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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하늘로 한 주를 보낸 듯합니다. 뭔 가을이 이런가 싶지요. 살다보면 그러 날들도 있는 법, 하고 넘어갑니다. 다음 주에는 나아지려니 기대하며 주말을 맞습니다. 산길에 먼지가 나지 않아서 좋기는 한데, 질척한 길도 그리 맘에 들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젖은 나뭇잎들이 행여 신발을 밀어내면 어쩌나 겁도 납니다. 맑은 하늘과 구름이 번갈아가며 지나가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시월도 중순에 접어드는데 앞으로는 좋아지겠지요? 그야 기상청 관계자도 하지 못할 일이겠지만 아무튼 우리의 바람입니다. 계절도 체면이 있지, 이런 식으로 밀고 나가지는 않겠지요.
사회는 ‘대장균’이 아니라 ‘대장동’으로 시끄럽습니다.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맘을 상하게 만드는 사건입니다. 없는 사람들 것을 빼앗아 있는 자들이 잔치한 결과입니다. 수천억을 동네 이름보다 더 익숙하게 들먹거립니다. 우리 같은 서민들은 입에 담기도 힘든 거액인데 말입니다. 30대 청년의 몇 년 일한 퇴직금이 50억이라니 그들만의 잔치에 우리는 그저 멍하니 달나라나 쳐다봅니다.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나라의 이야기지요. 빚더미 서민들은 고작 456억 ‘오징어’에나 목숨을 겁니다. 455 명의 목숨 값입니다. 그런데 이 대장동은 몇 명을 잡으려는지 기다려봅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인지 온 세계가 들먹거리고 있습니다. 거참!
맑은 하늘이나 기다리며 다음 한 주를 걸을까 합니다. 아직도 숨 쉬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또 하루를 밀고 갑니다. 건강하십시오. ^&^
2021년 10월 9일 김종우 목사
쉽게 읽는 요한계시록 10
김종우 목사
새로운 이스라엘, 인 맞은 자들(계 7장)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질타한 내용 중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눅 12 : 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한 마디로 때를 알고 신앙하라는 말씀입니다. 지금의 때가 어떤 때인가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버거운 인생살이 속에서 그까짓 때를 아는 것이 무에 그리 중요한가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사는 것으로 끝장나는 인생이 아님을 알기에 좀 더 깊이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바로 앞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49절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세상에, 아니 우리 주님이 화염병 들고 시위라도 하시겠다는 말인가요? 이만큼 왔으면 이 ‘불’이 불이 아니라는 정도는 짐작할 것입니다. 렘 5 : 14 “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그들이 이 말을 하였은즉 볼찌어다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로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으로 나무가 되게 하리니 그 불이 그들을 사르리라” 무엇이 불이 됩니까? 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 오기 전에 율법을 가지고 신앙했습니다. 좀 넓게 생각하면 구약성경을 가지고 신앙했습니다. 그 약속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이 백성에게 메시야를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약속대로 그 아들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약속대로 오신 메시야입니다. 오셔서 구약의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증거하셨습니다. 그 약속의 실체로 오신 것이지요.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때가 새롭게 열린 것입니다. 율법의 시대가 끝나고 복음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이 즉 유대인들이 그것을 모르고 인정하지 않고 믿지를 않습니다. 이렇게 시대를 분변하지 못하는 백성을 질타하십니다. 오셔서 무엇을 하시는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보고 들어보면 깨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들으려 하지도 않고 보고도 믿지 않고 도무지 상대할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때를 알 턱이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크게 시대를 3등분할 수 있습니다. 그 기준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상 2번 오십니다. 한번은 이미 오셨고 이제 다시 오마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 말씀대로 오실 것을 믿습니다. 그렇게 역사 속에 두 번 오십니다. 그런데 오시면 3가지가 바뀝니다. 시대와 백성과 법(말씀)입니다.
1) 시대가 바뀝니다. 초림 전이 구약시대, 초림 후가 신약시대 그리고 재림하시면 새로운 시대입니다. 예수님은 그 때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9 : 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우리 주님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 그 때가 바로 세상이 새롭게 되는 때, 새로운 시대입니다.
2) 백성이 바뀝니다. 초림 전에는 잘 아는 대로 아브라함의 자손, 유대인들이 하나님 백성이라 칭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약속을 깼습니다. 약속대로 오신 메시야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백성이 새로 창조됩니다. 요 1 : 12 - 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은 끝났습니다. 이제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백성입니다. 다시 오실 때는 어떻게 될까요? 그리스도인들이 그대로 남아서 하나님 백성의 자리를 유지할까요? 그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앞에서 본 바 말씀에는(마 19 : 28)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구약시대의 열두 지파입니까? 그들은 이미 초림 때 심판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이지요.
3) 법(말씀)이 바뀝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구약성경을 가지고 신앙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더하여 신약성경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구약을 어떻게 성취하고, 오셔서 무엇을 하셨는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오시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당연히 신약의 약속을 어떻게 이루었는지 그 성취된 이야기를 해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이 성취된 이야기와 오셔서 그것을 증거하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다시 오시면 그 때 하나님 백성은 신약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과 그것을 증거하는 분을 믿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신약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했듯이 예수님이 오셔서 아주 간단하게 그것을 언급하셨습니다. 바로 마 24장입니다. 이 마 24장에 별칭을 붙인다면 ‘소계시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이야기하신 바를 나중에 사도 요한을 하늘로 불러서 보여준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주님 다시 오실 때 지켜야 할 새로운 법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법은 지키라고 제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백성에게 법을 왜 주시겠습니까? 지키라고요. 세상에서는 법 잘 지킨다고 상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법을 잘 지키면 상을 주십니다. 복을 주시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고 화를 당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명확하게 대조하여 말씀해주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신 28장입니다. 매우 길게 기록된 내용인데 짧게 예를 들겠습니다. 9 - 10절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그리고 15 - 16절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신 28장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복에 대한 약속이 1절에서 14절까지이고 저주에 대한 약속이 15절에서 68절까지입니다. 그러니 저주에 대한 약속이 몇 배나 더 많다는 것이지요. 우리 하나님 이왕이면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줄 것이지 왜 나쁜 이야기를 그리도 많이 하셨습니까, 서운한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무섭게 저주했음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지켰습니까? 잘 아는 대로 그 반대였습니다. 우리는요?
자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계시록으로 들어갑니다. 계 7 : 1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우선 일의 전후 관계를 이야기해주는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이 일 후에,’ 그렇지요? 그렇다면 이 7장의 사건은 무슨 일 후에 일어나는 일이겠습니까? 바로 앞, 6장의 사건입니다. 계 6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해 달 별이 어두워지고 떨어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 백성이 무너졌다는 말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한다면 심판을 받아 끝장난 것이지요. 하나님 백성이 왜 심판을 받습니까? 신 28장에서도 보았듯이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으니까. 언약을 지키지 않으니까. 하나님을 등지니까. 누가 망하는 겁니까? 불신자가 망하는 이야기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 백성이 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백성입니다. 복을 받아도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이 받고 저주를 받아도 이스라엘이 받는다는 말입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그게 아니라 하나님 백성이 불순종하면 지옥이란 뜻입니다.
자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섰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바람을 붙잡아 불지 못하게 합니다. 바람이 붙잡힙니까? 천사는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여기서도 생각해볼 것은 이 단어들입니다. 땅, 바람, 바다, 나무 등 이것들이 단어 그대로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인가 아니면 비유인가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바람을 붙잡아 불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2 - 3절을 봅니다.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하나님의 인을 가진 천사가 나옵니다. 그가 네 천사에게 외칩니다.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지요. 그 네 천사는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가지고 있답니다. 그런데 해하지 말라고 하지요. 언제까지요?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입니다. 그러면 짐작할 수 있는 것이 바람도 그 때까지 불지 못하도록 막는 것입니다.
앞에서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계 6 : 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바람에 선 과실이 떨어지듯 별들이 떨어집니다. 별들은 하나님 백성 오늘로 이야기하면 성도들입니다. 그들이 떨어집니다. 심판을 받는 것이지요. 왜 심판을 받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언약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바람을 불어 선 과실 떨어뜨리듯 떨쳐버리는 것입니다. 바람은 심판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잠시 멈추도록 하는 것이지요. 언제까지요? 인 치기까지. 그러므로 여기 말하는 땅 바다 나무 등도 하나님 백성과 연관된 뜻을 담고 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인 맞은 자들의 수가 나와 있습니다. 4절부터 8절까지 그 수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각 지파 12,000씩 해서 도합 144,000입니다. 이 숫자가 실제냐 상징이냐 말들이 많습니다. 아무튼 그것은 나중에 따져보기로 하고 일단 하나님 백성은 과거나 현재나 그리고 장래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도 변함없이 열두 지파라는 사실입니다. 이 열둘은 실제입니까, 상징입니까? 이 시초는 잘 아는 대로 야곱의 열두 아들입니다. 야곱의 이름이 나중에 이스라엘로 바뀌었으니 바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이 열두 지파로 형성되었습니다. 신약의 하나님 백성도 열두 지파로 표현합니다. 약 1 : 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앞에서 보았듯이 이 열두 지파가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닙니다. 예수를 영접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새로 창조된 이스라엘이란 말입니다.
주님 다시 오셔서 영광의 보좌에 앉아 열두 사도와 심판할 대상도 바로 이 그리스도인 열두 지파입니다. 마 19 : 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이 열두 지파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재림 후 다시 창조될 이스라엘도 역시 열두 지파가 되는 것이지요. 그 일이 계 7 : 4 - 8절 내용입니다. 그런데 숫자가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각 지파 12,000씩 해서 합 144,000입니다. 실제 수로 볼 것인가, 상징수로 볼 것인가? 그러면 열두 지파의 ‘12’는 어떻습니까? 거 왜 꼭 열둘이어야 하지요? 그야 나중에 주님 만나면 물어보도록 하지요.
이어갑니다. 계 7 :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또 사건의 앞뒤를 알려주는 문구가 나옵니다. ‘이 일 후에’ 이번에는 무슨 일 후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앞의 ‘인 치는’ 사건 후입니다. 144,000 하나님의 종 인 친 후에 큰 무리가 나옵니다. 그런데 ‘흰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 서서 찬송합니다. 10절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그러자 천사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송으로 화답합니다. 11 - 12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
자, 궁금한 것은 소위 말하는 ‘흰 무리’입니다.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합니다. 앞의 하나님의 종들 144,000과는 비교가 됩니다. 그 수가 대단히 많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종들의 수는 제한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옛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시내 산에 집합시키고 율법(언약)을 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출 19 : 5 - 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세상이 다 내 것이지만 너희는 특별하다는 것입니다. 언약(말씀)을 잘 지키면 열국 중에서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해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 좋아하는 용어로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왕이 있으면 백성도 있어야 합니다. 백성이 없는 왕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모두가 왕이 된다면 누가 백성이 됩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만인제사장’ 말이야 좋지만 비합리적입니다. 다 제사장, 왕 같은 제사장이면 누가 백성이 된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종들 144,000이 왕 같은 제사장이 되고 그 밖의 저 많은 흰 무리는 백성이 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란 말입니다. 이 흰 무리에 대하여 뒤에 설명해줍니다. 계 7 : 13 - 14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우선 ‘큰 환난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이들의 신앙생활이 쉽지 않았나보다 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 초림 때 예수를 믿고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과도 비교가 됩니다. 그러니 주 재림 때도 신앙 지키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뜻이지요.
우리는 너무 안이하게 신앙하고 있지 않는가 두려워집니다. 예수님도 분명 천국 들어가는 길이 넓은 길이 아니라 좁고 협착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7 : 13 - 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그런데 단순히 ‘예수 천당’이나 외치고 있으니 주님의 당부와는 도무지 맞지를 않습니다. 그 때는 그렇고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까? 사실 ‘예수 천당’은 예수님 오신 당시에 필요했던 전도입니다. 그 때 하나님 백성이라 자칭하던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습니까? 믿기는커녕 그 말씀을 들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말을 하면 어떻게든 빌미를 잡아 쫓아내려 하고 잡아들이려 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알지 못하고 그 짓거리를 하는 자기 백성을 불쌍히 보고 외친 것이 바로 ‘예수 천당’입니다. 율법에 매여 있지 말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믿으라는 것이지요. 그래야 구원이고 천국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초림 때 제자들이 다니며 전한 말씀은 간단히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믿으라고 그렇게 외쳤습니다. 행 5 : 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그것을 2천 년이나 지난 오늘날도 외치고 있습니다. 물론 불신자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필요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 말씀을 버리고 엉뚱한 말을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신앙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런 사실을 알려줘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옳다고 고집하는 것이지요. 초림 때 서기관 바리새인 그리고 제사장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니 그런 환경 속에서 신앙을 지키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지금 이 계시록은 장래 일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니 우리 앞에 그런 일이 있을 것을 대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십시오. 그런 대비가 조금이라도 되어 있나요? 아무튼 그렇게 어려움을 딛고 환난에서 나온 그들은 주님이 흰옷을 입혀준다는 말입니다. 그 흰 옷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계 7 : 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어린양의 피에 씻어서 희게 되었답니다. 이 말도 이상합니다. 피가 흽니까? 그러니 ‘피’가 의미하는 바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보좌 앞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그들에게는 놀라운 약속이 있습니다. 16 - 17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찌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아멘!!
<007 노 타임 투 다이>
인류 문명사의 발전은 또한 무기의 발전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류사가 전쟁사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사람은 싸우기 위해 사는가, 할 정도로 역사는 전쟁을 이야기합니다. 개인 간의 싸움이 부족 간의 싸움으로, 나아가 국가 간의 전쟁으로 확대해 갑니다. 사람의 수가 늘어나는 만큼 싸움의 규모도 커지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싸우지요? 뺏으려고? 지키려고? 이것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빼앗으려는 자가 있으니 뺏기지 않으려 싸워야 합니다. 왜 빼앗으려 하지요? 자기가 없는 것을 채우려고, 아니면 더 가지려고. 한 마디로 어찌 보면 욕심의 발로입니다. 사람은 욕망의 덩어리이니 욕심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채우는 방법은 공존의 법칙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벗어나니 싸움이 일어납니다.
욕심이 어느 정도까지 자랄 수 있을까요? 잘 아는 대로 끝이 없습니다. 아니면 ‘망할 때까지’입니다. 요즘 우리 안에서 문제가 되는 부동산 소유를 예를 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이 수 백 채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과연 그 사람의 생활에 그 많은 부동산이 필요한 겁니까? 자기 생활비나 개인 활동비를 생각한다 해도 상상을 초월합니다. 사업자금을 조달한다고요? 글쎄 말입니다. 아무래도 정상 경제활동이라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요즘은 총칼을 든 싸움보다는 돈 가지고 싸우는 경우가 많을 듯합니다. 가진 자가 더 유리합니다. 그래서 돈이 돈을 벌어주는 것입니다. 부익부빈익빈이 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아무튼 우리 사회가 전쟁과도 같은 상황 속에 놓인 것은 분명합니다.
전쟁의 목적이 문제가 됩니다. 일으키는 자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방어가 아니라면 탈취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며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주 원인도 사실 식민전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라를 빼앗는 대규모 전쟁이었지요. 그것이 전 세계로 확대되었고 온 세계가 전쟁 포화로 신음하였습니다. 그 후 서로 자제하기를 꾀하여 UN이라는 기구도 만들어졌지만 아직도 각국의 이해득실에 따라 그 안에서도 왈가왈부하고 있습니다. 그 후 우리의 상상은 보다 규모가 확대됩니다. 국가도 아니고 한 개인이 또는 한 집단이 세계를 독차지하려는 음모를 합니다. 자연히 그만한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세계 정복을 꿈꾸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이야말로 부동산 몇 백 채 가진 것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인간의 욕심이 이렇게 확대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지구 땅덩이 다 가지고 뭐 하려는 것이지요? 그래봤자 자기 누울 자리는 한 평 남짓일 텐데 말입니다. 하기야 땅덩이 차지하려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자기 맘대로 주무르고 싶은 욕망 때문이리라 짐작합니다. 사실 땅을 가지는 것보다 사람을 가지는 것이 훨씬 흥미진진할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바로 그런 욕망이 숨어있습니다. 사람을 자기 수단으로 사용하고 싶은 욕망입니다. 그래서 한두 세기 전까지만 해도 노예제도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노예는 인격이 무시당할 수 있습니다.
비록 노예는 아니더라도 개인의 수단이 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갑질’과 ‘을의 굴욕’이 문제시 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총칼로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 사람을 누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 힘(권력)을 가지든지 아니면 돈을 가져야 사람 대접받습니다. 그것이 확대되면 다른 사람을 내 임의로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사람의 주인이 됩니다. 그 욕심이 확장되어 온 세상 사람을 자기 멋대로 가지고 놀고 싶은 모양입니다. 이 세상 땅덩이와 사람을 모두 자기 발아래 두고 싶어 합니다. ‘007’ 이야기의 대부분은 이런 터무니없는 욕심쟁이의 등장으로 시작됩니다. 자연히 그만한 무기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이번에 새롭게 등장한 무기는 생화학 무기입니다. 그것도 여태 알고 있는 정도의 세균이나 독가스 정도가 아닙니다. 사람의 유전자에 침투시켜 사람 자체를 독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니 그 사람에게 접하는 사람들은 그 독성에 오염되어 죽음을 당합니다. 좀비보다도 훨씬 무서운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좀비는 형태로라도 분별이 되지만 이 사람은 전혀 겉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습니다. 누구나 스스럼없이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악수라도 하면, 반갑다고 포옹이라도 하면 생명은 끝나는 것입니다. 지금은 상상의 산물이지만 이런 일이 정말 나타날까 두려워집니다.
007 시리즈가 시작된 지도 반세기가 훨씬 지났습니다. 사람도 여럿 나왔습니다. 그러나 가장 007다운 첩보원은 이제는 세상에 없는 배우, ‘숀 코네리’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007 영화의 특색 중 하나가 때마다 나타나는 신무기인데 이번에는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습니다. 속된 표현을 하자면 그 많은 007 영화 중에 가장 몸을 많이 사용한 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으로 끝나다니, 이런 경우도 처음입니다. 가장 감성적인 007로 떠납니다. 뒤를 잇는다면 아마도 여성 007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NO TIME TO DIE)를 보았습니다.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현재 세간에서는 ‘언론중개법’ 안을 가지고 제정해야 한다 말아야 한다 하고 말이 많습니다. 야당에서는 극구 반대하고 나서고 있습니다. 특히 언론 종사자들은 개악법이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세계적인 시각에서도 그다지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의도야 어찌 되었든 그 법이 가져올 수 있는 악영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악용될 수 있으리라는 예측입니다. 하기야 아무리 좋은 법이라 해도 실제로 적용하지 않으면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적용하기에 따라서 좋은 법도 악법으로 둔갑할 수 있습니다. 어지 보면 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일단 기준이라는 것이 필요하기에 제정을 해놓으려 합니다.
개인정보 보호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특히 민주주의 사회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사생활 보호법이라고도 합니다. 나의 일상을 누구인가 다 들여다보고 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살맛이 안 날 것입니다.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런데 도대체 왜 들여다보려고 하지요? 물론 중요 인물이라면 사회적 영향을 고려하여 사전 예방 차원에서 감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 성폭력범에게 착용하게 하는 전자팔찌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요 주의인물이기에 그의 생활 반경부터 제한합니다. 그리고 그의 동선을 일일이 확인합니다. 일단 어디로 가는지 보면 무엇을 할 것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시금 범죄현장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감시합니다. 그런 전과가 있기에 마땅히 짊어져야 할 짐입니다. 정해진 기한까지는 감내해야 합니다.
그런데 죄인도 아닌데, 그런 전과도 없는데 나의 일상의 삶이 감시를 받는다면 나는 온전한 나로서 살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라도 내가 감시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야말로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 여파는 남은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런 삶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실 요즘의 생활은 많은 부분 노출되어 있습니다. 여기저기 CCTV가 널려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나의 하루 삶이 송두리째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대부분 그러려니 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나를 감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동의를 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단 나의 사생활 터까지 들어오지 않은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안보가 우선인가, 개인의 사생활 보호가 먼저인가? 우리는 압니다. 나라가 없으면 어떤 고통과 비극을 당할지, 우리 역사 속에서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지구촌에 사는 사람들은 본인이 당하지 않았다 해도 다른 나라의 현실과 역사를 보고 배우면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라가 없으면 개인의 삶도 온전해지기 어려워집니다. 물론 그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자신의 삶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길이 얼마가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가능하면 나라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때문에 국가 안보는 매우 중요합니다. 누구나 바라는 일이지만 그렇다 해도 나만의 생활을 보장 받으면서 나라를 지키고 싶습니다. 사실 나라를 지키려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삶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은 가능하면 그 권력을 오래 유지하고 싶어 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자기 의지대로 움직이고 싶어 합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사용하고 싶은 것이지요. 권력 중에 가장 막강한 것이 바로 국가 권력입니다. 그래서 정부 기관에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들이 특히 그런 욕망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총을 쥐면 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듯 권력을 쥐면 휘두르고 싶은 욕망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래 유지하려면 자신과 대치되는 사람들을 이겨야 합니다. 자신에게 복종시켜야 합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그 권력의 부패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때마다 선거를 치름으로 바꾸거나 확인 작업을 합니다. 국민의 감시를 받는 것이지요.
그런데 권력을 쥔 자가 그 권력을 좀 더 오래 가지고자 국민의 감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감시하려 합니다. 그 야심을 이루기 위해 꺼낸 빌미가 ‘국가안보’입니다. 범죄와 테러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상황에서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다소 제한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자그마한 구실이 큰 것을 망칠 수 있습니다. 댐이 무너지는 것은 비단 폭탄으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 조그만 구멍이 생기고 그것을 모른 채 시간이 흐르면 그 커다란 댐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그래서 한 국회의원은 결사반대합니다. 그의 마음을 돌리고자 했던 관리는 결국 제거하기로 합니다. 완전범죄처럼 위장했는데 그만 환경단체 기자의 숨겨놓은 카메라에 담겼습니다. 이를 알게 되고 그 테이프를 빼앗으려 쫓고 쫓기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마피아의 약점을 잡아 이용하려는 변호사와 테이프가 얽히게 됩니다.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일입니다. 그래서 쫓겨 다니며 온갖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왜 그런지를 모릅니다. 권력이 얼마나 개인의 삶을 피폐시킬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국가의 이름을 등에 업은 소수의 권력자가 그 권력으로 얼마나 무시무시한 악인천하를 만들 수 있는지 보게 됩니다. 아주 잘 짜진 이야기입니다. 악당끼리 치고받게 만든 변호사의 지혜도 뛰어나고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낸 작가도 대단하다 싶습니다. 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Enemy of the State)를 보았습니다. 1998년 작인데 그 때 벌써 이렇게 과학기술이 발달되어 있었나요? 대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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