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해용의 해동농원 옆에는 낙남정맥 산불감시초소(아래 그림1)가 있다.
5년 만의 재회인데 감시원 휴무기간이라 그런지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은 없고
예전과 스타일을 달리 한 안내판 만이 인사를 대신하고 있다.
"낙남정맥 종주를 환영합니다"
이 초소도 미구에 폐기되겠다.
무인감시기로 대체중이기도 하지만 이 곳의 경우는 개발에 밀려 정맥 마루금과
함께 사라질 운명이다.
대규모 유통단지와 첨단산업단지가 들어선다니까.
농원(아래 그림2)과 더불어 미식가인 막내딸이 인정한 최우수 배와 감자를 먹을
기회도 동시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농원 주인(제해용 부부:아래 그림3))에게도 심각한 현안이 되겠으나 근면, 성실
하며 지혜로운 그들이니까 필경 전화위복을 만들 것이다.
진주의 시화(市花)가 석류꽃이다.
시민의 위국 충정, 시민의 굳은 의지, 시민의 단결력과 건강한 시민상을 상징하는
꽃이라지만 진주시 디지탈아트대전에서 논개를 석류꽃으로, 그 꽃의 유혹에 넘어
가는 적장을 벌레로 각각 형상화한 작품이 수상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논개와 무
관치 않은 듯 하다.
수주 변영로(樹州卞榮魯)도 논개를 '석류 속 같은 입술'이라 했으니까.
아무튼 진주의 관문이라는 가호동 국도변에 시화 이름을 딴 석류공원(아래 그림1)
이 자리잡느라 한창이다.
"진주의 랜드마크 역할과 함께 폭포와 광장,녹음이 어우러진 현대적이고 특색있는
휴식장소로 주목받을 것으로 기대한다" 나.
천수교는 삼천갑자동방삭(三千甲子東方朔) 설화처럼 건너면 천수를 누리게 되는
다리 또는 천수를 기원하며 걷는 다리가 아니다.
진주 역사 천년을 기념하는 다리다.
동쪽 망경동(望京)과 서쪽 신안동(新安)간의 남강을 연결하는 천수교는 시대 따라
변화무상한 지명이지만 고려태조 이래 천년세월을 올곧게 지켜온 이름인 '진주'를
기념하여 세운 다리란다.(아래 그림2)
천수교 남단에서 바라보는 의암쪽 남강(아래 그림3)이 아주 평화롭다.
강남콩꽃보다 더 푸른 그 물결"도 시인의 허사인가.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헤아릴 길 없으니....
진주성의 서장대(西將臺:아래 그림4)도 군 지휘소라기 보다 시인 묵객들의 풍류각
쯤으로 보일 뿐이다.
본성동과 남성동에 걸쳐있는 진주성 최초의 축성시기는 삼국시대.
고려말기(우왕5년-1379))에는 왜구의 잦은 침범에 대비해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
했다는데 사적 제118호다.
고려고종때(28년-1241) 창건되어 진주의 상징이며 영남제일의 명승이라는 촉석루
(矗石樓:아래 그림1))는 도 문화재자료 제8호다.
평시에는 선비들의 풍류도락의 장이지만 전시에는 군 지휘소가 되는 곳.
강 가운데 돌이 우뚝 솟아 있다 하여 촉석루이며 남장대 또는 장원루로도 불린다.
임란이 발발한 선조25년(1592),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은 3천 8백명 절대 열세의
병력으로 2만 왜군을 물리치고 순국한다.
임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이룩한 그의 전공비는 도 유형문화재 제1호이며
아래 그림2는 시호 충무공인 그의 동상이다.
진주성 패배에 화가 치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특명을 내린다.
대군을 몰아 진주성을 점령하고 성 안의 인종을 전멸하라고.
그래서 이듬해에 참상이 벌어진다.
방대한 사료에 근거해 저작한 이형석장군의 임진전란사(任辰戰亂史刊行委員會刊)
에 의하면 임진대첩과 달리 계사년의 함락을 예언한 노기(老妓)의 일화가 있다.
"그 때는 병력은 비록 적었으나 장졸이 서로 사랑하고 아껴서 호령이 한 갈래에서
나왔으므로 승리했으나 지금의 군사들은 통제하는 바가 없으며 장수는 병졸을 모
르고 병졸은 장수에게 친근하지 못하니 첩(妾)이 이것을 걱정합니다"
요망한 늙은 계집의 요언이라 하여 노기는 창의사 김천일의 단칼에 죽임을 당했고
성도 함락되고 말았다는 것.
여러 패인이 있지만 3천 4백 대 9만 3천은 애당초 성립이 되지 않는 전투였다.
도 문화재자료 제5호 창렬사(彰烈祠:아래 그림3)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된 충민사의 김시민장군 신위와 계사년 싸움에서 순국한 김천일, 황진, 최경회 등
39위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도 기념물 제235호 의암(義巖:아래그림4)은 본래 위험한 바위라는 뜻의 위암(危巖)
이었는데 논개가 왜장과 투신, 순절한 후 논개를 기리기 위해 고쳐 부르게 된 것.
논개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 도 문화재자료 제7호 의기사(義妓祠:논개
사당:아래 그림5)다.
'晉州城壬辰大捷癸巳殉義壇'(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아래 그림6)은 임진대첩을
높이 받들고 계사순국의 무명 충혼들을 위령하기 위해 건립된 제단이다.
임진왜란 직후에는 성 중앙에 내성을 쌓았다.
지휘소는 북장대(도문화재자료 제4호:아래 그림1)), 서장대(도문화재자료 제6호:
아래 그림2), 남장대(촉석루) 등이 있다.
특히 북장대(다른 이름 鎭南樓)는 성 안팎은 물론 외성의 병사까지 지휘할 수 있는
내성 끝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도 문화재자료 제3호인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아래 그림3)는 고종32년(1895)에는
진주관찰부, 이듬 해(건양원년)에는 경상남도 관찰사의 선화당 관문(宣化堂 關門)
으로 일명 망미루(望美樓)다.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된 1925년까지 선화당의 문루였다.
성내에는 도 유형문화재 제2호 촉석정충단비(김천일,황진,최경회 등 삼장사와 6만
무명 민.관.군의 충의를 새긴 비)와 도 유형문화재 제3호 쌍충사적비(임진애란,정유
재란 때 순국한 제말, 제홍록 숙질 장군의 충의를 새긴 비)도 있다.
정문인 촉석문(아래 그림4)과 후문인 공북문(拱北:아래 그림5)이 있다.
공북문은 진주성도에는 정문으로 되어 있는데 임금 계신 북쪽을 향해 공경의 뜻을
표하는 문이라 할까.
임진왜란 관련 유물 800여점을 전시하고 있는 임진왜란전문 역사박물관인 국립진주
박물관도 성내에 있다.(아래 그림6)
약방의 감초 같은 또 하나의 명물(?)이 빠지겠는가.
비석군이다.(아래 그림7 )
진주성과 시내에 산재해 방치된 비석들을 성내로 모았단다.
(디카의 그림 일부가 잘못되어 진주시 자료에서 전재했다)
명석면(鳴石面:아래 그림1))은 보국충석, 운돌의 고장이다.
도 민속자료 제12호 명석(아래 그림5)은 면소재지에서 산청군 신안면으로 이어지는
1006번지방도로를 따라 가면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의 신기리(新基)에 있다.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여진 및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고려 고종8년 몽고의 침입에
대비한 것이라는 설도) 진주성을 축성할 때 부역에 동원됐던 광제암(廣濟庵) 승려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급히 걸어오는 한 쌍의 돌에게 물었다.
<"무령석물(無靈石物)이 어딜 가느냐?"
"성 돌이 되어 축성에 고생하는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갑니다"
"이미 축성이 끝났다네">
돌은 승려의 말을 듣고 전신에 눈물을 흘리며 크게 울었다는 것.
이에 감복한 승려는 이 돌을 보국충석(報國忠石)이라 하여 합장배례하고 떠났다고.
이후에도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마다 3일간을 크게 울었단다.
운돌 또는 명석의 전설이다
현 위치에서 북동쪽 300m 지점의 논두렁에 서있던 숫돌과 북쪽 500m 지점 하천변에
누워 있던 암돌을 함께 옮겨 세우고(1970년 음3월 3일:아래 그림2) 1973년에 명석각
(鳴石閣:아래 그림3)을 지어 모시고 있단다.
두사충(杜思忠)이 이 소식을 듣고 자웅석찬(雌雄石讚)의 시 한 수를 보냈다고 한다
磊磊鍮石(뢰뢰유석) 큰 뜻을 지닌 그 돌
琅琅其鳴(낭랑기명) 울음소리도 낭랑하도다
其名宏大(기명굉대) 크고도 큰 그 이름
御千萬齡(어천만령) 천만년 빛나리라.
두사충은 이조 선조때 명나라에서 귀화한 무장이다.
임진왜란때(선조 25년-1592) 명나라 이여송(李如松)과 그이 사위 진린(陳璘)을 따라
입조(入朝)해 난 평정에 공을 세운 후 장차 명국이 망할 것을 알고 조선에 귀화했다.
일설에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21대 손으로 풍수(風水)인 그는 명나라 군영이 진칠 때
풍수적 기여를 한 1급 참모였단다.
그러나, 한 전투에서 명군이 왜군에 대패한 후 명군 진지에 대한 책임을 물어 죽을 뻔
했다가 사형을 면하고 귀국했는데 정유재란때 다시 입조해 돌아가지 않았다고도.
아래 그림4. 5는 두사충의 시를 인용한 명석유래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