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음(偶吟)
꽃은 피, 성(性), 대지의 웃음소리, 한낮의 춤, 단 한 번의
생식(生殖)이다.
꽃은 땅의 가장 좋은 기운을 드러내고, 그 숨길 수 없는 화사함으로 세상을 환하게 밝힌다.
꽃이 피는 건 기적이다!
꽃들이 무리지어 피어나는 사태는
"붉음의 일, 금지된 것들의 탄생, 그리고 서서히 사라지는/세상의 감탄사들을 생각해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꽃들에 대한 은유로 "나의 손녀들이나 그녀들의 친구들의 웃음판"만큼
놀라운 것을 찾기는 어렵다.
언어의 마술사는 꿀벌들 잉잉대는
꽃밭과 온통 어린 소녀들의 웃음판을
하나로 겹친다.
소녀들의 까르륵거리는 웃음판과
무리지어 피어난 꽃들의 웃음이 없었
다면 인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우울하고 불행했을 것이다.
꽃들은 인류의 기쁨을 위해 꼭 필요하다.
그래서 '모네'는 수련을 그리고 '고흐'
는 해바라기를 그렸을 테다.
그리고 많은 시인들이 꽃에 바치는
송시(訟詩)를 쓴다.
하지만 꽃 필 때 꽃의 찬연함과 약동
은 나를 슬프게 하는데, 그 아름다움
이 영원하지 않을뿐더러 그것을 거머
쥐고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꽃은 절정에서 무너져내린다.
벚꽃을 보라. 벚꽃의 무너져내림은
속절없고, 지나감은 찰나다.
지고 난 뒤 꽃의 광휘는 온데간데 없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삶은 발견 속에서 경이로 바뀐다.
차라리 그 발견의 순간이 '꽃'이다.
내려갈 때 보았던 꽃은 실은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바로 그 꽃이다.
이 엇갈림의 순간에 꽃이 있는데,
한 번은 못 보고 다른 한 번은 본다.
꽃을 본 것은 홀연한 각성의 찰나였을 테다. 꽃의 개화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꽃의 개화는 우주 만물이 기운을 다하여 역(易)의 변화를 보여줄 때 나타난다. 꽃이 피어 있다고 누구나 다 유심히 보지는 않는다.
꽃은 사건들의 흐름과 연쇄 속에 있는 것이어서 기어코 그것을 만날 처지에 있는 사람만 본다.
이 꽃의 개화에 맞춰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꽃을 보고도
무심히 지나친다.
꽃에 마음이 가야만 꽃을 보지,
마음이 딴 데 가 있다면 꽃을 못 보는 것이다. 꽃을 본다는 것은 꽃이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을 모아 피어나는 순간과 마찬가지로 놀라운 찰나의 마주침이다.
이때 꽃은 꽃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궁극의 무엇이다.
꽃은 숭고하고 영원한 찰나의 것, 즉
詩와 禮, 명예와 존엄의 표상이다.
꽃이 거기 있다는 건 꽃이 그 장소의
중심임을 함축한다. 장소의 확보는
실존의 존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장소를 갖지 못한 자들은 거점 공간을 갖지 못한 채 변두리를 떠돈다. 장소는 집, 거점, 실존의 근거다.
노숙자들과 난민들과 철거민들은 그
것을 갖지 못한 처지이기에 환대받을
권리도 환대할 권리도 갖지 못한다.
그래서 실존에의 의지는 장소들을
갖기 위한 뜨거운 투쟁으로 번진다...
다시 꽃으로 돌아가자.
꽃으로 피어나는 것은 우주적인 것의
開花다. 꽃 피는 아침이 설레는 것은
"꽃망울 속에 새로운 우주가 열리는
파동"을 보여주는 찰나인 까닭이다.
꽃은 하늘이 도와 길하고 순조로운
때의 다가옴을 알리는 전조다.
어찌 기쁘지 않을 수가 있으랴.
나는 봄날 아침 뛰어나가 막 피어나
려는 꽃 앞에 서고 싶다.
어쩌자고 꽃은 자꾸만 피어나서 식어
버린 가슴을 덥히는 것일까!
"꽃은 여기서 수동적 원리의 상징이다. 꽃받침은 하늘의 이슬과 비를 받는 잔(盞)에 비교된다. 고여 있는 물 위로 피어나는 연꽃처럼, 정원에서 피는 장미처럼, 꽃의 피어남은 모든 발현체의 성장과 개화를 나타낸다."
시인은 "한 알의 모래 속에 세계를
보며/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고 했다. 시인들은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특이한 시력을 가졌음에
틀림없다. 시인들은 안 보이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이 보고도 놓친 것을
용케도 찾아낸다.
영산홍 꽃잎에는
산이 어리고
산자락에 낮잠 든
슬픈 소실댁
소실댁 뒷마루에
놓인 놋요강
산 넘어 바다는
보름사리 때
소금 발이 쓰려서
우는 갈매기...
서정주의 '영산홍' 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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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사리: 음력 보름날의 밀물과 썰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