생존 능력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작은 권력이며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혼자 레스토랑에 드나들면서 1인 고객을 냉대하는 지배인 눈치를 살필 필요도 없어졌다. 오히려 특정 메뉴의 레시피에 대해 질문하면 그가 나를 격이 다르게 대우하는 시선이 즐거웠다. 남자 노인이라 푸대접하지 말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자택 냉장고 내부 모습. 김성룡 기자
내가 사는 아파트의 거실 한쪽 귀퉁이에 작은 주방이 딸려 있다. 식탁에는 항상 내가 구매해야 할 식료품 리스트가 포스트잇 메모에 적혀 있다. 나들이할 때마다 손지갑 모양의 휴대용 시장바구니를 호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산책하고 돌아오면서 편의점에 들른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바구니 밖으로 머리를 내민 길쭉한 대파와 통통한 무를 싸서 온다.
이런 요리본능이 내가 혼자 오래 버틸 수 있게 한 삶의 원동력이었다. 그냥 뭔가 먹어야겠다는 게 아니라 맛있게 만들어 봐야겠다는 욕심이 나를 이처럼 자유롭게 해줬다. 나는 그런 삶을 감사하게 여기고 있다.
지방 소도시나 대도시 구청 강당에 서서 웰다잉 강의를 할 때 나는 될수록 남녀의 균형을 맞추려 애썼다. 3명의 여성이 질문하면 적어도 1명의 비율로 반드시 남자를 끼워 넣는 식으로 질문을 유도하고 답변을 이어갔다. 강당의 맨 앞좌석과 중간 부분은 예외 없이 여성들이 차지한다. 남자들은 양옆 가장자리나 뒷좌석에 웅크리고 있다. 여성들은 힘차게 손을 뻗어 질문하지만, 남성들은 손을 들까 말까 망설인다.
하지만 나이 든 남자도 궁금증을 풀고 싶은 본능을 감추지 못한다. 정장 차림의 노년의 신사가 또박또박 말했다. “말기암에 시달리고 있는 아내가 같이 죽자고 자꾸 조릅니다. 제가 뭐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이 질문을 받고서야 그가 심각한 상황에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내에게서 인생을 시험받고 있는 배우자의 절박한 모습에 시선이 꽂혔다.
나는 그를 따로 만나 호스피스 병동에 아내를 입원시키는 방법을 안내하면서 배우자의 식욕을 살려주는 옛 맛집을 열심히 알아보라고 권했다. 멸칫국물에 묵은김치를 넣어 끓인 메뉴를 어디선가 찾아낸 그의 노력은 아내의 감동 어린 칭찬으로 되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나는 휴대전화 메시지로 전달받았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따뜻한 간병을 받으며 예상보다 훨씬 긴 1년 반을 더 살았다. 삶에 대한 본능이나 호기심에는 요리의 맛을 찾아가는 욕구도 숨어 있다. 웰다잉 강의에 음식 이야기를 간간이 끼워 넣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
앞으로 나는 얼마나 더 생존할 수 있을까. 노년의 여생은 제각각 하기 나름이라는 애매한 말투에 너무 젖어 있을 필요는 없다. 여성은 끊임없이 배우려고 노력하는 데 반해 남자들은 너무 게으르다. 그런 남자들에게 요리 배우기를 권한다. 나는 오늘도 재래시장 가게에서 장아찌 마늘 한 조각, 깻잎 한장의 맛을 전수받는 즐거움을 각별하게 여긴다. 밥 잘 챙겨 먹으라고 채근하는 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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