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의 고장, 군위(軍威) 여행
경북의 지리적 중심이고 대구와 맞닿아 있지만 오지 아닌 오지로 남아 있습니다. 면적(614.24㎢)은 서울보다 넓지만 인구는 420분의 1인 2만 4000여 명에 불과합니다. 주민 절반 정도가 농업에 종사하고 남쪽의 팔공산맥이 동서로 뻗어 농산촌을 이룹니다. 산이 깊고 물 맑은 고장입니다. 군위를 ‘삼국유사’의 고장이라 하는 것은 저자인 일연스님이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인각사에서 건국신화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장대한 역사를 ‘삼국유사’로 집대성했기 때문입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은 고려 때 국사(國師)에 책봉돼 강화도, 포항, 대구, 청도 등에서 불법을 닦다가 일흔여덟 나이에 은퇴해 여기 군위로 내려왔습니다. 당시 아흔다섯의 노모를 모시기 위해 군위의 절집 인각사에 자청해 부임한 것이었습니다. 이듬해 노모가 세상을 뜬 뒤에도 일연은 군위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입적하기 직전까지 일연은 인각사에 머물며 5년 동안 삼국유사를 썼습니다. 삼국유사가 쓰인 곳. 그게 군위의 가장 큰 자랑입니다. 자주적 민족사관을 바탕으로 삼은 삼국유사에는 드라마틱한 신화와 전설이 그득합니다. ‘한국판 아라비안나이트’라고나 할까. 이성의 눈으로 보면 다소 황당하다 싶은 이야기들이 적잖긴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통해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건 고대인의 사유와 상상력입니다. 삼국유사의 진가는 논리가 아니라, 상상력과 감동에 있다는 얘기입니다.
화본마을 곳곳에 그려진 벽화를 보면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각종 설화와 전설이 절로 떠올려집니다. 내륙에서는 찾기 어려운 아름다운 돌담길이 있고 추억과 낭만을 즐길 수 있는 간이역과 세트장이 동화 속의 한 장면 같습니다. 내년 100주년을 맞는 군위성결교회, 김수환 추기경 옛집, 일연의 삼국유사가 태동한 인각사, 삼존석굴 등 개신교, 천주교, 불교 유적이 한데 모여 있어 주말이면 3,000-4,0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종교 투어’를 위해 찾아오고 있습니다.
‘제2 석굴암’ 국보 109호, 삼존석굴
7세기 말에 조성된 석굴로 경주 석굴암보다 100년 이상 앞서고 우리나라 석굴사원 가운데 유일하게 자연 암벽을 이용한 점이 특징입니다. 우리나라 석굴사원 중 유일하게 수직의 천연 암벽 20m 높이에 굴을 만들어 아미타여래 삼존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석굴 안에는 본존불인 아미타불이 가부좌한 모습으로 있고 양옆으로 대세지보살, 관음보살이 새겨져 있습니다. 통일신라 초기에 조성돼 훗날 경주 석굴암 조성의 모태가 됐지만 1920년대 그 존재가 알려지면서 ‘제2석굴암’으로 불립니다. 경주 석굴암의 형뻘이지만 두 번째 석굴암이 돼 버렸습니다. 석굴까지 계단이 놓여있지만, 훼손의 우려 때문에 참배단에서 올려다봐야 하는 게 좀 아쉽지만, 군위에 간다면 군위의 유일한 국보인 삼존석굴을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돌담길에 안긴 ‘육지 속 제주도’, 한밤마을
팔공산 자락 북쪽 끝머리의 작은 마을로 부림 홍씨 집성촌입니다. 마을의 가장 큰 자랑거리인 돌담길은 마을 전체를 감싸면서 6.5㎞ 정도 굽이굽이 이어지고, 그윽한 정취의 고택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처음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육지 속의 제주도’라고도 하고, 마치 ‘제주도에 온 것 같다’는 이야기도 많이 합니다. 이 돌들은 1930년 대홍수 때 팔공산에서 마을로 떠내려 왔는데 그 엄청난 돌들을 치울 엄두가 나지 않아 집집마다 돌담을 쌓았다고 합니다.
가을이면 돌담길이 길섶에 빨갛게 익은 산수유 열매와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합니다. 문화재청과 한국관광공사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돌담길’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마을 입구 소나무숲은 예부터 마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곳으로 동제를 드리는 솟대가 있는 신성한 곳입니다. 한밤마을에서는 ‘산책’이 가장 잘 어울리는 일인데, 마을 들머리 도로에 치켜 올려 세워진 ‘진동단(鎭洞壇)’이란 화강암 솟대, 야트막하지만 길게 쌓아둔 돌담, 그리고 마을 중심에 있는 남천고택과 대청(大廳)은 산책코스에 꼭 끼워 넣어야 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 화본(花本)역
군위에는 대한민국에서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작은 기차역이 하나 있습니다. 그 이름마저 아름다운 화본역입니다. 아담하고 정겨운 시골 간이역이 TV에 나오고 입소문을 타면서 주말이면 많은 여행객들이 찾아들어 이제는 연간 40만 명 이상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습니다. 옆에는 역만큼이나 작은 시골마을이 기차역과 사이좋게 붙어 있습니다. 그 이름도 화본마을입니다.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화본역과 화본마을은 어른들에게는 어릴 적 향수와 휴식을, 아이들에게는 색다른 경험을 선물합니다. 역과 마을을 찬찬히 둘러보노라면 기차역의 낭만과 시골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는 곳들이 자연스레 펼쳐집니다.
1930년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데다 수려한 주변 경관과 잘 어울려 네티즌이 뽑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으로 선정되었습니다. 1936년에 완공된 중앙선 화본역은 증기기관차가 달리던 1950년대까진 꽤 북적거리는 역이었습니다. 지금은 경북관광 순환테마열차를 포함해 상·하행선 하루 세 차례씩 총 여섯 차례만 정차합니다. 역사 옆에는 박해수 시인의 ‘화본역’ 시비가, 시비 앞엔 삼국유사의 내용을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놓은 커다란 이야기책이 놓여 있습니다. 화본역에는 증기기관차가 다니던 시절 기차에 물을 대던 급수탑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영화 <라푼젤>이 떠오르는 이 급수탑을 배경으로 관광객들은 연신 사진 찍기에 바쁩니다. 폐기차를 이용해 만든 레일카페도 있습니다.
화본역은 몇몇 간이역을 제외하면 군위군에서 객차가 멈추는 유일한 기차역입니다. 그런 이유로 2011년에는 군위군에서 주도해 화본역 역사를 1936년에 지어진 화본역의 옛 모습을 그대로 살리면서 여행객들이 이용하기 편리하게 꾸몄습니다. 그와 함께 화본마을 큰길 곳곳에 ‘삼국유사’를 주제로 한 다양한 벽화도 그렸습니다. 화본역에서 나와 오른쪽 초등학교 방향으로 마을 끝까지 가면 입이 떡 벌어지는 300년 된 회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하늘에 닿을 듯 가지를 뻗치고 선 회나무의 기세가 대단합니다. 마을 어귀에서 가지를 넓게 펼치고 평화로운 화본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톡톡히 하는 듯합니다. 화본역 뒤로는 역과 마을을 이어서 한 바퀴 크게 돌아볼 수 있는 둘레길이 있습니다.
‘엄마아빠 어렸을 적에’ 추억의 박물관
폐교된 산성중학교에 들어선 이 테마박물관은 1960~7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다양한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공중전화가 딸린 동네 어귀의 구멍가게를 비롯해 전파상과 만화방, 이발소, 연탄가게, 극장, 사진관, 자취방, 화장실 등이 골목길을 따라 옛 모습 그대로 오밀조밀 재현돼 있어 추억이 모락모락 되살아납니다. 또 포니자동차와 타자기 등 지금은 사라진 옛 물건들을 구경하는 맛도 쏠쏠합니다. 운동장에서는 달고나 체험을 할 수 있고 자전거도 빌려 탈 수 있습니다. 마을 안 담장은 단군신화와 주몽, 도화녀와 비형랑 등 삼국유사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벽화로 채워졌습니다. 마을 안에는 철도 관사와 옛 정미소, 1962년 문을 연 다방 간판, 고인돌 등도 있습니다. 추억의 소품창고에는 포니 자동차와 타자기, 아이스케키통, 잡지와 포스터 등 다양한 소품들이 있습니다.
. ‘삼국유사가 완성된 천년고찰’, 인각사(麟角寺)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입니다. 절 앞으로 위천의 물길이 흐르고 물길 뒤로 거대한 암벽 학소대가 우뚝 솟아있습니다. 절집의 이름 ‘인각(麟角)’은 ‘기린의 뿔’이라는 뜻. 절이 앉은 자리가 기린의 뿔에 해당한다는 얘기입니다. 고려 충렬왕 때 국사(國師)를 지낸 일연(1206~1289) 스님이 아픈 어머니를 보살피기 위해 군위로 낙향해, 생애의 마지막 5년여를 머물면서 우리 민족의 고전인 ‘삼국유사’를 완성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1295년에 세운 보물 제428호 보각국사탑비는 충렬왕의 명으로 당대 문장가(민지)가 지은 글을 7년에 걸쳐 명필 중의 명필이었던 중국의 왕희지 글씨(4050자)만 모아 새긴 것입니다. ‘보각국사’란 일연 스님에게 내려진 칭호인데, 탑비는 일연 스님의 일대기를 담고 있습니다.
탑비의 글씨에 감탄한 당시 선비들이 줄을 서서 탁본을 해갔다고 전합니다. 급기야 탁본을 잘 뜨기 위해 비석을 넘어뜨리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탁본해 간 건 우리 선비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탑비에는 중국에도 없다는 왕희지 글씨가 포함돼 있어서 중국 사신들도 우리나라에 오면 인각사에 들러 비석의 왕희지 글씨를 탁본해가는 게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고도 전해집니다. 이 탁본을 토대로 일연 스님 탄생 800주년이었던 지난 2006년 훼손된 탑비를 원형대로 다시 만들어 극락전 뒤편의 옛 절터에 세워두었습니다. 비바람에 얼굴이 무너진 석불좌상도 있고, 소박한 맵시의 삼층석탑도 있습니다. 과시 않고 치장하지 않아서 좀 쓸쓸한, 그런 경관이 참 고즈넉한 절집입니다.
일주문도 담장도 없는 황량한 절집 인각사의 무무당(無無堂) 당호 ‘無無’는 '없고 없다'는 뜻도 되지만 '없는 게 없다'는 뜻도 됩니다. 그래서 '없고 없는 게, 없는 게 없는 것'을 뜻합니다. 일연 스님은 이곳에서, 오래 전 얘기를 기록했습니다. 스님의 여든넷 삶은 그가 쓴 삼국유사만으로도 빛납니다. 절집 안에 초라한 가건물로 서 있는 일연기념관에 들러 일연 스님 아니, 속명(俗名) 김견명의 생애와 삼국유사의 흔적을 더듬어볼 일입니다. 조계종이 한국 불교의 주류가 된 것 또한 인각사와 관련이 깊습니다. 일연은 이곳에서 무신정권을 반대하고 왕정복고를 주창하며 두 차례의 대규모 조계종 결사를 열었습니다. 매년 8월 ‘삼국유사문화축제’를 통해 일연 스님의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故 김수환 추기경 8년 머물던 옛집
돌계단을 따라 야트막한 언덕 위에 오르면 소박한 초가집이 있습니다. 김 추기경이 네 살 무렵 천주교 박해를 피해 이사한 가족을 따라와 보통학교를 마치고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대구 가톨릭대 전신)에 진학할 때까지 8년여 간 살았던 곳으로, 가족과 가장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사실상의 고향이입니다. 추기경이 여덟 살 되던 해 옹기장수로 떠돌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어머니는 옹기와 포목을 팔며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추기경의 아호 ‘옹기(甕器)’도 여기서 비롯됐습니다.
‘초가삼간’이란 말 그대로 집(36.5㎡)은 작은 방 두 칸과 부엌이 전부입니다. 너무 낡고 오래돼 붕괴 위험이 있어 옛집을 헐고 같은 자리에 똑같은 모습으로 다시 지었습니다. 벽에는 김 추기경의 사진과 그가 남긴 글을 적은 액자가 걸려 있습니다. 추기경은 생전에 가끔 이곳을 찾아 어린 시절을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2009년 2월 추기경 선종 이후 지금까지 전국에서 천주교 신자와 일반인 등 10여만 명이 다녀갔습니다.
군위 맛집 기행(‘작은 영토’)
영토정식, 게장정식, 연잎정식, 황태정식 등의 메뉴가 있으나 밑반찬은 동일합니다. 음식 맛 하나만 본다면 전국 최고라는 칭송과 외국인들에게 관광 상품으로 내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군위군청 관광과가 추천하는 군위 최고의 음식점입니다. 눈으로 보기만 해도 ‘대접 받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깔끔하고 먹음직스러워 보이며, 실제 잔반이 전혀 나오지 않을 만큼 그릇들이 거의 비워집니다. ‘1박2일’ 촬영지로도 유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