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죽음과 광해군의 즉위
어디까지나 야사에 불과한 내용이지만, <선조수정실록>에는 선조가 급사한 날, 동궁에서 찹쌀떡을 올렸다고 기록되어있다. 즉 찹쌀떡이 선조의 죽음을 이르게 했다는 야사의 단초가 된 셈이다. 일단 광해군의 탄생부터 즉위까지 한번 알아보도록 하자.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동복 형으로 임해군이 있었으나, 그는 성격이 거칠다는 이유로 세자에 책봉되지 못했다. 광해군이 2살 때 공빈 김씨가 세상을 떠났고, 선조는 또 다른 후궁인 인빈 김씨를 총애하며 신성군을 세자로 삼으려고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터지자, 다급해진 선조는 광해군에게 세자자리를 넘기며 임시조정을 만들 것을 요구하고,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고 왜군에 맞서 싸우며 백성들을 어루만졌다. 조선에서는 여러 번 명나라에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해달라는 책봉승인서를 보냈으나, 명나라 예부에서 이를 거부했다. 그 이유는 둘째가 서열을 무시했다는 이유였으나, 당시 명나라에서 신종이 둘째를 총애하여 태자를 삼으려고 했는데 첫째를 지지하는 세력이 반대했다. 따라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경우 둘째를 미는 세력이 이것을 구실 삼는다면 반대할 명분이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선조가 총애하던 신성군이 죽었고, 임해군은 이미 선조의 신임을 잃은 터라, 광해군의 세자지위는 공고한 듯 했다. 하지만, 1602년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가 등장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선조는 자신의 서자 컴플렉스를 씻기 위해 적자 생산을 고대했다. 하지만, 첫 번째 왕후가 아이를 못 낳는 사람이었으므로 체념하고 있었는데, 인목대비가 영창대군을 생산하자, 선조의 마음은 점점 광해군에서 멀어졌다.
선조의 마음을 알고 있던 유영경은 영창대군에게 하례를 드리자고 주청했고, 영창대군을 세자 자리에 앉히기 위해 온갖 노력을 쏟기 시작했다. 선조도 이에 동조하여 광해군을 세자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선조의 병세가 깊어져있었고, 결국 선조는 유영경을 불러 광해군에게 전위할 것을 명하는 교서를 내린다. 하지만, 유영경은 이를 자신의 방에 숨겼다. 이 사실을 안 광해군 지지자인 정인홍은 유영경을 탄핵했고, 선조는 분노하며 정인홍을 유배보내게 된다. 정인홍의 상소 이후 선조는 더욱더 광해군을 멀리했고, 문안인사도 드리지 말 것을 명한다. 이에 광해군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고 한다.
하지만, 선조의 병세는 걷잡을 수 없이 병세가 악화되었고, 결국 선조는 승하하게 된다. 선조가 승하하던 날, 유영경은 인목대비에게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고 섭정할 것을 권유하지만, 인목대비는 조야가 모두 세자로 인정하고 있는 광해군을 물러나게 할 명분이 없었으므로, 자신과 영창대군을 보호해주는 조건으로 광해군에게 한글 교서를 내리게 된다. 여기까지 광해군의 파란만장한 왕위 즉위 과정이다. 선조가 승하하던 날, 이를 지켜본 사람은 인목대비였다고 한다.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폐위한 명분 중에 하나가 바로 선왕을 시해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이덕형(한음 이덕형과는 다른 인물임)이 이에 처음 듣는 얘기라고 하자, 인목대비는 말을 바꾸어 고의로 충격을 주었다고 했다. 성협이라는 인물은 기록을 통해 선조가 독살되었다고 주장하고 이 소식을 들은 어떤 인물은 조정에서 물러났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뜬소문에 불과하고, 확실한 근거가 없었다. 그 예로 광해군이 선조를 독살했다고 상소할려고 했던 사람이 이를 그만두자, 그 측근이 왜 그만 두냐고 하니까, 이에 아무리 찾아도 증거가 없어서 만들 수 없다고 말한다. 결국 선조의 독살설은 거의 불확실한 설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된다.
글/학술마을지기 박종국
첫댓글 한 번에 읽어보는 조선사[37]에 대한
선조의 죽음과 광해군의 즉위를 잘 읽었습니다.
무능한 군주에 폭군이 이어지는군요. 감사합니다.
군주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신하도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