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홋카이도 일대에 조선인 남성들을 대거 징발해서 투입했고, 그로부터 약 5~6년 후인
1945년도에 패망했으니, 이 분들 대부분은 조선으로 돌아오려면 돌아올 수 있었을 텐데도......
개인적으로는 불과 5, 6년 밖에 안 되었는데도 못오나? 그 생각이 들었으나.
대부분은 못 돌아왔더군요.
이유는 이미 거기서 현지인과 결혼하거나 취직하거나 해서 생활 터전을 굳힌 관계로
올 수가 없어서.
한편 이걸로 제가 그간 품던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견훤이 927년도에 서라벌인들을 대규모로 전주에 붙잡아다 사민시켰고,
때문에 고고학적으로는 전주 자체가 엄청나게 "신라화"되어 적어도 고고학만 두고보면
거꾸로 경주가 전주를 정복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인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래도 후백제가 936년도에 멸망했으니 서라벌인들은 경주로 돌아가려면 갈 수도 있었는데도,
이 분들 대부분은 경주로 돌아가지 못한 게 분명합니다.
돌아갔다면 그렇게 대규모로 고고학적 현황이 지금까지 남을 수가 없거든요. ;;
대체 왜 그랬나? 싶었는데..... 어쩌면 홋카이도의 조선인들과 비슷한 사례가 아니었나 그런 생각은 듭니다.
ps. 사족.
한편, 전주 이씨의 조상이자 이성계의 직계 선조인 "이한"의 부인이
무열왕 10대 후손인데 시기를 역산하면 바로 이 시기인 것이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한편 이한의 "호"가 후백제 마지막 임금 신검의 중국식 이름인 "견성" 과 동일함은 더욱더 충격입니다. ;;
전주 이씨가 어쩌면 견훤의 후예는 아닐까 하는 몇몇 분들의 예측이 때문에 아주 허튼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전주 이씨와 경주 이씨의 관계에 대해서 여러 설이 있는데, 이렇게 보면 그 문제도 해결됩니다.
견훤과 아자개는 바로 경주 이씨의 후예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추풍령 일대 호족 가문이기 때문이죠.
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한은 신검의 아들이 아니었나 생각 중입니다.
첫댓글 + 견훤의 조상중에 소비 부여씨의 소생이 있을 수 있다죠. 특히나 이제가기에 기록된 조상이 진흥왕과 백숭부인인데 이게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르면 소비 부여씨일수도 있다죠.
저 개인 생각입니다만, 족보에 일부러 기록이 남은 두 조상할머니 중 하나인 '왕교파리'가 김선품의 후손인 김씨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신라인을 분산시키지않고, 큰 집단 단위로 전주에 사민시킨건가요?
네 서라벌에서 압송해온 신라인들을 전주에 집중적으로 사민시켰습니다.
여말 선초 왜구한테 붙잡혀 갔거나 임진왜란때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정착해서 일본에서 산 케이스도 있고, 지금 중국 동북 지역에 포진한 조선족의 사례도 그렇고 꽤나 그런 사례들은 많더라고요 ㅎㅎ
음~예측이 맞다면 견훤이 결국엔 소원성취 한것 같군요. 왕씨왕조를 멸하고 이씨왕조를 세운 이성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