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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송원(茶松園) 원문보기 글쓴이: 長樂山人 이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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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히토와 맥아더
"나(히로히토 일왕)는 국민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정치·군사 양면에서 행했던 모든 결정과 행동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있는 자로서 나 자신을 당신(더글러스 맥아더) 미국 총사령관)이 대표하는 모든 나라의 결정에 맡기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나(맥아더)는 큰 감동으로 마음이 흔들렸다. 죽음을 무릅쓸 정도의 책임감. (…) 용기에 가득 찬 태도는 나의 뼛속까지 흔들어놓았다." (<맥아더 회고록> 일부)
1945년 9월 27일, 히로히토 일왕과 맥아더 사령관의 1차 회담. 히로히토의 이 발언은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1947년 5월 시행된 신헌법('평화헌법') 아래서 그는 책임감 있으며, 평화를 사랑하는 일왕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일본 간사이가쿠인 대학 법학부의 도요시타 나라히코(豊下楢彦) 교수는 그의 말이 거짓이었다고 단호히 말한다. 오히려 두 사람 사이에 은밀한 '거래'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전후 일본의 처리 문제에서 일왕이 승전국 미국의 요구에 수동적으로만 움직였다는 일본 우파의 시각을 뒤집는 것이다.
히로히토, 전쟁 책임 회피하기 위해 맥아더와 협상
▲ <히로히토와 맥아더> (도요시타 나라히코 지음, 권혁태 옮김, 개마고원 펴냄). ⓒ프레시안 |
<히로히토와 맥아더>(도요시타 나라히코 지음, 권혁태 옮김, 개마고원 펴냄)에 따르면 히로히토는 패전 후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한다.
자신이 전쟁범죄인으로서 처벌받는지 여부와 냉전대결 구도에서 공산주의로 인해 일본 천황제가 붕괴되는지 여부였다.
저자 도요시타에 따르면, 히로히토는 맥아더와 '전략적 거래'를 통해 이 문제를 능동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1945년 1차 회담에서 1951년 4월까지 11차례 맥아더와의 회담이 그것이다.
또한 맥아더 역시 자신의 필요 때문에 히로히토의 거래를 용인했다. 원활하게 패전 처리를 하고 미국의 점령 정책을 펼치는데 히로히토의 권위가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맥아더는 히로히토가 재판에 기소되지 않게 미국 정부를 강하게 설득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히로히토가 펼친 '이중전술' 방식은 그의 본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전쟁에 대한 무한책임을 진다고 말을 하면서, 전쟁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로 대표되는 군부에 자신의 책임을 전가한 행동이 그것이다.
예컨대, <뉴욕타임스> 프랭크 클럭혼(Frank Kluckhorn) 기자와의 인터뷰가 일본에 보도됐을 때 그의 대응을 살펴보자. 당시 히로히토는 전쟁 책임을 추궁하는 미국 여론을 향해 진주만 급습을 명령한 '선전조서'는 자신과 무관하다고 밝혔다.
"'미국의 참전을 초래한 진주만 공격을 개시하기 위해서 선전조서를 도조 히데키 대장이 사용한 것처럼 사용한 것이 천황의 의사였는가?'라는 물음에 히로히토는 '선전조서를 도조 대장이 사용했던 것처럼 사용할 의도는 없었다'고 답하였다. (…)
하지만 사태는 급변한다. 클럭혼의 기사가 일본신문에 게재되자, 갑자기 내무성이 '일본 국민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이 기사를 게재한 신문을 압수해 버린 것이다. (…) '일본 국민은 천황 자신이 도조 히데키를 비난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커다란 소동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내각 정보국 대변인이 말했다."
이렇게 히로히토는 도조 히데키의 책임을 점령국인 미국 등에 유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 책임이 모두 자신에게 있다'는 식의 교묘한 이중전술을 펼쳤다. 이 전술은 성공해 그는 전범재판인 '도쿄재판'에 서지 않았고, 일본 사회 내 자신의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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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노미야 히로히토(迪宮裕仁 1901.04.29 ~ 1989.01.07) 일본의 제124대 국왕. 이름은 히로히토. 1926.12.25 ~ 1989.01.07까지 제위. 그의 연호는 쇼와(昭和)], 64년간(엄밀히는 62년 2주 동안) 지속되었으며 이는 일본역사상 최장기록.
1차대전의 대 호황기에 일본경제는 급성장했으나 대전 이후 열강의 생산력이 회복되자 일본의 수출은 크게 감소해서 전후에 공황에 빠졌다. 쇼와 2년,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금융공황이 일어났으며 당대의 와카즈키 내각은 스즈키 상회의 도산으로 불량채권 문제를 안고 총사직했다. 이를 계승한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여 일본전국 은행이 일제 휴업에 들어갔으며 일본은행이 긴급대출하여 위기를 견뎠다. 이러한 경제적 위기의 타개책으로 중국이 분열되어 있는 것에 주목, 만주에 진출하기 위한 구실을 찾았으며 이때문에 만주 몽고지역의 이권 사수를 위해 장작림을 암살했다. 당시 다나카 내각은 그때까지의 중국 내정 불간섭 정책을 연약외교로 비판했으며 수상이 외상을 겸임하여 중국 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사상 단속을 강화해서 무산정당, 공산당을 강력하게 탄압했으나 강경 일변도 정책이 문제가 되어 결국 다나카 내각은 일왕에게 추궁을 받고 총사임했다.
한편, 1929.10.24, 뉴욕발 대공황의 여파가 일본에도 도달하여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은 사임하고 쇼와 공황이 다시 일어났다. 일본은 이러한 경제적, 정치적 혼란속에서 조선을 넘어 만주를 일본의 생명선으로 규정했으며 군부는 독단적으로 대륙 출병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런던 군축회의의 문제와 31년의 관동군에 의한 만주사변 등이 지속되면서 군부가 주도하는 개전론이 강해지자 일본은 스스로 국제연맹을 탈퇴했고 외교적인 고립에 빠졌다. 1932년, 이누카이 츠요시 수상이 암살당하는 사건을 계기로 군부의 폭주는 점차 심각해졌고 의회가 정지되었다. 1937년, 노구교 사건으로 제2차 중일전쟁이 시작되었으며 1940년 프랑스가 항복하면서 추축국이 유리해지자 삼국동맹을 체결했다.
일본의 중국본토에서 전쟁을 확대하는 움직임에 반발하여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ABCD포위망이 형성되자 일본은 그에 반발하여 진주만을 기습공격하고 동남아로 진격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다. 초기에는 대승을 거듭하자 42년 도조 히데키 내각은 국민의 지지에 바탕을 두어 국민운동을 국가의 통제하에 두었고 반상회와 부락회 등의 조직을 감시하여 국민생활을 완전히 통제하기 시작했다.
전황은 개전초와는 달리 미드웨이와 과달카날을 기점으로 급격히 열세로 변하기 시작했으며 연패를 거듭했으나 국민에게는 이런 사실이 전해지지 않았고 중국전선에서 게릴라 전에 의한 교착상태나 수송의 문제 등에 관해서도 역시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본토가 미공군의 폭격에 직면하게 되자 일본은 소련과 독일의 화해를 근간으로 하는 종전안을 제시했고 독일이 항복한 다음에는 소련과 불가침 조약이 유지되는 동안에 본토결전으로 미군에게 피해를 준다는 항복안을 마련하였으나 모두 실현되지 않았고 원폭투하와 소련군의 선전포고 등이 겹치자 결국 8월 14일 일왕이 직접 항복을 결정하고 포츠담 선언을 수락했다.
전후 일본은 52년까지 미군정의 통치를 받았으며 오키나와와 오가사와라에는 그 이후에도 미군정이 이루어졌다. 일본은 헌법을 46년에 개정하여 평화헌법을 제시하였으며 비로소 근대적인 헌법이 등장했다. 일본의 경제는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통해서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며 국민의 생활수준도 높아졌다. 오일쇼크 이후에도 고도 성장을 이루었으나 90년대 이후 버블경기에 돌입하였다.
히로히토는 아내 향순왕후(香淳皇后) 나가꼬(良子) 사이에 2남 5녀를 두었다.
- 히가시쿠니 시게코 (東久邇成子, 1925년-1961년), 어릴 적 칭호는 테루노미야(泰宮). 히가시쿠니노미야(東久邇宮) 나루히코(稔彦) 친왕과 메이지 일왕의 딸 토시코(聰子)의 아들 모리히로(盛厚)와 결혼했다.
- 히사노미야 사치코 (久宮祐子, 1927년-1928년), 요절.
- 타카츠카사 카즈코 (鷹司和子, 1929년-1989년), 어릴 적 칭호는 타카노미야(孝宮). 타카츠카사 토시미치(鷹司平通)와 결혼했다.
- 이케다 아츠코 (池田厚子, 1931년생), 어릴 적 칭호는 요리노미야(順宮). 이케다 노부마사(池田宣政) 후작의 아들 타카마사(隆政)와 결혼했다.
- 아키히토 (明仁, 1933년생), 어릴 적 칭호는 츠구노미야(?宮). 1989년, 제125대 천황에 즉위하였으며 닛신 제분의 쇼다 히데사부로(正田英三) 회장의 딸 미치코(美智子)와 결혼했다.
-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常陸宮正仁, 1935년생), 어릴 적 칭호는 요시노미야(義宮). 츠가루 요시타카(津?義孝) 백작의 딸 하나코(華子)와 결혼했다.
- 시마즈 타카코 (島津貴子, 1939년생), 어릴 적 칭호는 스가노미야(?宮). 시마즈 히사노리(島津久典) 백작의 아들 히사나가(久永)와 결혼했다.
여기서는 일왕이라고 호칭을 통일하고 있지만 공식적인 칭호는 쇼와 천황이다. 일본 외에서는 히로히토, 히로히토 황제라고도 부른다. 그가 제위하던 중, 일본내에서의 칭호는 His Majesty the Emperor(텐노헤이카 ; 천황폐하)였으며 줄여서 His Majesty(헤이카 ; 폐하)라고도 한다. 즉위 중의 공식기록 상의 호칭은 (킨죠텐노 ; 금상천황)
쇼와의 유래는, 사서 오경 의 하나인 서경 요전의 「百姓昭明、協和萬邦」에서 소昭 화和를 뽑아서 만든 것으로 한학자 요시다가 고안한 것이다. 같은 어구에서 에도 시대의 메이와 라는 원호도 나왔다. 뜻은 국민의 평화 및 세계 각국의 공존 번영을 바라는 의미이다.
만주에서 장작림 폭사사건 관련 책임자 처분에 있어서 다나카 기이치 당시 일본 내각총리에게 책임자를 엄중히 처벌하도록 지시. 그가 명령에 따르지 않자 다나카의 식언을 격렬하게 질책했고 그 결과 내각이 총사퇴했다. 이 사건 이후에는 일왕이 대체로 정치적인 관여를 하지 않기로 했다. "쇼와 일왕 독백록"에는 '사표를 보내면 어떨까'라는 식으로 다나카에게 사임을 강권했다는 기술도 있지만 당시의 1차 사료와 대조해 본다면 그 부분까지 직접적인 발언을 했을 가능성은 낮다.
1935년, 일왕 기관설이 배격되자 본인은 시종무관장 혼조 시게루에게 "미노베 설이 정론이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으로는 일왕기관설로 좋다."고 했다. 그가 제왕학을 사사받을 무렵에는 독일의 영향을 받아서 이런 일왕 국가기관설, 헌법 의제설이 헌법학의 다수설이었으며 일왕이 직접 "미노베는 충신이다"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으로 미노베의 학설이 비난받는데는 관여하지도 구명하지도 않았다.
일왕 기관설은 국가 법인설이라는 독일의 학설에서 영향을 받았으나 이 학설은 국가의 본질을 '법인'이라고 하는 점에서 국민주권의 존재를 애매하게 하는 학설로써, 당시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 입헌주의가 형해화 되어 있는 전형이던 독일에서도 시대착오 적인 학설로 여겨지고 있었으나 전쟁 이전 일본에서는 일왕을 국가의 공적 기관으로 생각하는 점에서 사회과학적 사고와 결합되었던 데다가 요시노 사쿠조의 "민본주의"와 함께 호헌운동이나 다이쇼 데모크러시의 이론적 신념의 일부로써 채택되어 일본의 민주주의가 독일보다도 후발적인 것으로서 입헌주의가 보다 형해화 되었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쇼와 일왕이 거기까지 이해를 했다기 보기는 어려우며 일왕 국가기관설에서도 미노베의 학설(공동체로서의 성질을 강조하는 하나의 나무로서의 기관 일부)보다는 유기체의 머리부분임을 강조하는 시미지 키요시의 학설에 가까웠다는 설도 있다.
1936년 육군 황도파 청년 장교 들이 일으킨 2.26사건에서 혼죠 대장이 "그들도 나라를 우려하여 일으킨 행동으로 반드시 비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라는 진언에 쇼와 일왕은 대노하여 "짐의 수족과도 같은 노신을 살해한 흉폭한 장교들에게 무엇을 이해하라는 것인가. 노신들을 죽이고 짐의 목을 잡은 것은 시해 행위가 아닌가", "너희들이 하고자 한다면 짐이 직접 근위사단을 통솔하여 진압하겠다"라고 격렬히 반대했다고 전한다. 다나카 사건 이후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라는 입장을 취하던 일왕이 정부 기능의 마비에 직면하자 자신의 의사를 다시 발언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로서 궐기군은 일시에 반란군으로 지목되어 사건이 신속하게 해결되었다.
일왕은 이 시절의 발언을 나중에 태평양 종전의 결정과 합해서 "입헌군주로서의 입장을 넘은 행동이다"고 술회했으며 그때는 아직 젊었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 한편 1975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2.26사건의 주모자 마사키 진자부로의 아들이 통역을 맡았다.
1941.09.05 스기야마가 쇼와 일왕에게 진주만 공격에 대한 내각과 군부의 의견을 보고하자 일왕은
- 중국을 공략하던 때, 군부에서는 장개석이 3개월이면 항복하리라고 보고했었지만 아직까지 싸우고 있소. 스기야마 그대도 그때의 내각에 있었지 않소.
- 중국은 대단히 넓은 지역이라서 예상치 못한 난관에 처했습니다.
- 중국이 넓다고 말한거요? 태평양은 더 넓지 않소? 왜 짐에게 그런 것은 말하지 않는건가. 스기야마 그대가 짐을 속이려 드는가?
라고 강하게 힐난한바 있다.
1941.09.06 어전 최고회의에서 대 미전이 불가피한 것으로 결정되자 그때까지 좀처럼 최고회의에서 의견을 피력하지 않던 쇼와 일왕은 이 자리에서 특별히 입을 열어 메이지 일왕이 남겼다고 전해지는
四方の海 みな同朋(はらから)と 思う世に など波風の 立ちさわぐらん
사해는 모두 동료인데 세상에 풍파와 소란은 어찌하여 이는가.라는 하이쿠를 읊었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쇼와 일왕 자신은 개전에 반대 입장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특별한 반대의사를 표시한 적도 없으며 결과적으로는 이 어전회의에서 태평양 전쟁의 개전이 결정되었다.
무사시 선상에서.
1946.01.01, 패전 이후 히로히토 일왕은 신년 조서를 통해서 일왕의 신격을 부정했으며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평화헌법에 서명.
왕자였던 1921년 3월 3일부터 9월 3일까지 영국,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바티칸을 공식 방문했던 것은 일본 역사상 최초의 일로 반대의견도 많았지만 야마가타 아리모토나 사이온지 긴모치 등의 원로들이 강력히 주장하여 실현되었다. 영국에서는 특별히 영일동맹의 파트너로 환영을 받아 죠지 5세나 로이드 죠지와도 회견을 갖었고 이탈리아에서는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3세와 회견하였고 1차대전의 격전지등을 방문했었다. 쇼와 일왕은 훗날 이 외유가 대단히 인상깊었다고 말했다.
1971년 다시 영국과 네덜란드 스위스를 비롯한 유럽 7개국을 방문했지만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는 많은 반대 시위에 직면했다.
1975년 미국을 공식 방문해서 워싱턴과 로스앤젤리스를 들렀으며 디즈니랜드에서 미키마우스 손목시계를 구입한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80년대에 그가 고령으로 병상에 눕자 일본 각지에서 쾌유를 바라는 기장소가 설치되었다. 1988.09.19, 그가 토혈하고 다음해 01.07에 사망하기 까지 텔레비전에서는 화려한 연출이 금지되었다. "근신과 자숙"이 그 해의 유행어가 되었고 그의 병세에 차도가 있거나 악화가 되었으면 인기 프로그램 방송 중에도 즉시 임시특보로 전달되었다.
- 1988년, 쥬니치 드래곤즈의 리그 우승에는 퍼레이드가 없었다.
- 1988년, 메이지 야구 대회 중지
- 닛산 자동차 광고에서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부분도 중지되었고 인기 연예인의 결혼 피로연도 중지되었다. 일본 프로레슬링의 유혈도 자숙했다.(반면 대립구도의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는 유혈이 낭자)
- 1988년 일본가요대상 중지
- 드라마 '웃어도 좋다고!'의 오프닝 테마를 정숙한 것으로 바꾸었다.
- 로토 제약의 광고 오프닝 자숙.
- 공식행사, 의식에서 가무곡을 수반하는 행사는 모두 자숙.
- 스모 대회 1일 연기
- 사망한 다음부터는 텔레비전이 모든 CM을 중단하고 뉴스와 추도방송만 계속했다.(교육방송만 정상운영)
- 1989년, 전국 고교 럭비 결승 중지
- 1989년, 전국 고교 축구 토너먼트 선수권 2일 연기
- 1989년, 폭풍 슬럼프 무도관 라이브(연초에 연예인들이 모여서 축하공연을 하는 프로그램) 순차 연기.
- 1989년, 1월 8일 라디오 체조 중지
- 1989년, 1월 8일, 다카라즈차 가극단 공연 중지
- 유년기에 돌봐준 아다치(스즈키 칸타로 수상의 부인)을 경모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스즈키 칸타로 본인도 굉장히 좋아했으며 그가 시종장이었을때 직접 감싸주었다고 한다.)
- 학습원 초등과 시절에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해 다른 학생들은 "메이지 일왕"의 이름을 들은대 반해 히로히토 한명만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를 들었다. 그 이유로 "메이지 일왕은 무서워서 잘 모르지만 요시쓰네의 일은 잘 배워서 알고있다"고 대답했다 한다.
- 초등과 시절, 학습원장 노기 마레스케를 '원장각하'라고 부르며 존경하고 있었다. (노기 마레스케는 지휘관으로서는 유능하지 못했지만 그 인품과 한학의 지식은 대단히 훌륭했다. 육군의 고위직이었음에도 러일전쟁 중 자식 둘이 모두 전사했으며 부하가 잘못을 하더라도 항상 감싸주고 실패는 자신의 잘못으로 돌렸다. 그의 불행은 유능한 참모장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도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나중에 노기 마레스케를 다른 사람이 "노기 대장"이라고 부르자 "그래서는 안되고 원장 각하 라고 부르라"고 훈계했다.
- 1912년, 노기 마레스케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노기는 "지금부터 황태자로써 부디 면학에 힘쓰시기를"이라고 충고하자 히로히토는 "원장 각하는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질문했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노기의 죽음을 희미하게 느끼고 있었던 듯 했다.
- 영국을 순방했을때, 처음으로 런던의 지하철을 이용했는데 이때 개찰구에서 표를 역무원에게 건네주는 방법을 알지 못해서 역무원과 마찰이 빚어졌다고 한다.(역무원은 그가 일본의 왕자임을 몰랐다.) 결국, 히로히토는 표를 건네주지 않고 개찰구를 나왔다.
- 일반적으로는 평화 주의자로 기록되었지만 개전시에는 항상 이길 수 있는가 없는 가를 고려의 핵심으로 보았다.
- 전시에는 '어떻게 하면 적을 격멸 할 수 있는 것인가'라고 질문하는 일도 있었으며 전황이 가혹해졌을 때에는 집무실에서 '이 현안에 대해 대신은 어떻게 생각할까…'등의 혼잣말을 자주 했었다.
- 일왕으로서 자신의 뜻을 관철한 것은 2?26 사건과 종전때 뿐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 전후, 전국을 순방하면서 많은 설명을 받을 때는, '아, 그래'라고 하는 무미 건조인 대답만 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무엇보다 이 대답은 후의 원유회등에서도 잘 사용되었는데 설명에 무관심했기 보다 단순한 버릇이었던 것 같다. 본인도 나중에 이 부분에 신경써서 '아, 그런가 다시'라고 하기도 했다. 왕자도 '폐하는 "아, 그래"가 말 버릇이라 대화에 능숙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후일 평했다. 그와 함께 독특하게 손을 흔드는 버릇이 인상적이라서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트레이드 마크 처럼 되었다.
- 1969년, 왕궁이 개축되고 처음으로 장화전 발코니에 섰을 때, 빠찡꼬 구슬에 맞아서 이를 계기로 방탄 유리가 발코니에 설치되었다. 범인은 영화배우 오쿠사키 켄조였으며 폭행혐의로 체포되었다.
- 황궁의 밭에서 고구마를 파고 있다가 두더지 한마리를 발견하고 시종에게 급히 쌍안경을 가져오라고 명령하자 시종이 이유를 모르고 감자를 파고 있는데 쌍안경은 왜 필요하십니까? 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황후가 일본화에 두더지를 그리고 있었기 때문에 필요했던 모양이다.
- NHK의 아침드라마를 보는 것을 좋아했지만 1975년 기자회견에서 '텔레비전은 어떠한 것을 보십니까'라는 질문에 "여러가지 봅니다만 방송회사의 경쟁이 매우 격렬해서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해서 기자들을 웃겼다.
- 1982년 원유회에서는 쿠로야나기 아키코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가 자기 저서 '창가의 토토'(우리나라에서도 번역본이 출간되어 있다. 내용은 2차대전 시절에 초등학생이던 토토의 경험담에 관한 내용)을 설명하면서 국내에서 700만부 출판되고 세계 35개국에서 번역되었습니다 라고 말하자 "그렇게 많이 팔립니까?"라고 대답하여 쿠로야나기는 마치 자기 책 자랑을 하는 것처럼 되어 버렸고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고 한다.(쿠로야나기 본인도 웃었다.)
- 향쥰 왕후는 양궁이라고 불렀는데 (요시코 왕후는 구이황족가문 출신) 부부사이가 원만해서 왕녀만 4명을 출산했을때 측근들이 측실을 두도록 권하자 "양궁으로 좋다"고 대답했다.
- 운동에 관해서는 "어릴 적부터 여러가지로 해봤지만 무엇하나 잘 하는 게 없었다"고 말했으며 아키히토가 테니스에 능한 것은 양궁을 닮았다고 말했다.
- 의외로 예리한 면이 있어서 질문할때는 세부적인 사항까지 꼼꼼하게 물었으며 속임수가 통하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여러가지로 능숙해서 질문을 받은 사람은 항상 긴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 '남자는 괴로워' 시리즈의 팬으로 비디오를 전질 소장했다.
- 포드 대통령은 쇼와 일왕을 만났을때 카리스마에 손을 떨었다고 귀국후에 말했다.
- 새우 같은 뜨거운 것을 못먹었고 메밀 같은 것을 좋아했다.
- 스모와 벚꽃을 좋아했다.
- 히로히토 왕자를 어릴적에 굉장히 귀여워해서 무릎위를 지정석으로 했다.
- 히로히토가 어릴적 장난을 쳤을때는 격노해서 황궁의 연못에 빠트린 적도 있었다.
- 스승인 미나가타 쿠마구스(일본의 유명한 균류 연구가. 일찍부터 균류에 흥미를 갖고 영국, 쿠바 등지를 전전하며 독자적인 연구를 진행했다.)를 잊지 못해서 그의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 담배를 피지 않았지만 애연가인 신하들에게는 담배를 자주 하사했다. 그럴때에는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니까 담배는 줄 수 있지"라고 말해서 신하들이 "짐이라고 해주십시오"라고 당황하곤 했다고 한다.
특별히 하이쿠에 조예가 깊어서 평생 약 1만수의 하이쿠를 읊었다고 한다. 공표된 것은 약 869수로 문학적으로 엄선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냥 자기 입장을 대변하는 시적 표현으로 자주 활용했다. 궁중 행사나 노래 모임, 행차, 방송 등에는 자주 있었던 일로 모두 궁내청에서 감수하였으며 만요슈(일본의 통속적인 하이쿠 선집. 대단히 오래된 것이다.)는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는 것이 이색적이다. 바쇼나 기마타 오사모, 오카노 히로시와 같은 와카 작가의 영향도 받았으며 4자 정도로 적는 것은 미나가타 쿠마구스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미나가타 쿠마구스는 동경대 문학과를 중퇴했고 일본 근대 하이쿠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마사오카 시키와도 친했다.)
산기리시마:천황 가집 (마이니치 신문사편) (1951 년11 츠키, 마이니치 신문사)
쇼와 일왕은 특별히 생물학을 좋아해서 해양생물이나 식물의 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25년 6월에 아카사카 별궁에 생물학 연구실을 짓고 변형류 종류와 히드라 유를 분류하는 것을 목표로 연구를 실시했다. 28년 9월에 왕궁에 생물학 연구소를 만들었으며 29년에는 스스로 재야의 균류 연구 1인자 미나가타 쿠마구스를 방문해서 강의를 받았다.
2차대전 중에는 군신이자 현인신으로 추앙되는 일왕이 이런 시시한 연구를 하는 것을 공표할 수 없어서 연구 성과의 대부분을 전후에 발표했다. 히드라 에 관한 연구는 히로히토의 이름으로 발표되었으며 「일본산1 신속1 신종의 기재를 동반하는 Clathrozonidae 히드라의 검토」를 포함하여 총 7권의 논문을 간행했으며 이 분야에 관해서는 세계적인 권위자로 전문학자들과도 공동연구를 해서 지금까지 간행된 논문이 20권에 달한다.
그 연구의 깊이는 상당한 수준으로, 원했다면 생물학 학위를 받을 수도 있었다고 하지만 반면에 그가 이렇게 자연과학을 깊이 연구한 것은 자연계의 질서에 관해 무속적인(일왕은 일본 신토의 수장이며 제사장의 역할도 맡는다.) 제의의 일부로서의 역할이 잔존하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아무튼 그는 해파리등을 열심히 연구했고 일왕의 해양생물 연구 취미는 아들인 히로히토도 물려받아서 성과가 지금은 가나카와 현 후지사외 시의 신에노시마 수족관에 공개되고 있다.
메이지 헌법하에서 일왕은 최고 권력자로 규정되었기에 그에게 전쟁책임을 묻는 소리도 있었지만 일왕은 일본통치에 불가결한 존재로 여겨져서 연합국이 그에게 전쟁책임을 묻지 않았다. 맥아더 사령관은 '만일 일왕에게 전쟁의 책임을 묻게 될 경우 일본 각지에서 저항운동이 일어날 것이고 그것을 전부 진압하려면 100만 명의 병력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고 이에 기초하여 일왕이 연류된 전쟁범죄들은 전후의 전범재판에서 모두 제거되었다.
패전 이전, 일본제국 헌법(메이지 헌법)하에서 11조는 "일본 국왕에게 육해군의 통수권이 있다"고 규정하였으며 그에 의해 군 최고지휘권자 겸 통수권자는 일왕의 고유권한이었다. 12조에는 "일본 국왕에게 육군과 해군의 편제, 상비병의 정수를 규정할 권한이 있다"고 규정하여 군의 편성권 또한 일왕의 고유권한이다. 정부와 의회에서 독립적으로 일왕은 편성권을 포함한 통수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1930년 런던해군군축 조약의 비준이 통수권 침범 문제를 일으켰다.
그러나 만주사변 이후, 통수권은 일왕의 고유권한에서 서서히 벗어났으며 31년의 만주사변에서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15년 전쟁의 책임을 둘러싸고 최고지휘권과 선전 강화권을 가지고 있는 일왕에게 전쟁 책임이 있었다는 주장과 메이지 헌법 제3조, "일왕은 신성불가침"이라고 규정된 일왕의 무가책성과 일왕에게는 정상적인 군사보고가 제공되지 않았음을 근거로 전쟁 책임이 없다는 논쟁이 있었으나 일왕에게 전쟁 책임이 있었다는 주장은 일본 내에서는 극 소수설에 불과하다.
전쟁 이전 동경대 법학과 교수였던 미노베가 주장했던 일왕 국가기관설에 관해 일왕 본인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를 기초로 하는 입헌군주적 입장을 취했다는 것이 당시 헌법계의 지배적 학설이었으나 일본정부는 "국체명징성명 ; 국체를 명확히 밝힌다"을 통하여 통치권의 주체는 일왕에게 있음을 명시하고 이런 학설을 일체 금지시켰다. 이에 따라 미노베는 교수직을 물러나고 학습원 임원 직에서도 해임되었다.
전쟁 중, 쇼와 일왕은 일본군부의 행동 대부분을 재가하였으며 특히 중국에서 화학무기와 생물학무기 사용을 직접 허가했다.(이에 따라서 유명한 731부대를 비롯한 생화학 병기 실험과 실전 사용이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주요 군사결정이 내려진 회의에 참석했고 그의 이름으로 전쟁이 지속되었으며 45년 2월, 고노에 내각이 종전을 진언했을때에도 전과를 더 거두어야 한다는 것은 전쟁 속행의 의사표현으로 받아들여졌다.
패전 이후, 극동 국제 군사재판(도쿄 재판)에서 소련과 오스트레일리아 등은 일왕을 전범으로 재판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맥아더 본인이 일왕의 책임감에도 감명을 받은 것도 포함해서 냉전을 앞둔 정치적인 판단으로 일왕제는 수호대상으로 지정되었으며 이에 따라 결국 전범이 아닌 것으로 결정되었다.
맥아더 와 함께. 맥아더는 간단한 차림인데 히로히토는 정장을 차려입고 있다. 이 때문에 체면이 손상되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당시 메모에 의하면 맥아더 원수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를 고민하던 차에 대면하고 일왕이 의외로 왜소한 체격에 평범한 인상으로 "나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이 책임을 지겠으며 국민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기 바란다"고 말해서 감동했다고 한다. 관계자들은 이 사건에 대하여 일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기에 진위 여부는 분명하지 않으며 일왕 본인은 1975년 기자회견에서 "그 때 주고받은 내용은 남자끼리의 약속으로 공개하지 않는다"고 말해 긍정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이 발언을 전한 것은 애치슨 미국무성 정치 고문이었기에 현재로서는 이런 발언이 있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사안의 중대성으로 기록에서 삭제한 마쓰이 대사의 수기나 후지타 시종장의 저서로도 이 발언이 실제했다는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일왕 자신은 '전쟁 책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라고 하는 기자로부터의 질문에 대해 「그러한 문학 방면은 잘 모른다」라고 동문서답한 바 있다.
쇼와 일왕의 병세가 위독하던 1988년12월, 나가사키 시장이었던 모토지마가 일본 공산당과의 기자모임에서 쇼와 일왕에게 전쟁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발언을 하자 우익 진영은 격렬하게 반발했으며 많은 협박을 받았다. 모토지마 시장은 이에 관해 "발언의 철회는 정치가로서 자살행위와 같다"고 말해서 철회를 거부했으며 이 때문에 한 우익단체에게서 총격을 당했다.
야마다 후로타로 의 저서 '인간 임종도권'중, 야마가타 아리토모(조슈 출신으로 기병대 군감을 지냈으며 이후 추밀원 원장, 청일전쟁때는 일본군 총사령관을 지낸 원로) 의 항목에 쇼와 일왕이 종전에 즈음해서 피난가 있는 아키히토에게 쓴 편지에 '패전의 책임은, 제1차 세계 대전 의 때의 독일처럼 오로지 일본의 국력의 한계를 무시했기 때문으로 정신주의에 빠진 군부에, 청일때 육해군의 지휘를 담당한, 야마가타 아리모토나 야마모토 곤베에(야마가타 아리모토는 과감한 성격이기는 했지만 명장도, 실리적인 안목이 있는 사람도 아니라서 당시 일본 군부에서는 골치거리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안목이 부족한 것 같다. 야마모토 곤베에는 사쓰마 출신으로 일본해군을 근대화시킨 장본인. 러일전쟁까지 일본해군의 기본골격은 전부 그가 만들어낸 것이며 건함, 함선의 구입, 장교의 진급 등 해군 전반의 문제를 총괄했다. 러일전쟁 이후 자금 오용을 이유로 사임)가 있었다면 이렇게 터무니 없는 전쟁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내용이 있다.'
쇼와 일왕 기념관. 도쿄 하치오우지의 나가부사 마치 상원하방문 무사니노 에 매장되었으며 그를 모시는 신사는 없지만 모든 일왕은 왕성 내의 종묘에 모셔지고 있으며 일본 극우 세력인 "대일본애국당 청년대"를 중심으로 쇼와 신궁을 창건하자는 움직임도 있다.
2005.11.27, 도쿄의 다치가와 시 국영 쇼와 기념공원 내 "미도리 문화센터" 내에 기념관이 개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