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태복음 24장 40-44절 갑작스러운 재림
예수님은 재림의 긴박성과 갑작스러움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이제 재림이 일어날 그 날을 맞게 되는 사람들의 모습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사실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데 하나는 밭에 나가 일하고 있는 두 사람에 대하여, 또 다른 하나는 맷돌질을 하고 있는 두 여인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우리 40-4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앞에서 말씀하신 밭에 있는 두 사람은 남자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40절의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에서 ‘한 사람’으로 번역된 헬라어 ‘헤이스’ 는 남성 단수 주격이기 때문에 밭에 있는 두 사람은 모두 남자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밭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남자와 집에서 맷돌을 갈며 집안 일을 하는 여자들의 예를 드시면서 모든 남자와 여자가 당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 그들 중 일부는 데려감을 당하고, 일부는 버려둠을 당할 것입니다. 이 세상이 그렇게 복잡해 보여도 실상은 남자와 여자로, 그리고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과 집 밖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구분이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집 밖에서도, 집안에서도 역시 데려감을 당할 사람들과 버려둠을 당할 사람들로 구별되는 단순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재림 때가 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종교적인 행위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종말론을 강조하는 이단들일수록 열심을 더 내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던 일들은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그만 중단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모여 예배하는 일만 하라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맡기신 장소에서 열심히 일할 때 여러분들에게 천사들을 보내셔서 공중으로 끌어올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속에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을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하는 그들은 환난을 피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 남은 사람들은 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일에 종사할지라도 그들 가운데는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으로 나뉘는 단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같이 일을 하다가도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면서 예수님이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잠을 전혀 자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맞이한다고 하루에 두 세 시간만 자려고 애를 씁니다. 자기가 자는 시간에 예수님이 오실까봐 걱정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자는 두 세 시간 사이에 예수님이 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잠을 자지 말아야 합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누가복음은 잠을 자다가 예수님이 데려가시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17장 34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둘이 한 자리에 누워있다는 것은 부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남편이든지 아내든지 간에 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에게서 보냄을 받은 천사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 데려갑니다. 예수님이 다시오실 때 데려갈 사람들은 모두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들에게 항상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은 깨어 있습니다. 깨어있다는 말이 무슨 말씀입니까?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잠을 자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영혼이 언제나 주님을 뵙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재림하시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경건하게 살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사는 사람의 영적인 상태는 언제나 말씀을 중심으로 경건하게 삽니다. 베드로 사도는 깨어 있는 경건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11-14절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이 말씀을 통하여 베드로 사도는 경건하게 깨어 있는 영적 상태를 몇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들으시면서 여러분들의 영적인 상태를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날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시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조차 세상이 주는 성공을 꿈꿉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일을 충성스럽게 하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열심히 하는 이유가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성공할 날을 위하여 열심히 일을 합니다. 둘 다 열심히 일하기는 하지만 일하는 이유가 확연하게 다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눈이 예수님이 계시며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온전히 다스리시는 그 나라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록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그해서 그 나라에 대한 간절함을 가지고 그 나라가 속히 오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항상 깨어 경건하게 사는 사람은 주님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씁니다. 점과 흠은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들은 죄로 생각하지도 않고 무시하는 죄들입니다. 하지만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작은 점같고 흠같은 것조차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들 눈에는 그것도 크게 보입니다. 그 하찮아 보이는 죄가 자기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정복해 나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언제나 조심합니다.
여러분 작아 보이고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죄가 사람을 커다란 죄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는 사실을 기억해보십시오. 술꾼이 처음부터 항아리째 술을 마시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는 한 잔부터 시작하지만 얼마 안되어 인사불성이 됩니다. 죄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찮아 보이는 작은 죄가 마음 속에 바이러스처럼 은근히 들어가면 그 다음에는 온 마음을 정복해버립니다. 그러면 마음이 무뎌져서 죄에 대한 예민한 감각들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로인해 큰 죄를 지어도 다 합리화시키거나 죄라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하며 하나님도 이런 것정도는 용서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깨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성령에 의해 자기 속에 역사하심으로 인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과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을 행하기를 소원합니다. 그것이 집 밖에 있든지 집 안에 있든지, 깨어 있든지 잠을 잘 때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언제나 살아계신 예수님이 자신 앞에서 자신을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깨어 있지 못한 사람들은 경건하지 않습니다. 유다서에 기록된 세 구절은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이 영적으로 어떤 상태에 머물러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며, 홀로 하나이신 주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꾼다는 의미는 마치 벨사살 왕이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성전 안에서 사용하던 술잔을 자기들의 잔치 자리에 꺼내다가 마시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저울에 달아보니 왕의 자격이 없다고 하시면서 완전히 바벨론 나라를 멸망시키셨습니다. 또한 성찬식에 마시는 포도주를 한 잔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홀짝 홀짝 자꾸만 마시다가 취하여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교회에서 횡설수설 하는 그런 사람들 역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에서 준 직분을 세상에서 악이용하여 자기 배만 채우는데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들은 깨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경건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들의 결과는 멸망입니다.
다음으로 유다서 1장 15절입니다.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은 경건하지 않은 일을 하며, 또한 경건하지 않은 말을 합니다. 그들의 입은 경건하지 않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완악한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4-35절을 보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하시면서 15장 18-19절을 보면 그 악한 사람엑게서 나오는 악한 말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십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사람을 더럽게 하는 악한 말들이 있습니다. 이런 말하는 사람들은 경건치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마음에 들어있는 악한 행동을 하고 또 악한 말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다서 1장 18절을보면 또 다른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의 행동이 나옵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정욕대로 행하며 또한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을 조롱합니다. 그들 눈에는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이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보십시오, 경건하지 않아서 폭력적이고 음란하며 이기적으로 모으는 사람들을 대단한 것처럼 칭찬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이유가 되는 데도 말입니다. 문제는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이렇게 경건하지 않은 세상에서 경건하지 않은 삶의 방식을 쫓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깨어 있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혼이 수면 상태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언제 오셔도 그들은 깨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놀라 기겁하면서 두려워하는 가운데 숨을 곳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 2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그러면서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더 드십니다. 이것은 도둑이 들어오는 것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집주인에 대한 비유입니다. 43절입니다.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1950년 6월 25일에 6. 25 사변이 터졌습니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순식간에 북한 공산당들은 남하해서 낙동강까지 내려갔습니다. 이제 대한민국 땅은 부산만 남았고 엄청난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갑자기”일어나는 일들의 무서움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날은 불신자들에게 이보다 더 무서운 일이 일어납니다. 땅에 남겨진 자들은 이 땅에서 이제껏 겪었던 그 어떤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을 겪게 되며 이 땅에서 겪었던 그 어떤 고통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을 겪게 되며, 이 땅에서 겪었던 그 어떤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을 겪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날에 대하여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하지만 이 두려움과 고통과 슬픔의 날도 영원한 불못에서 겪는 두려움과 고통과 슬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아 구원받고 영생을 얻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그리고 성령이 여러분들의 삶을 깨워주며 경건한 삶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그런 경건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어느 날 갑자기가 아니라 어제도 예수님과 함께 동행했던 것처럼 오늘 역시 예수님과 동행하는 날이 될 것이며 에녹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데려감을 당하여 이 세상에 다시 있지 않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에 대하여 데살로니가전서 5장 4-6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44절입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여러분 항상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사십시오. 언제나 깨어서 주님을 기다리는 여러분들에게 주님은 여러분들을 위한 한 걸음에 달려오시는 것처럼 오셔서 천사들을 보내심으로 여러분들을 공중으로 이끌어 올려 함께 혼인잔치게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땅에 버려진 사람들은 울며 통곡하며 자신들이 믿지 않아 경건하게 살지 않고 방탕했고 방종했던 것으로 인해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절망 속에서 고통할 것입니다. 여러분 불경건한 세상 속에서 예수님을 더욱더 사랑하시고 성령을 의지하여 진리 가운데 행하시면서 깨어 경건한 삶을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