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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대축일’ 유래와 의미 살펴보기
빛으로 오신 구세주 예수, 경배의 순례 행한 동방박사들
5일은 주님 공현 대축일이다. 공현(公顯)은 ‘나타내어 보여줌’이라는 뜻으로, 아기 예수께서 동방 박사들을 통해 당신 자신이 메시아임을 세상에 드러낸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께로 이끄는 별을 따라 경배의 순례 여정을 시작했듯이, 그리스도인은 빛으로 오신 구세주를 닮기 위해 주님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주님 공현 대축일의 유래와 의미를 알아본다.
주님 공현 대축일의 유래와 의미
주님 공현 대축일의 의미를 알려면 우선 성탄 시기 전례력이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전례력에 있어 성탄 시기의 특징은 연속적으로 지정된 축일들이다. 이 축일 중 가장 중요한 축일이라 할 수 있는 것이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과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이다. 선교 지역인 한국 교회는 사목상 편의에 따라 1월 2~8일 사이의 주일에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내고 있다. 아울러 주님 성탄 대축일 다음 주일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주님 공현 대축일 다음 주일을 주님 세례 축일로 지내고 성탄 시기를 마무리한다.
주님 공현 대축일은 동방 교회에서 시작했다. 이집트에서 활동하던 영지주의자(주님의 인성을 부정한 이단)들이 1월 6일에 주님의 세례를 기념한 데서 유래했다. 로마와 갈리아를 중심으로 한 서방 교회에서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년) 이후 4세기부터 주님 공현 대축일을 기념했다.
주님 공현은 헬라어 ‘에피파네이아’(επιφανεια)에서 파생된 말로 ‘드러나게 나타나거나 밝혀지는 것’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 ‘유명한 존재로 나타남’ 등을 의미한다. 초대 교회는 신이 개입된 기적같은 사건이나, 황제나 왕이 올 때 사용하던 이 용어를 받아들여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심을 기리는 주님 성탄’을 드러내는 교회 용어로 사용했다. 이런 이유로 동방 교회에서는 지금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에 주님 성탄을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서방 교회는 주님 성탄 대축일을 별도로 지내고, 주님 공현 대축일에는 동방 박사들이 탄생한 구세주를 경배하기 위해 베들레헴에 온 것과 이방 민족들 모두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낸 주님을 기념하고 있다. 따라서 주님 공현 대축일 전례는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의 빛으로 널리 계시되었다’는 사실에 집중되고 있다. 구약의 독서(이사 60,1-6)를 통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불러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지만, 신약(에페 3,2.3ㄴ.5-6)에 와서 유다인들에게 약속된 복음 선포가 이방인들에게도 전파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복음(마태 2,1-12)은 구세주의 탄생을 알리는 베들레헴의 별빛은 그리스도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염원하는 모든 이를 위한 구원의 빛임을 선포한다.
동방 박사들은 누구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마태 2,1-11)
동방 박사의 경배는 네 복음서 중 마태오 복음서에만 나온다. 마태오 복음서를 보면, 동방 박사들은 별의 인도로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 베들레헴을 찾아왔다. 이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온 것은 모든 민족을 대표해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예물을 드리기 위해서였다. 예수는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로, 임마누엘로 세상에 왔지만 헤로데 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세주가 오심을 알아보지 못했다. 성경에서 동방 박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최초의 이방인으로 등장한다.
삼왕이라 불리는 동방에서 온 이 세 사람을 공동 번역 성경에서는 ‘박사’, 200주년 기념 신약성경에서는 ‘점성가’라고 번역했다. 동방 박사라고 번역되어 사용되었던 그리스어 ‘마고이’의 단수, 마고스는 본래 ‘현자’, 또는 ‘해몽가’라는 뜻이다.
전승에 따르면 세 명의 박사는 멜키오르, 발타사르, 가스파르로 불린다. 마태오가 복음서에서 이들이 온 곳을 동방이라고 한 것은 당시 메소포타미아나 페르시아 등 팔레스티나 동쪽 지역에서 성행한 점성술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동방 박사들은 예수님을 경배하고, 황금ㆍ유향ㆍ몰약을 선물로 바쳤다. 황금은 ‘왕권’, 유향은 ‘그리스도의 신성’, 몰약은 ‘인류를 위해 죽으실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는 예물이다. 신학자 칼 라너 신부는 “황금은 ‘우리의 사랑’, 유향은 ‘우리의 그리움’, 몰약은 ‘우리의 고통’”이라고 표현했다.
이들의 유해는 5세기 말경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밀라노의 성 에우스토르지오 성당으로 옮겨졌다고 전해진다. 1162년에 프리드리히 1세 황제에 의해 독일의 쾰른 주교좌성당에 옮겨졌다. 아기 예수의 탄생과 동방 박사들의 경배 장면은 많은 성미술 작품에 남아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기획] ‘한국 교회와 성모’
성모님 보호와 전구로 2020년 한반도에 축복과 은총 가득하길
1월 1일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다. 가톨릭교회가 성모 마리아께 ‘천주의 성모’ 곧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라는 호칭을 붙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하느님이시고 참인간이시기 때문이다.
이는 431년 에페소공의회 때 결정된 것으로, 이후 에페소공의회 1500주년을 맞은 1931년에 세계 교회의 보편 축일(당시는 10월 11일)이 됐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례 개혁으로 1월 1일로 복원됐다. 또한, 1970년부터는 모든 교회가 이날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냈고, 새해로 이날이 대축일이 된 지 50주년이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이에 앞서 1968년부터 이 축일을 ‘세계 평화의 날’로 정하고 평화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통해 하느님께 평화의 선물을 청하도록 했다. 이에 그간 한국 천주교회의 수호자로 우리 민족과 함께해온 성모님을 기억하며 ‘한국 교회와 성모’를 돌아보며 새해의 문을 연다.
새해는 한반도에 평화가 건설되는 ‘원년’이 될까?
한국 천주교회는 2020년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대림 제1주일부터 오는 11월 28일까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밤 9시 주모경 바치기’ 기도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 기도운동은 광복 70주년이던 2015년 6월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주관으로 시작됐지만, 한국 교회 전체가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의 연대를 이루자는 취지로 지난해 주교회의 가을 정기총회의 결정으로 전국의 모든 교구로 확대해 펼치고 있다. 새로운 한 해 한반도에 성모님의 보호와 전구 속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은총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다.
이처럼 한국 교회의 성모 신심이 활발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평신도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설립된 한국 천주교회에서 성모 신심은 신자들의 신앙생활 중심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1791년 ‘진산사건’의 주역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 복자가 순교 직전 “예수, 마리아”를 여러 번 부르다가 순교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고,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김광옥(안드레아) 복자 또한 형장에 끌려가면서도 큰 소리로 묵주 기도를 바쳤다. 이순이(루갈타) 복자, 김사집(프란치스코) 복자는 가족들에게 “언제나 성모 마리아께 의지하며 살 것”을 유언으로 남겼을 정도다.
초기 한국 교회 성모 신심을 더 확연히 보여주는 건 동정녀의 존재다. 「사학징의」에 따르면, 윤점혜(아가타) 복자가 회장으로 있던 동정녀 공동체는 정순매(바르바라) 복자나 김경애, 조도애, 박성염, 이득임 등 6명이 동정녀로 살았다. 이는 정결을 강조한 복자 주문모 신부와 한문서학서 「칠극」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지만, 동시에 성모의 삶을 본받으려는 신자들 열의가 그만큼 강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1836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한국 교회 성모 신심 운동은 전기를 맞는다. 1836년 매괴회가 설립됐고, 자신을 성모의 종으로 봉헌하며 특별한 보호를 청하는 ‘성의회’도 1834∼1837년 무렵에 설립됐다. 이처럼 조선 교회에 성모 신심이 확산하자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는 1838년 12월 1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에게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조선 교회의 수호자로 정해달라고 요청했고, 교황은 1841년 8월 22일자로 이를 수락했다.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는 1846년 11월 병오박해 소식과 함께 김대건 신부 순교소식을 전해 들은 뒤 조선 교회를 성모께 의탁하며 다블뤼 신부(훗날 제5대 조선대목구장)와 함께 공주 수리치골교우촌에서 ‘성모성심회 조선분회’를 설립했다.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는 1861년 10월 조선 교회를 성모의 보호에 맡긴다는 뜻에서 조선대목구를 8개 사목구로 나눈 뒤 이중 7개를 성모와 관련한 이름으로 명명했다. 서울은 ‘성모 무염시태’(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충청도 홍주는 ‘성모 성탄’(천주의 성모 마리아), 공주는 ‘성모 영보’(주님 탄생 예고), 충청도 동북부는 ‘성모 자헌’, 충청도 서부는 ‘성모 왕고’(往顧,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경상도 서북부는 ‘성모 승천’, 경상도 서부는 ‘성모 취결례’(取潔禮, 주님 봉헌) 사목구로 각각 칭했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과 함께 신앙의 자유를 얻은 조선 교회는 1887년 성모성심회와 매괴회, 성의회 등을 공식 단체로 승인했다. 또한, 1890년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는 성모님께 조선 교회를 봉헌했으며, 1911년 설립된 대구대목구는 교구 수호성인을 ‘루르드의 성모’로 모셨다.
일제강점기에도 성모 신심을 계속 이어져 성모성심회와 매괴회, 성의회는 본당 신심단체로 널리 확산됐으며, 신자들은 성모께 조선의 자주 독립을 숨어 기원했다.
성모의 전구로 일제 패망 이후 찾아온 해방과 건국은 한국 교회의 성모 신심에 새 활력을 불어넣는다. 해방일과 건국일이 똑같은 8월 15일이어서 ‘성모 승천 대축일’과 겹치게 되자 광복과 건국이 성모의 도움에 의한 것이라고 굳게 믿었고 한국 교회의 성모신심은 더 활성화됐다.
전쟁 이후 한국 교회에는 외국에서 새로운 성모 신심 단체가 유입됐다. 레지오 마리애와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푸른군대) 등 성모 신심 단체들은 성모 신심을 바탕으로 다양한 선교 활동과 봉사를 전개했고, 성모 기사회와 마리아 사제 운동 등도 1960∼1970년대에 잇따라 도입돼 한국 교회의 성모 신심은 부쩍 활성화됐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74년 2월 반포한 회칙 「마리아 공경」(Marialis cultus)을 통해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와 교회의 본질을 묵상하면서 그리스도의 신비의 기저에서, 또 교회 본질의 정점으로서 동일한 한 여인의 모습, 즉 동정녀 마리아, 그리스도의 모친, 교회의 어머니 상을 발견해 왔다”면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 신심이 발전되기를 바라는 이유는 이 신심이 교회의 참된 신심이기 때문”이라고 못 박는다. 또한, 이날을 세계 평화의 날로 정했던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이날은 갓 태어나신 평화의 왕을 경배하고 천사가 전해준 기쁜 소식을 다시 한 번 들으며 평화의 모후를 통해 하느님께 평화의 고귀한 선물을 청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새해 첫날, 천주의 성모 마리아의 보호와 전구 속에서 한반도 평화의 은총이라는 고귀한 선물을 청하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한 해의 문을 또다시 연다.
전례 탐구 생활 (1) 전례의 핵심
제가 신학생이었을 때 누가 자신을 소개하며 세례명을 토마스라고 했더니 제 옆에 있던 어느 교우가 되물었습니다. “토마스 모어요, 아니면 토마스 아퀴나스요?” 속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16세기 영국의 대법관이자 『유토피아』의 작가 토마스 모어가 성인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때 제가 모른다는 사실을 애써 감추느라 잠시 먼 산을 바라봤던 기억이 납니다.
사제 서품을 받은 지 1년쯤 지났을 때 어느 신부님이 제게 고해성사를 보러 왔습니다. 성사를 다 마치고 영대를 벗는데 그 신부님이 제게 물었습니다. “신부님, 사죄경 외울 때 왜 오른손을 제 머리 위로 안 펴 드셨어요?” 속으로 뜨끔했습니다. 그때서야 ‘사제는 고해자의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거나 오른손을 펴 들고 사죄경을 외운다’는 규정이 아주 어렴풋하게 생각이 났습니다. 그때도 적당히 둘러대느라 등줄기에 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던 기억이 납니다.
로마에서 3년 동안 전례를 공부하고 돌아온 지금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어제까지 몰랐던 것 오늘 새로 알게 되는 일이 다반사이고, 오늘 잘못 알고 있는 것 내일이라도 제대로 알려고 고군분투합니다. 그것은 제가 기본이 약한 사람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교회의 전례 자체가 엄청난 전통의 보물창고이기 때문입니다. 캐고 캐도 뭔가 나오고 꺼내고 꺼내도 속이 비지 않습니다. 온 세상에 퍼진 교회 공동체가 지난 2천 년 동안 예수님의 파스카 신비를 중단 없이 기념해 오고 있으니, 그 활동이 남긴 유산이 얼마나 크고 넓고 깊은지 감히 다 알 도리가 없습니다.
전례는 식순에 따라 진행되는 공식 행사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전례를 거행한다는 것은 교회가 성경과 교회의 전통을 바탕으로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표지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파스카 신비를 기념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풀어쓰면 이렇습니다. “전례는 한 사람이나 한 그룹이 아니라 온 교회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펼치는 활동이다, 좋은 것이면 아무거나 가져다 쓰는 것이 아니라 성경과 교회의 전통을 따른다, 신비라고 해서 우리의 머리와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괴상한 방식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감각에 직접 와닿는 말, 동작, 물건들을 사용한다, 거행의 종류에 따라 그 핵심 내용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한결같이 예수님의 파스카 신비, 즉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 중심을 차지한다, 그리고 이를 기념한다는 것은 다 지나버려서 현재 없는 사람의 과거를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전례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마주 대하고,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의 제사를 올려 드리는 예수님 곁에서 우리도 거룩해지는 사건이다.”
이것이 모든 전례 거행의 요체이고 전례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잊지 말아야 할 정신입니다. 토마스 모어가 성인인 것도, 사죄경을 외울 때 고해자에게 오른손을 뻗으라는 규정도 전례의 이 핵심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을 바라며 숙이는 고개나 십자가의 길을 바치는 발걸음에서도, 성무일도를 낭송하는 목소리나 성체를 받아 모시려 내미는 손에서도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전례는 복잡합니다. 그러나 이 복잡함이 가리키는 방향은 이렇듯 단순합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글에서 이 복잡함을 저 단순함에 비춰 풀이해 보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전례의 여러 요소들이 어떤 방식으로 예수님의 파스카 신비를 드러내는지, 혹은 그 신비를 단정하고 아름답게 드러내려면 전례 예절이 어떻게 질서 잡혀야 하는지 탐구해 나가려 합니다. 잘 짜인 체계 없이 제가 공부한 내용을 먼저 전해 드리게 될 것이라는 점, 양해를 구합니다.
[전례 영성 – 대중 신심] 대중 신심, 파스카 신비를 위한 불쏘시개
전례 기도와 신심 기도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느님의 행위이며 인간의 행위이다. 곧, 기도는 성령과 우리에게서 솟아나서, 사람이 되신 성자의 인간적인 의지와 결합되어 온전히 성부께 향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564항). 여기에 딱 들어맞는 기도가 바로 전례 기도이다.
사실 “모든 전례 거행은 사제이신 그리스도와 그 몸인 교회의 활동이므로 탁월하게 거룩한 행위이다”(전례 헌장, 7항). 이 때문에 “그 효과는 교회의 다른 어떠한 행위와 같은 정도로 비교될 수 없다”(7항).
그리스도인의 영성 생활에서 전례기도만이 전부는 아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은 공동으로 기도하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또한 자기 골방에 들어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여야 하며, 더욱이 사도의 가르침에 따라 끊임없이 기도하여야 한다”(12항). 미사와 성무일도 같은 전례 기도 외에, 성체 조배, 삼종기도, 묵주 기도, 십자가의 길, 9일 기도, 성모님과 성인들께 바치는 기도 등의 신심 기도를 혼자서든 여럿이서든 바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명심할 것은 “거룩한 전례는 그 본질상 이러한 신심 행위를 훨씬 앞서가는 것이므로, 전례 시기를 고려하여, 그러한 행위들은 어느 모로든 전례에서 이끌어 내고 백성을 전례로 이끌어 들여 전례와 조화를 이루도록 마련되어야 한다”(13항).
대중 신심
‘대중 신심’이라는 말은 전례에 속하지는 않지만 때로는 전례 거행보다 더 가슴 깊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신비를 느끼게 도와주는 다양한 표현을 말한다. 여기에는 신심 기도뿐만 아니라 성물에 입 맞추거나 손 대기, 메달 달기, 성화나 성상 공경, 성지 순례, 성월, 성모님 메시지 등이 있는데, 주로 특정 국가나 민족의 문화와 예술에서 비롯된 표현이 많다. 대중 신심은 모든 그리스도인, 특히 레지오 마리애,꾸르실료, 빈첸시오회, 성령 쇄신 봉사회 등 많은 신심 단체가 주체가 되어 행해진다.
대중 신심에 관한 교회의 원칙
전례와 신심의 관계에 대한 교회의 원칙은 확고하다. 2001년 9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교황청 경신성사성 정기 총회에 보내는 메시지에서 세 가지 원칙을 말했다. 첫째, 전례가 교회 생활의 중심이며 그 어떠한 신심 표현도 전례를 대신하거나 전례와 똑같이 여겨질 수 없고, 대중 신심의 완성은 언제나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전례 거행에서 이루어진다. 둘째, 대중 신심의 형태가 가끔 가톨릭 교리와 맞지 않는 요소들로 오염될 때 그것을 적절한 교리 교육을 통하여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고쳐 나가야 한다. 끝으로, 반대해야 할 명백한 이유가 없는 이상, 주교들은 대중 신심에 대하여 긍정적이고 격려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올바른 대중 신심을 위해서는 적절한 교리 교육이 언제나 요구된다. 왜냐하면 단순히 문화적, 국민적, 민족적, 심리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 요소들과 정화되지 않은 신앙 체험이 배타적으로 장려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위험을 알면서도 교회가 대중 신심에 대해 긍정적이고 격려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는 이유는 왜일까? 이는 대중 신심이 하느님에 대한 진정한 갈망과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부성, 섭리, 사랑, 현존 등 하느님의 속성을 이해할 수 있는 예리한 감수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교황청 경신성사성, 「대중 신심과 전례에 관한 지도서: 원칙과 지침」, 61항 참조).
특히 신심 행위 외에는 달리 신앙을 표현할 줄 모르는 복음화가 덜 된 지역에서는 대중 신심이 “사람들의 신앙을 심화하고 성숙하게 하는 출발점으로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64항)이기 때문이다.
대중 신심의 위험 요소들
교회는 대중 신심의 가치를 존중하면서도 “대중 신심을 복음화해야 할 필요성을 계속해서 강조”(66항)한다.
교회가 지적하는 대중 신심의 해로운 위험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곧 그리스도의 부활이 지니는 구원의 의미나 교회에 대한 소속감, 성령의 위격이나 활동과 같은 그리스도교적 요소들의 결여, 성인들에 대한 관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권이나 그분의 신비에 대한 관심 사이의 불균형, 성경을 가까이하지 않음, 교회의 성사 생활에서 멀어짐, 예배와 그리스도교 생활의 의무를 분리, 대중 신심의 일부 표현들에 대한 실용주의적인 관점, ‘때로는 지나치게 강조되거나 과장된 표지와 몸짓, 기도문’의 사용, 특정한 경우에 ‘분파나 미신, 주술, 운명론, 억압을 조장’할 위험 등이 그것이다”(65항).
전례와 대중 신심의 조화
대중 신심이 전례와 조화를 이루려면 무엇보다 주님의 파스카 신비, 곧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어야 한다. 예컨대, 십자가 신심이라 해도 그리스도 수난의 특정한 측면들에만 초점을 맞추어선 안 된다. 전례처럼 죽음에서 부활로 건너가는 신비를 전체적으로 강조하지 않으면 십자가 신심이 오히려 구원의 신비를 잘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성체 신심도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지어 생각해야 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련하신 파스카 만찬이 성체성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형태의 성체 신심은 본질적으로 성찬의 희생 제사와 관련이 있어야 하며, 희생 제사 거행을 준비시키거나, 희생 제사의 본질인 예배의 연장이어야 한다”(161항).
대중 신심의 종류는 아주 다양하고, 여기에서 나온 신심 행위들도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었다. 어떤 것들은 교회의 명시적 승인도 받고 장려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사목 현장에서 신심 행위들이 때로는 전례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면서, “모든 그리스도교 예배의 토대이고 정점이며 주일에 특별하게 표현되는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의 중요성”(41항)이 충분히 강조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전례에서 멀어지면 성경에 대한 관심이 감소되고, 그리스도의 중요한 업적에 대한 깨달음도 약화되며, 결국은 교회 감각도 상실하게 된다(56항 참조).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 안에 언제나 현존하시면서 신자들의 마음에 신심을 불러일으켜 주시는 성령께 의탁하되, 동시에 같은 성령의 도움을 받아 언제나 전례에서 갈 길을 찾고 신심의 방향을 우리의 파스카이신 그리스도께 향해야 한다. 그렇게 전례와 조화를 이룬 대중 신심은 파스카 신비를 위한 좋은 불쏘시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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