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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약간의 일방적인 ? 친분이 있는 분 입니다. 십여년 가까이 되나요? 라듸오 방송의 간증을 숱하게 들었지만 그 중 유난히 가슴에 닿아오는 두 분의 간증인 가운데 한 분 카셑 테이프를 방송국에 신청해서 다시 듣고는 이메일을 보내고... 약 6개월 후 어느날 문득 전화가 왔는데 전화를 받는 그 순간 저도 이 분 인 줄 직감을 했죠. 제가 어러움에 처했을 때 종종 신앙 상담을 하곤 했는데 인터넷에 이 분 글이 있기에 양해도 구하지 않고 펌 했습니다. 요즘 제가 시국에 대해 열변을 토하다보니 좀 치우친 감이 있어 분위기 전환 할 겸 좋은 글이라 여겨져 옮겨 봅니다.
[나의 길 나의 신앙―조현석 ⑴] 너무도 엄격했기에 그리운 아버지 |
“하나님,아버지가 아프세요.아버지를 낫게 해주세요” 나는 1958년 2월5일 충북 진천의 피란민들만 모여 사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내가 예수님을 믿었던 동기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초등학교 5학년 때 1년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를 다녔다.겨울엔 어깨까지 쌓여있는 눈을 삽으로 파헤치고 한 발자국씩 건너뛰며 교회에 가 기도했다.그러나 5학년 겨울방학 설날을 13일 앞둔 날 통곡하는 맏아들인 나와 어머니,두 동생을 남겨두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는 생전에 저녁마다 다리가 아프시다며 내게 주물러 달라고 하셨다.그때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마른 연약한 다리였지만 당시 초등학생인 내 손으로는 힘주어 주물러도 아버지를 시원하게 해드리는 게 여간 힘들지 않았다.지금 같으면 매일 밤낮으로 해드릴 수 있었을 텐데….아버지에 대한 기억 때문일까.아내가 아프거나 아이들이 아플 때면 항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밤늦도록 다리와 허리를 주물러준다. 아버지는 내게 늘 무서운 분이었다.초등학교 때 나는 대부분 1등을 했다.그러나 성적표를 받아보신 아버지는 알듯말듯 미소만 지으시고 말없이 성적표를 돌려주셨다. 당시 5일장이 서는 읍내장터는 가장 가까운 곳이라도 4㎞ 이상 되었다.아버지와 함께 시장에 갈 때면 나는 서너 발자국 뒤에서 말없이 아버지를 따라가곤 했다.아버지 눈을 피해 친구들과 놀다가 자주 혼났던 일도 생각난다.그 때문에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던 기억은 별로 없다.나는 지금까지도 노는 일에 익숙지 못해 교회에서 야외예배 드리는 날도 어색하기만 하다.내 아이들과 노는 일에도 서투르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다고 느낀 것은 초등학교 4학년 12월 4㎞나 되는 눈길을 걸어 설빔으로 웃옷을 사주셨을 때이다.옷을 입을 때마다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다.너무 기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아버지는 이런 사랑의 증표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두달후 문교부장관상을 탔다.상을 탄 후 이버지의 말없는 눈빛이 그리워 많이 울었다.중학교 3년동안에도 아버지가 사주신 그 옷을 바라보며 자주 울었다.친구에게서 성적이 떨어져 아버지에게 꾸중들었다는 말을 들으면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었다.고등학교 시절 내내 매를 때려줄 수 있는 아버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도 했다. 육신의 아버지는 유교의 전통 때문에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고 아들에게 사랑을 굶주리게 했다.그 때문에 오히려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더 간구하게 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고 더 힘썼다.인간의 형편을 선용하셔서 유익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
[나의 길 나의 신앙―조현석 ⑵] 골수염 고통 잊으려 군입대 |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그리워했다.너무도 그리워 가슴이 타버릴 정도였다.아버지는 당시 10세는 족히 더 돼 보이는 큰아들과 밑에 두 아들,사랑하는 아내를 북에 남겨두고 우리나라 방첩대에게 납치되어 인천으로 오셨다.아마 공산당 유력인사로 오해된 것 같다. 아버지는 북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며 5년 동안 재혼을 않다 내 어머니와 결혼,나를 맏아들로 두셨다.아버지는 가끔 집 모퉁이에서 북의 가족 사진을 보며 눈물짓곤 하셨다. 그런 아버지께서 1969년 12월19일 이 세상을 떠나셨다.막내인 동생 승호는 5살이었고,어머니는 충격으로 쓰러져 시름시름 앓으셨다.마을에서는 어머니가 돌아가신다고 상여까지 두 번이나 갔다 놓곤 할 정도로 몹시 아프셨다.여동생인 순애는 정상이던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시신경이 모두 끊어진 장애인이 되었다.나 또한 심한 축농증에다 무릎이 부풀어오르고 뼈가 나오더니 급기야 걸을 수 없게 되었다.한 가정에 하나씩 다가온 불행도 인내하기 힘들 것인데 우리 집은 네 가지 불상사가 한꺼번에 찾아왔다. 나는 쪼그려 앉을 수도 없었다.어쩌다 쪼그려 앉으려면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70년대 후반 화장실은 양변기가 흔지 않아 대부분 좌변기였다.쪼그려 앉을 수 없던 나는 화장실을 가지 않으려 밥을 수시로 굶었다.4∼5일에 한번씩 화장실을 갔다.죽음과도 같은 아픔과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나날을 보냈다. 나는 냇가 옆인 우리 동네에서 유일하게 수영 못 하는 아이였다.어머니가 얼마나 나를 애지중지 키웠는지 물가에 가지 못하게 해서였다.중학교 3학년 때는 수학여행도 가지 못했다.당시 수학여행 시즌엔 수십명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자주 일어났었다.어머니는 나의 마음을 달래려 수학여행 경비를 지불하곤 막상 수학여행 날 아침엔 이불로 창문을 가려서 못가게 했다.학교에 가겠다는 나를 아직 밤이라며 안심시켜놓고 결국 차를 놓치게 했던 것이다. 그런 어머니에게 골수염이 다리에서 허리로 전이 중이라 다리를 자르지 않으면 죽게 된다고 말씀을 드릴수는 없었다.혹시 다른 사람을 통해 들을까 봐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혼자서 죽음과 같은 회색 빛 청소년기를 보냈다.고통을 참지 못해 죽으려고 두 번씩이나 시도했지만 죽을 수도 없었다.군대에 가기로 마음먹었다.병무청에서 신체 검사를 받으면서 나는 앉으면 혼자서 일어날 수 없고,일어나 있으면 혼자서 앉을 수 없는 고통을 “다리가 저려서 그렇다”는 핑계를 댔다. 그 때만 해도 군대에 가지 않으려는 풍조여서 다리가 손쉽게 현역 입영 대상으로 판정을 받았다. 훈련소 가는 날부터 기합조차 받을 수 없어 의무대에서 환자의 신분으로 보냈다.훈련 때도 그저 참관만 했다.한달 후 평가는 고등학교 선배였던 조교가 대신 해줬다.훈련 후 경기도 포천군에 있는 수송 부대로 배치됐다.자대 배치 첫날부터 태권도 훈련이 시작되었다.도무지 할 수 없었다.어째서 환자가 여기에 왔느냐는 등 모욕적인 언사와 함께 무조건 얻어맞았다.그러던 79년 7월10일 나는 예수를 믿기로 하고 군종 사병의 도움을 받아 부대 안의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1주일의 부흥회에서 나는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 |
[나의 길 나의 신앙―조현석 ⑶] 간절한 기도에 치유의 은혜 응답 |
1979년 7월10일 군종사병의 도움으로 교회에 나갔고 1주일 동안 열리는 부흥회에 참석했다. “하나님 제가 무릎꿇고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살려주세요” 부흥회에 화요일부터 참석해 내내 같은 기도를 드렸다.부흥회 마지막 날이었던 금요일 밤 기도중에 환상을 봤다.예수님께서 직경 2m가 됨직한 큰 원형 불로 내게 다가와 내 무릎에 떨어지시는 것이 아닌가.처음에는 죽을 때가 되었구나 하고 울었다.두번째는 뜨거워서 더 크게 울었다.처음 있는 일이라 당황했다.죽을 때가 되면 환상을 본다고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은 터였다.나는 죽을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나는 일어나 뛰어다녔다.골수염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살던 내게 하나님은 태양 빛으로,치료의 광선으로 내게 다가오셨던 것이었다. 뛰어다니면서도 나는 의심했다.‘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고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격언이 생각났다.그렇다. 내가 간절히 낫기를 기도했더니 저절로 나은 것이리라. 내게 또다른 신체적 고통이었던 축농증을 두고 기도하기 시작했다.고질적인 축농증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던 터였다.자고 일어나면 머리의 절반과 얼굴 전체에 고름이 고여 있었다.두 손으로 고름을 짜내야 했다.눈이나 코,목 어디든 누르면 고름이 배어 나왔다.머리를 감거나 화장실에 가서 힘을 줄 수가 없었다.머리가 온통 분쇄되어 파편처럼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아침에 일어나면 코에서,눈에서 고름이 고드름처럼 내 뺨을 타고 이불까지 흘러내려와 딱딱하게 굳었다.매일 그런 상태였다. “하나님 아버지! 썩은 제 다리를 고쳐 주셨다면 제 코를 고칠 수 있으시잖아요.제 콧병도 낫게 해주세요” 눈물로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한지 한 달 정도 지났을까? 부대에서 4㎞ 떨어진 곳에 있는 기도원에서 개원성회를 한다는 것이었다.저녁 시간에 몇십명의 부대원들과 함께 기도원에 갔다. 당시 최복규 목사가 성회를 인도했다.그 자리에서 많은 병자들이 치유를 체험했다.두 장정의 도움을 받아 들것으로 실려왔던 노인은 즉시 일어나 걸어가는 등 갖가지 표적과 이적이 나타났다.초조해지기 시작했다.‘왜 나는 낫지 않을까’ 마치 그 자리에서 일어난 기적 같은 일들이 미리 짜고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그때 나는 성경 말씀 한 마디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오직 믿음으로 거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야고보서 1장 6∼8절 말씀이었다.성회 자리에서 낫진 못했지만 나는 한 달 동안 고쳐주신 줄 믿고 감사 기도를 드렸다.어떻게 예수님을 믿은 지 한 달 만에 그런 믿음이 생겼는지 지금도 의아한 생각이 든다.하지만 모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다.하나님께서 믿음을 불어넣어 주신 것이다.한 달이 지난 어느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축농증은 나아있었다.할렐루야! |
[나의 길 나의 신앙―조현석⑷] 초병에 돌리던 생강차에 대대장도 감격 |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했다.이 기쁨과 감격을 어떻게 가슴에 담을 수 있는가! 나는 이 구원받은 기쁨을 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군인에게 겨울 밤 초병 근무시간은 참으로 힘들고 괴롭다.생각 끝에 당시 받던 2900원의 월급으로 군종사병이던 이경원 형제와 함께 생강을 샀다.낮에 미리 생강차를 만들어 밤 11시부터 새벽 4시까지 초병들에게 돌렸다.그들은 너무 감격해 울기도 하고 자기의 속사정을 다 드러내 놓았다.자살하고 싶다는 이야기며 여자친구 때문에 탈영하고 싶다는 등….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잘 하진 못했지만 함께 기도도 드렸다.군대 막사를 개조해 만든 전우교회로 병사들은 매주 몰려들었다. 생강차를 돌리던 어느 날 새벽 대대장을 만나게 됐다.당시 경계근무가 강화되던 시점이라 무척 당황했다.나는 탈영하려다 붙잡힌 병사처럼 떨렸다.그러나 한가지 이야기는 분명하게 했다. “초병들이 추울까봐 생강차를 주려고 나왔습니다” 이 말에 대대장은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내무반에 돌아온 나는 기합받을까 두려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께 기도했다.다음날 아침 조회시간에 중대장은 “이등병도 부대를 위해 일을 하는데 당신들은 무엇을 했소!”라는 대대장의 말을 전했다. ‘파이팅! 하나님의 승리다!’ 속으로 외쳤다.그 주일 군종사병과 나는 막사를 돌아다니며 전우들에게 교회 오기를 간청한 뒤 교회에 도착했다.어찌된 일인지 대대장이 와 있었다. “나도 자네가 믿는 예수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왔네” 하며 대대장은 웃었다.나중에 안 일이지만 대대장은 당시 불교 평신도연합회 부회장이었다.그후 중대장들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10여명이던 성도가 180명으로 늘어났다.이웃 포천군 낭유리교회 문세광 목사와 몇 분의 목사가 교회를 방문해 세례식을 베풀기도 했다.예수 믿은지 4∼5개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기적이었다. 고참이 되어선 말 안 듣는 후배 병사들을 훈계하다 구타한 적이 있었다.하루이틀 지나자 너무 미안하고 고통스러웠다.‘내가 이렇게 화를 잘내는 사람이구나’하고 놀랐다.나는 결심했다. 혀를 제어하기로 했다.3개월 정도 동전을 물고 다녔다.그후엔 금식기도를 했다.3일,10일,15일 등 여러 번의 금식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나의 모난 성격을 다듬어 주셨다.거짓말,화내는 말,비판의 말로 점철됐던 내 입술은 점점 바뀌어갔다. 어머니는 내가 군대에 있을 때인 79년 예수님을 믿었다.어머니는 병약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내 몸을 치유하신 것처럼 어머니도 건강하게 하셨다.최근 무릎이 아파 병원에 몇번 간 것 외에는 병원신세를 진 적이 없다.시골에서 혼자 몸으로 농사를 지으며 산다는 일은 쉽지 않다.모든 일을 손으로 직접 해야 했던 때였다.휴가를 나오면 어머니는 “누가 누가 내게 이렇게 했다”며 억울했던 일들을 하소연했다.나는 “어머니,용서하셔야 해요.용서하지 않으면 그동안 십일조 드린 일,새벽기도 드린 일 모두 소용없게 돼요”라고 말씀드렸다.그후 어머니의 신앙은 날마다 성장해 드디어 용서의 삶을 사시게 되었다.나중된 자가 먼저 된 자보다 용감하게 새로운 길을 걷고 계셨다. |
[나의 길 나의 신앙―조현석 ⑸] 대학 갈 수 있다는 희망에 밤낮공부 |
군 생활을 마무리지을 즈음 마지막 휴가를 나오게 되었다.1982년 1월이었다. 밤에 잠을 자는데 동생이 면도칼로 천장을 찢더니 무엇인가를 집어넣었다. “그게 뭐야?” “대학 합격증” “그걸 왜 거기 집어넣어?”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들 낳으면 보여주려고.아빠가 실력이 없어서 대학에 못간 것이 아니라 돈이 없어서 못간 것이라는 증표로 보관해야지” 동생을 부둥켜안고 울었다.내가 돈이 없어 대학에 못가는 것보다 동생이 못가게 된 것이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동생을 타일렀다.3월에 제대하고 나면 동네 사람들 집에 다니면서 일해 그 품삯으로 대학 보내줄 테니 한 해만 더 열심히 하여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도록 격려하며 기도해 주었다. 제대하자마자 새벽과 밤엔 우리 집 일을,낮에는 동네 사람들 집에서 일을 해주면서 품삯을 모으기 시작했다.슬프고 아프던 시기였다.논에 모를 심으러 가서 주인집 아들은 어느 전문대학에 다니는데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라도 듣게 되면 내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찼다. “주님,나도 공부하고 싶어요” 그렇게 울면서 기도하기를 얼마나 했는지…. 남북이산가족이 만나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그 해 봄 여름 가을은 텔레비전마다 온통 이산가족의 슬픔과 기쁨의 울음으로 가득 찼다.그 무렵 월남하신 6촌형을 만났다.6촌형은 서울에 있는 대학에 다니면 이북 5도민연합회에서 대학 등록금을 해결해 준다고 알려주었다.그 말을 듣고 난 후 2개월동안 거의 잠을 자지 않고 공부했다. 몇몇 사람들이 ‘참 잘 살기 때문에 도와줄 필요가 없다’고 헛소문을 퍼뜨려 이북5도민연합회로부터 장학금을 받지는 못했다.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와 내 동생이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대학 및 대학원 6년동안 학비 전액 면제와 매월 20만원씩 받을 수 있도록 해주셨다.동생은 집에서 가까운 청주대에,나는 국민대에 입학하게 되었다.만약 20만원씩 학비보조금을 지불해 주지 않았다면 대학에 갈 수 없었을 것이다.동생을 고향에 두고 홀로 대학에 갈 수는 없었으니까.이런 파격적인 장학금 제도는 전년도인 82년엔 없었다. 국민대는 다음해인 84년 입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는 제도를 없앴다.내가 입학한 83년도에 장학금을 너무 많이 지불해 학교 재정에 손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당시 총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나 한사람을 위해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대학에 들어간 뒤 일할 때 습관처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공부했다.일터에 있을 내가 대학에 있다는 한가지 이유만으로 얼마나 감사한지 그 감격,그 기쁨을 헤아릴 수 없었다.동료 학생들은 이성을 소개받고 축제에 시간을 보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하나님께서 어떻게 주신 기회인데…. 대학기간 내내 축제때 이성을 소개받는 자리에 한번도 참석하지 않았다.오직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성경 읽고 기도하고 공부하는 일이 최고의 즐거움이자 기쁨이었다. 내게 대학 4년은 지금까지 내 인생 가운데 가장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한 기간이었다.4년동안 너무나 많은 아름다운 일들이 일어났다. |
[나의 길 나의 신앙―조현석 ⑹] 고통스런 위경련도 돈 아끼려고 참아 |
대학에서 당시 매월 생활보조금 20만원을 받았다.그중 15만원은 동생에게 보냈다.당시 사립대에 다니고 있던 동생의 학비를 마련해줘야만 했다.2만원은 십일조였다.3만원으로 먹고,입고,자고,교재 사고,주일헌금 내고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차비와 책값은 스스로 벌었다.하루에 두끼만 먹었다.새벽 5시부터 밤 11시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면서 허기진 배를 부둥켜안고 국밥을 먹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을 수십번도 더했다.가게 앞을 지날 때면 빵이나 라면을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당시 버스비는 학생의 경우 90원이었는데 차비를 절약하기 위해 학교에 가려면 차를 두번 타야 하는데 한번만 타고 나머지는 걸어다녔다. 당시 너무 고마웠던 사람이 있다.삼선교회의 이명순 집사다.한끼값밖에 내지 않고 두 그릇,세 그릇을 비우고 반찬을 모조리 먹어버려도 상당 기간동안 한번도 불평하지 않으시고 밥을 해주셨다.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감사하다.그 후 어떤 일이 있어도 음식으로 타인에게 상처주지 말며 음식투정하지 않기로 다짐했다.결혼한지 16년째지만 지금까지 아내에게 음식투정을 부린 적이 한번도 없다. 그렇게 1년반이 지난후 하나님의 은혜로 ‘형설재’라는 대학 기숙사에 무료 입실하게 되었다.고시 준비생들 중에 몇 명을 뽑았던 것이다.먹는 것은 식당에서 스스로 해결했다.그 무렵 나는 잦은 위경련으로 119 구급차에 실려 다녔다.너무 아파 기숙사 방바닥을 손톱으로 긁었고 손톱에서는 피가 나는데도 고통을 지울 수 없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119 구급대에 실려가 병원에서 정신을 차리면 무조건 아프지 않다고 말했다.돈이 조금이라도 들게 되면 동생에게 학비를 보내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렇게 몇번씩 실려 다니면서 키는 1m76이었는데 몸무게는 60㎏도 안될 만큼 병약해져 갔다. 삼선교회 청년부 시절 내 옷주머니는 항상 젖어 있었다.휴지와 손수건이 흥건히 젖어 점퍼 밖으로까지 코 묻은 물이 배어 나왔었다.예배전 더 많은 휴지를 준비했지만 순식간에 휴지는 바닥나고 눈물이 성경책에 떨어져 나중에는 성경책이 보통 성경 부피보다 배 정도로 두꺼워졌다. 당시 나는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주님과의 대화가 나에게 더 없는 기쁨과 즐거움을 주었다.라일락꽃과 목련꽃,잔디,새들과도 대화를 나누며 울면서 걸었다.“너희들은 창조 당시 하나님께서 주신 임무를 잘 수행하는데 내 모습은 얼마나 거추장스럽고 방해되는 존재니?”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나로 인해 모두 비좁게 가야 하고 고시원에서 잠을 자도 나 때문에 다른 이들이 불편하고 내가 있어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주가 더러워진다고 생각하니 나는 주님이 주신 세상을 아름답게 하기보다는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오염시키는 장본인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놀랍게 지혜를 주셔서 당시 공부는 항상 수석을 차지했다.다른 학생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그것도 부담이었다.점점 예배의 감격이나 처음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의 벅찬 감동이 없어졌다.그후 난 첫번째 기도제목을 ‘내 눈에 감격의 눈물 회복’으로 정했다.꽤 오랫동안 감동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지만 쉽게 응답받지 않았다.그러다 94년 청주고 선배로 특수선교를 하는 조덕현 목사님의 교회에 갔다온 후 ‘내 눈에 감격의 눈물’을 회복했다. |
[나의 길 나의 신앙―조현석 ⑺] 간절한 기도에 기술고시 수석 합격 |
지우특허법률사무소를 설립하고 양재시민의 숲으로 직원단합대회를 갔다.족구와 배구 경기를 한참 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처음 보는 사람이었다.그 사람은 내 고등학교 친구라고 소개했다.옛 추억을 더듬어 보니 고등학교 때 폭력을 자주 쓰던 친구였다.그러나 그의 모습 속엔 예전 모습은 간데 없고 착하디 착한 모습이었다. “자네가 우리 동기 중에 잘 나가는 사람이 되었다지?” 청주고등학교는 당시 지방 명문고 중 하나였다.청주고 50회 동기중 판·검사와 의사 약사 교사가 200명은 넘을 것이라고 여겨진다.그 친구는 연이어 “자네 공부 잘 못했잖아”라고 말했다. 잠시 당황했다.각종 시험에서 수석을 놓쳐본 적이 없는데 공부를 못했다고 말하다니….공과대학 수석 입학,공과대 수석 졸업.교양과목으로 수강한 가정학원론의 점수가 잘못 기재된 것만 아니라면 졸업생 전체 수석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친구의 말을 듣고 24년전을 회고해 보니 당시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잘해야 전교 100등 남짓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400등을 넘어간 적도 한두 번 있었다.야구부와 육상부 밴드부 미술부 등의 특기생을 제외하고 400등을 넘으면 실질적으로 꼴찌에 해당되는 성적이었다.그동안 늘 1등이었다는 착각 속에 살았던 것을 깨닫게 됐다. 3번 연이은 대학시험 실패로 군대에 입대했다.제대후 다시 대학에 가기 위해 집중적으로 공부한 기간은 2개월 정도에 불과했다.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 교재를 펴면 8년전 고등학교 선생님의 제스처와 농담도 다 생각났다. 예수님을 영접한 후 하나님께서 내게 특별한 은사를 주셨다.한 번 읽은 것은 모두 암송할 수 있었다.공과대 수석입학,6년간 수업료 전액 면제와 매월 20만원씩 학비보조금 수여 등을 통해 꼴찌에 해당되던 나를 일약 수석의 자리에 앉게 하셨다. 대학교 2학년 1학기를 마치기 전에 졸업 때까지 필요한 거의 모든 과목을 공부했다.그리고 기술고등고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당시 국민대학교는 설립 이래 한 명도 기술고등고시 합격자를 내지 못했다.기술고시를 공부하는 방법도 몰랐고 어떤 유형의 시험 문제가 출제되는지조차 몰랐지만 응시하겠다는 일념으로 필요한 과목을 열심히 공부했다. 공부를 시작한 84년 1차 시험에 합격했다.합격 여부를 확인하곤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제가 주일에는 공부하지 않고 하나님만 섬기겠습니다.대신 제가 고시를 합격할 수 있게 해주세요” 어렵던 고시 준비 기간이 지나고 2차 시험 발표 날이 되었다.그러나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순간 하늘이 깜깜해졌다.환한 대낮인데 학교 구내의 큰 길을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마음이 정돈된 후 다시 기도했다. “주님! 주일에 공부해서 고시에 합격한다면 오히려 주일을 지키고 떨어지는 편을 선택하겠습니다.하지만 주님! 1등으로 합격하게 해주세요” 기도의 결과는 87년 제23회 기술 고등고시 수석 합격으로 나타났다. |
[나의 길 나의 신앙―조현석⑻] 하나님 도움으로 거짓같은 일이 눈앞에 |
시험 종류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고시 2차 시험은 통상 50점만 넘으면 합격이었다.그러나 나는 전자기학 89점,회로이론 98점 등의 성적을 냈다.시험 답안지를 어떻게 써야 점수를 잘 받는지 알 수 없었다.어느 누구에게서도 답안지 작성법을 배운 적이 없다.단지 시험을 몇번 본 경험뿐이었다.그런데 문제지를 받으면 하나님께서 내 머리에 새로운 지식을 불어넣어주셨다.누가 무슨 말을 해도 사실일 수밖에 없는 구체적인 증거로 임재하셨다. 하나님은 내 손가락을 마음대로 움직이셨다.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전자공학과 관련된 문제를 받으면 이를 푸는 여러가지 방법 모두를 사용하게 하셨다.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힌 방법이었다.다른 수험생들은 그 바쁜 시간에 다양한 방법으로 문제를 푸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하지만 나조차도 이전에 그렇게 공부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지도를 받아보지도 못했다. 가장 어렵다던 송배전공학 시험 시간이 되었다.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의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한번도 본 적이 없는 문제가 출제됐다.대학원 교재에서나 나올 법한 문제였다.지금 기억하기론 ‘제주도의 전기 사용료가 비싸다.해중선로로 육지에 있는 전력을 제주도에 송전하기 위한 해중선로의 장단점과 고려해야 할 인자를 사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라’였다.문제를 다 읽은 순간 내 앞에 거짓말 같이 책 한권이 펼쳐져 있었다. 처음 보는 책이었다.나는 책을 보고 정신없이 답을 써내려갔다.그때 시험감독 두 명이 내게로 다가왔다.‘이제 들켰구나’란 생각이 들면서 너무 당황해 무조건 엎드렸다.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책은 여전히 펼쳐져 있었다.시험감독관은 그 책을 볼 수 없는지 내가 답안지 작성하는 것만 지켜보았다.그 책은 내게만 보이는 책이었다. 한 시간이 끝난 후 “제 옆에 계시면 두렵고 신경이 쓰여 답을 제대로 쓸 수 없으니 다른 곳에 가 계시면 좋겠습니다”며 항의했다.감독관은 “학생만 열심히 답안을 작성하길래,자네만 지키면 될 것 같아서 그랬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하나님께선 이렇게 나를 도우셨다. 기술고등고시 합격후 특허청 사무관으로 임용됐다.전자공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심사4국에서 근무했다.당시 사무관 3명당 1명의 기능직 여직원이 배치돼 업무를 도와주었다.그 여직원은 업무에 좀 소홀했다.하지만 전도해야 할 대상인 그에게 대놓고 말하긴 어려웠다. 내 바로 위 상사는 김항래 과장이었다.그때 ‘직장 상사를 성실하게 대하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김과장은 생활과 일처리 등에서 기독인보다 더 도덕적으로 생활했다.김과장으로부터 보고서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으면 그날은 퇴근하지 않고 도서관을 찾아다니며 밤새 좋은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애썼다.그렇게 얼마 동안 지냈는데 몇몇 다른 상관들이 나를 찾아왔다. “김과장이 당신을 존경한다고 하던데.도대체 어떻게 하길래 상사가 부하직원을 존경한다고 하는지 보고 싶어 왔네” 나는 농담하지 말라며 펄쩍 뛰었다.그러나 사실이었다.잘 보이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는데….부끄러웠다.하지만 그런 상사 밑에서 배워 더 청렴하고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하는 공무원 생활을 했다고 자부한다.그 상사는 지금 특허청을 그만두고 현재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
[나의 길 나의 신앙―조현석 ⑼] 감격이 없어진 내삶을 하나님께 회개 |
1990년 12월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출장을 가게 됐다.약간의 설렘을 안고 김포국제공항으로 나갔다.당시만 해도 해외여행의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다.많은 사람이 화려한 차림으로 치장하고 떠나는 사람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사람을 마중하러 공항청사에 나왔다.수속을 마치고 출입국장에 들어섰는데 어린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눈을 돌려보니 몇 명의 어린아이들이 울며 엄마를 찾고 있었다.해외로 입양돼 가는 아이들이었다.갑자기 가슴이 미어졌다. 그 사이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됐다.남녀 한쌍이 뜨겁게 포옹하는 모습이었다.아마 남편이 중동에서 근로자로 있다가 온 듯했다.오랫동안 떨어질 줄 모르고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다른 사람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사랑하기 때문일 게다. 출장지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 두 모습에 사로잡혀 있었다.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도 사랑하는 사람과 만날 때에도 눈물이 필요하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그렇지만 단지 머릿속에서의 깨달음일 뿐 나는 늘 감격하지 못하는 괴로움을 안고 있었다. 당시 천안에 살면서 서울로 출퇴근했다.천안 고속버스터미널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그래서 겨울이면 추위에 눈이 얼어 물체가 이중삼중으로 보였다.눈을 깜박이면 눈에서 살얼음이 부서지는 느낌을 받았다.비가 오면 생쥐가 됐다.오토바이만 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만 하고 있는데 장인이 중고차를 한대 사주셨다.너무 좋았다.비가 오면 비를 맞으면서도 차바퀴를 닦을 정도였다. 그러던 1994년 어느 날 고등학교 선배이던 조덕현 목사가 내게 신앙간증을 부탁했다.처음 있는 일이라 당황했다.간곡한 부탁이라 거절하지 못하고 약속한 날 교회로 향했다.강단에 서니 나와 다른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전신마비로 누워있는 사람,뇌성마비로 몸이 불편한 사람,미혼모도 있었다.모두 가난해보였고 심신에 장애를 하나씩 갖고 있었다.한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휠체어를 탄 사람들이 나타났다.여러 사람이다보니 주위가 산만해졌다.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그렇게 한동안 시간이 흘렀다. 책상만 보며 원고를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앉아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모두 엉엉 울고 있었다.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내 신앙을 보았다.그동안 얼마나 감격하지 못하고 생활해왔던가.그날 간증한 사람은 나였지만 은혜를 받은 사람도 나였다.내가 간증하고 내가 더 큰 은혜를 입었다. 그 날 이후 내 삶을 하나씩 점검하면서 과거의 은혜를 회상하고 이제까지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그동안 감격이 없었던 이유를 깨달았다.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지 않아도 인생에서 별로 아쉬울 것이 없어서였다.내 삶에 감격이 없어진 부분을 회개했다.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주님과 늘 눈물로 만나기를 기도했다.“주님,저의 눈을 눈물로 가득 채워 주세요” 마침내 단조롭던 내 삶에,감격이 없던 내 인생에 감격이 찾아왔다. |
[나의 길 나의 신앙―조현석 ⑽]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일만은 지켜 |
“네가 내 명령을 어겨? 지금은 전시에 준하는 상황이야.전시에 명령을 어기면 즉결 처형을 당해도 할 말이 없어.죽고 싶나?” 1979년부터 나는 주일예배 시간을 반드시 지켰다.군 복무중이던 1981년 팀스피리트 훈련으로 한달동안 야영을 했다.야영 현지에 있는 교회를 찾았다.그리고 상사에게 예배시간에 잠깐 참석하고 돌아오겠다고 보고했지만 수용되지 않았다.그래도 나는 그럴 수 없었다.예배를 드리고 부대로 복귀했다.상사가 나를 불렀다.그는 실탄을 장전한 권총의 안전장치를 푼 후 내 머리를 겨눴다. 이 일이 있은 후 나는 ‘한번 결심하면 반드시 하는 병사’로 불렸고 오히려 신뢰를 받았다.부대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면 다른 병사의 말보다 내 말을 믿어줬다. 주일을 지키는 일은 직장에서도 계속됐다.한번은 유럽에 출장을 갔다.그곳에서 일을 마치고 미국으로 가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아 1주일 안에 출장을 마칠 수 없었다.나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6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미국을 앞에 두고 13시간동안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와 주일예배를 드렸다.그후 19시간동안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갔다. 우연찮게 기독교텔레비전의 프로그램에 출연한 후 주일 하루종일 간증을 해달라는 부탁 전화를 받았다.그러나 주일예배를 출석교회에서 드려야 한다며 거절했다.결국 오후 헌신예배에만 참석키로 했다. 청년시절 예수를 믿고 난 후 주일날 교회 중직들이 빠지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지금은 고향 교회 또는 출장지 어느 곳에서든지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하며 이해할 수 있다.그러나 청년시절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내가 가르쳐야 할 학생들이 있고 내가 불러야 할 성가대의 성가가 있는데 빠진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때 ‘나를 보고 누구 한 사람이라도 낙심케 하지 말자.보는 이가 없더라도 나는 내 자리를 꼭 지키자’고 나는 결심했다.고린도전서 8장 13절 말씀의 바울처럼 그렇게 살겠다고 다짐했다. 딱 두번 주일을 지키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기술고등고시 시험 때문이었다.그때 당시 누구에게 물어봐도 특별히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나 역시도 혼란스러웠다.그러나 하나님께서 내 삶으로 영광받으실 것이라 믿었다.그리고 공무원으로 공평하고 정의로운 삶을 살 수 없다면 그 즉시 그만두겠다고 기도했다. 공무원 생활 9년만에 직장 상사와 한두번 의견 대립이 생겼다.나는 예전의 다짐과 기도대로 그만두겠다고 결심했다.10년동안 제대로 잠도 못자고 가족과 휴가도 즐기지 못했을 뿐 아니라 두 아이의 백일과 돌,생일,어머니 생신,결혼기념일조차 챙기지 못하고 살아왔다.아득했다.그러나 다짐한 이상 공무원 생활을 더할 수는 없었다. 그만두기 바로 전날까지 밥도 먹지 못하고 잠도 잘 수 없었다.동료들에게 그만두겠다고 선언하고 과장과 국장에게 보고했다.사무실에서 쓰던 짐은 새로 구한 직장에 다 보냈다.사표수리만 남겨놓고 있을 때 타의에 의해 다시 1년 남짓 근무해야 했다.발탁인사로 다른 동기들과 달리 서기관으로 빨리 진급한데다 특허청에 좋지 못한 평판을 가져올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
[나의 길 나의 신앙―조현석 ⑾] 친구 형수님 소개로 아내 만나 |
1982년 여름은 뇌염모기로 전국이 떠들썩했다.충남에서만 뇌염 환자가 1000명이 넘었다.친구 아버지도 이때 돌아가셨다. 무더운 8월의 햇볕으로 친구 가족 모두 지쳐 환자를 돌보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내 친구 아버지 곁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돌보고 있었다. 밤 12시가 되자 죽음의 그림자가 환자를 덮치기 시작했다. 모든 식구를 깨우고 임종예배 준비를 했다. 그런지 불과 몇 십분만에 돌아가셨다. 청년시절부터 초상집에 가서 시신을 닦아주며 수의를 입히고 상여를 메고 하는 일을 해왔다. 친구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했다. 주변에서 결혼하지 않은 청년이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했지만 그 일을 계속했다.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1년4개월 정도 됐을 무렵 그 친구의 형수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장례식 때의 모습이 성실해보였다며 한 여성을 소개해줬다. 그래서 아내를 만났다. 나는 내 아내를 만난 일을 내 인생 가운데 그 어떤 일보다 가장 감사하게 생각한다. 기도의 응답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배우자를 위해 기도하는 일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서로 불편한 점이 있어 큰 소리를 주고받은 적은 있지만 한번도 다투지 않았다. 우리는 만난지 3년3개월만에 결혼했다. 주고받은 편지가 900통이 넘었다. 하루에 두통씩 보낸 일도 있었다. 항상 대학 리포트지 6장 이상에 앞뒤로 빼곡하게 쓴 내용을 편지 봉투에 넣어 보냈다. 그것도 부족해 아내는 일기처럼 편지를 써나간 대학노트 다섯권을 내게 보내주었다. 날짜마다 나를 생각하며 기도해준 내용들이 처절한 슬픔과 또 다른 기쁨이 되어 요즘 읽어도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우리는 87년 2월 결혼했다.나는 결혼하자마자 고시 1차시험에 합격한 사람에게 고시원비 혜택을 준다는 장안평의 고시원을 찾았다. 책을 펼치면 가득히 아내 얼굴이 떠올라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고시원 옆 냇가 둑위를 미친듯이 달렸다. 샤워 후 한숨 자고 나면 어느 정도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당시 금요철야 예배에 갈 때마다 이런 고민을 신앙의 청년들과 함께 나눴다. 좋은 옷만 봐도 아내 생각이 먼저 났다. 맛있는 음식만 봐도 아내 생각으로 잘 먹지 못했다. 이렇게 지내던 어느날 문득 ‘하나님을 내 아내만큼 사랑하는가’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토록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한다고 했지만 하나님보다 아내를 더 많이 사랑했음이 틀림없었다. 철야기도하며 많이 울기도 했다. “하나님! 정말 죄송해요. 제가 저의 생명 되신 주님을 제 아내보다 사랑하지 못했음을 용서해주세요” 공부하는 중에 금식하며 기도했다. 내 아내도 임신한 어려운 상태에서도 남편을 위해 자주 1주일 또는 열흘씩 금식하며 기도했다. 그 해 12월에 23회 기술고등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지금 나를 만든 사람은 예수님 다음으로 예수님께 간구한 내 아내의 몫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를 위해 기도하면 즉시 응답을 받는 아내로 인해 늘 영적인 왜소함을 느끼며 기도생활에,영적인 삶에 더욱 분발하게 된다.믿음과 사랑은 생명이다. 믿음이 자라듯 사랑도 자라야 한다. 아내에게 “어제보다 오늘 더 사랑한다”는 말을 결혼 후 15년이 넘도록 계속하고 있다. |
[나의 길 나의 신앙―조현석 ⑿] 고객 만나는 일보다 하나님이 소중 |
우여곡절 끝에 특허청에 복귀한 후 예전처럼 충실히 업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여전히 직장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어느 추운 겨울 아침 요한1서 2장 15절을 읽게 됐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 그 순간 갈등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너무 사랑해 하나님과 했던 약속을 저버린 것은 아닌지…. 한편에선 어떻게 시험을 치러 이 자리까지 왔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고 호흡이 빨라졌다. 적어도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없다면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내 삶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기도했다. 그리고 전화로 아내와 상의했다. 아내는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그 즉시 사직서를 냈다. 그리고 직속상관에게 인사했다.오전 9시5분에 시작한 경건의 시간에 결정한 사항은 오전 10시 이전 모두 실행됐다. 동료와 선배들이 잘못된 결정이라며 만류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답변하기만 했다. 당시 나를 무척 사랑해주던 안광구 통상부 장관도 퇴직하고 나를 아껴주던 특허청장께서도 통상부 차관으로 가고 내가 그만두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던,지금은 고인이 되신 주수현 국장도 다른 보직으로 가게 되었다. 주변 상황도 내게 직장을 그만둬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었구나란 생각도 나중에 들었다. 나는 원대복귀한 후 1년만에 특허청이라는 직장을 그만 두었다. 특허법률사무소를 차린 어느 수요일 외국인 고객을 만났다. 지금이야 한달에 서너명씩 외국인이나 기업의 대리인 변리사나 변호사를 만나지만 그때만 해도 1년에 몇명 정도 외국인을 만났다. 적자를 면하지 못하던 때였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셨구나 하며 감사했다. 외국인 변호사와 변리사가 사무실을 찾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기뻤다. 중요한 고객으로 삼아야 했기 때문에 신중을 기했다. 한정식 집으로 자리를 옮겨 날씨 이야기며 신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수요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허청을 그만두면서 했던 결심이 떠올랐다. 모든 예배를 드리겠다는 약속이었다. 마음속으로 갈등하면서 내 입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그만 헤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외국인 고객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서울에서 천안으로 내려오는 동안 마음속에선 수많은 전쟁이 일어났다. ‘상담만 잘되면 매년 10억원 정도는 벌 수 있는데,아니야 하나님 편에 서야 해’. 그러나 교회에 도착한 후 난 통곡하며 기도했다. “하나님, 사람을 만나는 일을 하나님 만나는 것보다 더 소중히 여기며 고민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그 일 이후 하나님께서는 내게 복을 더하사 지경을 넓혀주셨다. 하나님께 조금만 잘해도 말할 수 없는 은혜로 가득 채워주셨다.매일 아침마다 30분씩 드리는 예배에서 고객을 위한 기도를 잊지 않으며 직원들이 모두 예배를 드리고 통성기도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늘 풍성한 삶으로 채워주신다. 고객들도 우리 사무실을 들른 후 사업이 잘되기 시작했다거나 왠지 오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사업이지만 한편으론 고객에게 큰 도움과 마음의 평정을 찾아주는 일을 하고 있다는 보람도 생긴다. |
[나의 길 나의 신앙 조현석 ⒀] ‘아버지학교’ 다니며 가족 소중함 느껴 |
“아빠,저 치아교정 해주세요.제 친구들도 다 교정해요” “한나야,어느 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하나님께서 네가 누구냐? 나는 네게 그런 이를 만들어주지 않았는데 하시면 뭐라고 말씀드리겠니?” “걱정마세요. 입 꼭 다물고 있을테니까” 다음날 아침 딸 한나가 말했다. “아빠,생각해보니 입을 다물고 싶어도 나도 모르게 웃어버리면 다 드러날 테니까 치아교정 안하기로 했어요” 결혼 후 우리 부부는 마리아의 향유 옥합처럼 예수님께 모두 드릴 것을 약속했다. 아내가 보건진료소장이어서 관사에서 지낼 수 있었다. 돈을 모아 집을 사서 서울로 이사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아내가 임신했을 때도 사과 한개 사지 않았다. 고기가 먹고 싶어도 참았고 외식으로 칼국수조차 먹지 않았다. 커가는 아이들에게 1만원짜리 옷 한벌 사주지 않았고 한복이나 필요한 옷들은 얻어온 것을 입혔다. 여행이나 휴가는 꿈도 못 꿨다. 한번은 아이들이 바다를 구경하고 싶다며 졸랐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더 좋은 곳을 보여주실 거라며 달랬다. 집을 사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는데 그 돈을 파라과이와 인도네시아에 선교사로 나가시는 목사님 두분께 드렸다. 집이 없다면서 찾아온 사람에게 돈을 보태주기도 했다. 그렇게 몇 명을 도와주니 저금통장엔 마이너스 1000만원이 기록됐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풍족하게 채워주셨다. 어느 날 가정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냉장고 배달을 왔다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우리 가족은 모두 서로를 쳐다보며 의아해하면서 배달원에게 “주문한 일이 없다. 잘못 배달왔다”고 말했다. 배달원은 돈은 이미 지불됐고 장소와 전화번호가 일치한다며 막무가내로 놓고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심방 오셨던 목사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우셨는지 사보내신 것이었다. 사무실을 차리면서 생활도 나아졌다. 늘 아이들에게 잘해주지 못한 듯싶어 스스로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아이들보다 일찍 들어와 학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을 서서 맞이했다. 방에 들어갈 때까지 서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오는 나를 맞을 때 소파에 누워서 인사했다. 몹시 불쾌했지만 잘못하면 아이들이 상처받을까봐 참았다. 2000년 9월께 온누리교회에서 개최하는 아버지학교에 참석했다.나 스스로가 ‘나같은 아버지가 없다’며 자만했지만 5주간의 과정에 참석해 흘린 눈물은 이제껏 살아오며 흘렸던 것보다 많았던 것 같다. 나름대로 아버지 역할,남편 역할을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론 10점도 안된다는 한탄이 절로 나왔다. 겉모습은 변하지 않았지만 속마음은 엄청나게 바뀌었다. 아버지학교를 졸업한 후 아이들도 학교를 마친 후 집으로 빨리 오고 싶다고 했다. 그렇다면 전엔 그렇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아내에게 물어봤다. 한번도 다툼을 하지 않은 부부로 자부하며 살았지만 아내 역시 퇴근시간만 되면 긴장하고 불편했었다고 말했다. 아버지학교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생겼다. 그래서 그곳에서 봉사하고 있다. 진행자로도 3회에 걸쳐 섬겼다.매번 학생으로 배우며 느꼈던 감정을 다시 느끼고 있다. |
[나의 길 나의 신앙 조현석 (14·끝)]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늘 감사 기도 |
1979년 9월 군대에서 처음으로 십일조 헌금을 드렸다. 당시 지폐의 최소단위였던 500원이었다. 군에서 제대한 후에는 학교에서 매월 20만원씩 6년동안 학비보조금 명목으로 장학금을 받았는데 그 중 십분의 일을 드렸다. 그때부터 십일조를 게을리 드려본 적이 없다. 그후 돈과 관련된 여러 일을 겪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게 필요한 만큼 풍성하게 채워주셨다. 지난 98년이라 기억된다.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의 경제적 공황을 건너가던 때였다. 청주에 있는 어떤 교회에서 건물을 지어놓고 공사대금 1억원을 미처 납부하지 못했다. 건축회사에서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교회를 철거해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했단다. 당시 모두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그전부터 알고 있던 터라 그 교회에서 내게 전화를 해왔다. 그렇지만 내가 소유한 것은 3000만원 정도 되는 땅밖에 없었다.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어느 날 오후 모그룹 소속 직원 3명이 찾아왔다. 특허출원을 하려고 온 일반 고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고객들은 회사 소유의 땅을 사고 싶다고 했다. 한 직원이 “참 이상하지요. 우리 회사는 97년 IMF 위기가 일어나기 전 이미 회사 부동산을 매입하는 관계부서를 해체했는데 보통은 출근하지 않던 부회장님이 오늘 아침 7시에 오시더니 조현석의 땅을 사라고 하셨어요”라고 말하며 계약금으로 1억원을 내밀었다. 계약을 마친 뒤 그 돈을 청주에 있는 교회에 전달했다. 헌금하면서 십일조를 드리면서 원칙을 한가지 세웠다. 아무도 모르게 헌금하자는 것이었다. 사무관으로 처음 받은 월급 40만원의 십일조를 여섯개 봉투에 나눠 익명으로 드렸다. 지금 섬기고 있는 서울중앙침례교회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다. 하나님께만 칭찬을 받기 위해 하나님만이 아시는 헌금을 하고 있다. 돈도 원래 내 것이 아니고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헌금이라는 말 자체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헌금을 나눠서 여러 봉투로 낸다는 것 자체가 헌금을 내면서 사람을 의식한다는 또 하나의 의식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엔 사는 집과 땅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리고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포장이사를 했는데 장소가 좁아 이삿짐을 정리할 수 없었다. 이삿짐을 부리던 사람들은 20여개가 되는 이삿짐 박스를 방에 놔두고 가버렸다. 지금 우리 부부 방은 2평도 되지 않아서 잠을 자려면 옷걸이를 내놓고 가방을 내놓아야 한다. 물론 보다 큰 방도 있지만 그것은 아이들과 어머니를 위해 배정했다. 한동안 무척 불편했다. 그러나 지하 단칸방에서 한 가족 모두가 잠을 자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나마도 행복하다며 감사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 나는 늘 이렇게 기도한다. “황금만능인 시대에 하나님보다 높아진 물질을 끌어내려 하나님 보좌 앞에 드립니다. 제가 드릴 것이 이것밖에 없어 주님께 이것만을 드립니다. 주님께서 제 마음을 받아주시기 원합니다. 골수염을 앓던 나와 내 아내를 죽음에서 건져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이 물질을 드립니다. 나도 마리아의 향유 옥합처럼 그렇게 드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님 나로 인해 주님의 기쁨이 되길 소원합니다” ◆조현석 변리사 △지우국제특허법률사무소 대표변리사 △서울중앙침례교회 장로 △58년 충북 진천생 △87년 2월 국민대 공과대학 수석졸업 △87년 12월 기술고등고시 제23회 수석합격 △88∼96년 특허청 근무(최단기간 서기관 진급) △2001년 신지식 특허인 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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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새뜸님 선물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가 주장하는 모든 내용이 이 분의 글 내용에 다 담겨 있다고 생각 합니다. 간단명료하게 언급되어 있으나 너무 많은 내용이 담겨 있다보니 글 자체는 길지만 , 그 한 줄 한 줄에 수많은 내용들을 담아내고 있음이 아닌가 합니다. 주일성수든 십일조든 내 마음의 중심자리든... 머리 따로, 가슴 따로 , 손 과 발이 따로 따로 신앙이 아닌...
한 분의 신앙여정을 잘 읽었습니다.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조현석님께 풍성한 은혜와 사랑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새뜸님이 이 분과 주안의 아름다운 교제를 하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
이 분의 아내에 관한 간증은 참으로 뜨거운 감동이 있는데 그 부분은 언급하지 않았네요. 하나님은 가끔 일반인은 아주 하찮케 생각할 일을 가지고 죽음 문턱에까지 끌고 가시기도 하는데 그런 내용이었죠. 저도 몇 번 된통 혼꾸녕이 난 일이 있고요...
전 지금도 혼꾸녕나고 있습니당.. ㅋㅋㅋ
하나님 앞에서 유구무언입니다... 아내에 대한 간증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개개인의 신앙여정을 돌아보면 모두 역사이지요...하나님의 역사하심...그래서 전 연만하신 분들의 지난 삶을 듣는걸 좋아한답니다.....저두 저만의 역사가 있지만 돌아보면 조현석님 못지않게 어찌보면 왜곡된 말씀에서 율법적으로 교회생활을 했지요....마흔이 넘어서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을 통해 바로 알고 행하게 하심에 감사하지요.....서울중앙침례교회에는 장로직분이 있나보네요....침례교회에는 없는 직분이라 생소하군요.
어찌됐건 그리스도인은 불신자들이 볼때 저 사람 같으면 예수믿겠다라는 인식이 들게 삶을 살아야 된다고 봅니다....그런면에서는 항시 주님께 죄스럽지요...숭사리에서도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가 많이 논의 돼야 된다고 생각합니다....!@#$ㅂ
제 업무상 오늘 수년만에 만나고 왔는데 2006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지금은 청평에 국제중고등학교 설립했다는군요. 대안학교...영어로 수업하는...그리고 그동안 자신의 믿음에 엄청 큰 변화가 있었다는 이야기도....진정한 자유에 대하여...동영상이 있다니 한 번 쯤은 퍼와보죠. 지우국제학교를 검색하면 설교 동영상이 있다든데...
극적이고 은혜로운 간증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지금도 본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과거처럼 미국에서 비행기타고 올 정도로 주일 성수에 열심인지 알고 싶네요. 종종 이런 간증들은 너무 극적이어서 사람들은 그 분의 행위의 핵심인 "믿음"을 보지 못하고 단순히 그의 행위를 본받으려고 하다가 율법주의에 빠지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입니다.
네에..저두 그게 궁금하긴합니다...저두 재학시절 자격시험을 안보다가 마침 졸업전에 토요일에 보는 시험에 합격한 경험이 있지요....주교교사였거든요....조현석형제에 비하면 새발의 피같지만 암튼 그랬지요..주일에는 가게도 안가구요.....
제가 염려함이 나타나네요. 제가 이 글을 올린 취지는 한 개인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역사하심( 표현이 좀 부족하지만)을 나타냄이라 여겨 올린 글이지 한 개인의 신앙적 문제점을 헤집거나 부족함을 터치하고자 올린 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과거 율법적인 어린 신앙에서도 그 마음의 중심자리를 보시고 늘 동행하셨고, 지금은 자유함의 믿음생활을 하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 누구나 과정이 있는것 아닐런지요. 어린 학생에게 어른의 자유를 만끽하라 할 순 없지요? 남의 신앙을 쉽게 판단하려는 마음 바탕은 좀....
저는 그분의 주님을 향한 열정을 비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열정과 사랑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거 원종수권사의 간증이나 이분의 간증이나 어린 신앙에서 행했던 율법적인 행위가 수 많은 학생들에게 믿음에서 나온 것이라는 핵심은 놓치고 행위만 그대로 복사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은혜로운 간증이라는 것이 종종 오히려 진리를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지적을 불쾌하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시고 역사하심에 대해 균형잡힌 시각을 주고 싶어서였습니다.
최야곱님의 답글이 균형잡힌 판단이라고 여겨집니다.
그 분의 중심이 예수님이시고 읽으면서 감탄하는 부분이 있지만 후대들에게 이런 신앙의 간증을 보고 본받아라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너무 힘들게 믿는 행위와 율법적 강박(?)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네요.
조현석님의 신앙간증은 은혜롭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답지만, 부흥사들이 보면 오용할 수 있는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최야곱님의 지적에 동의합니다.
복음의 은혜를 먹고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유도 마음껏 누릴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은혜로운 간증이기는 하나, 저 또한 최야곱님의 지적같이 율법적 행위에 의한 의로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형제가 생길까 걱정되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