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 시인의「고사목」과 최영랑 시인의「멍의 소용돌이」는 가정 폭력을 소재로 쓴 시로 읽힌다.「고사목」의 첫 행에 나오는‘손찌검’이라는 단어가 섬뜩하다. 감추지 않고 직접적으로 폭력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고사목’에서‘게’로 바뀌는 이미지 변주가 이질적이면서도 낯설다. 맛있는 간장게장이 사실은 폭력에 희생당한 어떤 무리의 죽음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죽음은 조금 비싸고 싱싱’할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갑각류의 방식으로 죽어’가는 폭력을 폭로하고 있다. 반면「멍의 소용돌이」에선 멍든 피부를‘산발적으로 생겨난 푸른 웅덩이’로‘비명’을 거친 파도로 변주했다. 이는 폭력에 시달리는 누군가의 피부에 깃든 멍을 바다의 이미지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생겨난 멍은 오랫동안 피부에 체류하면서‘갯지렁이가 꿈틀꿈틀 기어’가는 것처럼 서서히 풀어진다. 어떤 폭력이든 폭력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건이다. 폭력이 무서운 건 습관이 된다는 점이다. 때리고 맞으면서 내성이 생기기 시작한다.
황정은 작가의「야만적인 앨리스 씨」는 특이하게도 어머니가 가정폭력의 가해자인 경우다. “롤랑 바르트”는「텍스트의 즐거움」에서‘저자의 죽음, 독자의 탄생’을 주장했다. 작가가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독자에게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준다는 점에서‘고사목’과‘멍의 소용돌이’는 독자로 하여금 많은 생각에 빠져들게 한다. 시를 읽고 난 후 한동안 먹먹함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소설에 나오는 앨리시어의 어머니가 못에 찔리던 날, 동생은 집을 나갔고 모래더미 속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사고와 무관하게 죽은 동생의 몸에는 구타의 흔적들이 발견된다. 동생의 죽음으로 엄마가 두 형제에게 가했던 폭행 사건은 종지부가 찍힌다. 폭력에는 호명의 부재가 존재한다. 앨리시어의 동생은 단 한 차례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존재감 없는 들판의 들꽃, 풀 한 포기에도 이름이 있는데, 앨리시어의 동생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는 시종시관‘야’또는‘병신’으로 불리다가‘야’로 사라졌다. 작가는 끊임없이 나는 어디에 있나? 나는 어디까지 왔나?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지만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자는 어디에도 없다.
‘고사목’과‘멍의 소용돌이’에 자꾸 눈길이 가는 이유는 황정은 작가가「야만적인 앨리스 씨」를 통해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던 가정폭력에 대한 메시지를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학이 당대의 사회 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직무 유기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소연 시인과 최영랑 시인은‘우리의 피를 빠는 것들과 곤란한 사랑에 빠’질 때‘내 안에 깃든 너라는 또 하나의 멍도 제 빛깔을 드리’우게 된다고 폭력의 심각성을 에둘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 김분홍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