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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하전투(深河戰鬪), 전장터는 어딘가? [제1편]
2020년 03월 27일
○ 심하전투(深河戰鬪)【사르후(薩爾滸:살이호)전투(戰鬪)=부차(富車)전투(戰鬪)”라고도 하는데, 다 같은 곳을 지칭(指稱)한다.】에 대한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을 보면, 아래의 지도(地圖)와 같을 것이다.
인터넷(Internet)속으로 들어가 보면 ; 99.9999%의 이야기들이 몽땅 역사통설(歷史通說)이야기로 도배(塗褙)되어 있는데, 누구도 “심하(深河)”라는 하천(河川)이 어디에 있었느냐? 하는 문제(問題)제기(提起)를 하는 예(例)는 볼 수가 없다.
다 잘 알고 있다는 뜻인가? 아니면 알던 모르던 상관(相關)없다는 것일까?
“심하(深河)전투(戰鬪)!” 「오늘날의 만주(滿洲)인 압록강(鴨綠江) 이북(以北) 땅에서 벌어졌던 여진족(女眞族)과 명(明)나라와 이에 원병(援兵)을 보낸 조선군(朝鮮軍)과의 전투(戰鬪)에서, 여진족(女眞族)인 후금(後金)이 대승(大勝)을 거두고, 뒤에 심양(瀋陽)을 차지하면서 동북(東北)지방의 판도(版圖)를 바꿨다.」고 역설(力說)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해설(歷史解說)이 사실(史實)일까?
필자(筆者)는, 위에서 언급(言及)한 일련(一連)의 사건(事件)은,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일 수 없다. 이러한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전형적(典型的)인 역사(歷史)조작(造作)이라고 필자(筆者)는 주장(主張)한다.
➤➤➤ 「당시(當時)의 “여진(女眞) 노이합적(奴爾哈赤)과 조선(朝鮮)”은, 동서(東西)의 영토(領土)상에서 서로 대치(對峙)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여진족(女眞族)은 없었다.” 는 것이 ‘핵심(核心) 논리(論理)’다.
深 河 戰 鬪 (심하전투)
※ 1619년 심하 전투 당시 명군과 조선군의 행군 경로(왼쪽) [출처 : 한겨레]
➊ 심하전투(深河戰鬪)란 :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설명(說明)대로라면 : “심하(深河)”라는 하천(河川)주위에서 벌어졌던 전투(戰鬪)를 말하는 것이고, 그 “심하(深河)”는 오늘날의 심양(瀋陽)의 “동(東)”쪽에 있어야 한다.
명(明)이 전멸(全滅)했던, 노이합적(奴爾哈赤)이 대승(大勝)을 거뒀던지 간에 관심(關心)은, 전혀 다른 곳에 있는 것이다. 즉(卽) 「그곳 전쟁터가 어디였느냐?」하는 거다.
➋ 오늘날 이곳의 요녕성(遼寧省) 심양(瀋陽)은, 말 그대로 강(江)의 북(北)쪽에 있으므로 “심양(瀋陽)”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이고, 그 강(江)은 바로 “심하(瀋河)”다. 심양(瀋陽)이란 이름이 바로 심하(瀋河)의 북(北)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심하(瀋河)는 있고, 심하(深河)는 없다.〉 귀신(鬼神)이 곡(哭)할 노릇이 아니냐!
조선(朝鮮)의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은 말하기를(기록하기를) : 심하(深河)는 “산해관(山海關) 주위에 있다.”고 하였고, 도리(道里)까지 기록(記錄)해 놓고 있다. 심하역(深河驛)도 있고, 심하진(深河鎭)도 있고… …이 참 얼마나 웃기는 이야긴가!
➌ 또 ‘조선(朝鮮)의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은, 자신(自身)들이 직접(直接) 체험(體驗)한 사실(事實)을 기록(記錄)한 것이니만큼, 이걸 이를 부인(否認)한다거나 부정(否定)할 수 없다는 점인데,
〈심하(深河)는 사막지대(沙漠地帶)에 있다〉고 하였다. 하나하나 차례 차례대로 설명(說明)해 보기로 하자.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첫째로 청(淸)나라는 어디에 있었는가? 둘째로는 조선왕조는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사실(事實) 이건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의 핵심(核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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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하(深河)’는 어디에 있었는가? 이게 문제(問題)의 핵심(核心)이다.
(1) 薊山紀程 제2권/ 도만(渡灣) / 계해년(1803,순조3) 12월17일(무인) / 산해관(山海關) ; 산해관(山海關)에는 이중문이 있는데 모두 초루(譙樓)가 있고, 또 참호와 옹성(甕城)이 있다. 옹성 높이는 4장(丈)쯤이다.
심하(深河) : “성(城)에서 1리쯤 나와 강물을 건너게 된다.” 〈이곳은 요동백(遼東伯)이었던 김응하(金應河)가 크게 섬멸된 땅이라 왕왕 경관(京觀)이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볼 수 없다.〉 중략(中略). 〈부러진 창은 멀리 뻗은 모래벌판에 가라앉았고 : 折 戟 沈 長 沙 / 밤새의 구름은 옛 보루 묻어 버렸다 : 宿 雲 埋 古 壘 / 장군은 가 버리고 돌아오지 않는데 : 將 軍 去 不 還 / 천년토록 부질없이 물 흘러가는구나. : 千 載 空 流 水〉라고 하였다.
계산기정 제2권 / 도만(渡灣) ○ 계해년(1803, 순조 3) 12월 18일(기묘) 맑음. : 봉황점(鳳皇店) 30리를 가서 점심을 먹고 유관(楡關) 35리를 가서 묵었다. 범가장(范家莊) 중략(中略). 심하역(深河驛)은 봉황성(鳳皇城)에서 15리 지점에 있다.
薊山紀程 제5권 / 부록(附錄) / 도리(道里) / 심양(瀋陽)에서 산해관(山海關)까지 787 리이다. 심하(深河) 1리.
薊山紀程 제5권/부록(附錄)/산천(山川) ; 심하(深河)는 산해관(山海關) 1리에 있으니, 즉 요동백(遼東伯) 김응하(金應河)가 크게 무찌른 곳이다. 탕하언(湯河堰)ㆍ석자하(石子河)ㆍ양하(羊河)ㆍ음마하(飮馬河)ㆍ백사하(白沙河)ㆍ청룡하(靑龍河)는 모두 산해관(山海關)지역이다. 노정배참기(路程排站記)에 실려 있다.
◆ ‘계산기정(薊山紀程)’에 따르면 : 「심하(深河)는 산해관(山海關) 1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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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산시문집 제1권 / 題金營將深河射敵圖(김영장은 “좌영장 김응하(金將軍應河)”장군을 말한다.) 〈출처 : 고전번역원Db〉
川 邊 獨 樹 寒 無 枝 : 강변의 홀로 선 나무, 가지 없이 차가운데 / 중략(中略) / 鐵 騎 齊 飮 深 河 水 : 철기들은 모두 심하수를 마시네. / 중략(中略).
[주C-001] 김영장심하사적도(金營將深河射敵圖) : 좌영장(左營將) 김응하(金應河)가 요동(遼東) 심하【深河 : 무령현(撫寧縣) 동쪽 산해관(山海關)근처의 진(鎭)이름】에서 후금(後金)의 군사를 맞아 고군분투한 것을 그린 그림이다. 【김응하의 자는 경의(景義),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39세 때인 광해군 11년(1619) 선천군수 겸 조방장(宣川郡守兼助防將)으로 있던 중, 명나라의 원병 요청에 의해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이 거느리는 군사와 합류하여 3월 4일 적과 접전하던 가운데 강홍립과 부원수 김경서(金景瑞), 우영장(右營將) 이일원(李一元) 등은 다 항복하고 명나라 군사들은 완전히 패몰하였다. 이때 김응하는 버드나무를 등지고 단신으로 수백 명의 적을 죽인 뒤에 창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듬해에 명신종(明 神宗)에 의해 요동백(遼東伯)에 추봉되었으며 백금 1만 냥을 보내와 그의 가족에게 나눠주게 하였다.《海東名臣錄》: <고전번역원 참고>】
(3) 몽경당일사 제2편 / 오화연필(五花沿筆) ○ 을묘년(1855, 철종 6) 11월[17일-27일] 19일(무인) :
심하역(深河驛)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유관(楡關)을 지났으니 즉 당시(唐詩)에 이른바 ‘징을 치고 북을 치면서 유관을 내려간다.[摐金伐鼓下楡關]’는 곳이다. 몽염이 쌓은 장성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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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백사별집 제5권 / 조천록(朝天錄) 하(下) 3월 27일(병오) / 심하(深河)를 지나 산해관(山海關)에서 묵었는데, 차량(車輛)이 뒤떨어져 당도하지 못하므로, 여기서 6일간을 머물렀다.
(5) 성호사설(星湖僿說) 제28권 / 시문문(詩文門) / 박정길 시(朴鼎吉 詩) :《百丈深河萬仞山 : 백 길의 심하(深河)와 만 길의 높은 산에는 / 至今沙磧血痕班 : 지금까지도 사적(沙積)에는 피 자국이 얼룩졌네. / 英魂且莫招江上 : 강위에서 초혼하지 말라. / 不滅凶奴定不還 : 오랑캐를 멸하지 않고는 돌아오질 않으리.》라고 하였다.
◆ 사적(沙磧) : 사막지대(沙漠地帶)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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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심전고 제1권 / 연계기정(燕薊紀程) / 무자년(1828, 순조 28) 12월 16일 : 《산해관 관문의 세 큰 글자 : 山海關門三大字 / 진 나라 때 어찌 한 나라 때의 해서체(楷書體)가 있었으리 : 秦時安有漢時楷 중략(中略).》
심하(深河)는 요동백(遼東伯) 김응하(金應河)가 싸우다가 순절한 곳이다. 그가 버드나무 아래에 서서 활시위를 당기고 적을 꾸짖던 모습이, 천년(千年) 후까지도 그의 영걸스러운 풍도와 의기를 연상시켜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7) 연도기행 중 / 일록(日錄) / 병신년 순치(順治) 13년 (1656, 효종 7) 9월14일(기미) : 오시에 떠나서 망해점(望海店)을 거쳐 심하역(深河驛)을 지났는데, 성은 무너져 있었다. 강자점(綱子店)을 지나서 저물녘에 유관점(楡關店)에 도착하여 객점에 유숙했는데, 중략(中略).
(8) 연행기사(燕行記事) 상 / 정유년(1777, 정조 1) 12월 19일 : 《진황은 어디 있는지 : 秦皇安在哉 / 萬里長城埋怨 : 만리장성이 원망을 묻었네.》 : 서문(西門)에서 몇 리를 나와 심하(深河)를 지났다. 이곳은 곧 요동백(遼東伯)이 순절(殉節)한 곳이어서 감회가 갑절이나 더하다
(9) 연행록 / 정유년(1597, 선조 30) 2월 27일 / 심하(深河)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무령현(撫寧縣)에 투숙하였다.
[주-D001] 심하(深河) : “직례성(直隷省) 무령현(撫寧縣) 동쪽에 있는 강 이름”으로, 이곳에 우리나라 사신이 연경에 갈 때 경유하던 심하역(深河驛)이 설치되어 있다. 이 역은 산해관(山海關)에서 60리 되는 지점에 있다. 《增補文獻備考 卷177 交聘考7 附朝聘雜儀 燕京路程》
◆〈심하(深河)〉와 〈심하(瀋河)〉는 전혀 다른 하천(河川)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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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모래바람이 불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둠이 찾아왔다.」고 하였는데, 이와 같은 커다란 모래바람을 ‘매(霾)’라고 한다. 「갑자기 크게 매(霾)가 일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라고 사서(史書)에서 말하고 있다고 하였다.
➤ 매(霾) : 흙비 올 매(霾) : 3월∼4월경에는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네이버 중국어사전 : 1.하늘이 부옇게 되는 현상 2.흙비 3.황사 현상 4.‘埋’와 통용 / 명사 천문 (바람이 일으킨 흙먼지로) 하늘이 부옇게 되는 현상. 흙비. 황사 현상.
➊ 심양(瀋陽)과 심하(瀋河) : 심양(瀋陽)은, 심하(瀋河)의 북(北)쪽에 있는 도회지(都會地)이름이다. 이게 중요(重要)한 대목이다.
➋ 심하(深河) : 심양(瀋陽)으로부터 787리 떨어져 있는, “산해관(山海關) 동쪽 1 리에 있는 강(江)이름이다.”
➌ “갑자기 매(霾)가 일어 지척(咫尺)을 분간할 수 없었다.”는 말은 심한 황사(黃沙)를 말하는 것이고, 특히 3, 4월의 모래바람은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지독한 ‘토사(土砂)=토사(土沙)’의 분진(粉塵)인데,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風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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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江漢【황경원(黃景源 : 1709-1787】集 卷 之 二 / 深 河 行
《中略.深河一戰竟授命.大義震耀垂百世.吁嗟白骨委沙漠.烈烈英氣橫八裔. : 심하(深河)에서의 일전(一戰)은 명받은 책임을 다한 것이고, 놀라운 대의(大義)는 백세에 드리울 것이다. 아! 아! 백골은 사막(沙漠)에 맡겨졌으니, 그 위엄과 뛰어난 기상(氣像)은 가로질러 8대에(후손에게) 이어지리라.》하였다.
심하행(深河行) : 김응하(金應河)가 좌영장(左營將)으로 明의 원군으로 출전하여 3,000 명의 휘하 군사를 지휘하여 수만(數萬)의 후금(後金)군과 끝까지 싸우다 전사(戰死)한 것을 기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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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敬亭先生集卷之十一 / 詩 續集을 보면 : 《左營將金應河戰沒沙場.中略. : 좌 영장 김응하장군이 사막(사장)의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중략(中略).》하였다.
경정(敬亭)집은 <이민성(李 民 宬1570-1629)>의 문집이다. 이 분은 선조 35년 10월에, 왕세자책봉주청사로 북경에 다녀오신 분이다. 즉 조선왕조의 관리로 “북경(北京)”을 직접 다녀오신 분이기 때문에 그 여정 길을 체험한 분의 기록이다. 『左 營 將 金 應 河 戰 沒 沙 場 : 영장 김응하가 사장(沙場)의 전투에서 죽었다”는 의미다.
곧 북경(北京)으로 가는 곳의 지형지세(地形地勢)는, 사막(沙漠)지대를 통과(通過)해야 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13) 谿谷(張維:1587-1638)先生集卷三十.七言律.一百六十首.哀金將軍應河二首
《大漠煙塵白日黃.將軍力盡死沙場.中略. : 대막(大漠 :큰 사막)의 연기처럼 일어나는 먼지는 날이 새니 누런데, 장군(將軍)은 힘이 다해 사막(沙場)에서 쓰러졌다.》고 하였다.
사장(沙場) : 〈1. 사막지대(沙漠地帶)의 모래밭을 말한다. 2. 강가의 모래밭을 말한다.〉로 나누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계곡(谿谷)선생(先生)의 다른 저서(著書)를 보면 : ‘요동(遼東)요서(遼西)’는 모두 사막지대(沙漠地帶)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에서 말하는 “사장(沙場)”은 사막지대(沙漠地帶)를 말한다고 보아진다.
➤〈吳達濟오달제)忠烈公遺稿附錄.附錄.記事五絶句.曹漢英〉를 보면 : 「忠 魂 終 作 沒 胡 沙 : 충의를 위해 죽은 혼, 오랑캐 모래위에서 죽었다.」고 하였다.
“호사(胡沙)”란 말은, “오랑캐 모래 땅(沙漠地帶)” 을 말하는 것인데, 오달제(吳達濟)선생(先生)은, 후금(後金)에 의해 잡혀간 삼학사(三學士)의 한 분으로 심양성(瀋陽城) 서문(西門) 밖에서 ‘윤집· 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처형(處刑)을 당하였다’ 고 전해지고 있다.
즉(卽) 심양(瀋陽)은, 호사(胡沙)위에 지어진 도시(都市)였다는 이야기다. [제2편으로 계속]
2020년 03월 27일 [글쓴이 :문무(文武)]
첫댓글 우리역사를 연구하면서 아직도 아리송한것이 압록강을 건너 연경에 갔다왔다는부분이 이해하기 어렵다는겁니다. 대륙조선사에 놓고봐도 마찬가지죠. 대륙조선을 상정하고 대입하면 한반도 조선사보다 더 판타지소설에 가깝다고 할까요? 오늘날 서안이나 낙양에서 출발해 벨루하산근처에 있을것으로추정되는 연경으로 수없이 많은 연행사신들이 오고갔다는 기록을 도무지 어떻게 봐주어야되는지 깜깜할뿐입니다.
안녕하세요. <대부여>님!
가장 핵심적인 "문제"제기를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옛 원전을 보면, 반도조선이란 존재할 수 없는데, 연행록으로 보면 수없이 많은 사신단들이 "연경"을 들락거립니다. 춘하추동 관계없이 말이죠. 연행록으로 보면 그 거리가 왕복 7천리에서 8천리 가량이 됩니다. 대륙조선사 입장에서 보면, 당시의 서울이 어디였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죠. 벨루하산의 서남쪽에 연경이 있게 되는데, 이게 워낙 먼 거리이기 때문에......우리 일반적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됩니다.
이에 따라 여러가지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는데, 연경이 북경인가? 하는 문제도 제기가 됩니다.
@문 무 18세기의 청나라 황도(서울)엔 그 인구가 21만명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어 이를 추적중에 있는데,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청의 서울은 옛 연경이 될 수 없다고 보아집니다.
또 명나라의 서울 역시 북경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따라서 조선의 연행사신들이 오고간 그 연경이 어디냐? 하는 문제는 좀 더 지켜보아야 할 "사안"이 될 것 같습니다.
장안에서 4천리 정도는 감숙성 돈황, 또는 외몽고 항애산맥 정도가 됩니다. 연행록의 도리가 진실이다라는 가정하에 그렇다는 것이죠.
그러면 압록강과 요수는 어디에 있는 어떤 강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다 됩니다. 복잡합니다.
좁 더 시간이 걸릴 것 같구요.
@문 무 제2편에, 이런 문제에 대한 정황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조선사 연구에 매진해야 될 것 같다고 봅니다.
관심과 성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코로나 19때문에 사회가 온통 난리법석인데,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